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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0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제12주)
요셉의 지혜-거리두기
창45:1~15; 롬11:1~2상, 29~32; 마15:(10~20), 21~28
오늘 교회력 제1독서의 말씀은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오늘 말씀은 자기 이복형들에게 이집트로 팔려갔던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자신을 팔았던 형들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극적인 장면입니다. 이때 요셉이 형들에게 했던 말은 성경의 아주 유명한 구절 중의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십시오. 내가, 형님들이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도 하지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세상에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런 너그러움, 이런 용서와 화해, 감동적인 장면이지요. 여러분은 요셉의 이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참 좋은 말씀이지만 나와는 너무 먼 말씀이라고 생각이 드시나요? 인생역전이 확인되는 순간의 승자의 여유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나에게도 용서하며 살라는 도덕적인 교훈으로 다가오는가요?
저는 오늘 요셉의 이 말은, 마침내 큰 힘을 갖게 된 요셉이 형들에게 너그러움과 용서를 보여주는 반전의 장면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요약해 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꿈쟁이 요셉이 마침내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룬 반전의 이야기도 아니고, 형제를 용서하라는 도덕적인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이끄심”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을 허투루 보지 않고, 그것을 일상의 삶 가운데서 진짜 자신의 삶으로 보여준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우선적으로 “요셉의 영웅적인 이야기”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지혜”,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오늘 요셉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8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자신이 한 이 말을 진짜 믿었고, 믿기 이전에 알았던 사람이었지요. 진짜 알면, 믿고 말고 할 것이 없지 않나요? 나중에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요셉의 형들은 혹시 요셉이 자신을 보복할까봐 두려워, 자신들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청했을 때, 요셉이 한 말이 뭐였습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을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창50:19~20)
문제는 요셉이 어떻게 이런 삶의 태도를 갖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지요. 사실, 요셉은 하나의 역사적 인물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은 사람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관상적 삶을 이룬 인물의 표상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이나 야곱도 하나의 살아있는 역사적 인물이라기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했던 대표적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옛 삶을 버리고 영적 여정에 오른 인물의 표상이라면, 야곱은 많은 투쟁을 하면서 모나고 거친 자신의 성정을 정화해 간 사람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이들 이야기에 어떤 역사적 근거는 있겠지만, 그보다는 오랜 세월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새겼던 “믿음의 사람”, 또 “투쟁하는 사람”의 표상이 아브라함이나 야곱으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은 사람,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에 깨어난 사람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시 돌아와서, 요셉은 어떻게 이런 삶의 태도를 갖게 되었을까요? 다시 말해, 불확실하고 불안한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 섭리, 돌보심을 끝까지 믿으며, 계속된 불운한 운명 앞에서 “희망”을 놓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제가 요셉을 이렇게 말하면, 사실 우리는 요셉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기가 힘이 듭니다. 제가 앞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은 사람, 자신의 참된 정체성에 깨어난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면, 요셉은 우리와는 멀리 있는 사람처럼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요셉의 일상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요셉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만, 요셉이 주어진 환경에 보인 반응은 좀 특별히 보이는데, 우리는 이것을 좀더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읽은 본문인데, 어린시절 어머니를 잃은 요셉은 아버지의 편애를 받고 자랐습니다. 그로인해 그는 10명이나 되는 형들의 미움을 받고 자랐습니다. 게다가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을만도 했는데, 형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는 일도 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형들의 미움은 극도에 차서 그는 이스마엘 대상들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비극의 시작이자, 인생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집트 파라오의 경호대장 보디발의 종으로 팔렸는데, 그때 요셉 이야기의 해설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셔서, 앞 일이 잘 열리도록 그를 돌보셨다.”(39:2) 또 후에 그가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에 걸려 감옥에 갇혔을 때도, 해설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된 것은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며, 주님께서 요셉을 돌보셔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다 잘되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사실, 요셉 이야기 속에서 요셉과 하나님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요셉 이야기 속에는,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이야기처럼,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거나 지시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은 이렇게 배경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 주님께서 요셉을 돌보셔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다 잘되게 해주셨다”고 나오는 말은, 우리가 주목해 볼 만한 말씀입니다.
