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2일은 조카인 윤상의 결혼식이라서 참석하지 못하였다. 마침 퇴촌의 집주인인 정 여사도 미얀마에서 오신 스님(우빤디따 사야도)의 수련회에 참석하기 때문에 우리 모임도 한 주 쉬기로 하였다.
아파트 단지내 부녀회에서 벚꽃 축제를 열었다. 작년과 같이 약수터 옆에 천막을 치고 단지 내 노인들에게 대접할 음식을 차리노라 부녀회 회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뽕짝노래와 춤이 곁들여졌다. 어디 나서기를 수줍어하는 우리 집 젊은 노인을 위하여 떡과 부침이, 돼지고기 편육을 가서 얻어왔다. 남편은 이렇게 한 점 얻어먹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
엊그제는 남편에 대한 미운 마음으로 하루 종일 심사가 가라앉아 있었다. 나에 대한 남편의 좀스런 마음 씀씀이에 불만을 품고 티격태격하였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처럼 가슴이 부글거리는 것은 아니지만 다음날이 되어도 침체된 마음이 좀처럼 되살아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이런 생각을 하였다. 부처님은 내 몸을 나의 것이 아닌 물체로 보라고 하셨는데, 문뜩 물체인 나라는 존재가 또 다른 물체인 남편이라는 존재의 좀스러움을 싫어하며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화면을 보듯 그려보니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남편에 대한 미움이 사라졌다. 나의 명랑함도 서서히 되살아났다.
< 운동장에서 행선을 하면서 >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저녁 산보를 하기 위하여 운동장으로 갔다. 운동장으로 향한 층층대를 다 올라가 문뜩 수리산 쪽을 바라보니 수리산을 뒤로한 아파트 숲이 유달리 우뚝 솟아 보였다.
산본에 사는 주민 치고 수리산이 높은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만 지금 내 눈앞의 광경은 저 멀리 수리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아파트의 거대한 몸체가 마치 수리산보다 더 높다고 착각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무심코 보던 예전의 광경이 아니었다. 원근법의 원리를 모르는 나도 아니련만 눈앞의 집들이 새삼스럽게 커 보이는 것은 오늘 알아차리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아마 예전에 누가 나에게 산본의 모습을 눈을 감고 그리라고 하였다면 수리산을 제일 높게 그리려고 애썼을 것이다.
수리산이 높다는 사실은 나의 관념이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의 수리산은 거대하게 펼쳐져 있는 아파트사이로 간신히 그 산등성이를 들이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까지 그때그때 위치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눈앞의 모습보다는 관념상의 모습으로 산본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산본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이었던 것이다.
수리산이 산본에서 제일 높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내 눈앞에는 수리산보다 훨씬 높아 보이는 아파트 숲이 다가와 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사실은 모두가 진실이다.
위빠싸나의 기본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내가 현재 신수심법을 통하여 관(觀)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고 진실되지 않으며 변화무쌍한 것들이다. 안 이 비 설 신과 그 대상인 색 성 향 미 촉 법이 그러하며 그 주체라고 하는 마음도 뿌리가 없이 자기가 심어놓은 종자에 따라 제멋대로 떠돌아다닐 뿐이다. 주체가 없는 이 마음은 대상이 있을 때에 언제든 일어난다. 그것도 일초에 17번 이상이나 대상에 따라 움직인다니 어찌 이 마음을 나의 실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 수. 심. 법을 통하여 받아들이는 거친 호흡과 고통과 희. 노. 애. 락은 나에게 있어서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그간의 귀동냥을 통하여, 결국은 이 모든 것이 무상과 무아로 귀속되는 줄은 알면서도 이 현실을 무시 할만큼 나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이 모든 것이 결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모두가 진실인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이를 깨어서 관하라고 하셨다. 취사선택을 하지 않고 오직 지켜보라고만 하셨다. 어떤 것이든 거부하거나 따라가지 말고 알아차리라고만 하셨다.
그래서 나는 화가가 되지 못한 모양이다. 만약 화가였다면 지금 내가 문득 깨달은 것처럼 우뚝 솟은 아파트 허리쯤에 걸쳐져 있는 수리산의 늠늠한 모습을 자신 있게 화폭에 그렸을 것이다.
