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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이란 어떤 절기인가? (1)
오는 11월 27일은 대림절 첫번째 주일이다. 이 말은 이날부터 4주 후에 성탄절이라는 뜻이다. 성탄절 4주간 동안의 기간을 교회는 대림절로 지켜왔다. 대림절(待臨節)이란 주님의 오심(재림)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이다. 주님이 하늘로부터 오시기에 대림절은 대강절(待降節)이 된다.
대림절은 주님이 말씀하신 바, ‘내가 속히 오시리’라는 약속을 교회가 기억하고 준비하는 시간이다. 여기서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명확하게 이해할 때 우리는 이 절기를 바르게 기념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2. 예수님은 왜 다시 오시는가?
3.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4.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믿을 때 어떤 유익이 있는가?
5. 대림절을 어떻게 기념하는 것이 좋은가?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예수님은 승천하셨다. 그리고 아버지 오른쪽 보좌에 앉아 계신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계신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다. 그분의 오른쪽 보좌에 앉으셨다는 말은 하늘과 땅의 모든 대권을 받으셨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셔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듯이 하나님 오른쪽이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시다.
그런데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예수님은 왜 다시 오시는가? 우리는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들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이야기에는 밭을 소작농들에게 맡기고 먼 나라에 간 주인이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가 있다(눅 19:11~27, 마 25:14~30). 이 이야기에서 주인이 다시 돌아오는 이유는 자기 밭을 맡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소출을 거두기 위함이다. 여기서 소출을 거두는 자는 심판하는 자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을 맡기시고 그것을 관리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시 오셔서 그 관리한 일을 어떻게 했는지 평가하신다.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일을 맡기시고 그것에 대하여 평가하시는 분이다. 그 평가는 자기 나라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불가분의 관계 안에 계신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신 분이라는 말은 이 세상과 하나님은 별도의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지극한 관심사이며 돌봄의 목적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이 세상의 관리자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활동이다. 그리고 그 심판은 이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게 될 때 나타난다. 노아 시대 때 이 땅에 죄악이 가득하게 될 때 하나님은 심판하셨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을 들이신 사건도 가나안 족속들의 죄가 충만하게 되는 때와 관련이 있다(창 15:16).
이것은 추수 때라는 말과 상통한다. 추수 때는 봄에 심어 여름을 지나면서 그 내용이 가득하게 되어 결실하는 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추수 때라는 말은 인간의 활동이 그 충분한 결과를 만들어내게 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그 날에 악한 자들은 죄악의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착하고 충성된 종들도 자신들의 수고로 열매를 거두고 있다. 그 때가 추수 때다.
추수 때라는 말은 가을걷이를 의미한다. 가을에 열매를 거둔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지 나라든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그것을 포도원 비유에서는 삼년이라고 했다. 그 삼년이 지나도록 열매가 없자 포도원 주인은 그 포도나무를 찍어내어 버리고 다른 포도나무를 심으라고 명하신다. 그때 포도원 관리자는 기회를 일년만 더 달라고 요청한다(눅 13:6~9). 유예기간을 달라는 것이다. 이것은 심판을 지연해 달라는 요청이다.
어쩌면 우리는 바로 지금 ‘심판의 유예기간’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도끼를 들고 와서 뿌리부터 잘라내 버려야 하는데 유예기간을 받은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것은 도적같이 온다는 말(마 24:43, 눅 12:39, 살전 5:2,4, 밷후 3:10, 계3:3, 16:15)과 임산부에게 해산의 날이 갑자기 임하는 것처럼 비유의 말이다(살전 5:3). 이런 상황에서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는 말씀은 나온다.
대림절은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절기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이 세상의 관리자들은 그 행위의 결과에 대한 평가를 받는다. 각 사람은 자신이 맡은 달란트에 대하여 주님 앞에서 평가를 받을 것이다. 자신의 수고로 얻은 결과물을 가지고 주인 앞에 나가야 한다. 그것이 주님이 돌아오시는 날에 종들이 할 일이다.
