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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륨을 아주 작게 하시고 읽어주시면.......
고달사지를 찾아가는 발걸음에 흥분이 묻어있었다. 그것은 언젠가 경복궁 뜰 옆에 서있던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의 모습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이나,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처럼 두 마리의 사자가 서로 배를 맞대거나 마주본 채 하늘을 향해 화사석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마리의 사자가 생소하게도 여유롭게 앉아서 받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서 경복궁 뜰로 옮겨졌는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이 있어야 할 위치를 상상해 보는 것 또한 나만의 즐거움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아,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뜰로 옮겨졌구나!
고달사지 석등(경복궁 뜰)
남한강 기슭을 따라 오르며 꺾어들자 여주 북내면의 혜목산이 나온다. 산세의 흐름에 따라 완만한 경사면에 잡풀 흩날리고 이리저리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는 고달사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나를 처음 반기는 것은 푸르죽죽한 비닐 천으로 뒤 덥힌 옛날의 절터였다.
벌써 몇 년째 이런 흉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안타까움에 마음이 아파왔지만 그것도 사람의 일이라 어쩔 수 없이 복잡 미묘한 관계가 성립되어 있을 수 있겠다. 얼마 전 들렸던 서산의 보원사지와 이곳 고달사지는 국가의 소유가 아니라 불교 조계종 소유라 아직 문화재청과 두 집단(?)의 사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어 여전히 분쟁중인가? 하며 스스로 위안 삼는다.
역시 이권이나 이견의 충돌이 생기면 시간은 흐르게 마련이며 그 사이에 낀 주체만 고통을 받는 시간이 길어 질 뿐이다. 끌끌끌~~
푸른 비닐 천까지도 빛이 바래가고 있구먼....... 두 집단의 대표는 당장 가위바위보를 해서라도 결정을 하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 깨어져 버려진 듯 놓여있는 이수
고달사. 통일신라 때 창건되어 고려 광종 때 까지 국가의 화엄종찰로 왕들의 보호를 받아왔으나 언제 어떤 아픈 사연으로 인해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이곳에 흩어진 석재들과 힘 있는 부도와 승탑, 그리고 우람한 이수와 귀부, 거대한 불좌대만이 그때의 화려했던 기억을 간간히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다만 나옹선사의 제자인 무학대사가 한때 고달사에 은신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하니 그것이 기록의 전부일 뿐이다.(네이버 검색)
폐사지, 나는 폐사지란 생각만으로도 가슴에 잔잔한 물결소리가 들려온다. 한없이 조용하고, 한적하며 때론 고독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그곳에는 아픔이 있고, 그것을 만회하려는 말없는 수다가 있다. 바람도 쉬어가기를 자처하는 곳이고, 시간이 멈추어진 찰나를 보는 듯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정지된 순간에 나 홀로 움직이는 즐거움이 있다.
고달사지는 ‘고달’이라는 석공이 이곳의 석재들을 모두 조각을 한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며 그 이후 고승이 되어 절집이름도 고달사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를 기다리던 아내와 아이들은 굶어서 죽었다는 아픔도 함께 전해져 오지만 그것으로 인내하기엔 힘겨운 우리 선조들의 생활이 고스란히 들려주는 것 같아 미련이 남는다. 구태여 굶어서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사실 관계를 떠나 굶어서 죽었다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행복한 결말로 이끌어 낼 수는 없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아사달과 아사녀처럼 애틋한 결말로 각색했더라면 어떠했을까? 과연 처자식을 굶어서 죽게 만들고 큰 스님이 되기까지 그간의 마음속 고통에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자꾸만 그의 상상이 머릿속에 잡혀 가슴이 아프다.
말자, 비좁아 터진 가슴으로 감히 그것까지 집어본다는 것은 화재꺼리를 찾아 쫒는 부나방과 다름이 없음이리.
