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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벌 1부 4
어머니의 편지는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편지를 읽는 동안 한순간도 의혹이나 동요를 느끼지 않았다. 사건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결정되었다. 그것은 확고부동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따위 결혼은 시키지 않겠다. 루쥔 씨 같은 것은 될 대로 되라지!'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지 않느냐 말야'하고 그는 자기 결심의 성공에 벌써부터 짖궂은 승리감을 느끼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안 됩니다, 어머니, 안 돼요. 두냐, 내가 속을 줄 아니!....게다가 내 의견도 묻지 않고 나를 빼놓고 결정한 것을 사과하다니! 물론 그럴 테지! 이젠 혼담을 망쳐놓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어디 두고 보자, 되는지 안 되는지를! 그 변명이 참 그럴듯하군. 그이는 굉장히 바쁜 분이어서 역마차 안이나 기차 안에서라도 결혼식을 올려야 할 정도로 바쁜 분이다, 라고. 아니다, 두네치카, 빤히 들여다보인다. 네가 내게 할 말이 있다는 것도 무슨 뜻인지 나는 알 수 있다. 네가 밤새껏 방 안을 거닐면서 열심히 무엇을 생각했는지, 어머니 침실에 걸린 카잔의 성모상 앞에서 무엇을 기도했는지 나는 죄다 알고 있다. 골고다의 언덕에 오르자니 괴로울 수밖에. 흠....그러니까 완전히 결정을 보았단 말이지....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두냐의 본명), 그래, 너는 실무적인 사람이고 분별 있고 자기 재산을 가지고 있고 -자기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감명적이거든 - 두 군데나 직장을 나가고 새 세대의 신념에 공감하는 -이건 어머니의 말이지만- 더구나 너 자신의 관찰에 따르면 선량한 것 같은 남자에게 시집을 간단 말이지. 이 '것 같다'는 게 무엇보다 근사하군! 그 착실한 두네치카가 '것 같다'와 결혼한다니....훌륭해! 암, 훌륭하고말고!'
'....그런데 어머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새 세대란 말을 써 보냈을까? 단지 본인의 성격을 묘사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목적, 이를테면 내게 아첨을 해서 루쥔을 잘 보이게 하려는 속셈이었을까? 아아, 정말 교활하구나! 그리고 또 하나의 사정도 분명히 알고 싶다. 도대체 어머니와 두냐는 그날, 그날 밤에, 그리고 그 후 어느 정도까지 서로의 심정을 털어놓았느냐 말이다! 두 사람은 숨김없이 다 털어놓고 얘기한 걸까. 그렇잖으면 두 사람은 서로 한마음 한뜻임을 알아채고는 구태여 그런걸 입 밖에 내어 이러쿵저러쿵 얘기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말하는 것조차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걸까. 아마 그런 것 같다, 편지를 봐도 알 수 있거든. 어머니는 그 사내가 좀 까다로워 보였고, 사람이 너무 좋아서 자기가 느낀 대로 솔직히 두냐에게 얘기했겠지. 누이동생은 물론 화를 내고 불쾌한 듯 대답했을 테고. 당연하겠지! 고지식하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모든 일이 명백해 새삼스레 할 말이 없는데, 누군들 화를 안 내겠느냐고. 그리고 어머니는 또 뭐라고 썼지....두냐를 사랑해주어라, 로쟈, 그 애는 널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있다.....아들을 위해 딸의 희생을 동의했기 때문에 마음속으론 은근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가 보군. 우리의 희망, 우리의 전부라니....아아, 어머니!'....분노는 점점 더 심하게 그의 마음속에 끓어올랐다. 만약 지금 루쥔 씨를 만난다면, 당장 그 사내를 죽여버릴 것만 같았다!
'흠....그 말은 옳긴 하다.' 그는 회오리 바람처럼 머릿속을 맴도는 상념을 쫓으면서 생각을 계속했다.