여기서 달란트 비유를 생각해 보자(마 25:14~30). 주인은 자기 집에서 일하는 종들을 불러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맡겼다. 그 두 종은 자신이 맡은 달란트로 장사를 하여 결과를 남겼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자기가 받은 것을 땅에 묻었다. 주인이 돌아오는 날에 그것을 다시 파서 그대로 바쳤다. 그는 주인을 두려워하였으므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 종이 한 말을 보자. ‘주인이시여, 당신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분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는 분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어쩌면 그는 하나님을 나쁜 주인이라고 생각한 것 아닐까? ‘자기는 심지도 않고 우리에게 심으라고 하시고 자기는 뿌리지도 않고 우리에게 뿌리라고 하는 구나!’ 이런 생각일까?
아니면, 이렇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하나님은 심지 않아도 거두시는 분이시니 내가 할 일이 뭐 있겠는가?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텐데. 괜히 내가 잘못 심거나 뿌려서 손실이 나면 나만 곤란해질텐데…! 그저 잘 보관했다가 바치면 될 거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믿음은 좋은 믿음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임무를 저버리는 악한 행동이다.
심고 거두는 법칙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인데 왜 하나님이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려 하시겠는가? 이는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만든 결과다. 우리는 달란트 비유에서 게으르고 악한 종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의 문제는 게으르고 악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이해한 까닭이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그로 하여금 게으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악한 종으로 만들었다.
여기서 달란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달란트는 종들이 맡아서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 화폐를 말한다. 화폐는 자산이며 그 자산은 자신이 맡아 관리해야 하는 기업이다. 그러므로 달란트는 자기에게 줄로 재어준 기업(시 16:6)과 같은 것으로서 그것은 자신의 본분이며 임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우리가 사는 공동체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 가정이며 교회이며 그리고 마을과 국가공동체다.
그러므로 달란트는 우리가 맡은 일로서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 우리가 해야 할 본분이나 사명으로 종합된다. 공동체는 작은 가정에서부터 국가와 세계로 확장된다. 그리고 그 모든 영역은 다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곳이며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달란트는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우리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임무라고 할 수 있다. 그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사람은 갑절로 이윤을 남긴 착하고 충성된 종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임무란 무엇일까? 그것은 공동체의 안전과 번영을 위한 각자의 책임을 말한다. 금년 할로윈 축제 때 서울 이태원에서 군중이 몰려 압사사고로 150명이 넘는 청년들이 죽었다. 이 참사가 발생한 원인은 우선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이 직접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알고도 미리 대처하지 못한 정부에 대하여 국정조사가 있을 예정이다. 유가족들의 안타까움은 슬픔을 넘어 분노로 치닫고 있다.
공동체에서 각 구성원들의 책임이 중요하다. 특히 구체적인 사안에 대하여 의무를 진 사람들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공동체는 바로 그들의 성실한 임무수행으로 유지된다. 달란트 비유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 대하여 주인이 칭찬을 내리고, 악하고 게으른 종에 대하여 주인이 책망과 벌을 내리는 것은 그만큼 공동체 안에서 책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서 한 달란트 맡은 종이 보인 행동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자. 그는 주인을 오해하여 자신의 달란트를 땅에 묻었다. 그는 주인이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도 않은 데서 모으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말은 주인이 나쁜 사람이라는 의미이거나 아니면 주인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하는 분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주인의 면전에서 주인이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주인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하시는 분이니 내가 다른 것을 덧붙이거나 도울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 도리어 섣불리 무언가를 하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본전이나 잘 지키고 있어도 잘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닐까?
주인에 대한 종의 평가는 ‘당신은 엄한 사람이다’는 것이다(마 25:24). 여기서 ‘엄한 사람’은 ‘굳은 사람’(a hare man)으로도 번역된다. 헬라어로 ‘스클레로스’(skle:ros)라고 하는 굳은(hard)이라는 형용사는 요한복음에서는 주님의 말씀이 어렵다(hard)는 군중들의 대답에서 나온다(요 6:60). 굳은 사람이란 마치 딱딱한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듯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의미다. 사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그가 너무 완벽하거나 너무 까다롭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두려워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은 결혼식의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이야기와 달란트를 맡은 종들의 이야기, 그리고 양과 염소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세 가지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다. 첫째는,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삶이며, 둘째는, 하나님을 오해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며, 마지막은, 우리 곁에 있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삶이라는 교훈이다.
