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펜스타인Wolfen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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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칭 슈팅 게임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은 화면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대신 모니터가 게이머의 눈 역할을 하고 키보드 위에 얹은 손이 마치 화면안으로 이어진 듯한 느낌을 주어 직접 전투에 임하는 기분이 들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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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권상우) - 2001년 영화 <화산고>에서 권상우는 무공은 매우 높지만 운이 따르지 않아서 혹은 뭔가 결핍된(아마도 인간적인 매력이) 모범생 무도가로 나타난다. 그가 영화에서 모범생 연기를 한 것이 <말죽거리잔혹사>가 처음은 아니란 거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는 특유의 어눌한 대사가 캐릭터와 매우 잘 어울렸다. 이 영화를 제외한 그의 영화들은 흥행이나 비평면에서 모두 성공적이진 못했다는 평을 듣는다.

우식(이정진) - 이정진, 권상우보다 두 살 아래이지만 연기에서 뿜어져나오는 카리스마는 권상우보다 못하지 않았다. 그는 10살 때 처음 영화에 데뷔한 아역 배우 출신이다. 1988년 작인 <접시꽃 당신>이 그의 데뷔작이었다. 2002년 <해적 디스코왕 되다>에서 주목할 만한 배우로 등장해 <말죽거리잔혹사>로 이어지는 복고 연기를 하고 있다.

은주(한가인) - 처음엔 잡지 표지 모델로 나중엔 CF모델로 등장해서 TV, 그리고 <말죽거리잔혹사>가 그의 영화 데뷔작이다. <말죽거리잔혹사>를 통해 한국의 '올리비아 핫세'라는 별명을 얻을지도 모르겠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한가인이 더 퇴폐적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불행히도 이 남성 중심의 영화 <말죽거리잔혹사>에서 여성은 다시 소품이 되었다.

1971년 제7대 대선 당시 김대중후보의 유세장면

1978년 봄, 강남 땅값이 오를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어머니의 성화로 현수(권상우)는 말죽거리에 있는 정문 고등학교로 전학 온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체벌과 ‘짤짤이’, 교련선생과 우열반, 그리고 따분한 나날들이다. 거기서 그는 2학년 ‘주먹 짱’인 우식(이정진)과 친구가 된다.

그런 두 사람은 하교길에 우연히 한 여학생을 본다. 인근 고등학교 3학년인 은주(한가인)는 두 소년의 마음을 빼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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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code)와 키워드(keyword)
중학교 시절의 나는 반장이었고, 장학금을 받았고(당시엔 의무 교육이 아니었으므로, 꽤 큰 돈이었다), 학생회 간부였고, 지도부였다. 나는 당의 공식행사에 출연한 공산당 간부처럼 가슴에 가죽을 오려 만든 뺏지판을 만들어 달아야 했다. 학교, 학생회, 지도부 뺏지 도합 3개의 뺏지를 달고 학교에 다녔으며, 후배들의 등하교 언덕길에 우뚝 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네들의 복장 상태를 점검했다. 나는 중학 시절 그런 권력자였다. 그렇다고 내가 영화 속의 선도부장 종훈(이종혁)에게서 일체감을 느낀 것은 아니다. 변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런 나의 권력기 혹은 전성기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일시에 허물어졌기 때문이고, 사실 그런 나의 권력 기반은 그보다 훨씬 더 일찍 허물어졌다. 정문고가 폭력써클과 권위적인 재단과 그 부속물들인 교사들의 든든한 합체로 말미암아 주변에서 소위 '똥통학교'로 알려진 것처럼 내가 진학하게 된 고등학교도 강북에 소재하고 있다가 강남 개발의 끝물을 타고, 제 때 합류하지 못해 강남은 강남땅이되 온전한 강남이 되지 못한 송파 인근으로 이전해온 학교였다. 학교가 이전해오고 몇 년 안 되어 학교 뒷산에서 소위 교내 폭력 써클 조직이 한 학생을 패죽인 사건으로 악명을 날렸다.
