라우펜 전투

1339년 6월 21일
스위스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투이다. 그 당시 베른은 지방 봉건 영주의 지출로 크게 확장되었다.
그러나 베른은 지방 영주들의 군대가 도시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대응으로, 베른은 산지의 칸톤(주)들, 즉 모르가르텐에서 레오폴드와 합스부르크의 대군의 오장육보를 개발살낸 그들 동맹을 체결하였다.
슈위츠와 동맹 주들은 곧 동맹의 대가로 베른에 지원군을 파견했다.
그 때 영주들의 군대는 베른 인들이 방어하는 라우펜 요새를 조낸 갈구던 중에 있었다.
징병된 베른의 군대와 스위스 동맹군은 합류한 뒤, 스위스 인들의 18번인 숲을 통해 적을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동맹군은 언덕 위에서 집결했고, 영주들의 군대는 그 아래에 진을 치고 있었다. 영주군의 기병은 그 근처에서 가장 평탄한 위치인 군의 우익에서 대기 중이었고, 보병들은 기병들이 활동하기 어려운 좌익에 위치해 있었다. 대부분의 영주 연합군의 보병은 중세의 특징대로 전투력이 의심스러운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영주인 John von Magenber의 지휘하에 프라이부르크에서 도착한 굳건한 보병대도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영향권에 있던 그 영주군들은 부르고뉴를 필두로 약 15,000명의 군대로 이루어져 있었고, 스위스 동맹군의 숫자는6,500명으로 추산된다.
영주연합군은 진형을 가다듬은 후 언덕 위로 군대를 전진시켰고, 스위스 동맹군은 모르가르텐에서 그랬듯, 종대를 이루어 언덕 아래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영주 연합군 좌익의 프라이부르크 보병들은 곧 동맹군의 강타를 받았고 곧 붕괴되었으며, 징집병이었던 나머지 보병들은 곧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우익에선 영주 연합군의 기병이 동맹군을 상대로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잘 싸우던 그들도 좌익의 영주군 보병들을 패퇴시킨 동맹군이 합류하자 곧 격퇴되었다.
영주 연합군은 중무장한 기병대의 상당수를 잃어버렸다. 그 기병대의 상당수가 Sense강을 건너지 못하고 익사했다. 결국 어중이떠중이 보병들로 구성된 봉건 영주 군대는 전투 의지가 높고 잘 훈련된 군대에게 대패하였다.
비록 우익이 고전하긴 했어도, 라우펜 전투는 중세 전장에서 최초로 개활지에서 보병이 중무장 기병을 격퇴한 전투이다.
그 때까지 보병이 기병을 격퇴시킨 예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레냐노 전투에선 밀라노 보병들이 프리드리히 1세의 기사들을 물리쳤지만, 이는 격퇴되었던 밀라노 기사들이 도착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폴커크에서도 윌리엄 월리스와 스킬트론은 기사들의 공격은 저지했지만 장궁병의 공격에 패배했다.
베넉번에선 스킬트론이 기사들과 맨앳암즈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이는 좁은 길이나 계곡 같은 지형적 특성을 이용한 것이었고, 이는 유명한 모르가르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 번 스위스 창병들은 합스부르크의 공격을 막아내었으며 이제 젬파흐의 승리를 거쳐 스위스는 사실상 독립을 이루어낼 것이었다.
여담으로, 라우펜 전투 기록화에 스위스 국기가 남아 있어서 자주 인용된다.
군사학자인 오만은 라우펜 전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로마 제국 이후 최초로 기병의 지원을 받지 않는 보병들만으로 개활지에서 정돈된 잘 무장하고 숫적으로 우위에 있던 군대를 격퇴시켰다”
라우펜 전투는 스위스역사에 깊은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군사,무기,전투학적인 측면에서도 깊은 의미를 가지는 전투이다.
출처 - 네이버 까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