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 장선희
커피 냄새는 화약 냄새를 외
우리는 붉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토마토에 놀러 온 저녁이 일몰 쪽으로 수줍어했습니다
지금은 저녁별이 태어날 시간,
포성 전의 고요를 야식으로 먹기 위해
배는 조금 비워둡니다
국경 너머로 순찰 나간 철모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이와 여자는 표류하는 나뭇잎 위에 안전하게 태웠습니다
풍랑 사이를 뚫고 가는 건, 아이들의 웃음입니다
어디든 숨을 곳이 없습니다
평화라는 유행어는 언제쯤 전역할까요
포성이 길어질수록 전쟁도 길어지겠지요
발포 버튼을 어느 손가락이 눌렀습니까?
아이와 여자들은 라일락 샴푸를 꼭 쓰고 싶었습니다
전쟁을 알리는 자막들이 조명탄처럼 떴다 사라집니다
누군가 국물이 먹고 싶었던 걸까요 펄펄 끓는 물, 당신의 팔뚝에 흉터 자국이 늘었습니다
달빛이 죽은 탱크를 밟고 지나는 동안에도 커피 냄새는 화약 냄새를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허수아비를 만듭니다
사람을 죽게 할 순 없으니까요
반려동물을 보살피던 가스레인지가 화력을 잊은 지 오랩니다
안전핀을 뽑은 거친 손이 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구멍 난 탱크는 누가 잃어버린 군화입니까?
한쪽이 심하게 눌린 포화는 커피 냄새를 떠올리는 중입니다
-----------------------------------------------
알리만다 꽃그늘
여자의 목은 아주 길었습니다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는 이유는 노란 알리만다 꽃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여자의 목은 꽃그늘보다 서늘하고
저녁 바람보다 불안해서
가슴에 노란 단추를 자꾸 매만지게 합니다
노란색은 아름답고 노란 꽃은 슬픕니다
꽃그늘의 무게가 바위처럼 무거워집니다
사방의 꽃나무들이 숨쉬기를 하고
여자는 노랑 부리 앵무새를 손바닥에 올리고
나를 바라봅니다
앵무새는 어여쁜 털빛이라 쓰다듬고 싶어집니다
여자는 액자에서 자신을 꺼내 달라 소리치는 걸까요
그녀의 긴 목은 꽃그늘만큼 조용합니다
알리만다 노랗게 물들이고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계절은 어디서 올까요
가끔 그림 속 여자를 떠올리면
노랑만 따라 나옵니다
앵무만 날아 파랗습니다
꽃 모양은 잊혀지고 색깔만 선명히 남는
아주 이상한 그림이 나의 방에 걸려 있습니다
-----------------------------
장선희
2012년 <웹진 시인광장>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월명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크리스털 사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