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배우이자 영화감독, 제작자.
생애
어머니를 6살 때 여의었고 요리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여러번 이사를 다녀서 친구가 없었으며, 가정교육도 제대로 못 받아서 오랫동안 양치질하는 법도 몰랐고 통조림 같은 인스턴트로 끼니를 때웠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 학교 연극 동아리에서 연기를 시작하였다. 고등학생 시절 공부를 워낙 못 해서 그냥 하버드, MIT 같은 명문대에 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으로 마구마구 원서를 보내 장렬한 올킬을 맛봤다고 한다. 물론 그가 대학 진학을 하던 시절엔 원서 접수비가 거의 공짜에 가까웠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돈 버리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입학한 학교가 채벗 커뮤니티 칼리지[9]이고, 여기서 이수한 학점으로 새크라멘토 주립대 영화전공으로 편입했다고 한다. 다만 현장이 좋다는 이유로 중퇴했다.
연기 경력
1980년 호러 영화 《어둠의 방랑자》(He Knows You're Alone. 해당 제목은 국내 비디오 제목)가 데뷔작이었다. 이 작품에선 조연으로 나오지만 그래도 그의 성실한 모습을 본 제작진이 분량을 늘려주고 조지 클루니처럼 이런 장르 데뷔작에서 허무하게 죽는 배역도 아닌 안 죽는 배역으로 나오며 화면에 비치는 시간이 약 5분 정도는 된다.[10] 평은 그냥 그런 스릴러 호러 영화라는 평이지만 25만 달러 저예산 영화로 만들어져 490만 달러 대박을 거둬들였다.
이후로 TV 드라마와 TV 영화에서 조연을 맡았지만 작품 섭외가 없어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어느 인어 영화를 찍으려던 제작진이 원래 섭외하려던 배우에게 계속 거절당하자 무명 배우였던 톰 행크스에게 제안을 보냈다. 이렇게 하여 나온 1984년 영화 《스플래시》에서 대릴 한나와 주연 배우로 나와 흥행에 성공했다. 이후 한동안 가벼운 코미디 영화 위주로 출연했다. 스플래시 다음 출연작인 총각파티(Bachelor Party,1984)는 700만 달러로 만들어져 3980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벌어 성공했으며,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정확히는 그가 소유한 앰블린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머니 핏》(1986)도 1,000만 달러로 만들어서 5,000만 달러가 넘는 흥행 성공을 거둬들였다. 그러다가 1986년엔 전쟁 로맨스물인 Every Time We Say Goodbye (1986)에서 주연으로 나왔는데 이스라엘 자본으로 만들어진 저예산 영화였다. 이 작품은 370만 달러로 만들어졌는데 30만 달러조차 못 벌면서 망했다. 그나마 제작비가 저예산이라 큰 손실은 없었지만 톰 행크스는 다시 코미디 영화로 돌아갔다.
그 다음해에 주연을 맡은 코미디 수사물인 드라그넷(1987)이 흥행에 성공했다. 1988년에 개봉한 빅도 흥행에 성공했는데, 천만 달러를 넘긴 제작비로 만들어져서 그에게 처음으로 북미에서만 1억 달러 대박 흥행을 거둬들여 흥행배우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 행크스의 배역은 해리슨 포드에게 먼저 섭외가 갔는데, 노안이라는 이유로 톰 행크스가 최종 캐스팅된 것이었다. 빅 덕분에 행크스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13]
물론, 이 시절에도 흥행 실패작도 있었는데, 코미디 영화 <펀치 라인>(1987)에서 주연으로 나왔지만 이 영화는 흥행에서 실패했다.[14] <펀치 라인>도 평단의 평은 좋은 영화였다.<펀치 라인>은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의 고뇌를 그린 드문 작품으로 행크스의 진지한 연기를 볼 수 있는 좋은 영화다.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았지만 관객들이 톰 행크스에게 기대한 것은 어둡거나 진지한 드라마가 아니었다는 점이 영화의 패인이었다. 그래도 곧바로 그 다음 해인 1989년에 주연을 맡은 두 작품인 《유령 마을》과 《터너와 후치》는 흥행에 꽤 성공했다. 이렇게 코미디 영화에 주로 출연하다가 1990년에 다시 비 코미디 영화 두 편의 주연을 맡았는데, 하필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
먼저 브루스 윌리스, 멜라니 그리피스, 모건 프리먼 같은 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데다 거장 브라이언 드 팔마가 감독한 <허영의 불꽃>이 평단의 호평속에도, 4,700만 달러의 제작비 절반도 못 거둔 1,500만 달러 흥행으로 참패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볼케이노도 2,500만 달러로 만들어져 3,900만 달러를 좀 벌어 흥행은 실패했다.
