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가 멸망하면서 그 유민들의 행적을 나누어 보면 거란에 지배를 받지 않은 경우
1. 고려로 귀부 2. 정안국등 발해후국 형성 3. 여진족화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누어 볼 경우 여기서 도출할수 있는 사안은 모은 발해유민들의 생각이 다 동일하지 않다라는 것이죠.
고려에 귀부를 한다는 것은 그나마 고려를 발해와의 친연선에 중점을 둔 경우일것입니다.
이렇게 친고려적 행태를 하는 발해유민들도 있지만 한편으로 고려에 투쟁적인 입장을 하는 여진족으로 과거 발해국민을 형성했는 사람들은 결코 고려에 동화되려 하지 않았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보통 고려입장에서 생각하기를 혹은 현대한국인입장에서 생각하기를 고려와 발해의 민족적 문화적 친연성을 떠올리겠지만 실제는 그것이 아니었다라고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1번의 케이스에 해당되는 발해유민은 전체 발해인의 몇 퍼센트일까요? 아마도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보다는 여진족으로써 고려에 대항적인 입장을 지닌 발해유민들어 더 많을 듯 합니다.
이렇게 고려에 친연적인 입장을 가진 발해유민과 그렇지 않은 발해유민들이 존재한다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볼때 발해전체적으로 기준하면 반드시 고려와 문화적이나 민족적인 친연성이 존재한다라고 평가하기 어렵다라는 것입니다.
헌데 이 관련해서 종래 학설이지만 발해의 민족구성의 이원성을 들먹이며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구분해서 고구려인은 한국민족이라 나중에 고려에 귀부하고 말갈인은 나중에 여진족이 되었다라는 식으로 도식전재를 하는데 이 학설은 솔직히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딱히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구분한다는 것이 타당한 논리인지?
아마도 발해인을 고구려민족과 말갈계로 구분하려는 이유가 나중에 발해멸망후 고려로 흡수된 사람들과 여진족으로 금청을 건국하는 계통을 구분해서 기계적으로 한국민족 여진족 이런식으로 구획적인 선을 그어보려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발해멸망후 고려에 귀부해서 고려에 흡수되면 한국민족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고려에 흡수를 거부하면 여진족이 되는 것입니다. 원천적으로 발해국민을 고구려계민족과 여진족으로 이분법적구분을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고려입장에서도 발해를 무슨 동족이라는 식으로 민족적 친연성을 가지고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갑니다.
고려 패서호족들이 고구려계이니 발해인들과 어느정도 동질의식은 가질수 있지만 한편으로 발해를 다민족국가라는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발해인들중에서도 어느정도 고려인과 친연성을 가질만한 부류도 있슬것이고 거리가 먼 부류도 있슬것이니 발해의 아이덴디티중 필요한 부분을 흡수하겠다라는 전략으로 해석해야 할것입니다.
첫댓글 발해 유민들도 다양한 사람들이 섞인 공동체인 만큼 서로간의 생각이 부분적으로 다를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자국을 멸망시킨 거란에 대한 적대적인 시각은 발해의 대다수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다 갖고 있던 것은 분명하지요 정안국 등 후발해나 고려로 귀순하는 발해 유민들이나 반거란주의에서는 서로 동일할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발해의 전왕조 고씨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 평양을 남쪽 왕건의 고려가 보유하고 있었고 왕건의 고려도 전왕조의 국호를 차용해서 채택한 국가라 거란에게 멸망당한 발해인들의 입장에서는 왕건의 고려를 믿을만한 동족 국가로 여길수밖에 없는 법이지요
그리고 동여진은 성종때까지만 해도 고려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고 1차 거란의 침략때 거란의 침략 정보를 고려에
전해주기도 한게 동여진이었을 정도로 님이 언급한 세가지 부류의 발해 유민들은 반거란주의에서 다 동일한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왕건이 이를 의식 안할수가 없게 되죠 그리고 발해의 태자 대광현이 귀순하고 왕건이 그에게 자신의 왕족 성씨인 왕씨성을
하사하여 그를 친족의 예로 우대한 것을 보면 민족적인 친연성이 존재 안한다고 볼수가 없습니다
발해의 왕실인 대씨 일족을 비롯한 발해의 핵심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고 발해를 다민족 국가라고 보는 것도 미국과 같은 다민족 다인종 국가로 동일하게 보는 무분별한 일반화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겨질수밖에 없네요
발해의 민족 구성이 여러 계열이 있어도 기본적으로 당시 일반적인 신분제 국가의 특성상 지배계층과 피지배 계층으로 나뉠수밖에 없는 법이지요 다양성을 중시하고 혈연적 민족 차별을 금기시 하는 현대 민주 국가 같은 성격으로 발해를 보는건 금물이고 지배계층에 고구려계가 다수일수밖에 없는게 사료 근거로 확인되었고 그래서 왕건이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내린 것도 발해 왕실과 자신의 고구려 혈통과의 관계 떄문이었지요 그럼으로 왕건이 만부교 조치를 취한 것은 발해 유민들이 자국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밖에 없는 점이었고
왕건은 만부교 사건을 일으키고 훈요십조에서도 거란을 짐승 같은 야만 국가라고 적대하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으면
왕건과 발해 유민들의 관계가 혈연적 민족적 동질 같은 절대적 유대성을 띠고 있는지 알수가 있을 것입니다
후대 왕들의 외교정책의 기준이 되는 자신의 유명에 거란 배격을 완고하게 명시한것을 보면 알수가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