이런저런 생각으로 폐사지에 든다. 이곳저곳에 널 부러져 있는 장대석과 기둥을 떠 받쳤던 주초들이 황량한 기운에 슬픔이 묻어있고, 앙상한 잡풀 건더기들만 이방인의 발길을 방해하고 있다.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가 빈 터를 깨우고, 붉게 익은 산수유 열매가 산자락에 가는 가을이 아쉬운 듯 마지막 색깔을 내고 있다.
처음 이방인을 맞이하는 것은, 보기에도 장엄한 기운이 담긴 불대좌였다. 사각의 대좌만 남아 있으니 이미 사라지고 없는 그 위에 모셔졌던 불상의 크기를 가늠해 보는 것도 답사의 매력이겠지만 어느 초야에 묻혀버렸거나 외국으로 밀반출 되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어느 강물에 수장되어 미륵이 하생할 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니 내 가슴에도 묻어만 둘 일이다.
* 불좌대 (높이 1.57m)
사각의 대좌는 온전하고 건강한 모습이며 넓은 지대석위에 모두 세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밑에서부터 하나하나 뜯어본다. 아랫돌에는 가로로 길게 사각으로 다듬어 한 면에 각각 네 개씩의 안상(眼象/코끼리 머리를 정면에서 본 모습, 코끼리 눈의 형상)을 음각해 놓았고, 그 위에 볼륨이 좋은 연꽃잎이 아래로 향하게 한 복련이 각 모서리에 하나씩을 두고 가운데 다섯 개씩 새겨 넣었다.
조각수법이 예사롭지 않아 위의 앙련과 함께 바라보노라면 방금이라도 연꽃이 피어날 때에 청량한 미성이 마음속에 떨어지듯 청령화성(聽령花聲)이 들리는 듯 하다. 아서라, 그것이 진정 내 것이라면 나는 이미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섰음이니 욕심도 이정도면 수준급이요, 불신과 의심을 가득 안고 믿음을 가진 내 마음의 위선과 허영이리라.
세 단의 굄석을 놓고 그 위에 가운데 돌 간주석(?)에는 단순하기 그지없이 커다란 안상이 사각의 틀 속에 하나씩 음각되어 있다. 단순하게 조각된 이것은 자신을 단순화함으로써 위아래에 피어있는 연꽃잎이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빈 여백으로 남아 주위의 아름다움이 더욱 빛나게 한다는 하심(下心)의 마음과 다름이 없음이다. 그 역할로 거침없이 눈길은 위로 향하니 편편하게 다듬어 불상을 올렸던 윗면이 아랫돌과 대칭되게 앙련을 조각해 놓았다. 이것 또한 층급받침이 세 개로 되어 있으니 간주석을 중심으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어 안정감이 더하다.
그 위에 올려졌던 불상 또한 편안하며 당당했으리란 생각이 들어 마음속 합장을 하고 한바퀴를 돈다. 보호용 푸른 철제울타리를 타넘어 손을 가만히 대어 이것을 다듬던 석공의 정성에서 그간의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었던 불심과 현실의 틈바구니 속에서 갈등하며 다독였을 석공 고달의 손끝을 더듬는다.
* 원종대사 헤진탑비 /귀부와 이수
고달사지에는 우리나리에서 가장 아름답고 힘이 있으며 우렁차기까지 한 귀부(龜趺)와 이수(螭首)가 있다. 이것이 신라고승 원종대사 혜진탑비의 귀부와 이수이다. 비신은 국립박물관에서 보관중이나 기억이 일천하니 각설하고, 이곳에 남아있는 아름다운 석재미술품만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바라본다.