나의 고정관념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오늘 위빠싸나를 통하여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선생님께 이 말씀을 드렸다면 아마도 그 마음까지도 관하라고 하셨을 것이다. 분석하기 좋아하는 나는 현상을 통하여 얻어지는 지혜 혹은 깨달음에 취하여 곧잘 그 다음에 오는 현상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번에도 나는 얻어진 지혜를 즐거워하노라고 그 다음 마음을 놓쳤다.
[ 다섯째 주, 4월 29일 ]
선생님께서 직접 전화하여 모임이 없음을 통고하였다. 참석할 사람이 적다는 것인데 진짜 이유는 남양주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얀마 스님의 수행도량에 참석하고 싶은 것에 있는 것 같다. 나도 가보고 싶다.
그리하여 다음 날인 일요일에는 모임 회원들끼리 몇 차례 전화를 주고받은 끝에 경기도 용인에 있는 관음사에 가기로 하였다.
남양주군의 봉인사에서 수행 중이던 우빤디따 사야도가 관음사에 잠깐 들러 설법을 하신다는 것이다.
둘째인 경화가 운전하여 이곳을 찾았다. 용인 터미널을 빠져 나와 평택-이천-백암-와우정사-운학리를 거쳐 대정사와 보문정사가 오밀조밀 모여 있는 관음사 골짜기로 들어서니 봄 산은 온통 연두색 여린 잎새와 연분홍색 벚꽃, 철쭉꽃 등이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 찬란한 봄이여--
< 사야도의 법문 >
우빤디따 사야도는 미얀마에서도 널리 알려진 수행자라고 한다. 젊었을 때에는 부처님 열반하신 후부터 이어져 내려온 제 6차 부처님 법 결집대회에서, 아난 존자의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아비담마(부처님 때부터 구전으로 전수되고 있는 불법이론)에도 능통하고 실행도 높은 분이라고 한다. 80세가 다된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정한 노인의 모습이었고 오랜 수행으로 얻어진 침착함과 원만함이 둥근 얼굴을 덮고 있었다.
다음은 스님의 법문을 요약한 것이다.
1. 부처님 법은 실천의 법이다.
2. 불법의 실천은 알아차리는 것이다. 수시로 일어나는 탐진치를 알아차림으로써 탐진치를 제어(control)하고 돌아다니는 마음을 챙기게 된다.
3. 어린 자식을 보살피듯 마음을 챙겨라. 멋대로 돌아다니는 마음을 그대로 두면 돌보지 않은 자식처럼 황폐해 진다.
4. 천하는 것은 법(다르마)을 얻는 것이다. 돈을 벌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법을 얻으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자신을 격상(upgrade)시킬 수 있다.
5. 그 외에 스님은 우리에게 자비심을 키워나갈 것을 권고하였다. 남 의 일을 내 일처럼, 내가 만약 그의 입장이라면... 하는 생각을 항상 할 것을 당부하였다.
사야도의 법문에 대한 경화의 코멘트가 재미있다.
첫째, 수행을 통하여 자신을 저급의 상태에서 고차원의 상태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에 놀랐다. 마지막 한 순간까지도 방하착(放下着, 자신을 놓는 것)하는 것이 최상의 수행이라고 알아왔던 이제까지의 사고방식으로 볼 때, 아라한과를 최종목표로 자신을 발전시켜 나간다는(upgrade) 수행 방법이 생소하다.
금강경에 언급되어 있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도과들이 결국은 수행을 통하여 터득하여야 할 수행자들의 과정임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둘째, 불자로서의 미덕을 부처님에 대한 신심(信心)에 두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둔다는 점. 부처님을 잘 모시어서 가피지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위빠사나를 잘 하여 스스로를 격상하는 것, 이것이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 법을 펴신 목적이라는 것이다.
합리적일 뿐 아니라 미신적인 요소도 배제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다른 종교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 여섯째 주, 5월 6일 ]
오늘은 예정되었던 모임이 취소되는 바람에 못 갈 것으로 여겨졌던 위빠싸나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다.
조금 늦어서 도착하니 다른 사람들은 오지 않고 정 여사와 선생님 두 사람만 찻상을 마주하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 보살은 우빤디따 사야도 수행에 참석하면서 며칠 묵언을 한 관계로 목이 쉬어 있었다.