'코드'라는 말이 있다. 어느 시대를 규정짓는 '키워드'가 되는 말도 있다. 그러나 키워드와 코드는 비슷한 느낌이라도 다른 말이다. 왜냐하면 코드라는 것은 키워드보다 출생 자체부터 비밀스러움을 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소룡은 한 시대의 키워드이자 동시에 은밀한 코드이다. 모범생 현수와 불량아 우식(이정진)은 그렇게 서로의 코드에 접속한다. 거기에 단순히 이소룡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거기엔 그보다 먼저 성(性)이 있었고, 그 성의 주인은 은주(한가인)였다. 우리가 최초로 권력이란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언제일까? 사람들이 그 때를 명확히 기억하는 것이 언제일까 하는 것에는 분명 개인차가 존재하겠지만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계층과 서열에 익숙해진다. 그것은 우리가 원숭이였을 때부터 계속되어 온 본능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아침마다 주택가 좁은 골목길을 누비고 다니는 노랑버스엔 5-6살 무렵의 어린 아이들이 가득하다. 엄마의 손에 이끌려 나온 귀여운 작은 새들은 다른 새들과 함께 보모가 기다리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으로 옮겨지는 버스를 탄다. 그 순간 그 작은 마이크로버스의 공간 내에서도 서열은 매겨지고 아이들은 권력서열에 따라 자리를 잡는다. 늦게 탄 아이라도 늘 창가에 앉던 아이들은 창가의 전망 좋은 자리에 앉게 되고, 그렇게 관계가 맺어진 아이들은 그 관계가 극적으로 해결되기 전까지는(가령, 싸움과 같이) 지속된다. 우리가 풍경처럼 스쳐가는 아이들 사회에도 권력은 늘 존재한다.
폭군이 사라졌다고 저절로 행복해지지 않는다
그때 나는 9살이었다. 국민학교 2학년이었으므로, 삼촌 책꽂이에 꽂혀있는 절권도의 스텝을 따라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고, 싸움의 필요성을 알지 못했다. 공부는 곧잘했지만, 공부로 매겨지는 서열말고 주먹으로 결정되는 서열에 공식적인 내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고, 다만 나의 신장과 덩치로 결정되는 추측에 의한 서열만 있었다. 난 말랐고, 작았다. 영화 속 우식의 자리는 교실 맨 뒤편에 있었고, 어항 속 물고기들의 서열이 그러하듯 가장 힘 센 물고기가 어항 밑 바닥을 차지한다. 그는 2학년 짱이었고, 현수네 반의 비공식적인 우두머리였다. 선도부장 종훈과는 서로 엇비슷한 세력이었으나 종훈의 입장에서는 우식보다 잃을 것이 많았기 때문에, 게다가 우식은 학급 내에서 그다지 인기없는 짱은 아니었으므로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우식은 스스로의 무덤을 팠다. 우식이 학급 내에서 소위 자기가 거느릴 수 있는 아이들을 챙기는 조폭(마피아식)의 조직경영법을 알았다면 그가 그렇게 맥없이 종훈에게 당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우식이 종훈과의 한 판 대결에서 그토록 맥없이 패한 까닭은 '찍새(김인권)'를 보호해주지 않았고, '햄버거(박효준)'을 일러바치는 그야말로 양아치스런 행동의 결과다. 그는 권력을 쥐고 있었음에도 그 권력을 어떻게 해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우식은 결국 힘만 센 폭군이었다. 결국 우식은 신망을 잃었고, 그런 균열은 현수에게도 상처를 준다. 우식에게 배신당한 '햄버거'는 염산을 컵에 담아와 우식에게 던지고도 하고, 스스로의 두려움에 질린 나머지 우식의 허벅지를 칼로 찌른다. 이렇게 내부에 균열이 생긴 틈새를 선도부장 종훈은 놓치지 않는다. 우식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 차지한 햄버거는 선도부장 종훈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 와중에 성적향상을 위해 학교는 우열반을 나누고, "여드름(최재환)"은 그 사실을 비밀리에 투서로 알린다. 학교는 갑자기 들이닥친 장학사의 시찰에 부랴부랴 우열반을 원상복귀시키지만 내부고발자를 찾아내려고 눈이 벌개진다. 결국, 명확한 증거도 없이 내부고발자로 낙인찍힌 "여드름"은 선도부에 끌려가 죽도록 얻어맞는다.
폭군이 사라졌다고, 저절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가 성취하지 못한 결과엔 늘 그 댓가가 따르는 법이다.

