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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장경 연구소장 종림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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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그를 처음으로 눈여겨본 것은 4~5년쯤 전이었다. 서울 조계사에서 ‘간화선 토론회’가 열렸는데, 토론회가 끝난 직후 토론자로 그와 도법 스님을 비롯한 10여명이 인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처 못다한 토론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그곳엔 스님들뿐 아니라 수십명의 방청객과 기자들까지 대거 함께했다. 스님들만이 아니라 서로 얼굴도 모르는 대중들이 함께한 야단법석이 펼쳐진 것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종림 스님은 허리춤에서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그는 ‘대중들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맛있게 담배를 피우고, 맥주까지 한 잔 시원스레 들이켜면서’ 얘기를 이어갔다.
스님들 중엔 곡차를 즐기고, 담배를 피우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대중들의 안목이란 겉모습 하나만으로 사람 전체를 재단하는 겉볼안인 때가 많은지라 알 만한 사람들끼리의 자리가 아닌 대중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굳이 책잡힐 짓을 하지 않는 게 상식이 아니던가. 그래서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느라 겉 다르고 속 다른 게 당연지사가 된 세상에서 대중의 눈치에 아랑곳없이 담배를 물고 털끝만한 꺼림이 없이 할 얘기를 해가는 모습이 오히려 한줄기 청풍으로 느껴진 것이다.
알고 보니, 그가 바로 750년간 해인사 장경각에서 잠자던 고려대장경 1514종의 경전, 16만쪽·5천여만자를 한자도 빠짐없이 10년의 노력 끝에 지난 2000년까지 시디 15장에 담아낸 고려대장경 연구소장이었다.
그는 이렇게 수명이 다해가던 목판에 생명을 불어넣었을 뿐 아니라 1980년대부터 한국 불교계를 정화하려던 개혁 세력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만큼 나름의 불교관과 철학관을 가진 그지만 겉모습에선 새털만큼의 무게도 찾아볼 수 없다.
그 정도로 겉모습엔 신경을 쓰지 않는 그다. 해병대보다 군기가 세다는 해인사도 무욕의 그를 묶지는 못했다. 장래가 촉망되던 그를 아끼는 도반들이 “남 있는 곳에서 담배 좀 안 피울 수 없느냐”고 하면, “큰스님이나 주지는 느그들이나 하고, 나는 그런 거 할 생각 없으니, 담배 피우는 건 내버려 달라”며 태평스레 담배를 물었던 그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가 사는 방엔 언제나 밤새 읽어 머리를 깨끗이 비우게 한 만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컴퓨터를 찾아보기도 어려웠던 80년대 초부터 산사에서 밤새 컴퓨터 게임을 즐겼다. 너무도 방대한 작업이어서 누구도 엄두조차 내지 못한 고려대장경 전산화를 성공시킨 것은 그가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접했던 만화의 상상력과 그의 장난감인 컴퓨터가 빚어낸 조화의 산물이기도 했다.
술, 담배, 커피, 만화, 컴퓨터 게임…. 스님이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것만을 접하는 그와 함께 살면서 지금까지 고려대장경 연구소에서 함께 일하던 연구원 가운데 무려 7명이 그를 따라 출가해 머리를 깎았고, 어수룩하게만 보이는 그를 가수 김수철과 연세대 교수 이규갑, 김사인 시인, 김형태 변호사, 호미 출판사 홍현숙 대표, 시인 이문재씨 등이 그토록 ‘죽고 못사는’ 이유가 뭘까.
종교인이고 누구고 할 것 없이 ‘자기 포장’에 익숙한 세상에 언제나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심판과 가르침만 많은 세상에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넉넉한 미소로 귀를 밤새 열어두는 그를 지인들은 ‘우리 할배’라고 한다.
글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사진 박종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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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종림 스님 “설도인으로 불렸던 해인사 행자시절”
계절만큼 세월의 무상함을 정직하게 보여 주는 게 또 어디 있을까. 가을인가
싶더니 어느새 겨울의 문턱에 서있다. 이제 곧 눈발이 흩날리고 산사에는 깊은
정적만 감돌리라. 출가를 결심하고 들어간 그 해 겨울 월정사는 그렇게 눈 속에
파묻혀 태고의 깊은 정적 속에 있었다.