'그 말은 올아, 확실히. 사람을 알려면 긴 안목으로 주의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루쥔 씨의 경우는 너무도 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척 바쁜 사람이고 선량한 것 같다니 말이다. 정말 웃기는군, 짐은 자기가 맡아서 큰 트렁크를 부쳐주겠다니 말야! 그러고 보면 선량하지 않다고도 할 수 없군그래. 그런데 이쪽 두 사람은, 신붓감과 어머니는 거적 씌운 농사꾼의 짐마차를 타고 가는 거야. 나도 그걸 많이 탔었지! 뭘, 상관없겠지. 겨우 90킬로밖에 안 되니까. 기차 정거장부터는 3등차로 편안히 가겠다니, 천 킬로 여정을 말이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지. 무엇이나 자기 분수에 어울려야 한다는 속담도 있으니까. 그러나 루쥔 씨,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어쨌든 그 애는 당신의 신붓감 아니냐 말이오....게다가 어머니가 연금을 저당으로 하여 여비를 꾸어 쓰려 한다는 걸 당신도 모를 리는 없잖소? 하기야 그것이 당신네들 공동의 장사 거래라면 이익도 같이 나누고 비용도 반반씩 물어야 하겠죠. 속담에 빵과 소금은 같이 먹어도 담배는 제 것을 피운다는 말이 있으니까. 과연 여기서도 실무가답게 두 사람을 속이고 있군. 짐을 부치는 운임은 여비보다 싸게 먹히고, 어쩌면 공짜로 부치는지도 모르니 말야. 왜 두 사람은 그것을 모를까? 일부러 모르는 체하는 걸까? 게다가 그것에 만족하고 있으니, 만족하고 있단 말야!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진짜 연극은 이제부터니,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치는군! 실제로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그 자의 인색함도 아니고, 욕심도 아니며, 전체적인 그 태도에 있는 거야. 결혼 후에도 죽 그런 태도로 나갈 테니까, 말하자면 이것은 예언인 셈이지....그런데 어머니는 왜 쓸데없이 돈을 쓸까? 무슨 돈이 있다고 페테르부르크까지 오신다는 걸까? 루블 은화 세닢이나 지폐 석 장쯤 가지고, 그 전당포 노파의 말마따나....흠! 게다가 어머니는 장차 페테르부르크에서 어떻게 살아갈 작정이실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결혼 후엔 비록 잠시라도 두냐와 같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계시면서? 그 친절한 사나이가 아마 슬쩍 귀띔을 했음에 틀림없다. 하기야 어머니는 양손을 내저으며 절대로 같이 살지 않겠다고 하시지만, 도대체 어머니는 무엇을, 누구를 의지하려는 것일까? 아파나시 이바노치의 빚을 뺀 연금 120루블? 그렇지 않아도 결울철엔 잘 안 보이는 늙은 눈을 상해가면서 목도리를 짜고 수를 놓고 계시면서. 그러나 편물이나 자수로는 연금 120루블에다 고작 1년에 20루블쯤 보탤 정도다, 뻔한 거야. 그렇다면 역시 루쥔 씨의 훌륭한 마음씨를 의지하고 있는 거다. 자기 쪽에서 먼저, 제발 같이 사십시다, 라고 나오기를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걸! 아름다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최후의 순간까지도 공작 털로 상대방을 장식해놓고는 좋은 면만 보려 하고 나쁜 면은 보지 않으려 하거든. 그리고 일의 진상은 절대로 말하려고 하지 않는단 말이야. 이런 점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군. 결국 아름답게 장식된 인간이 스스로 정직한 자를 웃음거리로 만들 때까지는 한사코 진상을 숨기려 드는 법이지. 그건 그렇고 루쥔 씨는 훈장을 가지고 있을까? 암, 틀림없이 단춧구멍에 안나 훈장이 달려 있을 거야. 내기를 해도 좋아, 그자는 그것을 청부업자나 장사꾼들의 연회에 달고 다니겠지. 자기 결혼식에도 달 거야! 그러나 그까짓 녀석 아무려면 어때......'
