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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반지
염 상 섭
1
그가 오후 열시가 넘은 뒤에 C병원 환자실로 통한 동편 복도를 지나 동(東) 5호로 돌쳐서려니까 뒤에서 누구가 ― 누구라는 것보다는 간호부 견습생 E자가 "O씨"하고 겨우 들릴까말까한 떠는 목소리로 불러놓고, 팔삭팔삭 가벼운 왜짚신 소리를 내이며 쫓아온다. 그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벌써 알아차렸다는 듯이 다시 돌쳐서서 나란히 같이 서게 될 때까지 웃으며 기다리고 섰다.
십 촉 전등을 드문드문히 높다랗게 매달은 흐릿하고 둔한 불빛은 잿빛 면회(面灰)를 한 한편 벽과 감장칠을 한 듯한 저편 유리창에 반사가 되어서 한층 더 우중충한 광선이 잔잔히 흐르고 사방은 가냘픈 신음 소리 위에 괴괴하다. 모든 것이 음침하고 졸음이 오는 눈같이 피로할 대로 피로한 것 같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그 계집애는 남자의 몸에 실리려는 듯이 바짝 다붙어서 그를 웃으며
치 어 다보았다.
"오늘은 좀 바쁜 일이 있었어요. 한데 쟤는 어때요?"
남자도 웃음을 띠운 눈으로, 파란 테를 두른 간호부 모(帽)를 뒤통수에 얹은 여자의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수군수군하였다.
"그저 그 모양이지요. "
하며 여자는 고개를 떨어뜨린다. 백설 같은 간호복을 입은 여자의 어깨에는 눈에 뜨일 만한 잔 파동이 점점 기어오른다. 이 여자는 지금 우는 것일까?
그는 잠자코 잠깐 섰다가 여자의 왼손을 슬며서 쥐었다. 빤질빤질하게 닳은 여자의 손끝은 바르르 떨리고, 남자의 가슴에 파묻듯이 구부린 얼굴에는 분홍빛 핏발이 살짝 기어올랐다. 남자의 왼팔이 여자의 분때가 있을 둥 말 둥한 상큼한 목덜미를 사뿟이 간지릴 때에 두세 치밖에 떨어지지 않았던 두 사람의 거리는 일분의 틈도 남기지 않았다. 저편 문 밖에서 홀러오는 엔진의 덜거덕거리는 소리는 여전히 들린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는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귀를 에워쌀 뿐이다. 머리 위에 외로이 매달린 흐릿한 전등은 놀란 듯 비웃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다.
2
그는 이 년 전에 어느 날 밤엔지 경험한 이 광경이 머리에 떠오를 때마다 은행 잎사귀 모양을 플래티나[白金]로 봉박은 금반지가 눈앞에 알찐알찐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입가에는 자기만이 이해할 수 있는 기쁨을 느끼는 사람에게서 흔히 보는 아름답고 생기 있는 미소가 떠돌았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반드시,
『무얼, 오히려 잘된 셈이지. 그편이 제게 대해서는 사실 행복일 테니까!』
하는 생각을 하고서 스스로 위로하는 모양이나, 그래도 서운한 듯하여 풀없이 고개를 내리뜨리고 멀건히 앉았고는 한다.
3
그가 스물세 살 되던 해 봄이었다. 일본 S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사령만 나오면 곧 K은행에 취직할 작정으로 급히 귀국을 하여 보니까 아직 돌도 못된 누이동생을 늑막염으로 C병원에 입원을 시켜 놓고 대수술을 한 뒤이었다. 사내 동생은 둘이나 있건만 계집애 동생이 없어서 내심으로 바라던 차에 누이가 생겼다는 말을 외국에 앉아서 들을 때부터 축전을 놓는다, 모자를 사 보낸다 하며 기뻐하였고, 나올 때에는 계집애 양복하고 빨간 우산까지 사가지고 나온 터에, 병세가 의외에 위중한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와서 보던 날, 간호부장이 조수를 데리고 와서 붕대를 갈아 맬 제, 그는 갈빗대만 남은 어린아이의 가슴을 보고 깜짝 놀라며,
"그래 이렇게 되도록 무엇들을 하느라구 그대루 내버려 두었더람!"
하고 자기 모친을 칭원이나 하듯이 짜증을 내니까, 간호부 조수는, "그래두 처음 수술을 하였을 때보다는 퍽 나은 모양이랍니다."
하며, 감던 붕대를 매고 나서 그를 치어다보았다. 그때에 그는 일본 사람으로만 알았던 여자가 조선말을 하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유심히 치어다보았다.
호리호리한 키에 날씬한 허리를 꼭 잘라매고, 상큼한 모가지 그 위에 간들거리며 갸름하게 자리를 잡은 얼굴은, 첫눈에 많이 보던 사람 같은 친숙하고 상냥한 표정을 띠고 있다. 아래 웃니가 앞으로 좀 삐듯하고 그 위를 얇은 듯한 두 입술로 덮어서 꼭 다문 것도 귀엽지만, 상큼하게 올라간 콧나루 그 위에 화순(和順)히 좌우로 갈라 앉은, 그러나 한 초 동안도 쉴새없이 대룩대룩하는 두 눈, 넓도 좁도 않은 이마…… 이러한 것이 모두 균제의 미를 가졌을 뿐 아니라 얇고 보드라운 살갗은 그의 성정(性情)을 말하는 것 같았다. 다만 혈색이 좋지 못한 것을 보면, 간호부 기숙사 생활에 찌든 것을 알 수 있다.
