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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의 향기 스크랩 013_경북 경주시 진현동 불국사
無盡藏 추천 0 조회 51 12.03.27 14: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팔공산 갓바위에서 내려와 유스호스텔에서 잠을 잔후 이제 맑은공기가 가득한 산장같은 곳에서 아침을 맞이해 밑층의 사우나에서 몸을 풀고 식당에서 된장정식의 식사를 마친후 오늘의 목적지인 불국사와 석굴암을 향해 영천밑의 하양을 경유 고속도로로 들어갔다. 경산고속도까지의 길은 산정상을 넘는 멋진길이다. 물론 위험하지만.... 한없이 밀리는 고속도로로 경주톨게이트에 도착해 부지런히 불국사로향해 주차장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떨어진다. 다시 우산을 챙겨들고 어릴적 기억을 되새기며 한 바퀴 돌기시작했다. 너무도 광범위한 사찰의 웅장함에 매료되며 연실셧터를....

처음 도착했을 때는 사진이 거의 나오지 않을정도로 비가 많이 내렸었는데 그래도 헛되이지 않게 시간이가며 날이 맑아지고 있어 불국사를 다 돌고 점심으로 주차장에서 비빔밥을....부른배를 달래며 토함산 석굴암으로 향했다. 흐린날 석굴암을 찾아 사진으로는 빵점이지만 시원한 여름의 산행을 맛보고 또 정성어린 우리의 뜻을 전하는 그런 날이었기에 마냥 즐겁기만하였다. 주차장에서 이왕에 내려가는 것 포항 감포쪽으로 내려가자는 뜻을 합치하고 내려가며 이곳저곳 들르고 또 저수지를 지나 경주로 돌아와 보문단지돌아 분황사지와 안압지등증 경주의 대표적인곳을 다 돌아보았다.

[불국사 연화교위 범영루입구...]

대웅전의 남쪽 회랑 동쪽과 서쪽 끝에 각각 경루와 범영루가 위치하고 있다. 남쪽 회랑의 양쪽 끝에 돌출하여 대칭으로 위치한 건물이다. 범영루와 좌경루의 석조기단은 김대성에 의해 불국사가 창건될 당시의 모습을 간직한 것으로 보이는데,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범영루의 기단은 석재를 '十'자형으로 짜 만들었는데, 총 8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에서 제4단까지는 호형(弧形)을 이루며 좁아들다가 제5단부터 점차 넓어지는 형태인데, 제5단 이상의 석재 끝에는 공포의 살미에 베푸는 듯한 조각을 베풀어 변화를 주고 있다. 이에 반해 좌경루의 기단은 비교적 간단한 형태이다. 전체가 석조로 구성되어 있을 뿐 아래에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운 뒤 공포를 짠 목조건축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기둥은 팔각이고, 기둥 위에는 공포처럼 '十'자로 짠 석재를 두 단 놓았다.

[불국사 입구에서 본 우측 모서리 종각방?...]

[불국사 경내의 이동통로...]

[아름다운 계단...]

[불국사 극락전]

극락전 영역은 『무량수경(無量壽經)』또는 『아미타경(阿彌陀經)』을 소의경전으로 삼아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를 구현한 곳으로 불국사 전면 석축 위 높게 조성된 대지 위에 위치하고 있다. 대웅전 영역의 서쪽에 해당하는데, 대웅전 영역 보다 대지는 한 단 낮다. 극락전은 극락정토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는 이 영역의 중심 전각이다. 극락전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조선 효종 10년(1659년)에 중창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으나 조선 영조 26년(1750년)에 다시 중창되었다. 조선시대의 불전 중에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직후의 복구 과정에서 긴급히 중창되었다가 좀 더 여유가 생긴 18세기에 들어와 다시 중창하는 경우가 많은데, 불국사 극락전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1750년에 다시 중창된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시대인 1925년에 중수한 바 있고, 1973년에 다시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불국사 석가탑 전경..]

석가탑은 일명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한다. 석탑의 조영과 연관된 설화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석가탑은 백제의 석공 아사달이 조영했는데, 그를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을 담고 있다. 탑은 이중기단과 삼층의 탑신, 그리고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신라계 석탑의 모습이 완성된 시원형식으로 이야기되기도 한다. 한편 석탑 주변으로는 네 모서리와 각 면 중앙에 하나씩 모두 8개의 연꽃을 새긴 돌이 있고, 그 사이를 장대석으로 연결하고 있다.

또한 탑의 하층기단 아래로는 지면 위로 노출된 천연 암반이 있어 다른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탑 주변의 연화석은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로 불리는데, 그 역할이나 의미는 알 수 없으나 탑과 같은 성스러운 영역을 감싸는 시설, 즉 탑구(塔區)로 해석되기도 하고 연화대 위에 8보살을 안치하여 공양하는 모습을 나타내려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석가모니가 팔방금강좌 위에서 성불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즉 팔방금강좌와 함께 탑 아래 노출된 천연암반은 석가모니가 성불하는 순간과 함께 설법을 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국사 다보탑...]