선생님도 미얀마에서 오랫동안 묵언 수행을 한 적이 있는데 처음 말하려 할 때에 목청이 굳어져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정 여사는 매우 활동적이고 일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이번에 곽 선생님을 모시고 수행을 계획한 것도 그의 추진력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가 이번 수행에 들어가자 그간 알고 지내던 어떤 노스님도 같이 따라 들어갔는데 그 후 이 스님도 우리 모임에 참석할 뜻을 보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금 늦었지만 그 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이가 꽤 드신 것으로 보아 그간의 자신의 수행방법이 있었을 텐데 그걸 버리고 여기에 참석한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대단한 용기를 가진 분이 아니면 그간의 수행방법에 의문을 품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직접 만나 잠시 같이 대화하다 보니 후자에 속하는 것 같았다.
이 스님의 뒤늦은 참석으로 선생님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위빠싸나의 기초적인 이론을 정성스레 들려주었다.
위빠싸나의 기본 정신은 부처님이 일러주신 열반, 즉 닙빠나에 드는 방법을 부처님께서 하신 방법 그대로 따라하는 것, 그 방법으로는 신수심법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는 것, 그리하여 이를 통하여 무상, 고,무아를 깨달아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이러한 방법은 부처님 이외의 어떤 종교나 성현도 일러주지 못하였다는 것 등.
다시 듣는 설명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위빠사나는 결국 8 정도(正道)의 길을 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얼마 전, 미국에 살고 있는 둘째 여동생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부엌 설거지 대 위에 정견(正見), 정념(正念), 정어(正語) 등 8 정도(正道)에 관한 쪽지를 붙여놓은 것을 보고 “여기서 말하려는 정, 즉 바르다는 것의 기준이 무엇이냐”고 반문하였던 기억이 난다.
이제 와서 보니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등에서 말하는 ‘바르게’는, 알아차려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라는 의미였다. 그 깊은 뜻도 모르고 그간 이를 경시하였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결국 위빠싸나는 8 정도를 행하는 것이다.
8 정도(正道, Eight-fold Path)는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 수행의 덕목을 말한다.
즉, 正見(Right View), 正思惟( Right Thought), 正語( Right Speech), 正業( Right Action), 正命( Right Lifelihood), 正精進( Right Effort), 正念( Right Attentiveness). 正定( Right Concentration)
< 미얀마 인들의 정신적 생활 >
선생님의 설명가운데 노스님은 예외 없이 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 중 흥미로운 것은, 미얀마가 현재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독재국가일 뿐만 아니라 가장 가난한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는 것, 더구나 3월에서 5월경까지의 우기(雨期)에는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습기 찬 악조건의 나라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 국민들 대다수가 부처님 법 잘 지키면서 양순하고도 평화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부처님 수행을 잘 하는데 왜 잘 못사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선생님도 처음에는 스님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미얀마를 찾았다고 한다. 게다가 짧은 수행기간이지만 어느새 남방불교를 비하하는 마음에 물들어서 이곳을 소승불교의 고장이라고 깔보는 마음의, 이중의 편견을 가지고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의 수행하는 자세와 방식을 보면서 그간 자신이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는지 오히려 부끄럽게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이 나라 사람들의 수행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스님들은 아직도 부처님 당시와 똑같은 방법으로 탁발하고 신도들도 당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스님께 드릴 음식을 정성스레 장만하여 문밖에서 기다린다. 스님들은 한 시간도 더 걸리는 거리를 맨발로 걸어서 탁발을 하는데 부처님 당시처럼 일곱 집만을 들르는 것은 아니지만 음식을 주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은 채 걸식을 하고 돌아와서 다같이 나누어 먹는다고 한다.
이 같은 배려 하에 일단 스님이 되면 돈이나 숙식에 관한 것은 모두 신도들에게 맡기고 수행에만 전념한다.
그러니까 온 국민이 스님들의 수행 뒷바라지를 하는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시로 절에 가서 스님이 되기도 하고 일정기간 수행하기도 하기 때문에 스님과 신도가 따로 있을 수가 없다.
수도장마다 평균 천명의 수행자가 항상 북적인다고 한다.
이와 같이 온 국민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수행에 전념하다 보니 국민들의 심성 또한 온화하고 평화로워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향기를 느끼게 된다고 한다.
고도의 정신적 문화라고나 할까, 불국토(佛國土)가 따로 없다고 한다.
그런 미얀마 사람들이 왜 세상에서 제일 못사는 것일까. 이는 미얀마에 관심을 가진 자라면 한번쯤은 가져봄직한 의심이다.