다행히 1991년 《그들만의 리그》와 1993년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 북미에서만 1억 달러 이상의 흥행에 성공하면서 행크스는 최고의 코미디 & 로맨스 배우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러나 행크스는 이제 더 이상 로맨스물과 코미디만 할 수 없다고 결심한 뒤 들어오는 섭외는 모두 거절했다.
고심 끝에 고르고 골라서 출현한 조나단 드미 감독의 1993년 개봉작 《필라델피아》에서 에이즈에 걸린 게이 변호사 연기로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비로소 그의 정극 연기가 인정받기 시작했고 이후 작품 노선도 굉장히 달라지게 되었다. 이 당시 행크스의 수상 소감이 유명한데 이때 그가 언급한 고교시절 게이 은사에 대한 에피소드는 영화 《인앤아웃》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톰의 수상 장면 영상[15] 아카데미 상 최고의 수상 소감으로 검색하면 나온다.
이듬해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포레스트 검프》에 출연해 다시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2연패 수상자로 등극했다. 포레스트 검프 촬영 당시 초기 3일치 촬영분은 모조리 폐기되었는데, 행크스의 남부 사투리 연기가 어색해서 포레스트의 아역 배우로부터 말투를 배우면서 다시 찍었다고 한다. 포레스트 검프는 북미에서만 3억 2천만 달러, 전 세계 6억 6천만 달러라는 경이로운 흥행기록과 뛰어난 작품성으로 미국내 영화제와 아카데미까지 전부 휩쓸었다.
그 후에도 론 하워드 감독의《아폴로 13》, <유브 갓 메일>, 실제로 미해병대 훈련까지 받으며 출연한《라이언 일병 구하기》, 대본 없이 리얼리티급으로 촬영한 《캐스트 어웨이》, 《터미널》등의 유수의 명작에 출연해서 연기력을 과시했다. 《포레스트 검프》에서 보여준 혼신의 연기(버바를 구해야 돼요!!!)는 물론이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부대원(의무병)을 잃은 후 대원들 앞에서 억지로 눈물을 참다가 홀로 멀리 떨어져 우는 연기는 보는 사람의 가슴을 애처롭게 한다. 2000년대 이후에도 좋은 작품 선구안을 보여주면서 커리어를 성공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1996년에 《댓 씽 유 두》라는 영화로 감독으로 데뷔했다. 평은 좋았지만 2600만 달러로 만들어 3400만 달러를 버는 데 그쳐 흥행은 그리 안 좋았다. 2011년작 《로맨틱 크라운》에서도 감독, 주연을 맡았다. 그나마 제작비 3천만 달러로 만들어 7200만 달러를 벌어들여 흥행은 어느 정도 한 편이다.
세계 최초의 3D 극장 개봉 애니메이션인 토이 스토리에서 우디의 목소리를 맡았는데[18], 제작진을 직접 설득해서 후속편은 극장판으로 제작될수 있었다.[19] 토이 스토리 4 마지막 녹음때는 감정이 복받쳐서 뒤돌아서 녹음했다고 한다.
2007년에 나온《심슨가족 더 무비》에선 본인 역할로 목소리를 맡았다. 크레딧에 본인 역 톰 행크스라고 나와서 확인사살시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