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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급제한 사람을 축하하는 자리에 선배를 초대할 적에는 반드시
이웃이나 친분이 두터운 사람을 고르는데, 많아도 십여 명을 넘지 않는다. 혼인할 때의 위요(圍繞)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조정 관원이 부족하면
종친도 관대 차림으로 식장에 간다. 요즘은 풍속이 갑자기 변해서 선배와 위요를 기어이 많이 초대하려 한다. 많게는 칠팔십 명이고,
적어도 이삼십 명을 밑돌지 않는다. 많이 초대하지 않으면 차별한다고 손가락질하고, 때로는 나무라기도 한다. 그러므로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억지로
초대하니, 비단 복잡하여 짜증스러울 뿐만 아니라 음식 장만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가 너무 어렵다. 권세가에는 초대하지 않아도 많이 오니, 더욱
이상한 일이다. 대신(大臣)의 경우, 옛날에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거리낌 없이 초대하고, 사양하지
않고 찾아간다. 술에 취해 떠들다가 위아래도 없이 뒤섞이는 결과를 면하지 못하니 참으로 사소한 일이 아니다. 어찌하겠는가.
新及第慶席邀先生, 必擇隣族或相知分厚人, 多不過十許員, 婚姻圍繞亦然.
故朝士不足, 則宗親亦具冠帶, 而赴婚席焉. 近來時習頓變, 先生圍繞, 必務多請, 多至七八十, 少不下二三十. 若或不多請, 則便目以分物我, 時或加誚.
故雖知其不可, 而作意强請, 非但紛雜可厭, 器具酒饌, 人極難當. 若是勢焰之家, 則不請者亦多往, 尤可異也. 昔則大臣非極親厚處則不往, 而今則請之無憚,
而往亦不辭, 醉謔之間, 未免混無等級, 實非細事, 奈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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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국형(尹國馨,
1543~1611), 『갑진만록(甲辰漫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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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혼례를 올릴 적에 친척과 친구를 초대하여 주위에 둘러
세우고 식을 거행하였는데, 이것을 위요(圍繞)라 한다.(『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 권8) 위요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결혼 풍습으로, 유교적
예법에는 없는 것이다.
원래 유교적 예법에 따르면 신랑은 신부 집으로 가서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식을 올려야 한다. 이것이 친영(親迎)이다. 유학자들은 조선 초기부터 친영 제도를 보급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데릴사위제의 유습 때문인지 민간에서는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식을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신랑이 식을 올리기 위해 신부 집으로 갈 때 함께 데리고 가는 친척과 친구가 바로 위요이다. 의빈(儀賓) 또는 요객(繞客)이라고도
한다. 쉽게 말해 신랑의 들러리, 또는 하객이다.
옛날 결혼식에는 친척도 오고 친구도 오고 동네 사람들도
오고 작년에 왔던 각설이도 왔을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정식으로 초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초대하더라도 절친한 사이가 아니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임란을 전후하여 분위기가 바뀌었다. 부르기만 하면 다 오고, 심지어 초대하지 않으면 차별하냐고 화를 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결혼식에 부르면 부르는대로 불만이고, 안 부르면 안 부르는대로 불만이다. 예나 지금이나 하객을 초대하는 것은 곤란한 문제이다.
더 곤란한 것은 하객을 접대하는 데 드는 비용이다.
윤국형은 과거에 이삼십 명에 불과했던 신랑 측 하객이 당시에 오면 칠팔십 명으로 늘어났다고 하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신부 측 하객이 비슷한
규모라고 가정한다면, 당시 결혼식 하객의 총인원 수는 아무리 많아도 백오십 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결혼식의 하객 수가 평균 이삼백
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과거의 결혼식은 모두 ‘작은 결혼식’이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이것도 많아서 하객들을 대접할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것이 윤국형의 증언이다.
지금은 하객들의 축의금으로 그 비용을 충당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축의금을 얼마나 냈을까? 아니, 축의금이라는 것이 과연 있기나 했을까? 큰일을 치를 적마다 주위 사람들이 한푼 두푼 모아 보태주는
것이 우리 고유의 풍습이었으니 축의금 비슷한 것이 있었을 법도 한데, 그러한 기록은 극히 드물다.
그다지 오래된 것 같지는 않지만, 혼부조기(婚扶助記)라는
문서가 있기는 하다. 결혼식 때 받은 돈과 물건을 기록한 문서이다. 그런데 여기 보면 돈을 낸 사람은 별로 없다. 떡 한 그릇, 술 한 병,
생선 몇 마리, 거의 다 음식이다. 우리 전통 혼인 문화에서 축의금을 낸다는 개념은 희박하였고, 손님 대접할 음식을 나누어 마련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던 것이다.
반면 장례식에서 부조금을 내는 문화는 일반적이었던 듯하다.
웬만한 고택(古宅)의 문서 더미에서는 장례식 부조금을 낸 사람과 액수를 기록한 문서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의 장례식장 방명록과 비슷하다.
부조는 물건으로 내는 경우도 있지만, 돈으로 내는 경우도 많았다.
결혼식 축의금은 내지 않고, 장례식 부조금만 냈던 이유는
무엇일까.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훨씬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신을 염습하고 운구하며 장지를 마련하는 데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빌려 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수의(壽衣)를 빌려 입힐 수는 없지 않은가. 반면 결혼식은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 지금처럼 ‘스드메’가 필수인
것도 아니고, 기둥뿌리를 뽑아서 거하게 혼수를 마련하는 풍습도 별로 오래된 것이 아니다. 필요한 물건은 전부 빌리면 되고, 손님 접대나 신경
쓰면 그만이다. 친지와 이웃들은 음식을 해 오거나 일손을 보탬으로써 손님 접대를 도왔다.
이러한 풍습은 산업화에 따라 점차 사라졌다. 자기 먹을
음식도 해 먹기 귀찮아서 사다 먹는 판국에 남의 결혼식 음식을 해 주기를 바라는가. 결혼식에 오가는 몇 시간도 아까운데 온종일 있으면서 일을
도와줄 리가 있겠는가. 게다가 지금은 장례식보다 결혼식에 훨씬 많은 비용이 든다. 돈으로 주고받는 것이 합리적이기는 하다.
축의금을 낼 때는 홀수 단위로 3, 5, 10만 원에
맞추어 낸다. 축의금을 내는 것이 전통이 아니니, 홀수로 축의금을 내는 것이 전통일 리 없다. 일본에서는 비교적 오래된 풍습이라고 하는데,
『주역(周易)』을 근거로 내세우는 모양이지만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일본에서 유래한 풍습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축의금은 글자 그대로 결혼식[儀]을 축하[祝]하는
돈[金]이다. 지금은 결혼식에 가지 않아도 축의금은 내야 하고, 심지어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람도 축의금은 달라고 하는 모양이다. 강제
징수나 다름없다. 결혼을 축하한다는 본래의 의미는 사라진 지 오래다. 이미 관례로 굳어졌으니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요새는 하객도
적게 부르고 비용도 아끼는 추세이다. 축의금 문화에도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돈이 아니어도 축하할 방법은 많다. 손쉽게 봉투 하나 던져주는
것보다 축하의 의미가 더 클 것이다. |
글쓴이장유승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주요
저·역서
- 『현고기』,
수원화성박물관, 2016
- 『일일공부』,
민음사, 2014(공저)
- 『동아시아의
문헌교류 - 16~18세기 한중일 서적의 전파와 수용』, 소명출판, 2014(공저)
-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 글항아리, 201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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