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세이치로 田中淸次郞(1872)】"총 쏜 뒤 서 있는 안중근... 신을 보는 느낌"
"총 쏜 뒤 서 있는 안중근... 신을 보는 느낌"
<영웅 안중근>의 3·26 순국
"나는 당시 현장에서 10여 분간 안중근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총을 쏘고 나서 의연히 서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신(神)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음산한 신이 아니라 광명처럼 밝은 신이었다. 그는 참으로 태연하고 늠름했다. 나는 그같이 훌륭한 인물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뒷날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안 의사의 총탄을 발에 맞았던 다나카 세이지로 만철이사의 회고담이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구리하라(栗原貞吉) 전옥이 사형집행문을 낭독한 다음 마지막 유언을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우리 대한국이 독립해야 동양 평화가 보존될 수 있고, 일본도 위기를 면하게 될 것이다."
안중근의 유해는 송판으로 된 관에 안장된 채 그날 오후 뤼순감옥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날 새벽부터 내린 보슬비는 하관할 때까지도 내렸다. 이천만 대한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안중근 의사에게 흘리는 눈물이었다.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
1921년 동경대 공학부를 졸업하고 오노다시멘트에 입사한 그는 이듬해인 1922년에 오노다시멘트 평양 지사에 부임해서 계속 조선에서 일하며 1940년에는 조선오노다시멘트 전무까지 올랐다. 그가 한국을 떠난 것이 1947년이었으니 2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른바 ‘청춘’을 조선에서 보낸 것이다.
이런 그가 훗날 펴낸 회고록 『韓國わが心の故里(한국, 내 마음의 고향)』(原書房, 1984)의 ‘安重根は民衆の心(안중근은 민중의 마음)’이라는 챕터에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당시 이토를 수행하다가 함께 총상을 입은 남만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가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훌륭한 사람은 안중근”이라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안 의사를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평가한 일본인 다나카 세이지로는 1872년 이토 히로부미 고향인 야마구치현 하기에서 태어나 동경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을 다녀와서 34세에 만철 이사가 된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가진 회동에서 이토를 수행하던 다나카는 프랑스어 통역을 맡았다.
회동을 마친 이토가 열차에서 내려 러시아 의장대 사열을 받고 있을 때 안 의사 저격이 있었고 이토는 현장에서 사망하였으며 이토보다 두세 걸음 앞에 있던 다나카는 발뒤꿈치에 총상을 입었다.(바로 그 총알이 현재 일본 헌정기념관 이토 히로부미 코너에 전시되어 있다.)
플랫폼에 이토 히로부미가 하차했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체념하던 순간 9시 30분경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준 덕분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의 얼굴을 확인하고 8연발 검은색 브라우닝 FN-M1900 권총으로 4발 저격했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수행원도 3발 저격했다.
제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제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제3탄은 윗배 중앙 우측으로 들어가 좌측 복근에 박혔다. 제4탄은 이토를 빗겨 나갔다. 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의 복부에 1발,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 다이지로(森泰二郞)의 복부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의 왼쪽 무릎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나카무라 요시히코(中村是公)의 오른쪽 장딴지에 1발을 맞췄다.
안 의사에게 총상을 입은 다나카는 앞서 소개한 안도의 대학 선배로 안도가 존경하며 매우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고 한다.
만철 이사였던 다나카는 당시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하는 전 세계 저명인사들을 만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엘리트였다.
“당신이 이제까지 만난 세계의 여러 사람 중 일본인을 포함해 누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안도의) 질문에 “그(다나카)는 한마디로 ‘그것은 안중근 이다’라고 말했다. 유감이지만... ”
“그때의 안중근의 늠름한 모습과 유연한 언행, 달려든 헌병이나 경찰에게 총알이 아직 한 발 남았음을 주의시키는 태도 등은 그의 인격의 높이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으며, 이제까지 다나카씨가 본 것 중에 최고였다고 한다.”
평소 존경하던 선배인 다나카에게 이와 같은 말을 들은 안도는 큰 충격을 받고 안중근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평양에 근무하며 진남포와 청계동 등 안 의사가 살던 집터를 찾아 두 차례나 답사를 다니기도 한다.
회고록에는 현지에서 만난 조선인들에게 안중근이 살던 집을 아느냐고 묻고는 잘 모른다고 하자 안도 본인이 조선인에게 안중근 집터를 알려주었노라는 얘기도 나온다.
이 내용을 회고록에 공개한 안도는 해방 이후 소련군에 의해 2년간 억류되어 있다가 일본으로 돌아가 1979년 ‘안중근연구회’를 만들었는데 일본 내 안중근 연구는 바로 안도에게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안중근 연구로 유명한 최서면 선생이나 나카노 야스오(中野泰雄) 아세아대 교수 등이 모두 안도와 교분이 두터웠다.
일본인들이 안중근 의사를 존경한다는 얘기를 하면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 안 의사에게 총을 맞은 사람부터 존경심을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영웅이 탄생하였고 신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