'.....그런데 어머니는 그런대로 좋다고 하자, 원래가 그런 분이니까. 그러나 두냐는 어떻게 된 거야? 두네치카, 귀여운 내 누이동생,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너를 만났을 때 너는 벌써 스무 살이었다. 그러니 나도 네 성격은 잘 알고 있어. 어머니는, 두네치카는 무엇이라도 참을 수 있다고 쓰고 있다. 나는 2년 전부터 그런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의 2년 반 동안 나는 줄곧 두네치카는 무엇이라도 참을 수 있다는 것만을 생각해왔다. 스비드리가일로프 씨와 그 때문에 생긴 많은 결과조차 참아냈으니까, 사실 어떠한 일도 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어머니와 함께, 가난에서 구해준 남편 덕을 보게 되는 아내의 장점을 운운하는 법칙을 확언한, 그것도 거의 초대면 때부터 그러한 루쥔 씨도 참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설사 그자가 분별 있는 위인인데도 어쩌다가 그런 실언을 했다고 하자, 아니 어쩌면 실언이 아니라 오히려 사전에 자기 태도를 명백히 밝혀두려고 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두냐는, 두냐는 어떻게 된 거냐? 그 애는 남자의 인품을 잘 알고 있을 게 아닌가. 더욱이 한평생을 같이 살 사내니까. 그 애는 검은 빵을 씹고 물을 마시며 살더라도 결코 자기 마음을 팔 아이가 아니다. 안일한 생활을 위해 정신적 자유를 팔 여자가 아니야. 루쥔 씨는커녕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을 몽땅 준다 해도 그럴 애가 아니다. 더군다나 루쥔 씨 같은 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아니, 내가 아는 한 두냐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그리고....지금도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그건 말할 필요도 없다! 스비드리가일로프 부부 댁에선 괴로웠을 테지! 평생을 200루블짜리 가정교사로 떠돌아다닌다는 것 역시 고달픈 노릇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내 동생은 제 몸 하나의 이익을 위해 존경하지도 않고 상대조차 안 되는 사내와 영원히 운명을 맺고 자기 영혼이나 도덕감에 먹칠을 하느니, 차라리 식민지의 농장주한테 노예로 달려가든가 발트 해 연안의 독일인한테 식모로 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여자다! 그리고 설사 루쥔 씨가 순금이나 다이아몬드로 된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의 합법적인 첩이 되는 것을 승낙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왜 승낙했을까? 도대체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 수수께끼의 열쇠는 어디 있는가? 뻔한 일이다. 자기를 위해, 자기 안일을 위해, 아니 그뿐만 아니라 자기 몸을 사지에서 구하기 위해서라도 결코 자기를 팔 아이는 아니지만, 남을 위해 기꺼이 자기 몸을 팔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경모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팔려는 거다! 바로 여기에 열쇠가 있다. 오빠를 위해, 어머니를 위해 팔려고 한다! 모든 것을 팔아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오오,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의 도덕감도 억누를 것이고, 자유도, 안일도, 끝내는 양심까지도 죄다 넝마 시장에 내놓고 만다! 자기 일생 같은 건 아랑곳도 없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지면 그만이다. 뿐만 아니라 제멋대로 이유를 만들어 제수이트파 흉내를 내면서 그것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량한 목적을 위해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며 잠시나마 스스로를 위로하고 설교도 하리라. 우리는 이런 인간인 것이다. 만사는 대낮처럼 명백하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는 로지온 로마느이치 라스콜니코프가 관계자이며, 더구나 그 주인공이라는 것도 명백하다. 그것도 좋다고 하자. 오빠의 행복을 계산하고, 대학도 계속 다닐 수 있게 하고, 법률사무소의 공동 경영자로 만들어주고, 일생의 운명을 보증할 수도 있다. 그래서 후에는 아마도 명예에 싸여 사람들이게서 존경받는 부자가 될 지도 모른다. 또는 훌륭한 인간으로 평생을 마칠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렇다, 문제는 로쟈인 것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로쟈, 외아들 로쟈! 이런 외아들을 위해서라면 비록 그토록 훌륭한 딸일지라도 희생시켜서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으랴! 오오, 얼마나 갸륵하면서도 그릇된 생각들이냐! 아니, 그러다가는 우리도 소네치카의 운명을 답습할지 모른다! 소네치카, 소네치카 마르멜라도바, 이 세상이 계속된는 한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소네치카여! 당신네들 두 사람은 희생이라고 하는 것을, 희생의 참뜻을 충분히 생각해본 일이 있는지? 어때? 힘에 겹지 않은지? 무슨 이득이 있지? 이치에 맞는 걸까? 두네치카, 너는 알고 있니? 소네치카의 운명은 루쥔 씨와 맺어지려는 네 운명에 비해 조금도 더럽지 않다는 것을? 그 애한테는 사랑이란 있을 리 없다고 어머니는 쓰고 있다. 그러나 만약 사랑은 고사하고 존경조차 없다면, 아니 그뿐 아니라 혐오와 멸시와 증오가 있다면, 그때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때는 너도 역시 산뜻한 옷차림을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그렇지 않니, 응? 너는 알겠지, 알 수 있겠니, 그 산뜻한 옷차림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니, 루쥔 부인의 산뜻한 옷차림은 소네치카의 산뜻한 옷차림과 같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더 더러운, 더 천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두네치카, 네게는 뭐니뭐니 해도 다소 편하게 살려고 하는 타산도 숨어 있지만, 소네치카에게는 그야말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이니 말이다! 그 산뜻한 옷차림이란 건 비싸게 먹힌다, 두네치카. 그런데 만약 나중에 힘에 겨워 후회하게 된다면? 그때 그 슬픔은 얼마나 클 것이며, 탄식과 저주, 그리고 남몰래 흘리는 눈물은 얼마나 많겠느냐! 너는 마르파 페트로브나와는 다르니 말이다. 그때 어머니는 어떻게 되겠니? 어머니는 벌써부터 불안을 느끼고 번민하고 계신데, 만약 만사가 분명해지는 날엔 어떻게 되겠느냐 말이다. 그리고 나는 또 어떻게 되고?....정말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나는 너희들의 희생 따윈 바라지도 않는다. 두네치카, 그리고 어머니, 나는 싫소!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런 짓은 시킬 수 없소. 암, 시킬 수 없고말고!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그는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오며 걸음을 멈추었다.
