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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24:1~17 타작마당의 풍성함은 어디로? 2024. 6. 16.
일상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주어진 일상이 얼마나 행복하고 좋습니까? 이스라엘의 일상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일상이 늘 기대와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상의 은혜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타작마당이었습니다. 타작마당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행복과 기쁨의 장소이고 잔치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보리와 맥을 추수하면서 그 단을 타작마당에 널고 말리고 거기서 타작을 합니다. 그 기간이 49일 동안인데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타작과 건조로 열심을 다하는 기대되는 곳이 타작마당입니다. 타작을 할 때는 타작마당에서 기거를 합니다. 모든 잔치도 타작마당에서 합니다. 모든 사람들도 모두 타작마당에 있습니다. 주인과 종이 함께하는 곳이고 함께 즐거움과 기대를 나누는 곳이 타작마당입니다. 룻과 보아스도 타작마당에서 만났습니다. 생의 미래가 타작마당에서 결정되기도 했습니다. 삶과 행복과 은혜가 상존하는 곳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혜를 생각하는 곳이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더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드리게 되는 곳이 타작마당입니다. 여기서 칠칠절이 나오고 오순절이 등장하게 됩니다.
모두 다 꽃이야 라는 류형선의 시가 있습니다. 산에 피어도 꽃이고, 들에 피어도 꽃이고, 길가에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아무데나 피어도, 생긴 대로 피어도, 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봄에 피어도 꽃이고, 여름에 피어도 꽃이고, 몰래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아무데나 피어도, 생긴 대로 피어도, 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모두 다 꽃입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 있어도 소망을 버리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이 것이 타작마당에 대한 기대이고 다 같이 행복한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어떻습니까요?
여러분, 앞장 선 한 사람이 중요 합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요? 지도자 한 사람만 잘 만나도 국민이 잘 편안히 살아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국가도 마찬가지이고, 가정도 마찬가지이고, 사업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지도자 한 사람이 잘못하면 고생하지 않아도 될 일에서 죽을 고생을 합니다. 쉽게 가야할 길에서 방황하며 고통 받는 일이 생깁니다. 기대되는 곳이 악몽의 장소로 변합니다. 기대와 꿈을 갖게 되는 타작마당이 아니라, 악몽의 장소가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어떻게 서 있느냐가 매우 중요 합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다윗은 매우 중요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스스로 잘못을 합니다. 마지막 길에서 이상한 일을 합니다. 그 결과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백성들이 죽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기 개인의 고통은 개인의 일이기에 참을 수 있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 국민이 아픔을 겪으면 대개의 많은 사람들은 포기를 합니다. 가족이 아픔을 겪으면 그 아픔을 중단 하려고 자기의 꿈을 접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소망을 접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소망을 갖습니다. 다윗은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서 어떤 고통을 받아도 소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다윗 왕 말년의 어느 날, 다윗은 자신의 왕국과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고 싶어 요압 장군에게 인구조사를 시켰습니다. 구약시대에 인구조사는 싸울 수 있는 군사의 수를 조사하는 것으로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려는 불 신앙적 이고, 교만한 태도로 여겼습니다. 9절에 다윗은 인구조사를 강행시켰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의 군사 수가 80만 명이고, 유다의 군사 수가 50만 명으로, 도합 130만 명이라는 보고입니다. 그 보고를 듣자 다윗에게 기쁨이 찾아왔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자책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후회를 했습니다.