"아가, 이따 오마! "
눈을 말똥말똥 뜨고 가만히 누웠는 아기의 곁뺨을 손등으로 문지르고 상긋 웃으며 저편에 앉은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팔딱팔딱 간호부장의 뒤를 따라가는 뒷모양을 한참 바라보던 남자는, 어린아이에게로 눈을 옮기어 들여다보면서도 머리로는 지금 그 여자의 태도와 목소리를 생각하여 보았다.
"그 간호부가 조선 사람이로군요."
한참 있다가 그가 모친더러 이상하다는 듯이 물으니까 모친은 웃으며,
"그럼 일본 사람으로 알았던? 어떻게 사람이 안상하고 잽싼지, 애를 부덩부덩 써가며 제 일같이 친절하게 해준단다. 나이 보아서는 참 숙성하지!"
하며 칭찬이 늘어졌다.
"몇 살인데요?"
"열일곱이라던가?"
"공부나 시켰더면. 간호부로는 좀 아까운데……."
모자는 이러한 소리를 하면서도, 아들은 자기 모친이 칭찬하는 것이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슨 의미가 있는 듯이 들었다.
그 후부터는 날마다 만나게 되었다. 아직 학생이기 때문에 좀처럼 하여서는 숙직을 할 때가 없지만, 그래도 간호부가 째이는 때에는 밤까지 일을 보고 숙직실에서 자는 때도 있었다. 그리고 병실에서는 그가 돌아온 뒤부터 고모가 쉬러 가고 모자가 번갈아서 밤을 새게 되었기 때문에, 그 간호부가 숙직을 하는 날은 그의 독서 시간을 그 여자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물론 환영하였다. 친숙하여 감을 따라서 밤을 같이 새게 되는 날 같은 때에는, "이야기 하나 해주세요, 해주세요."하며 조르는 대로 그는 서양 소설책을 가지고 앉아서, 요점 요점을 찾아가며 선생이 가르치듯이 자상하게 들려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간병을 하러 다니게 된 뒤부터 이 계집애에게 유표(有表)히 달라진 것은 몸맵시다.
언제던가 하루는 새 옥양목 왜버선을 조그마한 발에 꼭 맞게 팽팽히 신고 빨간 끈올 달은 얌전한 왜짚신을 잘잘 끌면서 병실로 돌아다니는 것을 그는 보고 속으로 기쁘기도 하고 천하게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날 밤에 마침 그의 모친이 어린아이를 끼고 누워서 잠이 들었을 때 E자는 아까 보던 그 버선과 그 신을 신고, 세수를 다시 하였는지 보얗게 분기가 끼여 보이는 얼굴에는 진정으로 반기는 기색을 보이며 살금살금 들어와서 자는 아기를 잠깐 들여다본 뒤에 저편 구석에 신문을 펴 들고 앉았는 그의 앞으로 오더니,
"심심하시지요?"
하고 은근히 인사를 하였다.
"아뇨. 거기 좀 앉으시구료!"
하고 그는 옆에 놓인 교의를 가리키면서,
"때때신 신으셨구료!"
하고 여자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 여자를 다만 예쁘장스러운 어린 동생이나, 자기와는 격수(格手)가 되지 않는 손아랫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때까지 이러한 실없는 소리를 틈틈이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자가 매우 무안한 듯이 얼굴이 발개지며 발을 움츠러뜨리고 교의에 주저앉는다. 그는 좀 심하게 말을 하였구나 하는 후회를 하면서도,
"나 좀 신어 봅시다. 난 일본에 십여 년을 있었어야 그런 신은 구경은 했어도 내 발에 끼어 보지를 못한 게 철천지 한이에요.
하며 부덕부덕 졸라 보였다. 그러나 여자는 그럴수록 한층 더 얼굴이 발개지며 발을 오므라뜨리다 못하여 나중에는 벌떡 일어났다. 여자가 일어나는 것을 본 그는 웃으며 별안간 여자의 손목을 꼭 쥐고 따라 일어나서 한편 슬리퍼를 벗고 여자의 발등을 사뿟이 누르며,
"좀 신어 봐요!"
하고 추근추근히 시달렸다. 여자는 치마 앞을 휩싸안고 전반신을 구부린 채 캑캑하며 한 손 한 발을 빼지 못하여 애를 쓰는 모양이나, 공연히 몸을 비비 꼴 뿐이다. 그 사품에 뒤통수에 얹혔던 흰 모자가 훌떡 벗겨지며 떨어졌다. 남자는 잠자코 얼른 집으면서 손을 놓고 자리에 앉았다.
"이리 주세요, 네? 어서 가봐야 해요."
E자는 한 걸음 다가서며 어리광 비슷하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소리를 죽여서 웃기만 하고 앉았다가 모자를 씌워 주려는 듯이 두 손으로 가장자리를 벌려 들고서, 이리 오라고 고갯짓을 하였다.
"내 쓰게 이리 주세요."
E자는 ― 뒤를 돌아다보며 또 한 마디 곱게 하였다. 그러나 남자는 웃고만 앉았다. E자는 하는 수 없이 또 한 걸음 다가서며 남자에게 몸을 비스듬히 가볍게 실렸다. 그는 그제서야 여자의 머리를 왼팔로 얼싸 안으며 모자를 씌워 주고 머리를 한참 매만져 주었다. 두 사람은 잠자코 한참 동안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의 모친이 부시시 일어날 때까지.