'시킬 수 없다고? 그럼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넌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금지시키겠다고? 그러나 네게 그럴 권리가 있느냐 말야? 그런 권리를 갖기 위해 너는 그들에게 어떤 약속을 해줄 수 있느냐? 대학을 졸업해서 직장을 얻으면 자기 운명의 전부를, 자기 장래의 모든 것을 그들에게 바치겠다는 거냐? 그런 말은 싫증이 나도록 들었다. 떡 주는 사람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려는 격이지 뭐냐? 어쨌든 지금 당장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당장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되지 않느냐 말야? 넌 그걸 알고 있느냐? 그런데도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말이다. 너는 도리어 그들을 착취하고 있지 않느냐 말이다. 그들의 돈은 연금 100루블과 스비드리가일로프네 집에서의 시중과 저당을 담보로 마련한 것이니 말이다! 스비드리가일로프나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바흐루신 같은 무리에게서 너는 어떻게 그들을 지켜낼 작정이냐? 미래의 백만장자, 그들의 운명을 지배하는 제우스 신? 10년 후에 보자는 건가? 그러나 10년이 지나는 동안 어머니는 목도리를 짜는 일과 눈물 때문에 아마 장님이 되고 말 게다 아니, 그뿐 아니라 영양실조로 꼬장꼬장 여위고 말 게다. 그리고 누이동생은 10년이 지난 뒤, 아니 그 10년 동안 어떻게 될지 생각해봐라. 어때, 이제 알겠느냐?'
이렇게 그는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리고 일종의 쾌감까지 느끼면서 이러한 물음으로 스스로를 우롱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 갑자기 일어난 것도 아니며, 오래전부터 앓고 있는 낡은 병증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 문제들은 그를 괴롭히기 시작해 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현재의 이러한 괴로움이 그의 마음에 생긴 것은 무척 오래된 일인데, 그것이 차차 자라고 쌓이고 쌓여 최근에 이르러서는 무섭고도 기괴한 환상적인 의문이 되어 완전히 성숙하고 응결한 것이다. 이 의문은 어쩔 수 없는 해결을 요구하면서 그의 감정과 이성을 괴롭혀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받은 어머니의 편지는 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타격을 주었다. 이제는 이미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수동적으로 괴로워하고 있을 때가 아님을 똑똑히 직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곧, 한시바삐 무엇이든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전적으로 인생을 거부해야 한다!' 갑자기 그는 광분에 사로잡혀 외쳤다. '있는 그대로의 운명을 한평생 순순히 변함없이 받아들임으로써 활동하고 살고 사랑하는 일체의 권리를 단념하고, 자기 내부의 모든 것을 짓눌러 죽여버려야 한다!'
'아시겠어요, 젊은 양반, 어디로도 갈 데가 없다는 그 뜻을 아시겠느냐 말이오?' 어제 마르멜라도프의 질문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어떠한 인간이든 적어도 발길 돌릴 데쯤은 있어야 하잖겠어요.....'
그는 갑자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역시 어제와 같은 상념이 하나 또다시 그의 머릿속에서 번쩍였다. 그러나 그가 몸을 떤 것은 이 상념이 번쩍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즉 그는 이 상념이 반드시 '번쩍일'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예감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상념은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한 달 전까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것은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지금은 갑자기 공상이 아니고 뭔가 새롭고 무서운, 전혀 생소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자신도 대번에 그것을 의식했다. 그는 머리를 호되게 얻어맞은 듯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얼른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는 무언가를 찾았다. 어디든 앉고 싶어 벤치를 찾고 있었다. 때마침 K가로수 길을 걷고 있었다. 백 보쯤 앞에 벤치가 보였다. 그는 되도록 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도중에 일어난 사소한 사건 때문에 잠시 동안 그의 주위는 그곳으로 쏠리고 말았다.