다보탑은 석가탑과 같이 높이 10.4m로 대웅전 앞마당의 동쪽에 세워져 있다. 경덕왕 10년(751년) 불국사가 창건될 때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시대인 1925년에 해체 보수된 바 있는데, 관련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탑 속의 사리와 사리장치, 유물 등은 알 수 없다. 또한 현재 기단 위에는 한 마리의 돌사자만 있을 뿐 세 마리의 돌사자도 행방을 알 수 없다. 석가탑이 석가여래를 상징한다면 이 다보탑은 다보여래를 상징하고 있다. 법화경(法華經)』「견보탑품(見寶塔品)」에는 다보여래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다보여래는 석가여래 이전에 나신 부처님으로 영원히 살아계시는 본체(本體)로서의 부처님, 즉 법신(法身)의 부처님이다.

그는 옛날에 동방의 먼 곳 ‘보정(寶淨)’, 즉 ‘깨끗한 보배’라는 나라에서 태어났는데, 아직 부처가 되기 전 보살로서 수도를 하고 있을 때 다음과 같은 서원(誓願)을 했다. '내가 부처가 되어 죽은 뒤 어디서든지 누가 법화경을 설하는 곳이 있으면 그 앞에 탑 모양으로 땅에서 솟아나 참마로 잘하는 일이다, 잘하는 일이라고 증명하리라.' 이처럼 다보탑은 석가여래가 설법을 할 때 탑의 모습으로 그 옆에 나타나 그것의 옳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다보탑이라 부르고 있는데, 국내는 물론 국외를 포함하여 다른 어떠한 곳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조형을 지닌 신라인의 창작물이다.

[불국사 다보탑앞의 돌사자상...]

[불국사 다보탑의 섬세함..]

[불국사 대웅전...]

대웅전의 기단과 계단은 극락전의 것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남북국시대 건축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기단은 지대석과 탱주, 우주, 면석, 갑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탱주와 우주 및 면석을 별석(別石)으로 만들지 않고 하나의 돌에 면석과 탱주, 또는 면석과 우주를 새기고 있는 점은 남북국시대에 들어와 나타나는 신라 건축의 특성이다. 기단의 네 면 중앙에는 각 하나씩의 계단을 두었는데,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소맷돌에 지대석과 갑석을 조각했다. 면석은 직각삼각형의 모습이 되었는데, 그 끝을 살짝 들어올린 것은 불국사에서 볼 수 있는 조형상의 특성으로 예각으로 인한 날카로운 맛을 해소하고 있다.

[불국사 목어...]

[불국사 종각의 운판...]

[불국사 관음전 입구에서본...]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을 본존으로 모신 관음전은 대웅전 영역 뒤편 불국사에서 가장 높은 대지에 위치한 중심 전각이다.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에 걸쳐 중창한 건물로 평면은 도리통 3간, 양통 3간이다. 내부에는 4개의 기둥을 세워 전체 평면을 내외진으로 구성하였다. 이러한 평면 구성은 이미 신라 때 만들어진 것이나 조선시대에 와 옛 건물터의 기단과 초석을 그대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기둥 배열은 옛것과 같으나 공간의 이용은 조선시대 후기의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내부 기둥 중 후면의 기둥에 의지해 불단을 만들고 후불탱과 관음보살상을 봉안하였다.

[불국사 비로전 입구...]

[불국사 비로전옆 사리탑...]

[불국사 나한전...]

나한전은 소조 삼존불과 16나한을 모시고 있는 전각으로 비로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평면은 도리통 3간, 양통 3간이며, 외1출목의 주심포식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내부에는 후면 벽에 의지해 ?자형의 불단을 만들고 삼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8구씩 나누어 나한상을 모였다. 그 뒤의 벽에는 불화 3폭을 걸었다.

[불국사 밑벽싸놓은 형식이 독특하다는데.....]

[불국사 왼쪽벽의 독특한 형식의 쌓기...]

[불국사 입구 전경...]

[불국사 종각]

[토함산 가는길목에 ...]

[토함산 석굴암 일주문?....]

[석굴암 입구 ...내부는 촬영금지...]

현재 ‘석굴암 석굴’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으나 이러한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 절의 명칭은 ‘석불사(石佛寺)’였으며, 본 석굴을 따로 지칭하는 명칭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창건 당시 석불사는 사찰로서의 일정한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을 것이며 석굴은 그 중심 불전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석굴암 석굴은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해 室을 만들고 불상을 모신 금당의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전세계의 불교사원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인 형식을 지니고 있다.

한편 ‘석굴’이라는 명칭은 인도나 중국에서 볼 수 있는 자연암반을 파고 들어가 만든 굴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석굴이라는 명칭은 자칫 이 금당의 구조를 전혀 다른 구조, 즉 인도나 중국에서 볼 수 있는 석굴사원으로 오해하게 할 소지가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후기에 석굴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고 그로 인해 관습적으로 석굴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엄연히 석굴과 구분하여 부를 필요가 있고, 돌로 쌓아 室을 만든 금당이라는 점에서 ‘석실금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함이 옳은 것으로 생각한다.

[토함산 석굴암 광장벽화...]

[토함산 석굴암 광장벽화...]

[석굴암입구의 종각]

[보문단지내의 연못위 폭포]

[경주 보문단지내의 연못의 전경]

[분황사 보광전 전경...]

[분황사지 9층석탑중...일부...]

[분황사의 약수터?....]

[분황사 9층석탑 입구...]

[분황사의 석탑....]

[분황사지의 ...]

[분황사지의 목어...]

[안압지의 ....]

[천안의 각원사지붕과 같은맥의 용마루...]

[안압지의 모습...]

[경주 첨성대의 고고한...]

[경주 대능원 안의 천마총...]

[신라시대 첫 번째 김씨왕인 미추왕의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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