그날 밤에 그는 자기 모친에게 몇 마디 사살을 들었다. 간호부 또래 같은 여자에게 실례하지 말라는 꾸지람이다. 이 말을 들은 그는 처음 오던 날 칭찬하던 것이 마치 계집 하인에게 대한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깨닫고 불쾌히 생각하였다.
그런지 이틀만에 비로소 조용히 만난 것이 ― 그가 지금도 아름다운 꿈같이 때때로 혼자 생각하여 보고는 혼자 웃고 혼자 역정을 내는 일이지만 ― 그날 밤중에 복도 한구석에서 E자가 뒤쫓아오며 불러 가지고 속살거린 때이다:
이러한 일이 몇 번 있은 뒤에는 자연히 앓아 누웠는 어린 누이보다는 E자를 생각할 때가 많아져 가고 병구완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걱정보다는 어떻게 틈을 타면 한번 E자를 데리고 나가서 산보도 하고 자유롭게 이야기라도 할 수 있을까? 하는 욕구가 점점 간절하여졌다. 그러나 아직 학생인 그에게 더구나 이목이 번다한데 그러한 청을 하는 것은 무리할 뿐 아니라, 어린아이는 나날이 달라가서 집안 식구가 총 출동을 하여 연락부절한 터에, 그러한 한가로운 짓을 하였다가는 야단도 야단이려니와 틈을 탈 수가 없었다.
사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언젠지 한번 늦게 갔다가 그의 모친에게,
"너는 병인을 위해서 와 있니? 심심파적으로 와 있니?“
하며 핀잔을 맞은 뒤부터는 처음 같지 못한 열심이라도 한층 더 집안 식구들에게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양으로 그가 돌아온 지 거진 한 달짝이나 된 뒤에, 그는 취직을 하자 며칠 안 되어서 밖에 있는 여러 친구와 같은 은행원 몇 사람이 축하 겸 환영회를 발기하여 어느 일요일 오후에 한강에서 선유(船遊)를 하게 되었다. 그날 오정 때쯤 그가 한강으로 나가는 길에 병원에 들르니까 모친은,
"그저 그만한 모양이지만 누가 아니? 그러나 술은 조금 먹고 일찍이 들어오너라! 이리 바로 오겠지?"
하며 강에 나간다는 말에 마음이 아니 놓인다는 듯이 아들을 치어다보았다.
"그러지요!"
아들은 환자를 잠깐 들여다보고 이렇게 대답을 하며 무심코 옆에 있는 E자를 치어다보니까, 그 계집아이도 자기를 보아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방긋 웃어 보이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에는 한강 부두에 꾸며 놓은 선유배 ― 그 속에 그득 실린 보지도 못한 고운 아씨네 ― 연소한 자기의 성공과 장래의 발전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여러 친구와 수십의 축배가 한꺼번에 우글우글하기 때문에 E자의 얼굴이 이쁜지 어떤지 다시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그날 그는 새로 한 시가 넘은 뒤에 인력거에 실리어서 가까스로 자기 집에 들어왔다. 그러나 취중에도 자기 어머니가 안방에서 나와 맞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마당 한 가운데에 딱 서며,
"앗, 어, 어머니 이게 웬일이세요? 아, 아 이거 웬일이에요? 네? 네?"
하며 비틀거리고 마루를 치어다보았다.
"무에 뭐란 말이냐? 어서 네 방으로 가서 차거라."
하며 모친이 마루 끝에 앉으려니까 아들은 축대 위로 엉금엉금 기어 오르면서 여전히 혀꼬부라진 소리로,
"그예 죽었…… 아 참 정말 죽었습니까?"
"내일 다아 들으려무나! 어서 가서 자거라."
하는 모친의 눈에 눈물이 괴는 것을 보고 그는,
"아 그예 죽었습니다그려. 꿈 같은 일이로군. "
하며 께께 울었다.
그 이튿날 그가 술이 깨어서 맑은 정신에 들으니까 자기가 다녀간 지 두 시간쯤 지나서 절명이 되자 부랴부랴 치워 버렸다 한다.
"웬일인지 숨이 진 뒤에도 얼마 동안이나 눈을 뜨고 있더라. 볼 사람을 못 보면 그렇다더니 너를 못 보아서 그랬는지……." 하며 모친이 새로운 눈물을 저고리 고름으로 씻는 것을 보고는 그도 창연한 빛을 띠었으나 어제 취해서 울던 눈물은 간 곳 없다. 다만 아까운 듯도 하고 매일 공과가 하나 줄어서 서운한 것 같기도 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뒤미처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E자는 어떻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날 은행에서 파사(罷仕) 하는 길로 우선 간호부들에게 치사를 하느라고 선물을 한 보자(褓子)나 사 가지고 C병원으로 부리나케 찾아갔다. 휑뎅그렁한 복도에는 다아 넘어간 석양의 여광이 엷게 비치고 밥쟁반을 들고 오락가락하는 간호부가 가끔가끔 눈에 띌 뿐이다. 어쩐지 한층 더 처량한 것 같았었다. 우선 동(東) 5호의 간호부실을 기웃해 본즉 아무도 없다. 죽은 누이가 누웠던 병실을 들여다보니 우중충한 속에 침대 한 채만 벌거벗은 듯이 가만히 누워 있다. 다시 나와서 복도를 왔다 갔다하려니까 낯익은 일본 간호부 하나를 만났다.
“부상(姙長) 상은?"
하녀 물은 즉,
"지끔 저기 계세요. 여쭈어 오죠."
하고 달아난다.
