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정치가 용골대와 조선과의 관계
1596년~1648년 2월 24일
청 개국시기의 군인이자 외교관, 재무관, 행정관. 만주족으로 타타라(Tatara, 他塔喇) 씨족의 사람이며, 팔기(八旗) 중 정백기(正白旗) 출신이다. 조선에서는 용골대(龍骨大), 명에서는 영아이대(英俄爾岱), 영고이대(英固爾岱) 등으로 음차해 놓았지만 본래의 만주어 발음은 '잉굴다이'가 맞다.[1]
실제로는 조선과의 외교 교섭을 자주 맡았던 것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정치, 외교, 행정, 재정 관리 수완도 뛰어났다. 시키는 일은 뭐든지 다했고, 뭐든간에 청태종의 기대를 200% 만족시켰다. 그는 뛰어난 외교적 재능을 발휘하여 청태종은 대신들 앞에서 "육부의 여러 신하들 중에서 잉굴다이는 있는 힘을 다하여 부서의 업무를 처리하고, 일처리가 분명하여 짐이 아주 좋아하고 인정한다. 나머지 각부의 대신들 중에서는 힘을 다하여 일처리를 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라고 하기도 했다.
청태종은 이런 타타라 잉굴다이를 크게 신임했는데 참수를 당할 일이 발생하면 1회에 한해서 면제를 받을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다. 그러나 정작 잉굴다이는 살아생전에 참수면제권을 단 한번도 사용한 적도 사용할 일도 없었다.
용골대와 조선과의관계.
청태종의 즉위 이후에 용골대는 뛰어난 재능 덕택에 정치, 군사의 여러 방면에서 임무를 맡았다. 1627년에는 조선과의 형제의 맹을 맺는데 파견되었다.[4] 같은 해 5월, 잉굴다이는 부장(副長) 유흥조(劉興祚)[5]와 함께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원창군(原昌君)을 귀국시켰고, 청태종에 대한 인조의 맹세를 이행하라는 국서를 전달했다.
또 같은 해 12월, 청태종은 명의 경제봉쇄에서 벗어나고 물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잉굴다이를 다시 조선에 파견하여 무역 문제를 협의하게 하였다. 힘든 협상 끝에 청과 조선은 국경 시장인 변경호시(互市)를 여는 것에 합의한다. 합의서에는 조선에서는 쌀 3천 석을 준비하여 2천 석은 청에 직접 보내고 1천 석은 변경호시에서 매매하며, 다른 물자는 각국의 백성들이 변경호시에서 교환하도록 허용하여 서로 가진 것을 가지고 없는 것과 바꾼다라고 되어 있다.
그 후 5년 간, 즉, 1628년에서 1632년까지 잉굴다이는 감시관(監市官)으로 묵던과 조선을 오가면서 청에 시급히 필요한 물자의 공급을 해결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1631년, 청과 조선의 형제 관계가 긴장되기 시작했다. 인조가 보낸 사신 박난영(朴蘭英)이 청으로 봄철 공물을 보내왔는데, 청태종은 공물이 부족하다고 여겼고, 인조가 고의로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 공물을 받지 않았으나 예전과 마찬가지로 인삼 등의 답례물은 준비해서 잉굴다이로 하여금 박난영이 머무는 관사로 보내도록 했다. 박난영은 청이 자신들의 공물을 받지 않는데 자신이 답례품을 받을 수는 없다면서 이를 받지 않으려 했으나 잉굴다이는 공물을 받지 않는 것은 조선 측이 맹세를 어기고 공물을 갈 수록 감소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난영은 이에 반박했다. 후금의 답례품도 계속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이때 잉굴다이는 이를 담담하게 인정했으며, 박난영의 말이 이치에 맞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돌려 조선이 여러번 명을 도와서 청을 괴롭혔지만 청은 여전히 대의를 생각해서 조선을 대해 주었다고 하나하나 나열해 박난영을 공격하였다.
같은 해 3월, 잉굴다이는 다시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쌍방의 관계 및 봄철 무역에 관해서 계속 논의했다. 이 기간 동안 만주에서 도망친 385명이 배를 타고 조선의 경내로 들어왔는데, 잉굴다이는 이를 알고난 후, 즉시 사람을 보내 구금하여 묵던으로 송환시켰다.
1632년 11월, 조선은 회령(會寧)의 시장을 단속하기로 결정한다. 이 때문에 잉굴다이는 다시 조선에 가서 교섭을 벌이게 되는데, 그는 이 해에만 5번이나 조선에 가게 된 것이다. 이번의 담판은 쉽지 않아서 청태종은 특별히 그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그는 인조에게 보낸 서신에 이렇게 적었다. "잉굴다이를 파견했으며, 여러가지 논의거리는 그가 직접 전하게 하였다."