여러분, 제임스 윌리암은 말하기를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며, 습관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식의 변화와 함께 계속된 실천이 삶의 다른 스타일이 되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생각이 행동을 이끌어 주고, 그 행동을 반복하면 습관이 되는데 삶의 습관이 삶의 변화를 만들어준다는 의미입니다. 고정적이고 결정된 삶의 질도 변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무슨 생각이어야 하는가? 빌4:6-7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은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예수 안에 있는 마음과 생각입니다. 여러분, 예나 지금이나 염려라는 것이 찾아옵니다. 육체적인 염려와 정신적인 염려, 그리고 영적인 염려와 이런 저런 염려가 모두에게 다 있습니다. 그럴 때에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도는 일상적 패턴의 아룀이라면 간구는 나의 삶에 사건과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개입을 간청하는 일종의 탄원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권면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하였을까요? 여러분, 마음과 생각은 때때로 사실이 아닐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생각은 지극히 주관적입니다. 그러나 사실의 세계는 좀 더 객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내려놓고 기도할 때에 사실을 확보하게 됩니다. 진리 되신 주님께서 사실에 개입하시든지 확보한 사실을 가지고 진리 되신 주님께 가게 하시든지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마음과 생각에 갇혀있으면 사실로 나아가는 길이 닫히게 되고, 진리의 길이 열려있지만 진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구약은 기억하라는 말씀이 주로 등장을 하고, 신약은 기도를 말씀합니다. 왜요? 차이와 반복의 의미를 깊이 새기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다윗의 모습이 평소와는 전혀 다릅니다. 공포에 질려서 부들부들 떱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사흘 만에 무려 7만 명이나 되는 백성이 전염병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인구조사를 한 것이 하나님께 그렇게 잘못된 일인지 몰랐습니다. 이런 재앙이 닥칠 줄은 몰랐습니다. 잘못이 있으면 본인이나 본인 가족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지 왜 무고한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지를 이해 할 수 없었지만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가 없었습니다. 통곡소리는 더 커지고, 그 광경은 참담했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다윗은 갓 선지자의 인도로 어느 시골 촌부의 집으로 옵니다. 신분과 격이 다른 두 사람이 제사장 앞에 섰습니다. 한 사람은 다윗이고, 또 한 사람은 평범한 아라우나 입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아라우나가 곡식을 타작하는 타작마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잊을 수 없는 장소가 됩니다. 그러면 타작마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앞으로 무엇을 하는 곳이 되나요?
1.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healing과 회복의 장소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곳에서 실수까지도 최선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중단되고 사망의 늪으로 들어가던 고통이 중단되었기 때문입니다. 70000명이 죽었습니다. 어떻게 중단이 되었습니까? 다윗의 회개하는 것으로 평안이 찾아 왔습니다. 평상시의 다윗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힐링을 받고 회복이 되고 다시 세움을 입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큰 실수와 허물과 잘못이었음에도 힐링의 근거가 되고 회복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롬5;21절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합니다. 죄보다 은혜가 중심입니다. 은혜에 능력이 더 넘치기 때문에 소망과 위로가 굅니다. 사실 인구조사를 한 것은 실수이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나라의 인구조사를 한 것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출30:12.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조사할 때에 조사받은 각 사람은 그들을 계수할 때에 자기의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것을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단순히 한 나라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 백성 하나하나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속전, 목숨 값을 지불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모세 때의 사회법이니까 이미 그 일은 완료된 일이고, 그 효력은 자손들에게 전승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셀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고, 만약 사람이 그 수를 계수한다면 월권이고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를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하 요압이 다윗의 인구 조사를 말렸습니다. 24;3절 요압 장군이 말하기를,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숫자라는 것은 얼마든지 늘이고 줄일 수 있는 문제인데, 왜 그 숫자에 연연해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인구조사를 하십니까?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이 하실 수 있는 분 아니십니까? 사2;22절.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사람들이 몇 년을 살겠다고 다짐을 해도 그 것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언제 머리 수 계산해서 무엇을 했느냐 그 말이지요. 그런데도 다윗은 인구조사를 강행합니다. 약 열 달 만에 그 일을 마치자 이스라엘에 무시무시한 재앙이 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다윗의 고집과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통일이 되고, 국난도 없고, 문제들이 대충 해결이 되니까 긴장이 풀렸습니다. 