그러나 "E자씨는?"하고 물을 용기는 없었다. 뒤미처 부장이 와서 인사를 주고받은 뒤에, 가지고 간 물품을 내어논 뒤에도 한참 망설이다가, 죽을 힘을 들여서 어머니께서 특히 몇몇 사람에게 인사를 전하여 달란다고 늘어놓고 나서, "E자 상은?"하며 물으니까 벌써 기숙사에 들어갔다 한다.
전등불이 뿌옇게 막 들어온 긴 복도를 나오면서, 그는 아까 아침에 모친이 "너를 보려고 절명 한 뒤에도 눈을 뜨고 있었나 보더라."고 하던 말을 생각하여 보았다.
『보이려는 사람에게는 감은 눈도 떼 주고 안 보이려는 사람에게는 뜬눈도 가리 우려는 운명 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가 두세 번이나 붉은 벽돌집을 돌려다볼 제 땅거미는 벌써 발미를 감추었다. 전찻길로 나와서 닫은 대문의 철창 틈으로 인생의 육체의 고뇌를 고(煎)는 큰 도가니 같은 삼층 벽돌 양실을 쳐다볼 제는 영원한 신음과 고뇌의 상이 흘립(屹立) 한 것같이 박모(薄暮)에 가리웠다. 그 속에는 E자도 안기어 있으리라고! 다시금 생각하고 그는 진정우로 축복하고 싶었다. 어제 한강에 가는 길에 들렀을 제 왜 좀더 다정하게 수작을 아니하였던고 후회도 났다.
4
그가 본점에서 반 년쯤 근무하고 D시 지점으로 영전을 하였다가 다시 본점으로 오던 그해 가을이었다.
아직 출근을 아니 하고 며칠 쉬는 동안에 하루는 모친이 아침을 자시다가 안방에서 상을 받은 그를 돌려다보고,
"얘, 내 눈이 늘 성치 않은데 어디 가서 의사를 좀 보이면 어떻겠니?"
하는 말에,
"그거 뭐 어렵습니까. 오늘이라도 가보시지요."
하고 조반 후에 모친을 모시고 나섰다.
"C병원으로 가잔 말이냐? 거긴 말구 없겠니?"
모친은 작년 봄에 딸을 없애던 것을 생각하고 실쭉해 하였으나, 다른데보다는 역시 아는 사람도 있겠고 늘 다녀 버릇하던 데니까 나으리라고 그리로 향하였다. 그러나 그의 내심으로는 일년 반이나 못 만난 E자나 혹 만날까 하는 호기심에 더 끌리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사람이 붐비고 여전히 우중충한 좁은 복도를 거치어서 제일 막다른 안과실로 휘더듬어 들어가려니까 꼽뜨리는 모퉁이에서 젊은 간호부 하나가 홱 돌려 나오면서 딱 마주치자, "에구머니!"하며 우뚝 선다. 한눈을 괄며 앞서 가던 그가 깜짝 놀라며 돌려다볼 때는 벌써 그의 모친하고 인사를 하고 있다.
"참 오래간만이구료. 그래 몸성히 잘 있었소?"
"네! 댁내 다아 안녕하세요. 그 후에는 어쩌면 그렇게두 한번두 뵈일 수가 없어요?"
하며 그 간호부는 자기 옆에 그가 섰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돌릴 듯하며 잠깐 말을 끊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말이 끝난 틈을 타서 비로소 모자를 벗으며 공손히 인사를 하였다.
"네 ! 참 오래간만이올시다."
하며 여자는 해죽 웃어 보이었다.
그는 첫눈에 벌써 아깝다는 생각부터 났다. 키는 더 클래야 더 클 수도 없겠지만 포동포동한 두 뺨이며 윤광(潤光)이 도는 눈찌라든지 도담스러운 어깨통, 눈에 띄게 불룩한 가슴께가 어디로 보든지 작년 봄에 본 E자라고는 할 수 없다. 일 년 반쯤 되는 동안에 이렇게도 피었나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까지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이 아깝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수작 붙이는 것이라든지 침착한 태도가, 그전 같은 앳된 티가 너무 없어 보이었다. 인제는 남자를 정말 남자로 정시할 만한 무슨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모성으로서의 경험까지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수록 까닭 없는 엷은 질투까지 생기었다.
‘그전 보다 퍽 나아졌는 걸. 인젠 아주 노처녀 꼴이 배겼는데!"
그의 모친도 총총히 저편으로 달아나는 E자의 뒤를 돌아다보며 이러한 소리를 하였다. E자가 볼 일을 보고 안과실로 들어갈 때에는 그의 모자를 치어다보지는 않고 고개만 까딱하고 지나갔다.
차례가 돌아와서 O상 하고 부르는 대로 그가 모친과 같이 진찰실로 따라 들어가니까 E자는 간신히 그를 거들떠보고 콧잔등이나 간지러운 사람처럼 방긋이 열린 입가에 어리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감추고 일하는 듯싶게 잽싸게 돌아다니며 의사의 시중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가 통역을 하려고 교의에 앉은 모친의 옆으로 다가서려니까, 곁에 섰던 조선 의사가 E자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눈을 그에게로 옮기며,
"노형은 나가두 예서 다아 할 테예요."
하고 그를 내쫓았다.
"시키지 않은 말썽두 퍽 부리는 자제로군!"
하며 그는 하는 수 없이 나와 버렸다.
진찰이 끝난 뒤에 E자는 그의 모친을 따라나오며,
"한 달은 걸리시겠다지요? 날마다 오시겠어요?"
하고 인사를 하니까 그의 모친이,
"글쎄 봐야 알겠소. "
하며 어림 삥삥한 대답을 하는 뒤를 이어 그는,
"암 오시지요. 내일 또 뵙겠습니다."