이는,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 마음속에 수도 잘하면 복 받는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계행 잘 지키고 마음 곱게 쓰는 착한 사람은 복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복 받는 사람들이 반드시 착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에 의문을 가져본다. 그래서 기복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 복을 나중에 천당에 가서 받는다, 현실적인 복과 수행과는 별개의 것이다 하는 내세론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렇다면 미얀마 사람들은 내세를 바라보고 지금의 괴로움을 기꺼이 감수한다는 것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던 나는 한 때, 미얀마 사람들이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수행을 하다보니 부수적으로 가난하게 되었다고 나름대로 분석, 평가한 적이 있다
마음 비우는 것을 연습하다보니 돈에 대한 욕망이 적어지고 그러다 보니 외형적으로는 가난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수행과 부(富)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고 가난은 스스로가 원하여 택한 어느 일방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분석은 어디까지나 물질의 있고 없고를 기준으로 한 것이었음을 오늘의 대화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이들의 행복의 척도는 물질의 풍요로움이 아니라 정신적인 충만과 마음의 풍요로움이다.
선생님에 의하면, 독재정치 하에 죽임을 당하면서도 이들은 전생의 업보려니 하며 알아차리며 죽는다고 한다.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이러하니 다른 일에선들 오죽하겠는가
우리들이 이들의 빈곤을 측은히 여기는 것과 같이 이들은 오히려 서구물질문명의 풍요로움을 측은히 여긴다고 한다. 물질의 있고 없고는 그들의 관심 밖이다. 그들에게는 오직 마음속의 고통 없음과 이 고통의 원인인 욕망과 집착의 있고 없음만이 관심사인 것이다.
그들도 역시 속세에 살고 있으니 우리와 같은 물질적 욕망이 왜 없으랴만은 전반적인 분위기가 온통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까닭에 자연스럽게 이런 나라가 된 것 같다.
어쨋든 미얀마 사람들은 소유로부터 자유롭다.
그들은 물질의 행복을 포기한 대가로 정신적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물질계의 일들에 관심이 없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들이 누리고 있는 행복을 헤아리려면 우선 이쪽의 마음부터 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수도 잘하면 복 받는다가 아니라 수도 잘하면 부처님에 가까워진다로 생각하고 그로 인하여 올 수 있는 결과 역시 물질적인 잣대로 가늠하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 현실은 마음의 결과 >
최근 들어 우리 집안은 형제들 중에 하던 사업이 잘 안되면서 다섯 형제 모두가 돈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면서 짧은 기간이었지만 형제간의 불화도 경험하였고 번창하였던 집안의 명예도 많이 손상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우리 형제들에게는 하나의 의문이 생겼다.
그간 우리는 부모님이 이루어 놓은 가문의 위상을 지키기 위하여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왔다.
나와 동생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새벽부터 일어나 금강경 열심히 읽고 24시간 게을리 하지 않고 일어나는 마음마다 부처님께 바치기를 일상의 생활로 하는 등 어머니로부터 전수 받은 수행방법을 지키기 위하여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부모님이 모두 안 계신 이 시점에서 자식들이 이 지경이 되고 보니 부모님의 유훈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다는 자책감, 죄송함과 함께 그간 우리의 수행 방법에 한 가닥 의문을 갖게 된 것이다.
무엇이 잘못되어 이렇게 되었는가. 아니면 오히려 잘된 것인가. 성경 말씀에도 부자가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한 단계 발전하는 것인가 등 등.
이러한 의문 속에는 행동을 잘못하면 나쁜 업보가 떨어진다는 권선징악의 이치도 어느 정도 내포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짜 욕심을 버리는 수행을 하려면 현실적인 부귀영화는 멀리하여야 한다는 또 다른 생각도 들어있다.