벤치를 찾다가 그는 스무 걸음쯤 앞에서 걸어가는 어떤 여인을 보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여태까지 눈앞에 어른거리는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그 여인에 대해서도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집에까지 돌아와서도 자기가 지나온 길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미 그렇게 걷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앞에서 걷고 있는 여인은 처음 본 순간부터 이딘지 이상한 데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그의 주의는 그녀에게 끌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고 어쩐지 불쾌하기까지 했으나, 차츰 강한 호기심으로 변해갔다. 그 여자의 어디가 이상하게 보이는 것일까, 그것이 별안간 알고 싶어졌다. 첫째, 그녀는 아주 젊은 처녀인 모양인데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 모자도 쓰지 않고 양산도 안 가지고, 장갑도 안 끼고, 우스꽝스럽게도 두 손을 흔들며 걷고 있었다. 그녀는 가볍고 부드러운 비단옷을 입고 있었으나, 그것 역시 괴상한 옷차림이어서 단추도 아무렇게나 채우고 뒤 허리께에서 스커트 위쪽 부분이 몹시 찢겨 있는 데다가 그 찢어진 조각이 뒤로 늘어져서 흔들흔들 흔들리고 있었다. 드러난 목덜미에는 조그만 목도리가 걸쳐져 있었으나 그것도 비뚤어져 옆으로 처져 있었다. 더욱이 처녀는 비틀비틀 넘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마침내 이 뜻밖의 만남은 라스콜니코프의 주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는 벤치 바로 옆에서 처녀를 따라잡았으나, 벤치에 이르자 그녀는 한쪽 끝에 털썩 쓰러지더니 등받이에 머리를 던지고 기진맥진한 듯이 눈을 감았다. 그 모양을 보고, 처녀가 몹시 취했다는 것을 그는 금방 알아챘다. 이런 꼴을 보니 이상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그는 자기 눈을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의 앞에 있는 여자는 몹시 젊어 보여서, 기껏해야 열대여섯 살밖엔 안 돼 보이는 조그마한 금발 머리의 아름다운 얼굴이었으나, 홍당무처럼 빨개진 그 얼굴은 어딘지 좀 부어오른 것 같았다. 처녀는 거의 의식이 없어 보였다. 한쪽 다리를 다른 다리 위에 포개놓고 있었으나, 그 얹힌 무릎이 보통보다는 훨씬 높았다. 모든 점으로 보아 그녀는 자기가 한길에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라스콜니코프는 앉지도 않고 자리를 뜨려고도 하지 않은 채 망설이듯 그녀 앞에서 있었다. 이 가로수 길은 언제나 한적한 곳이지만, 지금 1시가 지난 무더운 이맘때는 거의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열댓 걸음쯤 떨어진 한길 저쪽에 한 신사가 서서, 무슨 목적을 품고 처녀에게 가까이 오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아마 그도 멀리서 그녀를 발견하고 뒤를 쫓아온 것이 틀림없었으나, 라스콜니코프가 방해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이쪽에 눈치를 채이지 않으려고 애쓰기는 했으나, 끊임없이 라스콜니코프에게 원한에 찬 시선을 던지면서, 거지 같은 룸펜 녀석이 가버리고 빨리 자기 차례가 와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사태는 명백했다. 신사는 서른 안팎으로 보이는 유들유들하게 살찐 사내였는데, 핏속에 우유라도 섞인 듯이 윤기 있는 장밋빛 입술 위에 콧수염을 기르고,아주 멋진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왈칵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는 어떻게든 이 유들유들한 멋쟁이 녀석을 모욕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잠시 처녀를 내버려두고 신사 쪽으로 다가갔다.
"이봐, 스비드리가일로프! 당신은 여기 무슨 볼일이 있소?"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 격분한 나머지 거품이 이는 입가에 냉소를 띠며 소리쳤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신사는 미간을 찌푸리고 거만하게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위엄 있게 반문했다.
"어서 꺼져버리란 말이오!"
"뭣이, 건방진 놈 같으니!"
이렇게 말하고 그는 단장을 휘둘러 올렸다. 라스콜니코프는 이 덩치 큰 신사가 자기 따위는 둘쯤 문제없이 당해낼 수 있다는 것도 생각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그를 잡았다. 그들 사이에 순경이 끼어든 것이다.