마주하는 순간 근처의 원주 문막에 있는 거돈사지의 원공국사 승묘탑비의 조각수법과 참으로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공국사승묘탑비의 조각수법은 두깨가 얇고 아기자기하다면 이곳 고달사지의 원종대사혜진탑비의 귀부와 이수는 조각의 스케일이나 메스자체가 힘차고 시원시원하며 볼륨이 크다. 거대한 석재를 구해와 깊고 힘차게 정이질을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며, 그렇게 한 후에 부분으로 디테일 한 조각을 해 왔으니 그 깊이와 힘을 함께 느낄 수 있으며 어느 한 부분을 잘라 놓아도 하나의 완벽한 작품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그것을 바라보는 내 입에선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고려시대 석재품을 단순한 석탑으로만 얕보았던 내 생각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것이라 할 수 있어 부끄러우나 사실 반가웠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듯 하나 되새김하듯 하나씩 바라보는 재미 또한 만만치 않으니 오래도록 머물며 그것을 감상한다.
지대석과 귀부가 하나의 돌로 되어있으며 우람하고 힘 있는 용두에는 방금이라도 콧김이 새어나올 듯 하며 가지런한 이빨이 막 벌어지려는 찰나를 보는 듯 하다. 툭 튀어나온 왕방울의 눈과 옆으로 아가미가 활짝 펼쳐져 있고, 그 뒤로 깃털이 바람에 날리니 더욱 역동이적이나 다만 목이 짧아 움츠린 모습과 앞으로 삐져나온 발가락이 몸과 머리에 비해 다소 작게 표현되어있어 그것이 아쉽다.
거북의 등에는 육각갑(六角甲)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위로 향할수록 비신을 받치고 있던 직사각형의 연꽃비좌(碑座) 아래 눌린 듯 뭉친 갈기와 구름이 물결처럼 살아 움직이고 있어 용두와 구름과 조각 수법에서 고려초기의 힘을 느낀다.
그 위로 이수에는 각각의 모퉁이에 네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입에 문 채 구름을 타고 용트림을 하고 있다. 지금 막 구름을 뚫고 튀어 나올 듯 하며 비늘 하나까지 섬세한 조각과 서로 엉킨 모습의 그 깊이가 온 정성을 다한 모습이다. 이 또한 세월의 아픔 속에 오른 쪽 귀퉁이가 떨어지고 없음이 아쉬우나 이나마 있어 준 것이 감사하고 행복하다. 손으로 만지면 꿈틀 하고 살아 움직일 것 같아 자못 긴장한 마음에 자꾸만 손대고 싶은 욕심이 일었으나 보는 이가 있어 억지로 참는다.
늘, 돌아서는 발길은 아쉽기 마련이다. 그것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만남을 기약하며 이별을 고하는 연인들의 마음이 되는 순간과 서로 다르지 않음이다.
근처 버려져 있는 상처투성이의 귀부를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사진으로만 담고 만다.
하늘의 해는 구름이 덮고, 멈추었던 바람이 귀를 스치며 지나간다. 나도 바람을 따라서 혜목산 깊숙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그곳의 우리나라 국보4호라 명명된 부도를 만나기 위해서다.
길이 아닌 곳을 헤집고 억새우거진 터밭을 지나니 앞에서 놀란 장뀌가 괴성을 내며 하늘로 나른다. 미안타. 난 길을 두고 그들의 영역을 침범하여 놀라게 했으니 아마 오늘의 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겠구나!
역시 그곳은 길이 아니었다.
*그동안 뜸 했습니다.
미천한 몸이라 일년 중 이모작 중이여서 눈코 뜰 사이없이
정신까지 사납습니다. 우짭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해서, 잠시 짬을 내어 하나만 올립니다.
부디 건강하시옵고, 년말 행복한 시간들 되소서~~
첫댓글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고달사지 석등은 중앙박물관 복도에 잘 있습니다. 박물고나 명동 1번지에 자리잡고 있지요.
오랜만에 맛깔나는 초시님 글 봄서 느꼈네요~고즈넉한 나만의 세계도 빠져들고 싶음을요
고달사지부도는 어디다 두고 왔노? 안보고 왔더나?
씨뱅아 2편 있다^^*~ 니놈 보고싶네.....
↑해석이 필요한 대화.ㅎㅎ
고상한 취미를 연마하고 계시는 초시님...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초시햄...대구를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