고 인사를 깍듯이 하고 헤어졌다.
"얘, 내일부터는 어디든지 가까운 데루 가자. 너두 며칠 있으면 사진하지 않니? 나 혼자는 다니기도 싫구, 누가 저물도록 전차를 바꿔 타 가며 날마다 다니겠니."
전차 속에서 그의 모친은 이런 소리를 하였다.
"다른 데 가면 비싸지 않아요? 행기삼아서 어멈이나 데리고 다니십쇼그려. 노는 동안만는 저하구 다니시구……."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으나 이러쿵 저러쿵하면 귀찮지 않느냐고 모친은 반대하였다. 그 중에는 늘 통혼이 어근버근하고 잘 들어서지를 않는 이때에 E자와 자주 만나게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속다짐도 없지 않은 것을 그는 눈치채었다. 그 이튿날은 그가 병원에 가자고 하고 싶었으나, 모친이 혹 의심이나 내지 않을까 하고 잠자코 있어 보았다. 오정 때쯤 되어서,
"얘, 아니 가랸?"
하고 모친이 소리를 친 다음에야,
"어디로 가실 테예요?"
하고 물으니까.
"어디든지 가깝고 좋은 데만 가자꾸나."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그의 집 근처의 민간 의사에게로 갔다.
5
일년 반이나 아니 만날 동안에는, 친구끼리 실없는 이야기 끝에 자랑삼아서 E자의 인물을 그려보고 떠든 일은 있으나, 그것도 그때나 그후 며칠 동안 공상으로 간혹 머리에 떠오를 뿐이요, 탐탁하게 생각하여 본 일도 없었다. 사실 귀국한 당시에는 지각이 난 뒤에 조선 여성으로 만난 것이 E자가 처음이니까, 얼만큼은 마음이 끌리었었다. 그러나 E자의 지식이라든지 취미가 자기와는 거리가 멀고, 아적 나이 어린데다가 계모시하에서 자라나느라고 고생살이에 찌든 사람처럼 환히 트이지가 못하고, 어디라고는 말할 수는 없으나 좀 궁기가 끼여 보이는 듯싶은 것이 마음에 실쭉하였었다. 그보다 더 나은 여성이 지금 어디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것이다. 그렇게 급히 서두르지 않아도 좋을 것이라고, 상업학교 출신이니만치 주판질도 아니 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로 뜻밖에 한번 만나 본 뒤로는 새삼스럽게 작년 봄 일이 그립고, 어떻게 해서든지 조용히 다시 만나서 옛 정서를 추억케 하고 새로운 정열을 돋과 보고 싶었다.
일 년 반이라는 세월이 오고가는 동안에 간혹 기생이라는 여성과도 접촉하여 보고 소위 여학생이라는 것과도 추축(追逐)하여 보았지만, 결국에는 그게 그것이요, 그리 남다른 여성이란 것을 본 게 없다. 부모는 보기가 무섭게 혼인 혼인 하지만 그다지 떠드는 폭에 비해서 과연 얼만한 것이 걸려들는지 의문이다. 하고 보면 역시 마음에 들고 다소간이라도 서르 보고 아는 사람이 나을 것이다. 되기만 하면 승낙이야 어떻게든지 받을 수 있겠지―이러한 생각을 몽롱히 하여 보았으나 대관절 저편이 어떨지 알 수가 없다.
"여태껏 간호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 결혼은 아니하였을 듯하지만 무서운 세상에 부대끼는 동안에는 편 변하였을걸! 지금쯤 나 같은 것은 수효에도 치지 않으렷다! 대관절 이런 얼굴에도 반할 계집이 있을까?"
하며, 그는 커다랗고 허여멀건 자기의 얼굴을 면경에 비쳐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만큼 생겼으면 자기두 여태껏 그대루 있을 리가 없고, 번잡한 그런 속에서 벌써 어떤 놈의 눈에든지 걸려들었을 것이라……."
이렇게 생각할 때에는 세상만사가 부심하고 무엇을 바라고 사는 것인지, 말할 수 없이 고독하고 처량할 뿐이었다. 은행에 가서 한참 분주히 일을 할 때에는 이것저것 다 잊어버렸다가도, 오후 세 시를 땅 친 뒤에 한숨 돌리고 잠깐 멀거니 앉아서 백여 명 가까운 행원이 갈팡길팡하고 제각기 떠들썩거리는 것을 가만히 건너다볼 때에는 대체 이 사람들이 무엇을 위하여 움직이고 있누? 하는 의심 이 새삼스럽게 들어가서 자기부터 불쌍하게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자기가 그 중에서는 제일 행복스러운 것 같기도 하였다.
『내게는 그래도 나의 장래와 행운을 빌면서, 내 말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생각할 제, 그는 가슴이 뻐근하도록 기쁘고 주판을 재깍거리는 소리마다 그것이 모두 앞으로 오는 자기의 행복을 위하여 춤추는 장단 소리같이 들리었다. 그러한 날은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일이 손쉬웠다. 그러다가 저녁때 파사하여서 나오는 길에, 전차 속에서 예쁘장한 여학생이나 혹은 인력거를 위세 좋게들 몰아가는 기생을 만날 때는, 반드시 E자의 모습이 전광같이 머리에 떠올라왔다. 그러나,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누? 기숙사에서 동무들하구 퉁탕거리고 깔깔대며 돌아다니렷다!』
하며 그 거동을 그려 보려다가 아니 되면 공연히 혼자 속으로 짜증을 내며,
『무얼 나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고 어떤 의학생이나 선생에게서 온 편지나 몰래 펴놓고, 혼자 단꿈을 꾸며 앉았을지도 모를 게다…… 아깝다. 그때 왜 내가 좀더 열심을 내지 않았던구? 에이, 분해!』
이러한 생각을 할 적이면 그의 모친과 안과에 갔을 때에 나가라고 하던 가무잡잡한 의사의 얼굴이 떠올라와서,
『그 놈팽 일지도 모르지?』
하는 생각도 하여 보았으나, 그때에 E자가 허둥허둥 하며 제 풀에 겸연 쩍어하던 양을 다시 생각하여 보면, 아직 그대로 있는 듯도 싶다.