"그만들 하시오. 한길에서 싸움을 하면 안 됩니다. 대체 왜들 이러시오? 자넨 뭔가?" 라스콜니코프의 남루한 옷차림을 보자, 순경은 준엄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라스콜니코프는 순경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희끗희끗한 콧수염과 구레나룻을 기른, 이해심 있어 보이는 눈을 가진 늠름한 군인 타입의 사나이였다.
"마침 잘 오셨소." 그는 순경 손을 잡으며 외쳤다. "나는 대학에 다니던 라스콜니코프란 사람이오....당신도 사정을 알 수 있을 거요." 그는 신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리 가십시다. 보여드릴 게 있으니......."
이렇게 말하고 그는 순경의 손을 붙잡고 벤치 쪽으로 끌고 갔다.
"자, 보십시오. 완전히 취했습니다. 방금 이 가로수 길을 걸어왔답니다. 어떤 여자 인지는 몰라도 직업적인 여자 같지는 않군요. 필시 어디서 강제로 술을 먹은 다음 속아 넘어간 게 분명합니다....처음으로 말입니다.....아시겠죠? 그러고는 이렇게 거리로 쫓겨난 거예요. 보십시오, 이 찢어진 옷을, 그리고 이 옷 입을 꼴을. 이건 누가 입혀준 것이지 자기 손으로 입은 게 아닙니다. 서투른 남자의 손으로 입힌 게 뻔합니다. 그럼 이번엔 이쪽을 보십시오. 내가 지금 싸우려고 한 이 멋쟁이는 생면부지의 사람이지만, 길에서 술에 취해 정신없는 이 처녀에게 눈독을 들이고, 처녀가 이런 꼴을 하고 있으니까 접근해서 제 손에 한 번 넣어보려 하고 있는 겁니다. 어디론가 끌고 가려는 거죠....그게 틀림없습니다, 틀림없어요. 내 눈으로 똑똑히 봤지만, 저자는 이 처녀를 지켜보며 눈독을 들이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방해가 되니까 빨리 가버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저자는 지금 좀 떨어져서 담배를 빠는 시늉을 하고 있군....어떻게 해서든지 저자한테 이 처녀를 넘겨주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집에까지 데려다 줘야 해요. 어떻게 좀 생각해주십시오!"
순경은 곧 모든 것을 이해하고 납득했다. 뚱뚱한 신사에 대해서는 명백했으므로 남은 것은 처녀 문제뿐이었다. 순경은 좀 더 찬찬히 보려고 처녀에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동정하는 빛이 나타났다.
"아, 정말 가엾군!" 그는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 어린애인데, 속았군. 틀림없어. 이봐요, 아가씨!" 그는 처녀를 부르기 시작했다. "집은 어디요?" 처녀는 뿌옇게 흐려진 눈을 뜨고 질문하는 사람의 얼굴을 멍청히 바라보더니,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순경 아저씨"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말했다. "자, (그는 호주머니를 뒤져 20코페이카를 끄집어냈다. 마침 돈이 있었다.) 이걸로 마차를 잡아서 마부더러 집까지 데려다 주라고 일러주시오. 주소만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는데!"
"아가씨! 아가씨!" 돈을 받아 들자 순경은 다시 묻기 시작했다. "곧 마차를 잦ㅂ아서 집까지 데려다 드리겠소. 집은 어디요? 예? 어디 사시오?"
"저리 가!....귀찮아!"
"참, 이거 큰일 났군! 젊은 아가씨 부끄럽지도 않소, 이게 무슨 꼴이오!" 그는 겸언쩍어하기도 하고, 동정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면서 다시금 머리를 흔들었다. "이거 야단났군!" 그는 라스콜니코프를 돌아보더니 다시 한 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세히 훑어보았다. 이렇게 남루한 옷차림을 한 주제에 남에게 돈을 내놓는 것이 아마 이상했던 모양이다.
"당신은 멀리서 이 두 사람을 발견했소?" 하고 순경은 라스콜니코프에게 물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처녀는 가로수 길을 비틀거리며 내 앞을 걷고 있었어요. 그런데 벤치까지 오더니 별안간 쓰러져버리더군요."
"정말이지 요즘 세상엔 별의별 추태가 다 있어요! 이렇게 어린 처녀가 벌써 술에 취해 다니고 있으니! 속아 넘어갔을 겝니다, 틀림없이! 이 찢어진 옷을 좀 보시오.... 참 타락한 세상이란 말이야!....집안은 좋은가 본데, 아마 지금은 몰락한 가정인가 보군요....요즘은 이런 게 많아졌거든. 꼴을 보니 귀엽게 자란 좋은 집안 딸 같은데 말야...."