도대체 내가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이 얼마인지? 각 도시와 마을들은 어떻게 되는지? 당장 이용 가능한 군사력은 얼마인지를 조사해야겠구나. 여러분, 사람 속에 긴장이 풀리고 교만이 들어가면 그때는 그 사람의 고집을 꺽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잘못 됐다고 깨달은 순간, 이미 재앙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으로서 잘못한 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했습니다. 회개함으로써 용서는 받았지만, 그러나 허물의 결과는 자기에게 돌아갔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갓 선지자의 의지로 갓 선지자와 함께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아라우나의 타작마당까지 왔습니다. 거기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에야 하나님의 징계는 그쳤습니다. 70000명으로 마감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리더쉽에 큰 흠집이 났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역대하 3:1에,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 성전 터가 어디였냐 하면,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여기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 은 바로 오늘 본문의 아라우나입니다. 그리고 오르난의 타작마당이란 다름 아닌 오늘 다윗과 아라우나가 밟고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형제가 죽임을 당한 아픔의 장소이고 다윗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의 장소이었습니다. 그러나 실패의 장소에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장소는 아픔이 중단된 은혜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 터가 되었습니다. 실패의 장소는 하나님이 영광을 보이시는 임재의 장소가 되고, 회복의 장소로 바뀌었습니다. 시작은 다윗의 허물과 실수로 시작되었지만 그 결말은 이스라엘의 축복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실수하고 넘어지셨습니까? 하찮게 생각하고, 기억하지 않은 생각 때문에 삶의 고통이 되었습니까? 실패의 장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가 되며, 바로 축복이 시작되는 장소가 됩니다. 가장 큰 실패의 장소가 가장 거룩한 장소가 됩니다. 여러분에게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실망하고 시험 드는 곳입니까? 위로 받고 용기를 얻으려고 에배를 드리는 교회에서 오히려 실망과 좌절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왜 그런가요? 교회에서 우리는 우리의 실존을 알게 됩니다. 가리고 숨겼던 상처들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 상처들끼리 서로 부딪기니까 더 아프고 더 짜증납니다. 허물과 연약한 사람들끼리 함께 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만 이 모든 것은 치유의 과정입니다. 회복의 과정이고 다시 굳건하게 세움을 입는 과정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그럴 듯하게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인지 알잖아요? 아는 문제를 말씀과 은혜로, 교제로 조금씩이나마 고침 받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고쳐주지 않습니까? 약간의 갈등과 혼돈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건강을 위한 홍역이지 병 자체는 아닙니다. 시시때때로 넘어지고, 실수하고 실패합니다. 후회를 하고 회개도 합니다. 여러분! 이 땅을 살아가면서 실패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쓰임을 받은 위인들도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고 그 실패를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니고 실패한 그 자리, 넘어졌던 그자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가장 큰 실패의 장소가 가장 큰 영광의 장소가 된 곳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입니다. 속담에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뺨을 맞았으면 그 상대에게 하소연해야지 왜 다른 곳에 가서 한을 풉니까? 실패한 장소가 힐링의 장소가 되고 다시 일어섬의 장소가 됩니다. 쓰러진 장소가 승리의 장소가 됩니다. 여러분, 엘리야도 로뎀나무 아래서 힐링을 받고 회복이 되고 다시 세움을 입고 호렙산을 향하여 갑니다. 하나님은 오늘 다윗을 회복의 자리로 인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패하면 그 자리에서 일어서야 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타작마당에서 실수하고 넘어지고 실패를 했더라도 엘리야처럼 다윗처럼 다시 회복과 승리와 일어섬의 자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새롭게 세워지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한 장소가 되고 거룩한 장소가 됩니다. 무명과 조연 같았던 아라우나를 주연으로 들어 쓰시는 장소가 됩니다.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필드에서 뛰는 리더가 됩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 횟수나 위치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18절 이하 여덟 절 가운데 다윗의 이름은 네 번만 나오는데 비하여, 아라우나의 이름은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아라우나에게 비중이 더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만큼은 그가 주인공입니다. 그러면 이 아라우나라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사람은 여부스 사람입니다. 여부스 족속은 이스라엘 원주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종으로서, 주로 물을 긷는 일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역대 상 21장에도 똑같이 나오는데, 아라우나가 밀을 타작하다가 천사를 보고 네 아들과 함께 숨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만큼 성격도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의 내용에서 아라우나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아들 넷을 데리고 농사짓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집에 왕과 그 신하들이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상당히 두려워하면서 왕에게 자기를 찾아 온 이유를 묻습니다. 