겨울날 눈 덮인 월정사는 한적했다. 무릎까지 때로는 허리까지 내린 눈 속에서
나는 불 때고 밥하고 시간나는 대로 나무를 팼다. 이무도 없는 눈 속에서 커다란
도끼를 들고 나무를 패며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가족, 그 동안 배워 익힌 학문과
지식, 그리고 지난 시간을.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봄이 왔다. 삼월 스무 이렛날, 한암 스님 생신날에 계를
받는다고 했지만 문득 두려움이 일었다. 월정사는 가족적인 오붓한 분위기였으나
내가 머물 곳은 아니었다. 막연히 떠오르는 인연이 아니라는 생각. 나는 계를
받기 보름 전에 오대산을 내려와 해인사로 발길을 돌렸다.
두루마기를 차려 입고 종무소에 앉아 있으려니 한 스님이 나타나 내게 깊숙이
합장을 했다. 지금 구룡사에 있는 정우스님이었다. 옷을 그렇게 입고 앉아 있으니
중물이 꽤 들어보였던 모양이다.
해인사는 행자실이 위채 아래채 두 개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해인사 행자실은
규율이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위채의 상행자들을 향해서는 눈 한번 바로 뜰 수가
없었다. 물론 나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하행자들이 모여 있는 아래채로 갔다.
그 곳에는 스무 명쯤 되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온 길이 달라도 모두
한 공간에서 그 길의 다름을 모두 묻어버리고 다 같은 길을 가고자 서 있는 사람들.
말을 하면 저마다 다른 과거가 언어 끝에 짙게 묻어나 전정에 대한 다짐을 앓을까
조바심하며 깊게 침묵을 지키던 그들의 입술. 그것은 마치 오대산 계곡을 울리며
지나던 세찬 겨울바람과도 같았다. 출가란 이런 것인가. 모든 것을 베일 듯한 칼날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출가란 무엇이란 밀언가. 베어 버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출가의 길. 나는 비로소 출가의 길을 바로 보는 것만 같았다.
침묵과 하심. 입을 닫으니 마음이 고요해졌고 마음을 낮추니 낮출수록 잔잔한
기쁨이 몰려왔다. 언어와 문자와 관계 속에서 살 때는 결코 느껴본 적이 없는
마음의 복됨을 나는 비로소 만난 것이다. 내 고뇌와 방황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내 찾음과 갈등은 무엇이었을까. 말을 버리고 욕망을 버린 자리에서 지난 내 삶의
의례적 의미는 무엇이었던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다만 버리지 못했기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버릴 수만 있다면 자취도 없이 사라
질 그런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힘들 때나 괴로울 때도 짜증내지 않았다. 누군가 행여 푸념을 하면 따뜻하게
그를 감싸고자 했다. 누군가 내게 와서 그의 고충을 말할 때면 마치 하밀 할아버지
처럼 그의 이야기를 열심히 경청해 주었다. 언제나 성내지 않고 느긋하게 살아가는
나를 보고 나의 동료 행자들은 설도인이라고 불렀다. ‘설익은 도인’으로 불리웠던
나. 그것은 아마도 이런 저런 사람들의 온갖 얘기를 다 들어 주고 뒤치닥거리하던
나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한 모양이다.
사람이 좋았기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아니다. 해인사에서의 짧은 행자기간이 나를
많이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어떠한 가르침도 없이 그저 내게 큰 스승으로 다가왔던
침묵과 하심. 그것은 어떤 훌륭한 스승보다도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생각을
버리고 그냥 따라가 보라. 침묵과 하심이 낸 길을 따라 그저 걷다 보면 마음이
망망대해가 되어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못할 게 없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마음이
또랑이 되어 부딪치며 소리내며 흐르는 것은 침묵과 하심에 마음을 비우고 발 디딘
적 없기 때문이다. 행자시절은 그렇게 침묵과 하심의 길을 향해 발내디디며 열심히
걸어가는 시간이다. 그 시간의 의미를 나는 닭이 알을 품듯 품고자 했다.
행자사절 나는 간상看床 소임을 주로 맡아 했다. 신도들에 오면 상을 봐 내가는
일이었는데 신도들이 왔을 때 찾아서 없으면 말썽이 생길 소지가 많아 누구나
내심 꺼리던 일이었다. 하루는 강주실에 손님이 왔다기에 밥상을 차려 내갔더니
은사이신 서경수 교수님이 앉아 있다 나를 알아보는 것이 아닌가. 그 자리에서는
서로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 뒤 내 신분이 드러나고 말았다. 인도 철학을 공부한
행자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행자생활이 몸에 익어갈 무렵 어느 결제 법문날. 나는 방장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깨달음' 에 대하여 깊이 고뇌하기 시작했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깨달음
의 유용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유용성의 현실적 전개는 어떻게 가능한가.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대답을 찾으려고 나는 홀로 떠나 참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반들이 모두 잠든 시간, 나는 칠흑 같은 해인사 산길을 내려와 지리산
쪽을 향해 밤새 걸었다.