이런 관념들은 부모님을 통해서나 사회를 통하여 은연중에 박혀진 고정관념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위로하였던 것은, 이번 일을 계기로 진짜로 마음 비우는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먹고 입고 사는데 있어서 쓸데없는 욕심 안 부리고 소박한 노후를 보내는 것이 욕심 없는 생활이라고 여겨왔던 나에게 하루아침에 집이 날아갈 걱정을 하고 통장에 기록된 돈을 세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그 동안 자부하였던 나의 무욕(無慾)이 멋 내기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역시 사람은 한번쯤, 일부러 랄 것까지는 없어도, 재산을 몽땅 잃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요즘 김용옥 교수가 TV에서 열변을 토하는 바와 같이, 허(虛)가 드러나면 드러난 만큼 마음을 비울 수가 있다는 노자(老子)의 사상에 동의하면서 이번 일이 우리에게 준 교훈은 없어진 재산 이상의 값어치가 있다고 위안하였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모두 그러하듯 우리 집안도 해방 후에 한번 재산을 몽땅 날리고 6.25 때 또 다시 한번 몸만 건지며 탈출하여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였다
특히 어머니의 경우는, 시댁에서는 9 남매의 맏며느리로서, 친정에서는 6 남매의 맏딸로서 그 중 세 사람이 평양에서 피난 내려와 어머니에게 의탁하였으니 양쪽 집안을 통 털어 오죽 많은 일과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랴.
거기에 금지옥엽으로 키운 자식을 부산에서 잃고 나머지 다섯을 키웠으니, 어머니 표현대로라면, 한 가지 일을 간신히 해결하고 나면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또 다른 일이 밀려오는 거센 파도와 같은 삶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내게 비친 어머니의 모습은 거침없고 활달하였으며 수중에 돈 한 푼 없을 때도 군색해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는 일년 동안 부어서 찾은 곗돈을 고스란히 다른 사람에게 선뜻 넘겨주시는 것을 보았다.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계획도 많았었는데도 어머니는,
“그 사람이 쓰라고 들어온 돈 인가보다” 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어버렸다.
학교 등록금을 제 때 내 본적이 없는 우리였으나 우리 집은 항상 식객으로 북적였고 풍부해 보였으며 또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왕성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부모님은 소유의 허무함을 알았으나 무소유에도 집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소유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이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보아서 우리 부모님은 부자도 아니지만 가난하지도 않았다. 그것을 초월하여 있었다.
이와 같이 소유와 무소유로부터 자유로웠든 부모님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이번 일을 계기로 철저하게 마음 비울 연습을 할 것을 다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미얀마 사람들의 무소유 개념을 말하면서 우리 집 사태에 대한 이제까지의 결론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미얀마 사람들의 가난이 세속적인 의미의 부의 개념과 무관하듯 사실 우리 형제들의 수도 생활과 부귀영화와는 무관한 것이다.
우리 형제들에게 주어진 현재의 조건이 그러할 뿐인데 이를 맞이하는 우리들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니, 우리 형제들이 유달리 집착하고 있는 부분이 수도(修道) 잘못하면 한번 혼나보아야 한다, 혹은 수도를 잘하여야 복을 받는다는 생각이었다. 수도 잘못하면 벌 받는다는 생각, 혹은 생전의 어머니 표현대로 소금물에 한번 담궜다 꺼내야 혼비백산하여 정신을 차린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깊이 박혀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생각대로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의 일은 우리의 평소 생각이 그대로 현실화 한 것이다. 날아간 부귀영화가 수도 잘못한 탓도 아니요, 무소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체험은 이런 일이 아니고도 얼마든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런 방식으로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고정 관념이 우리를 이리로 끌고 들어온 것이다. 물론 수도 잘못하면 이 같은 결과가 업보로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선생님에 의하면 선업과 악업은 항상 섞여 있다고 한다. 결과로 떨어진 악업 뒤에는 반드시 선업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업이 어떻게 적용될지는 오직 부처님만이 아신다고 하였다.
이렇듯이 우리는 잘못된 고정관념에 젖어, 그리고 그 고정관념이 또 다른 악업을 만들어가면서 살아온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할 일은 오직 떠오르는 마음을 그대로 지켜보는 일이다. 형제 중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더라도 그 사람을 바로잡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형제를 걱정하는 그 마음을 먼저 지켜보아야 한다.
좋은 의도에서 나온 마음도 알아차리고 보아야 한다. 좋다고 내었던 마음과 의도도 집착에 의한 것일 경우에는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
이 점을 소홀히 하면 흔히 불교인들이 말하는 무소유의 개념에 집착하거나 자기만의 독선에 빠져 원하지 않던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다.
이것이 이번에 내가 터득한 깨달음이다.
중요한 것은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을 보는 자신의 마음인 것이다. 예전에도 마음이 모든 것의 근원이며(一切有心造) 삼라만상이 마음을 일으킨 결과라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의 깨달음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깨달음이다.
후에 이 깨달음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최상의 결론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