『편지를 해볼까?』 ― 어떤 날 밤에 혼자 누워서 이렇게 공상을 하여 보다가 정말 벌떡 일어나 앉아서 .밤새도록 편지를 댓발만큼 썼다. 그 이튿날 무슨 급한 볼일이나 있는 사람처럼 부리나케 일어나서 아침 먹기 전에 어젯밤에 써놓은 것을 다시 한번 읽어 보니, 말이 잘 돌아가지 않는 데도 있고 또 보낸다손치더라도 당자의 손에 잘 들어갈까? 무어라구 답장이 올까……? 말씀은 반가우나 이편 사정이 뜻과 같지 못하오니 미안 천만이외다. 일생의 친우로 알아주시고 끝끝내 잊지 말아 주시오면 이 사람의 무상의 광영이겠습니다…… 운운한 엽서 한 장밖에는 소득이 없다 하면, 처음부터 그만두는 것이 체면이나 아니 깎이니만큼 도리어 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하여 가면서도 척척 접은 편지를 봉투에다가 넣었다 꺼냈다 하기도 하고 피봉 글씨가 잘못되었다 하고는, 또 찢고 또 쓰고 하다가는 밥 먹으라는 바람에 짜증을 내면서 그대로 소봉투(素封套) 에 다시 넣어서 양복 저고리 속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어떻든 한번 만나 보는 게 상책이다. 다시 한번 만나서 눈치를 더 살펴보고 편지를 해두 ― 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새에 세웠으면 똑 좋겠구만…….』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무슨 반찬을 집어넣는지, 정신없이 퍼부으며 이런 생각을 하였다. 상을 물리고 자기 방으로 와서, 옷을 갈아입고 벽에 걸린 석경 (石鏡) 앞에서 넥타이를 메고 섰던 그는, 별안간 깜짝 놀라며, 면경 앞으로 바짝 다가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뜬다.
"트라홈은 아니겠지. "
하며, 넥타이를 쥐었던 두 손을 올려다가 아래 위 눈꺼풀을 비집고 한참 들여다보고 섰다. 아닌게 아니라 좀 불그스름하게 약간 충혈이 되었다. 왼편 눈을 캥기어 보니까, 여기도 역시 그렇다.
『흥! 트라홈이 전염이 된 게로군!』
이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 눈시울이 죄는 것 같고 좀 아픈 듯하다.
『어떻든 한번 가 보는 게다!』
그는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이 이렇게 생각하며 뜰로 내려오다가,
“어머님 눈병 이 제게루 옮았나 봅니다.”
하며 웃었다.
“별소리를…… 수건이 다르구, 대야까지 따루 쓰는데…….”
하며 모친은 웃고 나서,
“이따가 나오다가 나 다니는 데 좀 가 보려무나! 그 길에 나는 얼마나 더 다녀야 할지두 물어 보구…….”
하며, 아들을 치어다보았다.
그는 어디로 갈까 하는 작정도 채 못하고 전차에 올라서 한참 망설이다가, 차장이 표를 청구할 때에야 비로소 C병원 앞이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아직 이른 듯하여 도중에서 차를 내려 가지고 전화를 빌 겸 하여 친구의 상점을 찾았다.
“아침결에 이게 웬일인가? 지금 들어가는 길인가?”
하고 친구가 인사를 하니까,
“응, 안질이 나서 오전은 베때리고 병원에 좀가는 길일세. 게다가 요새는 눈이 점점 침침해져서…….”
하며, 묻지도 않는 말에 기다랗게 늘어놓고, 그는 전화실로 들어가더니, 역시 안짙이 나서 병원에 시급히 가는 길이니까 오정에 들어갈 터이니, 주임더러 그렇게 말하라고 은행에 전화를 걸어 놓았다.
6
그래도 시간이 일러서, 복도에는 아직 그리 사람이 붐비지 않고, 안과 진찰실에는 낯설은 간호부 두 명이 준비를 하고 있을 뿐이요. E자도 눈에 안 띄었다.
"출근 시간이 바쁜데, 속히 좀 못될까요?"
그가 진찰권을 내놓고 이렇게 물으니까,
"한 삼십 분 기다리셔야 할걸요."
한다.
밖으로 나와서 의사가 오기만 ― 의사라는 것보다는 E자가 오기만 기다리고 앉았으려니까 어쩐지 쑥스런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끔벅끔벅해 보아야 그리 아픈 것 같지도 않다.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고 웃으면 어떡하나? 온 길에 안력 시험이나 하자고 해서 안경이나 하나 만들까?』
이러한 생각을 하고 앉았으려니까, E자가 타달타달 들어오다가 그를 보더니, 별안간 얼굴이 발개졌으나 매우 침착한 태도로 허리를 납신 구부리고 나서,
"그동안 어찌 아니 오셨어요?"