다윗도 갓 선지자가 명령한 대로 그 집을 찾아 왔습니다. 자기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둘 사이에는 제사를 둘러싸고 몇 토막의 대화가 진행됩니다. 다윗은 지시대로 그 집에서 제사를 드려야 했고, 그런 의도를 알게 된 아라우나는 그 일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아라우나가 타작마당을 번제 단으로 내 놓는데 진심으로 드립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말하기를 제사에 쓰일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을 테니까 그냥 쓰라는 거예요. 소는 물론이고 각종 농사기구와 멍에까지 제사에 땔 나무로 쓰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라우나는 어떻게 됩니까? 자기 생업의 근간을 모두 잃게 됩니다. 소와 농기구 없이, 농토 없이 어떻게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의 모습에서 조금의 위선이나 허울을 볼 수 없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아라우나라는 이름은 우리 하나님은 확고하신 분이시다는 뜻입니다. 지금 아라우나를 그냥 아라우나로 부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말로 부를 것 아닙니까? 누군가가 자기를 부를 때 하나님은 확고한 분이시다고 이렇게 불렀습니다. 여러분, 무슨 말입니까? 늘 부르는 이름은 그 사람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작명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확고한 분이시다! 계속 부른다면 그것이 곧 믿음이 되지 않겠어요? 아라우나는 하나님을 믿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모두 다 내어 놓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분명히 책임져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다른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이라면 기꺼이 드리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아라우나를 보면, 그 누구도 그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역할로 봐서는 조연이나 엑스트라 정도의 사람입니다. 하찮게 물 긷는 일을 하고 농사짓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은 아라우나를 들어 쓰셨습니다. 그의 터에서 재앙을 막는 제사를 드렸을 때 재앙이 그쳤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터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라우나가 무슨 대단한 일 한 것이 아닙니다. 시골에서 촌부로 살아갔지만 자기 자리를 성실하게 지켰습니다. 이것이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무명의 사람이고 주목 받지 못하더라도,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께 성심을 다한다면, 하나님은 그를 들어 세우십니다. 그 뿐 아니라 그의 거하는 곳이 어디가 되었든지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성지로 쓰십니다. 역대기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주는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비록 지금 힘들고, 아직은 무명이며 별 규모가 크지 않은 사업가이지만, 있는 자리를 잘 지키고 하나님께 중심을 드린다면 언젠가는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주연으로 세우십니다. 아라우나는 다 드렸습니다. 그렇다고 아라우나가 아무것도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다윗도 아라우나와 실랑이를 벌여서 기어이 그 값을 지불합니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은 아라우나의 중심을 보시고 그 마음의 동기를 보셨습니다. 그냥 말 한마디 잘 했는데, 인심 한번 드렸는데, 물질적으로 전혀 드린 것이 없음에도 다윗과 함께 희생을 드린 것으로 간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섬세하고 풍성합니다. 여러분, 하시는 일을 알아주지 않아서 못내 섭섭하십니까? 교회를 위한 일과 가정의 일이든지 직장의 일과 사업의 일이든지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을 어떻게 효율성 있게 하느냐 보다는 그 일을 하나님께 하듯이 전심을 다하셔야 합니다. 그곳이 어디이든지 여러분은 아라우나의 거룩한 타작마당에 서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렇게 서계시는 여러분을 주인공으로 들어 쓰십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조연 취급도 안 해 주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주연으로 여기십니다. 사람은 몰라줘도 주님은 알고 주님은 인정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내려놓고 기도할 때에 사실을 확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기도와 간구가 진리 되신 주님께서 나의 이 사실에 개입하시든지 확보한 사실을 가지고 진리 되신 주님께 나로 가게 하시든지 역사하십니다. 반드시 사용하시고 반드시 세우십니다.
이제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이탈리아의 밀라노 대성당에는 세 가지 아치로 된 문이 있습니다. 첫 번째 문은 장미꽃이 새겨져 있는데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두 번째 문은 십자가가 새겨졌는데 모든 고통도 잠깐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세 번째 문에는 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이 라는 문입니다. 여러분, 모든 즐거움도 지나갑니다. 모든 고통과 아픔도 지나갑니다. 이 또한 지나갑니다. 그런데 터키 사람들은 고난과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인사할 때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빨리 지나가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나의 즐거움을 다 아십니다. 나의 고통과 아픔의 내용도 다 아시고 보시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또한 지나가리라. 왜요? 영원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라우나에게 있었던 주님의 그 세우심이 여러분 모두의 것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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