그는 또 한 번 처녀에게 허리를 굽혔다. 혹시 그에게도 이런 딸이 있는지 모른다. 마치 지체 놓은 집안의 딸처럼 귀엽게 자란 듯 교양 있는 체하고 온갖 유행을 좇기를 좋아하는 딸이......
"무엇보다 중요한 건"하고 라스콜니코프는 혼자 몸이 달았다. "어떻게 해서든 저 악한한테 넘겨주지 말아야 합니다! 저자는 이 처녀를 다시 욕보이려 하고 있어요. 저 자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뻔합니다. 보세요, 저 악당은 물러가려고도 하지 않아요!"
라스콜니코프는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똑바로 신사 쪽을 가리켰다. 신사는 이 말을 듣고 화를 내려다, 생각을 고쳐먹고 경멸하는 시선을 던졌을 뿐이다. 그러고는 천천히 열 발짝쯤 물러서더니 다시 멈추었다.
"저런 사람에게 내주지 않을 순 있습니다만"하고 하사관 출신인 경관은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 "단지 어디로 데려다 줘야할 지 그것만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렇잖으면...아가씨! 아가씨!" 그는 다시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소녀는 눈을 번쩍 뜨고 물끄러미 상대방을 바라보더니, 무언가 알아차린 듯 벤치에서 일어나 온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제기랄, 뻔뻔스런 놈들이 아직도 날 쫓아다니는군!" 그녀는 다시금 한 손을 내젓고 중얼거렸다. 그녀는 재게 걸음을 옮겼으나, 여전히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멋쟁이도 가로수 길 건너편을 걸으며 처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뒤를 따르고 있었다.
"염려할 건 없소. 절대 안 내줍니다." 콧수염을 기른 순경은 단호히 말하고 두 사람을 뒤쫓았다. "아무튼 타락한 세상이야!"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소리를 내어 되풀이 했다.
이 순간 라스콜니코프는 무엇인가에 쿡찔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순식간에 기분이 홱 뒤집히는 듯했다.
"이거 보시오!" 그는 뒤에서 콧수염 순경에게 소리쳤다.
순경은 뒤돌아보았다.
"놔둬요! 참견할 것 없어요! 내버려둬요! 실컷 재미 보라고 하시오. (그는 멋쟁이를 가리켰다.) 당신이 끼어들 필요가 뭐요?"
순경은 영문을 몰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라스콜니코프는 웃음을 터뜨렸다.
"쳇!" 하고 순경은 손을 크게 내젓고는 멋쟁이와 처녀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아마 라스콜니코프를 미친놈 아니면 그보다 더한 사람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내 돈 20코페이카만 없어져버렸군.' 혼자 남게 되자 라스콜니코프는 씹어 뱉듯이 중얼거렸다. '저놈한테서도 받으라지. 그리고 저 처녀를 놈에게 내주면 그만이야. 그것으로 끝나는 거야....그런데 나는 무엇 때문에 동정을 베풀었지! 나 같은 게 남을 돕다니? 내게 그럴 권리가 있을까? 그들은 서로 살아가며넛 먹고 먹히는 거야! 그것이 내게 어쨌단 말이냐? 무엇 땜에 나는 그 20코페이카를 선뜻 내주었을까? 아니, 그게 내 돈이었나?'
이런 괴이한 생각에도 그는 괴로워서 못견딜 지경이었다. 그는 텅 빈 벤치에 걸터 앉았다. 머릿속은 산란하기만 했다. 이럴 때일수록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모든 것을 잊고 푹 쉬고 나서 새롭고 산뜻한 기분으로 다시 출발하고 싶었다.