이소룡 세대가 아닌 긴급조치 세대들과 10월 유신
1978년 우리 사회는 박정희의 유신체제 아래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한동안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배웠던 유신체제는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이름도 모호한 조직에 의해 합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 기간동안 우리나라는 사실상 '헌법'없는 공화국이었다. 이런 체제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소위 "10월유신(十月維新)"에 의한 것이었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유신(維新)이란 이 말의 본래의 뜻은 낡은 제도나 체제를 아주 새롭게 고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말은 국민들에겐 "하다형 타동사"였다. 1971년 4월에 치뤄졌던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은 여당인 공화당 후보 박정희에 불과 150만표 뒤진 근소한 차이로 패했다. 그러나 이 선거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선거 사상 부정 선거의 대명사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선거는 박정희 정권이 치른 역대 선거 중에서도 가장 광범위한 부정이 자행되었다. 야당의 자금원을 원천봉쇄한 것은 물론, 후보자와 선거대책위원회, 주변 인사들을 구속하거나 조사하여 불순한 자금이 전달되었다며 용공조작을 시도했다. 실제 선거에서도 전국적으로 2중등재, 투표용지 미전달, 사전투표, 무더기투표, 릴레이투표, 대리투표, 부정개표 등 오늘날 우리가 들어 알게 된 모든 부정선거의 수법이 사용되었다. 재미난 것은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직접 찍은 한 표조차 무효표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그의 투표용지엔 선관위원장의 도장이 찍혀 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 선거에서 주요한 쟁점이 된 것 중 하나는 '삼선개헌' 문제였다. 당시 김대중은 "반공이란 이름아래 국민을 억압, 삼선개헌을 강행한 만큼 이를 환원시켜야 한다"며, 박정희가 이번 선거를 통해 총통제적 영구집권을 획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나는 총통제란 말이 무엇인지 모른다"며 이를 부인했고, 같은 해 4월 25일 서울 유세에서 행한 연설에서 "나를 대통령으로 뽑아주시오 하는 정치연설은 이 기회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약속은 지켜졌다. 그는 이듬해인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당의 정치활동을 중지시켰고, 헌법의 일부조항에 대한 효력을 정지시킨다. 그것이 10월 유신이었다. 국회를 대신하여 헌법기관이 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국회의 기능을 사실상 박탈하였다. 국회는 국정감사도 할 수 없고, 그나마 전체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지명하도록 되었다. 이는 국민의 선거권을 박탈한 것이었고, 대통령은 입법·사법·행정권을 모두 장악하여 연임이나 중임의 제한없는 영구집권자가 되었다.
유신헌법에는 대통령이 헌법적 효력을 지닌 '긴급조치(緊急措置)'를 발동할 수 있도록 했는데, 유신독재체제를 구축하고도 불안했던 박정희는 이런 긴급조치를 통해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와 유신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했다. 이후 이 세대를 우리는 이소룡 세대란 호칭보다는 긴급조치 세대(약칭, '긴조세대'는 다시 긴급조치 몇 호 때 학번이냐로 구분되기도 했다)는 모두 9호까지 발령되었는데 75년 5월 13일에 발표된 긴급조치 9호는 "주무장관이 이 조치의 위반자, 범행 당시의 그 소속학교, 단체나 사업체 또는 그 대표자나 장에 대하여 제적, 해임, 해산, 폐쇄, 면허취소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으며 아울러 이 조치에 의한 주무장관의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그야말로 초법적 권한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신은 곧바로 양심적인 재야인사와 젊은이들로 하여금 분노케 하고, 이에 저항하도록 만든다.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지 열흘도 채 안된 시점인 5월 22일 유신에 반대하는 데모가 일어났지만, 유신헌법은 이를 보도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이런 반대 데모 뒤엔 늘 대규모 검거와 민청학련 사건과 같이 조직 사건이 공안당국에 의해 조작되곤 했다.
1978년, 그 때를 기억하십니까?
