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지암 소머리 국밥의 탄생
지난 5일 서울에 볼 일이 있어 올라가게 되었다. 볼 일은 오후 4시에나 약속이 돼 있어 대전에서 올라가야 하는 처지에서 그 시간까지 어떻게 보내야 좋을지가 문제였다. 서울에 갈 때마다 오가는 길 운전을 해줘야하는 바오로가 의견을 내놓았다. 가는 길에 그동안 한번 가서 먹어 봐야지 먹어 봐야지 하던 곤지암 소머리국밥으로 점심을 하자는 것이다.
9시 아파트를 출발 고속도로유성IC를 통과 처음 들린 곳은 오창휴게소, 쉼터 입구에는 ‘그대 생각에 행복합니다’,‘당신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라는 꽃말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제라늄이 8월 태양아래 붉은 꽃을 활짝. 예쁜 얼굴로 반겨주었다. 진천농다리를 오른 쪽 강 아래로 하며 성하의 녹음을 눈에, 가슴에 가득 담으며 아름답고 시원하게 꾸며진 맹장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다시 출발, 다음 행선지인 경기도 광주시 실촌읍 곤지암리에 있는 ‘원조 최미자 소머리 국밥(집)’으로 향했다. 오른 쪽 길 아래 자리 잡은 식당 주차장은 모여든 차로 만차를 이루었고 입구에는 미처 들어가지 못하고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2000년 경기도 으뜸 맛 집으로 선정되었다는 그 집 소머리 국밥 맛이 더욱 궁금해졌다.
잠시 후 식당 홀에 자리를 잡고 소머리 국밥과 수육을 시켰다. 함께 나온 깍두기와 배추김치, 소머리 국밥은 국물에 밥을 말아 내왔고 수육에는 시큼한 소스가 곁들여 나왔다. 소머리 국밥에는 큼직큼직하게 썬 여러 부위 수육이 많았고 수육도 생각보다 좋은 여러 부위가 골고루 함께 나왔다. 적당하게 익은 배추김치를 얹어 먹는 소머리 국밥이나 깍두기와 먹는 수육 맛도 좋았다.
소머리 국밥은 최미자 할머니가 1981년부터 초가집에 솥 3개를 걸고 끓이기 시작해 곤지암 소머리 국밥의 원조 할머니가 되었다는데 지금도 소머리국밥의 자존심을 걸고 주방을 파수꾼처럼 지킨다는 것이다. 70년대 중반부터 포장마차를 하며 어렵게 살아가던 젊은 여자가 소머리 국밥을 끓이게 된 사연이 있다. 유난히 허약하고 병치레가 잦은 남편 병수발에 정성을 다 하는 그녀의 정성을 눈여겨 본 이웃이 도축장에 다니는 다른 이웃에게 ‘좋은 고기가 있으면 아낙에게 좀 주라’고 부탁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난생 처음, 오로지 남편을 위하는 한 마음으로 소머리를 달였으나 긴 병에 입맛이 짧아진 남편은 오장육부 기능이 좋아진다는 국물을 제대로 맛있게 마시지 못해 아내의 마음을 더 안타깝게 했다.
그녀는 꾸준히 소고기 특유의 냄새를 제겨하고 소고기 국물 고는 방법을 연구하여 이웃이나 포장마차 손님에게 그 맛을 선보였다. 먹어 본 사람들은 하나 같이 ‘맛이 구수하고 깊다’며 비법을 묻는 이가 늘어나게 되었다. 힘을 얻은 그녀는 이웃들에게 그 비법을 알려주고 소 혀를 더 넣어 고기의 감칠맛을 더 하는 등 연구를 거듭하는 동안 소머리 국밥의 소문은 곤지암 소머리 국밥, 더 빨리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몇 해가 지나 포장마차가 식당이 되었을 뿐 아니라 광주는 곤지암 소머리 국밥의 고장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곤지암 소머리 국밥은 약골의 병약한 남편을 살려내려는 아내의 지극한 사랑으로 탄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창 휴게소 화분 제라늄의 꽃말이 더 아름답게 들려오는 곤지암 소머리국밥 점심이었다. (2014. 8. 15. )
첫댓글 무슨일이든지 정성을 들이면 들인 만큼의 성과가 나오기 마련.
나는 가까이에 살면서 수년 전에 직장 동료들과 여행을 하는 길에 잠깐 들른 경험밖에 없는 최미자 할머니 소머리 국밥 집에 가슴 찡한 남편 사랑의 역사가 깃들여 있는 줄 몰랐다네. 일간 날을 잡아 친구들과 함께 꼭 찾아봐야 할 것 같네.
지금부터 20년전에 몇번 들렸지만 최미자 할머니의 소머리국밥집 내력은 처음 들어 보았네 . 다시 한번 또 가고 싶군
전에는 자주 들렸었는데 술 좋아 하는 사람은 맛 좋은 안주는 좋은데 한정된 수주병에 아쉬움이 많은 곳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