쌀과 라면만 가지고 찾아간 지리산. 보름동안을 오롯이 화두 하나만 들고 분별의
세계를 뛰어넘어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자했다. 장맛비가 내리는 인적 드문 세석
산장에 앉아 깨달음에 대한 간절한 사무침으로 몇 밤을 새웠던 시간들. 그 시간은
아마도 내 인생에 있어 가장 값진 시간이었는지 모르겠다.
먹을 것이 떨어져 화엄사로 내려와 두 주쯤 있다가 해인사로 다시 돌아와 아무 것도
못 먹고 한동안 앓아야 했다. 절집안의 법도라는 것이 말없이 도망간 행자를 받아
주는 일이란 어림없었으나 간호를 극진히 해 주었고 별말 없이 받아 주었다. 도망
가기 전 행자노릇을 착실히 잘한 덕분이었을까.
사월 보름부터 행자생활을 시작해 시월 보름에 지관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았으니
월정사 시절을 빼고 꼭 여섯 달 만이었고, 1972년 가야산이 붉게 물들어 있을 때
였다.
출가를 하기 전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온 뒤 두 해 남짓 도서관에 파묻혀
책만 읽은적이 있다. 종교, 철학 서적에서부터 사회과학 서적을 두루 섭렵하며
과학과 서양철학의 방법론에 끌렸고, 불교적 태도의 ‘유용성’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이나 프롬의 저서들을 읽으며 나는
그들이 연기적인 사고의 틀을 실제에 적용시켰다고 보았다.
절집에 들어와 보니 경전에 대한 해석 방법이 습관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나의 유용성에 대한 관심이 대장경의 전산화를 시도하게 했다.
컴퓨터를 처음 만지면서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불교가 형성되어지는 과정에서
세습된 구태의연하고 왜곡된 관습을 새롭게 만들어 낼 자료를 제시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불경이 전산화되면 새로운 기준이나 상상력이 적용되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불교가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불경의 전산화 작업도 어쩌면 출가
전이나 뒤에 늘 가지고 있었던 ‘유용성’ 에 대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행자시절부터 큰 꿈이나 욕심이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욕심을 하나 낸다면
'사이버 승가'를 창조해 내는 일이다. 가지고 가고 싶은 자료를 마음대로 가지고
가서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토론해 불교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다면 족하리라.
1944년 경남 안의에서 출생, 동국대 인도철학과를 졸업했다. 1972년 해인사에서 최근 입적한 지관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오대산 상원사를 비롯해 여러 선방에서 화두를 받기보다는 스스로의 과제를 풀기위한 정진을 했다.
해인사 도서관장, 월간 <해인> 편집장, 해남 대흥사 선원장, 일본 하나조노대학 국제선학연구소 연구원, 세계전자불전협의회 공동의장, 2006년 한국불교학결집대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93년 고려대장경연구소를 설립해 소장을 지냈으며, 2005년부터는 사단법인 ‘장경도량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으로 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
올해부터는 동국대와 함께 디지털통합대장경 구축에 나선다. 지은 책으로 <종림잡설-망량의 노래>가 있으며, 지난해 11월에는 ‘한일공동 초조대장경복원간행 사업’ 의미를 담은 <우리 곁으로 돌아온 초조대장경>을 연구소 명의로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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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허~참 한두시간의 기다림의 시간이 지난후 스님 제가 공부좀 해볼라꼬 하는데 화두 하나주심 않됩니까?ㅎㅎㅎ
답:그런거 없어!나두한8년 선방 왔다갔다 했는데 않되겠더라구...
나: 드릴말이 많지만 다음을 기약하며...(한참 아쉬웠음..쩝)
그런거 없다는것,스님,그런거 없다는 스님의 시각을 제가 알고 싶은데요.라고
말 했어야 하는데,그날의 분위기는 더 말씀을 이어가는것이 힘든 다비의식중
에 잠시의 만남이라,아쉬운 마음을 접게 되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