"다니기가 머시다구, 가까운 데서 치료를 하시지요."
하며 머뭇머뭇하였다. 좌우에 늘어앉은 사람의 시선은 분명히 이리로들 모인 것을 두 사람은 의식하였다.
"그래, 누구를 보시러 오셨어요?"
"네 ― 내가 어제부터 좀 이상해서…… 아직 의사가 아니 온 모양이지요?"
하며 그는 인제야 정신을 가다듬어 가지고 여자를 똑바로 치어다보았다. 남자의 얼굴에서 무슨 뜻을 읽으려고 말끄러미 치어다보고 섰던 E자는,
"어디 들어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며 진찰실로 쪼르르 들어갔다. 그는 자기의 왼편 가슴을 사붓이 만져보고 다시 앉았다. 거기에는 아침에 넣고 나온 편지가 들어 있었다.
"어디가 어때요?"
윗수염을 도툼한 입술가와 나란히 깎고 금무테안경을 쓴 의사는, 그가 앞에 앉기를 기다려서 이렇게 물었다.
"글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제부터 두 눈이 다 아프고 금새루 벌개져서요. 일전에 와서 진찰을 하고 갔습니다만, 우리 어머니께서 트라홈을 앓으시기 때문에……"
의사는 그가 장황히 늘어놓는 이야기를 채 다 듣지도 않고, 그의 턱을 끌어당겨다가, 먼데나 바라보는 사람처럼 눈을 위로 뜨고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나더니 옆에 괴어 놓은 대야레다가 손을 말끔히 씻고, 다시 덤벼들어서 이쪽저쪽의 눈등을 발깍발깍 뒤집어 본 후에 고개를 잠깐 기웃하고 앉았다가,
"별로 이상은 없는 듯하외다. 어제 늦게 주무시지 않았소?"
하고 묻는다.
그는 자기 뱃속을 들여다나 보는 것 같아서 깜짝 놀라면서도 용히 들어맞힌 것에 만족한 듯이 웃으며,
"네! 그동안 며칠 늦게 자기는 하였습니다마는……."
하며 의사를 치어다보았다.
"그래요. 그래서 좀 충혈이 된 모양이외다. 약을 드릴께 갖다가 2, 3일 써 보아서 그래도 낫지 않건 다시 오슈."
하며 그와 나란히 앉은 조수에게로 향하고 독일어로 무어라고 두어 마디 일러주니까 그 사람은 곧 받아써서, 그 종이를 옆에 있는 간호부에게로 넘기었다.
그러나 그는 어쩐지 미진한 것 같아서 잠깐 머뭇머뭇하다가,
"선생님! 눈이 좀 침침한 듯해서 왔던 길에 안력시험을 해보구 싶은데요?"
하고 웃으며 의사를 또 치어다보니까,
"네, 그건 저리 가서……."
하며 귀찮은 듯이 얼른 한 마디 하고 간호부를 건너다보며,
"그다음! "
한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벌떡 일어나 저편으로 가서 젊은 의사를 붙들고 아까 한 말을 다시 뇌이었다. 그 의사는 몇 마디 물어 보고 나서, 누구든지 이리 하나 오라고 간호부를 부르니까, E자가 쪼르르 왔다. 그는 인제야 온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E자는 의사의 분부대로 상하좌우로 터진 여러 가지 부호를 크고 작게 층충이 박은 기다란 안력 시험표를 내어걸고,
"저쪽 벽에 가서 기대 서세요!"
하더니, E자 자신이 가느다란 막대기를 들고 서며 그를 한번 치어다보고, 부끄러운 듯이 방긋 웃고 나서 일본말로,
"이거 뵈세요?"
하며 맨 꼭대기에 입춘만큼 가로 쓰인 터진 입 구(ㅁ)자를 가리켰다.
"네 ㅡ 뵙니다! "
두 사람은 또 한번 마주보고 웃었다.
"이거 뵙니까?"
"네 ―."˙
"그럼 이거 뵙니까?"˛
이번에는 한 두어 층 내려가서 가리키고 웃는다.
"네 ―."
"이것두?"
E자는 중간쯤 내려가서 꽤 자질구레한 글자를 가리켰다. 그는 E자의 말씨가 점점 반말처럼 변하여 가는 것을 내심으로 기뻐하면서,
"그건 아리 승아리숭한데요. "
하고 웃음을 참았다.
"그럼 이거?"
"그것두 좀 잘 안 뵈어요."
"이건 어때요?"
"네 ― 게서부터는 보입니다."
그가 이렇게 대답을 하니까, E자와 그의 중간에 앉았던 의사는,
“그만!”
하며 무엇인지 종이조각에 끄적끄적하고 나서 그를 검은 휘장으로 가린 암실로 끌고 들어갔다. 한 십 분쯤 지난 뒤에 의사는 그를 다시 데리고 나와서,
"안경을 쓰시려면 왼쪽은 이십팔 도쯤 되고, 오른쪽은 삼십이 도 가량밖에 아니 되겠소이다."
하고 독일어로 다시 끄적끄적해서 그에게 주며,
"아직은 쓰지 않으시는 편이 오히려 보안 (保眼)이 되겠지요."
하며 그를 치어다보고 웃는다. 옆에 섰던 E자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비웃는 웃음이 아닌 것은 그도 짐작하면서 어쩐지 얼굴이 버럭 취하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렇게나 하지요. 고맙습니다."
그는 이렇게 인사를 하고, E자에게도 고개를 끄덕하여 보이고 총총이 나왔다.
