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부사 김수근 타루비(安東府使 金洙根 墮淚碑)-2
▲ 퇴계선생의 명망에 비해 비교적 조촐하게 만들어진 퇴계선생 묘소. 동자석, 문인석, 비석 등 평범하게 보인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하계마을 건지산 중턱)
모든 유림들이 퇴계선생의 유지를 받들다
일반적으로 고을수령이나 관찰사가 떠 날 때 비를 세우는 것은 관례처럼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나, 안동에서 만큼은 다른 지역과 달랐던 것 같다. 이는 퇴계선생 이후의 안동 이야기로서, 퇴계선생의 유지에 따라 송덕비나 공덕비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퇴계 선생은 임종을 앞두고 조카 영(寗,1527~1588, 삼촌인 퇴계에게 어릴 때부터 수학함)에게 장례절차를 간소하게 하고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만 돌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간단히 표시하라고 하였다. 당시로 보면 종1품의 정승이었던 퇴계 선생의 비석은 그 품계에 따라 크고 높게 만들어야 하는데, 정작 본인은 시골에 숨어 사는 선비를 자처하며 세상을 떠났으니 그것 또한 보통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국가에서도 퇴계선생의 장례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건만, 유언이 그러하니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퇴계 선생의 행적은 안동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앞 호에서도 김수근의 공덕비에 대해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안동 유림은 퇴계 선생의 이런 가르침 때문에 자신들의 공적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물론, 이 지방을 거쳐 간 많은 수령들조차도 감히 자신의 공적을 드러낼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최고의 권세가였던 김수근의 공덕비였지만 안동 관내에서는 세울 수 없을 만큼 안동 유림의 힘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 종1품의 품계를 가진 퇴계선생의 묘비이다. 일반적으로 종6품만 하더라도 이보다 큰 비를 세우는 것이 보통의 일이었다. |
유림이 선출했던 안동의 좌수별감 자리에 대해 서애 선생의 일화가 전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물러나려는 서애 선생에게 선조가 무엇인가 해주려고 했지만 모든 것을 거절한다. 선조가 그래도 한 가지 소원은 있을 것이니 얘기해 보라기에 서애 선생은 다소 엉뚱한 대답을 하는데, ‘안동에 내려가 좌수별감이나 하면서 조용히 쉬고 싶다’고 한다. 그러자 선조가 ‘안동의 좌수별감이 그렇게도 좋은 자리이면 짐은 할 수 없는가?’란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해부터 2년간 좌수 자리를 비워두었다는 농담 같은 얘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안동에 공덕비가 세워지지 못했던 것은 지방 수령이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푸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그것을 공덕비를 세워 찬양할 것까지는 없다는 유림의 생각이 철저하게 반영된 것이다.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 해관육조(解官六條-수령이 바뀌어 돌아갈 때의 태도와 재임 기간 중 남긴 치적)중 유애(有愛)부분에서 돌에 새겨 덕정(德政)을 칭송하여 영구히 전해 보이는 선정비(善政碑)는 마음속으로 반성하여 부끄럽지 아니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나무로 만든 비나마 세우는 것이, 아첨하는 사람도 있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으니 욕 먹을 바에야 세우지 않는 것이 낫다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삼정이 문란해지면서 신임 관리를 맞을 때는 쇄마전(刷馬錢)이라 하여 관에서 주는 노잣돈 말고도 백성들이 따로 바치게 하고, 떠날 때는 입비전(立碑錢)이라 하여 공덕비를 세우는데 돈을 모았으니 백성들의 원망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동 만큼 그러한 수령들의 횡포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퇴계 선생의 가르침이 있었고, 그 가르침을 지킨 안동 유림의 힘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김수근 타루비의 비석 규모로 보자면 당시의 이러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규모면에서는 꽤나 큰 비석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비석을 설치하기 위해 주변에 두었던 초석들의 크기 또한 우리 문경에서는 볼 수 없는 큰 규모라 할 수 있다. 여하간 당시 문경과 관련이 없던 인물의 비가 문경새재에 세워진 것만 보아도 당시의 김수근의 위세가 대단 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 기존에 세워졌던 송덕비보다 규모가 큰 김수근 타루비
퇴계 선생은 임종 전 도대체 어떠한 유서를 남기셨길래 퇴계 선생 이후의 안동에 비석이 거의 없는가?
퇴계는 1570년(선조 3년) 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하였다.
이 유서에는 첫 번째,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예를 갖춘 성대한 장례를 피하라는 뜻), 그리고 두 번째는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 도산에서 물러나 만년을 숨어산 진성 이씨의 묘라는 뜻)라고만 새기고, 뒷면에는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한 바와 행적을 간단하게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12월 8일 한서암에서 앉아서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퇴계의 묘소는 종택에서 남쪽으로 약 1㎞ 가량 떨어진 토계동 하계마을 건지산 남쪽 산봉우리 위에 있다. 여기서 바라보면 평소 퇴계선생이 오가산(吾家山)이라 일컬을 만큼 평소에 즐겨 찾고 좋아하셨던 청량산을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문인록에 언급된 바와 같이 선생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은 조정의 방침에 의하여 오늘날의 국장인 예장으로 치루어졌으나 성현의 묘소로서는 매우 초라하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