자, 요셉과 하나님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말이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아버지 야곱처럼 무조건 요셉을 편애한 것일까요? 요셉은 실제로 어떻게 한 것일까요?
요셉 이야기를 묵상하다 보면,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셔서, 앞 일이 잘 열리도록 그를 돌보셨다.”, “그렇게 된 것은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며, 주님께서 요셉을 돌보셔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다 잘되게 해주셨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요셉의 이야기를 읽은 열쇠입니다. 요셉이야기의 나레이터는 그가 잘 될 때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위기를 맞았을 때 이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저는 이 말 속에서 요셉의 매우 중요한 태도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초연함”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초연함”이란 자신을 괴롭히는 환경에서 물러나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뻔한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요셉은 거리를 두는 연습을 한 것입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환경, 혹은 자신을 유혹하는 환경과 거리를 두는 힘을 길렀습니다. 그런 “대상들”에 매이지 않으려고, 대상이 아닌, 자신의 바탕을 바라보는 연습을 한 것입니다. 그도 우리처럼 수많은 집착과 혐오의 대상들이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끌어당기는 것의 표상입니다. 종으로 팔려감, 또 감옥은 요셉이 거부하는 대표적인 표상이었겠지요. 그런데 그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그것도 “날마다 끈질기게” 요구해오는 요청에 끊임없이 노출되었지만, 성경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그 여인과 함께 침실로 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아예 그 여인과 함께 있지도 않았다.”(창39:10) 엄청나게 끌어당기는 것들과, 집착하게 하는 것들과 거리를 둔 것입니다.
또한 그가 싫어하는, 혐오하는 것들에도 그는 거리를 두는 연습, 초연해지는 연습을 하지요. 그는 보디발의 집에 팔려와 그곳에서 눈물과 한숨으로 날을 새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이 할 일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보디발의 눈에 들지요.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는 복수심에 불타서 날을 새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하다가 모범수가 되지요.
저는 이것이 요셉이 본디 그런 사람이라서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셉이 원래 천성이 그런 사람이어서 유혹에 단 한번도 넘어가지 않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단 한번도 불평하지 않았다고 보기 힘듭니다. 저는 이것은 요셉이 끌어당기는 혹은 혐오하는 대상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연습을 통해서 이루어진 삶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위기가 있으면 있을수록 그에게는 연습하는 기회가 더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상들에서 떠나 하나님을 향하는 것, 이것을, 성경은 거꾸로 말해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다”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대상들에서 거리를 두고 주님을 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삶은 거리두기의 연습입니다. 다시 말해 초연함의 연습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진정 자유, 내적 자유를 가져다 줍니다. 특정한 대상들에 마구 끌려 다녀서야,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자유란 거리두기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은 바로 이 세상의 수많은 대상들과 거리를 두고 자유로워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또 다른 대상이 아닙니다. 그분은 대상이 아닌 바탕입니다. 대상이 아닌 우리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은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자유로워진다는 말입니다.
요셉이 이렇게 매사에 거리를 두고 초연해졌을 때, 그는 이 모든 일이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는 것임을 알았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판 형제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집착과 혐오의 연속입니다. 우리의 욕구와 욕망 자체가 집착과 혐오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를 어쩔 수없이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욕구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하겠지만(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허구에서 시작하겠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욕구에 말려드는 것이 아니라, 틈을 내고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삶의 중요한 문제입니다.