1978년 유신은 정권 말기적인 증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사회는 출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갑갑했고, 경제는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중공업 중심, 재벌 중심의 경제개발논리와 중앙집중식 경제 정책은 그의 집권 초반부의 가장 큰 업적이었던 경제성장은 한계에 봉착했고, 잇달아 밀어닥친 오일쇼크는 한국 경제를 휘청이게 만들었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철저한 노동착취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기에 정치적인 각성이라기 보다는 삶의 무게에 짖눌린 노동자들 역시 한계 상황의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베트남에서 패배한 미국은 중국에 화해 제스추어를 보냈고, 이 해엔 드디어 미.중 수교를 맺게 된다. 박정희 정권은 이런 상황을 극복할 만한 정치능력이 부재했다. 1978년 광화문에서 대학생들이 유신 반대 데모를 했고, 민주청년인권협의회, 해직교수협의회, 민주주의국민연합,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김지하구출위원회 등이 결성되었다. 함석헌, 문익환, 박형규 등이 '민주구국국민선언'을 발표한 것도 이 해의 일이었다. 이 해 노동자들을 가장 분노하게 만든 사건은 '동일방직사건'이었다.
동일방직사건은 1972년 인천 만석동에 소재하고 있는 동일방직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을 지부장으로 하는 노동조합이 탄생하자 회사측에서 이들을 대상으로 협박과 폭행, 부서 강제 이동 등의 노동 탄압을 가해 민주적으로 결성된 노동조합을 파괴하려 했던 사건이다. 1976년 7월에 동일방직측은 불법으로 대의원대회를 소집하여 기존지도부를 밀어내고, 어용 지도부를 구성하려는 시도를 했다. 여성노동자들은 회사측의 이런 행위에 대해 파업농성으로 맞섰고, 부당한 노동조건과 저임금에 항의하는 여공들은 회사의 폭력적인 제재조치에 대항해 나체 시위와 단식 농성으로 경찰과 대치했다. 그 와중에 72명 노동자가 연행되고, 1백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1978년 2월 21일 회사와 독재정권은 노동조합의 대의원 대회장에서 여성노동자들에게 인분을 뿌리며 강제해산시켰고, 곧바로 124명의 노동자를 해고했다. 이 사건은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요구한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조차 폭력적인 강제 해산과 노조 파괴로 맞서는 유신독재가 드리운 깊고 우울한 그림자였다. 사실 이 사건은 우리 노동운동이 추구한 것이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으로 항거한 이래 계급운동이거나, 혁명이라기 보다는 "근로기준법"이 제시하고 있는 노동조건을 만들어 달라는 일종의 준법 투쟁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정부와 회사측에 법을 준수해달라는 요구를 했음에도 노동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살인적인 폭력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노동현장의 근로조건 개선 요구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 이후 노동운동은 민주화운동, 기독교인권운동, 지식인 운동들과 연대하면서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기는 민주노조운동, 인권운동, 정권 퇴진 운동으로 발전해 나간다. |
동일방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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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2월21일은 자본과 국가 권력이 초보적 노동운동에조차 얼마나 저열한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는지를 참혹하게 보여준 날이었다. 이 날 인천시만석동에 자리잡은 동일방직 인천 공장에서는 노조 지부장과 대의원 선거가 치러질 예정이었다. 새벽 5시30분께부터 삼삼오오 출근하는 여성 조합원들을 맞은 것은 남성 노동자들의 무자비한 폭력이었다.
회사의 사주를 받은 이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노조 사무실을 난장판으로만든 데 이어, 방화수통에 똥물을 담아와 여성 노동자들에게 닥치는 대로뿌렸다. 투표소로 오던 조합원들만이 아니라 탈의장과 기숙사에 머물고 있던 여성 노동자들도 똥물 세례를 피할 수 없었다. 현장에는 경찰관들이 나와 있었으나 이들은 이 상황을 방치했고, 노총 역시 동일 방직 여성 노동자들을 ‘불순분자’로 몰았다.
소수의 남성 노동자들이 장악하고 있던 동일방직의 어용노조는 1972년부터내리 여성 지부장을 선출하며 어용의 굴레를 벗고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싸우고 있었다. 회사는 이 독립 노조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1976년께부터 경찰의 비호 아래 남성 노동자들을 부추기며 본격적인 노조 와해 공작에 나섰다. 노조원들도 회사와 경찰의 어용노조 재건 움직임에 단식 농성과 알몸 시위 등으로 맞서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해 싸웠다.1978년의 똥물 투척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 경기도 지부에 근무하고 있던 최종선(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의문사한 서울 법대 최종길 교수의동생)씨의 증언에 따르면, 지부와의 협의 없이 중앙정보부 2국이 직접 개입한 일이었다. 이 사건 이후 회사측은 정부와 섬유노조의 방조 아래 여성노동자 1백24명을 해고한 데 이어, 해고 노동자들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 등을 기록한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다른 기업들에 보내 이들의 취업을 막았다.