1633년 4월, 그는 또 조선으로 가서 담판을 벌인다. 국경 인근에 주둔한 청군의 식량 공급을 조선이 책임져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6월, 그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서 교섭을 벌였으며, 동시에 그는 팔기의 무역상 80인을 데리고 인삼 900근을 가지고 조선으로 가서 무역을 하였다. 잉굴다이는 협상에 능했기 때문에 비교적 조선에서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협상은 원만하게 끝나서 인조는 조(粟)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으며, 이로써 변경 병사들의 식량 문제가 해결되었다. 8월, 잉굴다이는 묵던으로 돌아갔다가 9월에 다시 무역상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가서 가을 무역을 벌였다.
1634년 3월, 잉굴다이는 마푸타(Mafuta, 마부대, 馬福大, 馬福塔) 등을 데리고 조선으로 가서 변경호시를 연다. 계속되는 무역으로 청은 조선에서 대량의 물자를 얻어 청 통치자들의 수요를 충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 화물을 다시 몽골에 팔고 말을 얻어왔다. 청의 강력한 기병은 이렇게 무장된 것이다. 즉, 잉굴다이는 청의 군대건설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 덕택에 같은 해 5월, 잉굴다이는 일등(一等) 잘란이 장긴(jalan-i janggin, 甲喇 章京)[6]으로 승진하였다.
1636년 2월, 청태종은 황제를 칭할 준비를 하였다. 지금까지 청은 아직 후금이란 국호를 쓰고 있었고, 명처럼 정식으로 황제를 칭한 상태는 아니었다. 이때부터 정식으로 청이라는 국호와 황제의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청태종의 지시 하에 8명의 호쇼이 버일러(hošo-i Beile, 和碩 貝勒), 17명의 구사이 어전(gūsa-i ejen, 固山 牛祿)[7], 49명의 버일러는 조선의 인조에게 자신들과 함께 청태종에게 황제 칭호를 바치자는 내용의 서신을 썼다. 잉굴다이는 이 서신을 가지고 대량의 인원을 이끌고 조선으로 갔다. 그러나 이때 조선의 형세는 이미 바뀌어 있었다. 주전파가 득세하여, "오랑캐 사신을 죽이고, 오랑캐의 글을 불태워서 대의를 드높이자."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다. 잉굴다이 등은 한성에 도착하자마자 감시를 받기 시작했으며, 항상 활과 화살을 든 병사들이 이들이 머문 관사를 밤낮으로 감시하였다. 잉굴다이는 인조를 만나뵙기를 청했지만 인조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래서 서신을 제출하고자 했지만 인조는 이도 받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난감해진 잉굴다이는 전체 인원을 이끌고 백성들의 말을 빼앗아 도망치기로 했다. 그는 그렇게 조선 조정에 인사도 안 하고 떠났는데, 인조는 골치아픈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즉시 사람을 보내 조선 조정의 회신을 잉굴다이에게 건냈다. 동시에 인조는 명령을 내려 변방의 수비를 강화하였다. 잉굴다이가 돌아가던 도중에 가도(椵島)에 주둔하던 명나라의 병사들이 길을 막았지만 그는 이를 뚫고 청으로 돌아갔다.
1636년 12월, 청태종은 2차로 조선을 침공하였다. 병자호란이 터진 것이다. 그는 군사적 공세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정치공세도 펼쳤다. 마침내 청과 조선의 협상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잉굴다이는 이때 회담에 참석하였다. 28일 간의 힘든 협상 기간 동안 잉굴다이는 양군 사이를 왕복하며 협상을 성사시키는데 힘썼다. 청은 군사적 우위라는 배경과 잉굴다이의 뛰어난 중재에 힘입어 협상을 타결하는데 성공하였다.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끊기로 하였고, 청과 조선은 화해를 하기로 결정했다. 인조는 잉굴다이에게 감사하며 백은 2천 냥을 선물로 주었지만 그는 이를 모두 위에 바쳤다.
한국에서의 용골대 이미지.
한국에서는 병자호란 때 조선군을 격파한 것 때문에 군인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고 조선땅을 짓밟은 청의 선봉장로 취급되어 고전소설 박씨전에 작가의 창작 인물인 동생 용홀대가 어이없이 죽임을 당하고 임경업을 피하는 겁쟁이로 나오는 등 대우가 매우 좋지 않은편이다.
그러나 실상은 매우 다르다. 백성들을 위해 민생방안을 펼치고 한족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노력하는 등 민생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조선이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았다.
사실 한국에서 잉굴다이에 대한 평가는 잉굴다이가 호란당시의 청나라 고위관료들 중 가장 이름이 알려졌기에 앞잡아 매도당했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잉굴다이는 당시의 청 관료나 무장들 중에서도 상당히 신사적으로 조선을 대했다. 사실 잉굴다이가 여느 청의 장수나 관료들 같았으면 조선이란 나라가 인조때 사라졌다 해도 이상할게 없다. 조선이 신하나라가 된 뒤에도 소현세자나 강빈 등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며[10][11] 몇번이고 조선에서 들락날락 거리면서 말썽 한번 일으킨적 없었다.[12][13] 또한 김상헌과 최명길을 심문할때도 대답이 이치에 맞다 싶으면 오히려 수긍하고 넘어가줬다. 실제로 두 사람 모두 적국에 끌려간것이나 다름없음에도 불구하고 심한 고초를 겪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