칼릴 지브란의 “결혼에 대하여”라는 글을 보면, 거리를 두는 것이 어떤 뜻인지를 너무나 절절히 표현합니다. 사람이 가장 친밀한 사이가 되는 것의 상징인 결혼에서조차 거리가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거리를 두는 것, 우리의 상처들과 거리를 두고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과 거리를 두고, 심지어 우리의 자녀들과 거리를 두는 것, 이것이야 말로 우리 삶에서 끊임없이 연습해야 할 가장 큰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마지막은 그 모든 것을 놓아두고 영원히 거리를 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 여정은 살아있을 때 바로 그것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던 말씀,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도 바로 이 연습입니다. 거세게 일어나는 파도와 거리를 두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었고, 수없이 물에 빠지겠지만, 다시 파도와 거리를 두고, 주님을 바라보고...
여러분, 모든 일에 틈을 두십시오.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대상에 틈을 두십시오. 잠시 멈추고 바라보십시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말씀을 묵상할 수 있고, 향심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매일매일 순간순간에 내가 하는 일들을 알아차리고 틈을 벌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일상은 바로 그 일을 연습하는 자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 “나다”라는 분이 들어서게 됩니다. 사실, “나다”는 내가 대상에서 떨어져 거리를 둘 때 우리 안에서 그분이 들어와 사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중심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나다”임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틈에서 일하는 분은 “나다”라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늘 부끄럽습니다. 거리를 두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말려들 때가 하루에도 수없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감정에도 그렇고, 집착과 혐오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습니다. 다시 알아차리고 돌아서는 일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요셉의 특징을 또 하나보면, 그가 울었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는 겁니다. 43:30, 요셉은 자기 친동생을 보고 치밀어 오르는 마음을 누르지 못해, 급히 다른 방으로 가서 한참을 울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형제에게 자기의 신원을 밝히고 나서 한참 동안 울었다고 했지요? 그 울음이 어찌나 컸던지 이집트 사람들도 다 듣고 바로의 궁에도 들렸다고 합니다(45:2). 또한 15절에 베냐민을 만나서, 목을 얼싸안고 울고, 형제들과도 부등켜안고 울었다고 했지요. 46:29절에 아버지 야곱을 만나서는 “목을 껴안고 한참 울다가는, 다시 꼭 껴안았다.” 또한 50장에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형들이 자신에게 용서를 빈다는 말을 전해듣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거리두기는 감정과 마음을 도외시한 기계적인 거리두기가 아닙니다. 요셉의 마음은 메말라 있거나 딱딱해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울음은 그의 열린 마음을 표현입니다. 따라서 그의 거리두기는 언제나 유동적이고 흔들리는 거리두기였을 겁니다. 우리의 거리두기도 이렇게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냉정하고 기계적으로 하는 거리두기, 초연함이 아닙니다. 거기엔 눈물이 있고, 아픔도 있고, 서성임도 있고, 우유부단함도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요셉의 이 울음은 거리두기를 하는 중요한 방법 중에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감정이 꽉 차있을 땐 거리를 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울음을 터트리고 압력을 빼고 형제들을 만납니다. 이것은 매사에 요셉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오늘 자세하게 살펴보지는 못하지만, 복음서의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는 자신의 욕구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우리가 이 말씀을 잘 묵상해보면, 오히려 가나안 여인이 자신의 욕구와 대상들에서 눈을 돌려 예수님께 집중하는 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의 함정에 빠지지도 않고(“나는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을 위해 왔다”, “자녀의 빵을 집어 개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자신의 초점에 집중하고 있지요. 이런 면에서 가나안 여인은 단순하고 담백합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본 것처럼, 베드로가 풍랑이라는 위협의 대상에 말려들었을 때는 그는 물 속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 다시 말하면 멈추어서서 대상에서 떨어져 중심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풍랑 속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큰 파도가 넘실거릴 때, 거기서 잠시 물러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대상과 거리를 두는 연습을 하십시오. 우리는 번번히 물속에 빠질 수밖에 없겠지만, 그때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주님께 향하면서, 풍랑 속을 걷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리를 벌린 그 틈새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