<고종석 ,2004년 02월 20일, 한국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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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엔 이외에도 영화배우 최은희 씨가 홍콩에서 북에 의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세종문화회관이 개관되었다. 명동성당기도회를 비롯한 여러 기독교 단체들이 선언문과 더불어 민주화를 염원하는 기도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5. 18일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있었다.
1978년, 그 때 학교에서는…
영화 <말죽거리잔혹사>에 등장하는 교련 선생과 선도부는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 선포 이후 전국의 고교와 대학을 병영화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작품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전국의 고교와 대학마다 학도호국단을 편성하게 해 학교를 병영화해 나갔고, 학내에서 군사교육을 실시하도록 했다. 박정희는 소위 4대 전시입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교수재임용제를 신설하여 교수들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고, 같은 해 9월 서울대는 학생집회, 데모, 농성, 등교 거부, 마이크 사용 등을 일체 금지하는 학칙을 제정한다. 이듬해인 1976년 전국 98개 대학에서 460여명의 교수를 재임용에서 해직시켰다. 이때 해직된 교수들은 리영희, 박현채, 성내운, 한완상, 이우정, 염무웅, 문동환, 안병무 등이었고, 김병걸, 백낙청 등은 그보다 앞서 파면되었다. 권력의 광기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대학마다 소위 '새'라는 사복형사들과 전경, 경찰기동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상주했고, 이들은 '경비일보(학내에 상주하는 기관원들의 상황보고 일지)'를 작성해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학생들 숫자까지 헤아려 보고했다. 해직되지 않은 교수들은 연구활동이나 강의보다는 학생 시위를 막는 역할과 더불어 제자들의 시위와 집회를 감시하고 예방하도록 강요되어 학생들 모두에게 지도교수가 배정되도록 했다. 초.중.고등학교의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든 학교의 교무실마다 태극기와 박정희의 사진이 내걸렸고, 한쪽에는 '국민교육헌장'이 걸려 있어야 했다. "큰 칼을 차고 싶어", 스스로 혈서를 쓰고 대일본제국 만주군 장교의 길을 택했던 박정희, 아니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는 일본 천황의 교육칙어와 군인칙유의 정신을 대한민국의 모든 교실에 도입했다. 1978년 6월27일 마침내 전남대학교에서 민주교육, 인간교육을 주창하는 선언문이 교수들(김두진 김정수 김현곤 명노근 배영남 송기숙 안진오 이방기 이석연 이홍길 홍승기)에 의해 채택된다.
선언문의 내용은 "교육지표 4개항"으로 드러나는데 내용은 "국가주의에 근거해 애국애족교육을 강조하는 `국민교육현장'을 정면에서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1.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교육,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 교육의 참 현장인 우리의 일상생활과 학원이 아울러 인간화되고 민주화돼야 한다. 2. 학원의 인간화와 민주화의 첫걸음으로 교육자 자신이 인간적 양심과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적 정열로써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들과 함께 배워야 한다. 3.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대한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며, 그러한 간섭에 따른 대학인의 희생에 항의한다. 4. 3·1정신과 4·19정신을 충실히 계승 전파하며 겨레의 숙원인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민족역량을 함양하는 교육을 한다."는 구체적인 교육지표를 표방했다. 정부 당국은 소설가이자 당시 주동자였던 전남대 교수였던 송기숙 선생 등을 구속했지만 이는 도리어 더욱 큰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전남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자 정부는 휴교령으로 맞섰고, 학교가 폐쇄되자 학생들은 시내로 진출해 항의했다. 이 일로 500여 명의 학생이 연행되고, 18명이 구속.제적되었다.
물론 영화 <말죽거리잔혹사>는 이런 사실들을 구체적인 형태로 보여주기 보다는 일종의 알레고리로, 추억의 이미지들 사이에 배치해두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