제약실에서 조그만 약병을 받아 가지고 레테르를 들여다보다가, 혼자 깔깔 웃고 싶었으나 잠자코 약병을 포켓에 쓸어넣고 문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나도 죽을 때에는 눈을 뜨고 죽으렷다!"
하며 속으로 웃었다.
저녁때 집에 돌아와서 그의 모친더러 아무렇지도 않더라고 하니까,
"그러면 그렇지!"
하며 그의 모친은 기쁜 듯이 웃었다.
7
한동안 질펀질펀하던 진장바리가 뜸하여진 뒤에는 음산한 일기가 연일 계속하고,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겨울날같이 쌀쌀한 바람이 부는 십일 월 그믐께이었다. 그는 네 시쯤 해서 은행에서 나오는 길로 월급 때마다 돌림턱으로 내는 노름에 가려고, 같은 축의 한 사람과 작반을 하여 전차에 오르려니까, 바로 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던 여학생 하나가 깜짝 놀라며 일어나서 공손히 인사를 한다. 그이 역시 주춤하면서도 공손히 답례를 하였으나 별안간 그의 눈은 무엇에 놀란 듯이 똥그래지며 두세 번 깜짝깜짝하여졌다. 남(藍) 끝동 아래로 갸름하게 내려뜨려진 여자의 왼손 무명지에는 플래티나로 은행나무 잎사귀 모양을 본받은 순금 반지가 반짝하고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동안 벌써, 흐응!"
그는 덜컥 내려앉는 듯한 가슴을 마음으로 쓰다듬어서 가라앉혀 가며, 절망한 듯이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까닭 모를 분노와 숨었던 질투가 일시에 뒤범벅이 되어서 염통 밑 저 ― 깊은 데서 안간힘을 쓰는 듯한 일순간이 지나간 뒤에 그는 비로소 머뭇머뭇하고 섰는 여자를 똑바로 보며,
"어서 앉으시지요."
하고, 제자리에 앉는 여자의 무릎을 덮은 감색 세루치마 위에 사뿟이 놓인 왼손을 또 한번 슬며시 내려다 보았다 ― 흰 은행잎 하나가 날아앉은 누른 조그만 고리는 끼울 만한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는 듯이, 포근포근한 손가락에 여전히 꼭 싸여 있다.
"지금 저긴 그만두셨지요?"
그는 일 분쯤 지난 뒤에, 입을 떼고 나서 아까부터 여자와 나란히 앉아서 자기를 유심히 치어다보던 젊은 양장 신사에게 잠깐 눈을 주었다. 여자는 홀륭한 붉은 회색 비단 목도리 위에 떨어뜨렸던 고개를 쳐들며,
"네 ―."
하고 여자는 눈을 어디다가 둘지 몰라 애를 쓰며 생긋 하여 보이었다.
"언제 그만두셨어요?"
"지난달 초순께요. 그후에 가 보셨어요?"
여자는 그가 트라홈이라고 진단을 맡으러 C병원에 가서 안력 검사를 받던 생각을 하고, 유착한 대모테 안경을 쓴 남자의 얼굴을 치어다보았다. 그러나 그 알은 아무리 봐도 평면경이었다.
"그럼 그때 내가 다녀온 지 며칠 아니 되어섭니다그려 ……참 그런데……. "
하고 그는 결혼을 한다더니 어떻게 되었느냐고 떠보려다가, 정말 결혼을 한 부부인지, 제멋대로 달떠서 다니는 판인지 알아보려고 말뒤를 돌려서,
"지금 어디 계셔요?"
하며 물었다.
"차차 아시지요."
여자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을 하고 빨간 얼굴로 곁에 앉았는 남자를 잠깐 흘겨보더니,
"참, 그런데 댁을 몰라서 청첩도 못 보내구 실례했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여 버린다. 그는 무어라고 대답을 할지 몰라서 어물어물 하다가,
"말씀은 들었습니다만 얼마나……."
하고 또 말뒤를 흐리마리하였다.
여태껏 잠자코 눈치만 보고 앉았던 곁의 남자는 그제서야 여자에게 소곤소곤하더니 ,
"우리 인사하십시다!"
하며 조그만 몸집에 거드름을 피며 일어났다.
그는 이 남자의 명함을 보고 비로소 E자가 새문 밖에 사는 어느 미곡상의 며느리가 된 것을 알았다.
"지금 그게 누군가?"
전차에서 내려서 그의 친구는 눈이 뚱그레지며 물었다.
"왜 그러나? 이쁘지?"
하며 그는 풀없이 웃었다.
"응! 그만하면 되었어!"
"그게 내 애인이었다네!"
"그럼 그런 미인을 두구 왜 장가를 안 갔단 말인가?……그러나 그런 애인이 있었다는 것만 해두 자네에게는 명예일세."
하며 그의 친구는 커닿게 웃었다.
"옳으이! 명예일세, 나는 그 명예 때문에 살아가는 송장일세. 일평생 그 자랑이나 하고 돌아다니며 살까? 허허허. 허지만 어딜 가면 계집 없겠나?"
"그런 말 같지 않은 말은 그만두게. 그렇기루 말하면 이 세상에 연애하는 놈은 맨 미친 놈이게……."
"몰라! 몰라! 난 그런 이치 속은 처음부터 손방이니까…… 자, 들어가세, 오인(吾人)의 목적은 재어차처 (在於此處)다! 적어도 오늘만은 ……."
하며 그는 앞장을 서서 요릿집 문안으로 부리나케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가던 친구는 텅 빈 목소리로 껄껄 웃었다.
〈1924년〉
2016년 11월 27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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