대림절에 읽고 묵상하면 좋을 성경말씀이 마태복음 25장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절기에 이 세 가지 교훈은 우리에게 각성을 촉구한다. 그 중에서 달란트를 맡은 종들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오해하여 가장 안전한 길을 택했다고 자부하지만 실은 게으르고 악한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씀은 흔히 우리가 가진 재능과 물질과 시간을 잘 관리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설명된다. 그러나 단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는 가르침으로 일반화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는 것 아닐까?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느냐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하나님을 굳은 분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보이며 그 결과가 어떤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을 굳은 분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을 굳은 분으로 여기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두 가지인데, 그 하나는 까다로운 분이라는 의미로서 괜히 잘못하다가 책망을 받지 않기 위하여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두번째는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완벽하시므로 그 모든 일을 홀로 처리하시는 분이시라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소극주의적 행동을 낳기 쉽다.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주인을 두려워해서였을까, 아니면 주인이 다 알아서 하실 것이므로 자신이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 종은 주인 앞에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았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목적도 자신의 책임을 저버리는 삶에 대한 경고를 하시려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대림절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준비한다. 그리고 달란트를 맡은 종들의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하나님께 맡겨드린다는 미명으로 우리의 책임을 외면하는 일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일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니 우리는 묵묵히 기다리며 기도만 하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까?
가장 먼저 생각 속에 떠오르는 것은 정교분리라는 말에 매여 교회가 정치에 대하여 책임 있는 자세를 갖추지 못한 점이다. 교회에는 정치 영역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미덕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묵묵히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이 나돈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하무인식의 태도를 가지게 한다. 그 결과 공동체를 위태롭게 하는 일에 교회가 동참하게 된다. 최근에 10.29 참사로 자녀를 잃은 유가족 중에 어떤 이가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가장 힘든 건 나라를 이끄는 분들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생각에 떠오르는 것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책임의식의 결여다. 이것은 교단이나 교회, 또는 지역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맡은 사람들이 다 알아서 잘 하겠지’ 라는 생각이나 ‘내가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할 거야’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괜히 나섰다가 나만 곤란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이 가진 생각과 매우 유사하지 않는가?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온다. 이 비유가 들려주는 교훈의 핵심은 무엇인가? 심판날에 하나님이 둘로 사람들을 나누실 것인데 그 기준은 약자와 병자, 그리고 갇힌 자를 돌아보았는가 여부가 될 것이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생을 위한 노력이 그처럼 중요하다는 것 아닌가? 하물며 공동체의 선과 유익을 위하여 책임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은 얼마나 더 중요한 일인가?
책임 있는 한 행동으로 수많은 사람을 건진 예는 얼마든지 있다. 또한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이 간과한 한 행동으로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은 예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할 때 공공선을 위하여 책임 있는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제 주님이 다시 오시는 목적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재림의 목적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서는 신랑과 더불어 혼인잔치가 벌어지고, 충성된 종들에게 주인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특권이 주어진다. 주인이 돌아오면 잔치가 벌어진다. 그 잔치는 주인과 종들이 함께 즐거워하는 시간이다. 그들이 즐거워하는 것은 그들의 집과 포도원이 풍성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충만한 회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이유는 양과 염소를 나누시기 위함이다. 즉, 심판을 위하여 오신다. 그러나 그 심판이 끝난 후에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신다. 그리고 그 잔치는 하나님 나라를 가장 잘 나타내는 이미지다. 만인이 더불어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회복되는 세상이다.
대림절을 맞이하여 달란트를 맡은 종들의 이야기를 묵상했다. 그 중에서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이 하나님을 오해하여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미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나 바람에는 오해가 없을까 생각해 본다. 하나님을 굳은 분이라고 오해하면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완성하실 하나님 나라가 천상의 세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속한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일에 진지하게 나서기는 어려울 것이다. 누가 수몰예정지구에 있는 집을 꾸미려고 하겠는가!
금년도 대림절에는 이런 질문을 생각해 보자:
1. 예수님은 왜 다시 오시는가?
2.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어떤 일을 하실까?
3.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될까?
4. 나는 다시 오실 예수님께 칭찬을 듣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5. 재림 이야기가 인생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어떤 도전을 주는가?
마지막 질문에 대하여는 다음에 좀더 생각해 볼 예정이다.
<끝>.
대림절이란 무슨 절기인가? (2)
재림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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