'가엾은 처녀군!' 텅 빈 벤치 한 귀퉁이를 바라보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이윽고 정신이 들면 눈물을 흘릴 테지. 그러는 사이에 어머니도 알게 되고...처음엔 그저 손으로 맞다가 나중엔 회초리로 얻어맞게 되어 아픔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어쩌면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어쩌면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아니, 쫓겨나진 않아도 어차피 다리야 프란초브나같은 무리가 냄새를 맡게 되면 이 처녀도 여기저기 드나들게 되겠지....그다음 곧 병원을 찾을 거야, 이런 일은 극히 결백한 어머니 슬하에 살면서 몰래 나쁜 짓을 하는 무리에게 흔히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그다음엔....그다음엔 또 병원....술....술집....그리고 또 병원....이렇게 2,3년이 지나노라면 폐인이 되고 말 게다. 그래서 그녀의 생애는 겨우 열 여덟이나 열아홉으로 끝나고 마는 거야....나는 지금까지 그런 여자를 수없이 보아왔다. 그들은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던가? 뭐, 모두 저렇게 해서 그렇게 되는 거지....쳇! 될 대로 되라지! 그것은 필연적인 일이라고들 말한다. 해마다 그만한 퍼센티지는 나오게 마련이라니까....가소롭다. 필시 다른 사람들의 순결을 지키고,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겠지. 퍼센티지! 정말 근사한 말이군. 그럴싸한 과학적인 말이야. 퍼센티지, 이렇게 한마디 해두면 아무것도 근심할 필요는 없으니까. 이것이 만약 다른 말이라면, 그땐 아마....이렇게 안심하고 있지는 못할 게다....그러나 만약 두네치카가 그 퍼센티지에 들어간다면! ...이쪽이 아니라 다른 쪽의 퍼센티지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문득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상하다. 무슨 볼일이 있어서 나오긴 했는데. 편지를 읽고 나서 나왔지...아, 그렇지, 바실리예프스키 섬의 라주미힌한테 가는 길이지, 그렇다, 이제야 생각나는군. 그런데 무슨 일로 그 친구한테 가려 했지? 어째서 이런 때 라주미힌한테 갈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을까? 나도 모를 일이야.'
그는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라주미힌은 대학 시절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미리 말해두지만, 라스콜니코프는 대학에 다닐 때 친구라곤 거의 하나도 없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피해서 아무도 찾아다니지 않았고, 또 남이 찾아 오는 것도 싫어했다. 그래서 친구들도 이내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는 전체적인 회합에도, 친구끼리의 모임이나 놀이에도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 때문에 그는 존경을 받았으나, 아무도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몹시 가난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오만하고, 비사교적이고, 마음 속에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일부 친구들이 보기에, 그는 마치 자기들을 어린애로 취급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교양도 식견도 신념도 그들보다는 뛰어났으며, 그들의 신념이나 취미를 저급하게 취급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라주미힌과는 어째선지 이상하게도 뜻이 맞았다. 뜻이 맞았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보다 흉허물 없이 터놓고 지낼 수 있었다. 하기야 라주미힌하고도 그 이상의 관계를 가질 수 있었지만, 그는 유달리 쾌활하고 시원스런, 단순할 만큼 선량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이 단순함 속에는 깊이와 위엄이 숨어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모두 그것을 이해하고 그를 사랑했다. 그는 때로 바보처럼 보이는 수도 있었으나 상당히 영리한 편이었다. 그 풍채도 인상적이었다. 키가 크로 마른 데다가 검은 머리에 언제나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난폭한 짓을 하곤 해서 장사로 통했다. 한번은 밤의 연회석상에서 6척이 넘는 거구의 문지기를 한 대에 때려 누인 일도 있었다. 술을 한없이 마실 수도 있으며, 조금도 입에 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따금 지나친 장난도 했으나, 장난을 전혀 하지 않고 참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라주미힌의 특징은, 어떠한 실패를 해도 끄떡없고 아무리 곤경에 빠져도 절대 기죽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는 지붕 위에서도 살 수가 있고, 지옥과도 같은 굶주림이나 모진 추위도 능히 참을 수가 있었다. 그는 몹시 가난했다. 그는 완전히 혼자 힘으로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해서 돈을 버어 자기 생활을 지탱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일하기만 하면 퍼낼 수 있는 재원을 얼마든지 알고 있었다. 어느 해인가는 겨우내 방에 불을 때지 않고 지낸 적도 있는데, 추운 편이 잠이 잘 온다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지금 그는 하는 수 없이 대학을 쉬고 있지만, 그것도 오랫동안이 아니고, 다시 학업을 계곳할 수 있도록 사태를 회복하려고 열심히 서두르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벌써 넉 달 동안이나 그에게 가지 않았고, 라주미힌도 라스콜니코프의 하숙조차 모르는 형편이었다. 두어 달쯤 전에 한 번 그들은 거리에서 만났으나, 라스콜니코프는 외면을 하고 그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일부러 반대쪽으로 건너가버렸다. 라주미힌도 그를 보긴 했으나, 친구의 마음을 흔들어놓지 않으려고 그대로 자나쳐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