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정경
이 종 화(李 鍾 和) / 한국산업은행 차장
신은 빛을 냈지만 어둠을 없애진 않았다. 한손엔 빛을 다른 한손엔 어둠을 쥐고 태어난 인간은 생을 통해 박명(薄明)을 거닌다. 어둠을 지우려 빛을 찾지만 어둠은 잠시 가려질 뿐이었다. 운명은 흑백의 무명옷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곤 했다.
총성이 울리고. 그의 신화가 완성되었다. 링컨의 뻥 뚫린 뒷골에서 솟아난 피는 전장으로 흘러가 수십만 주검이 토한 핏물과 뒤엉켜버렸다. 빛과 어둠, 그 사이에서 조야(朝野)의 추앙과 조롱을 한 몸에 받던 난세의 정객은 그렇게 빛의 세계로 승천했다. 무참히 잘려나간 병사들의 팔다리가 켜켜이 쌓인 산야의 울음을 뒤로 하고.
링컨은 연방의 결속을 위해 노예해방이란 빛과, 전쟁이라는 어둠을 번갈아 저울질하며 민주주의의 이상을 멀리 구현했다. 헌법을 고쳐 노예제를 온전히 없앴지만 남부에 대한 잔혹한 살육을 방관하며 전쟁 내내 명과 암을 넘나들었다. 모든 게 잿더미로 변한 애틀랜타에서 스칼렛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했지만, 그건 오늘 기대할 건 아무것도 없단 뜻이기도 했다. 얼마 뒤 링컨은 재선(再選)에 성공했다.
그가 죽은 포드극장에는 지금도 미국인들의 엄숙한 행렬이 줄을 잇는다. 오늘날 이 강국의 초석을 놓은 지도자에 대한 경의가 아닐는지. 링컨이 쓰러진 객석, 그 노대(露臺)에 걸린 성조기엔 빛이 가린 어둠과 어둠이 덮은 빛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링컨이 숨질 무렵,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불탄 경복궁을 다시 짓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훗날 명성황후가 되는 민자영을 며느리로 점찍었다. 국운을 기울게 했던 육십 년 세도정치에 칼끝을 겨누고 왕도정치를 재현하려는 그의 이상은 척신들에게 핍박받던 왕실과 백성들의 지지를 고루 받았다.
허나 조선은 그동안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대원군은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고만 했다. 명문대족이 실각했지만 그가 꿈꾸는 조선은 오지 않았다. 소수가 독점하는 사회. 그 소수에게 빌붙어 손쉽게 성공하는 사회는 계속되었다. 왕도의 이상은 빛을 잃었다. 박제가 된 꿈을 어둠이 덮었다. 무리한 공사에 백성의 허리는 다시 휘었다. 민초들은 여전히 험준한 설산(雪山)을 오르고 있었다.
아버지란 태양에 가려 그냥 용상에 앉아 있던 고종은 부친 못지않은 아내의 빛도 감당해내지 못하며 스스로 꿈꾼 자주 제국이 가라앉는 걸 맥없이 지켜보았다. 권력이란 빛을 쥐고자 자웅을 겨루던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진검승부를 적절히 활용했던 열강의 침탈 속에 대원군이 표방한 척화와 쇄국은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었다. 왜검이 국모를 시해했다. 빛이라 믿은 빛이, 빛이 아니어서 슬펐던 나라. 조선은 그렇게 암흑 속으로 기울었다. 한민족의 한(恨)은 아리랑이 되었다.
무너진 광화문을 대강 세웠다가 한참 뒤 다시 지어 올렸다. 굶주림과 억울함. 세계는 아랑곳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변해갔다. 폐허가 다시 폐허가 된 땅에서 한국인은 대단한 결속력으로 검은 장막을 걷어 젖혔다. 제법이라고 웃으며 지켜보던 세계인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신 지도 꽤 되었다. 실리를 택한 결과였다. 한손에는 희망, 다른 한손에는 절망을 끊임없이 저글링하며 경제화와 민주화라는 빛을 차례로 움켜쥐었다. 그 빛이 가져온 뜻밖의 그늘이 짙어지면서, 저 광화문 앞에 마주선 빛과 어둠은 이제 새로운 달리기를 시작하고 있다.
광화문엔 내 유년과 젊은 날이 고스란히 묻혀있다. 아버지를 잃고 방황할 때도, 대학 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도, 사랑에 취하고 우정에 속았을 때, 운명이 빛을 주었다 빼앗을 때마다 난 거길 거닐었다. 어둠을 지우려고만 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궁문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포드극장, 거기 미국의 빛과 그늘이 공존한다. 구한말의 흥망과 굴곡진 현대사를 말없이 끌어안은 광화문은 멀리 삼산(三山)에 둘러싸인 채 오늘도 아늑히 하늘을 이고 있다. 그 하늘 너머에서 느낀 한국의 위상은 우리 생각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우린 그냥 중진국’이라 자조하는 사이 광화문이 이고 있던 하늘은 제법 높아졌다.
친분이 있던 이곳 대학의 네덜란드 출신 교수님은 한국의 강점으로 각 나라의 장점을 두루 조합할 줄 아는 영리함을 뽑았다. 한국 하면 누구나 인정하는 확실한 조커가 아직 없음에도 분단국의 불리함과 외국인들에겐 다소 높게 느껴지는 언어장벽을 극복하고 굴기(倔起)할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란 거였다.
정작 그런 나라에 살고 있는 내 친구는 여긴 헬조선이라 투덜거린다. 많은 걸 이뤘지만 빠른 성장을 위해 놓치고 빼먹은 벽돌들도 제법 있기 때문이다. 경제와 정치를 앞세우다 문화가 뒷전으로 밀려난 탓도 있을지 모르겠다. 명사(名士)들은 넘치지만 정치논리와 경제이익에 쉬 좌우되지 않는 정신적 구심점이 우리 사회에 박약한 건, 선진국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갑의 횡포가 흙수저들의 공분을 사는 사회에서 멈추고 꺾인 청춘들의 꿈속엔, 내가 이십대에 일찌감치 버린 꿈도 있다. 다행히 밥그릇을 부여잡았지만 그건 그냥 밥그릇이지 빛이 아니었다. 만인이 호인이 아닌 세상에서 우린 만인에게 호인이 되기 위해 양심을 버린다.
대국의 자부심에 약해도 가진 게 많은 중국, 혁신에 약하지만 칭찬에 약하지 않은 일본, 제 나라를 마뜩찮아 하면서도 끔찍이도 사랑하는 미국과 우린 앞으로도 무수한 빛과 그림자를 주고받으며 달려갈 게다. 선대(先代)의 피땀이 배인 바통을 이어받으며 빛을 쥐면 반드시 어둠도 쥐게 된다는 역사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려 한다.
포드극장의 명암처럼 우리가 남길 빛과 어둠이 또다시 저 궁문에 아로새겨질 테지만, 좀 떳떳하려면 빛다운 빛을 쥐어야 할 것 같다.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한 간절함으로 처음 그 소신을 지킬 수만 있다면 광화문은 지금보다 더 높은 하늘을 이게 될 것이다.
[2016년 3월]
[에세이문학 2016년 여름호]
첫댓글 소교님이 좋은 수필을 골라 올려 주셨군요. 젊은 분인듯 한데 글을 절도 있게 아주 잘 쓰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