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
1. '하느님의 종' 이정식 요한은 부산 동래의 북문 밖에 살았다. 젊어서 무과에 급제하여 동래의 장교가 된 그는 59세 때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첩을 내보내고 신앙생활에 매진하였다. 그는 가족에게도 신앙을 열심히 권면하여 모두 입교시켰다. 언제나 검소한 생활을 한 이 요한은 자선에 힘쓰면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한 집에 작은 방을 만들어 십자고상과 상본을 걸어 놓고 묵상과 교리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 요한은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가족과 함께 기장과 경주, 울산 수박골 등으로 피신을 다녔다. 그러나 1868년 동래 교우들의 문초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밝혀져 곧 체포되었다. 동래로 압송된 이 요한은 그곳에서 대자 양재현 마르티노를 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기로 하였다. 그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로서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는 것을 시인하였으나 다른 교우들에 대해서는 일절 발설하지 않았다.
이 요한과 동료 교우들은 50일 가까이 옥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모두 신앙을 굳게 지켰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고 군대의 지휘소가 있는 곳으로 그들을 압송하였다. 이정식 요한은 삼종 기도를 바칙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참수되엇다. 1868년 여름, 그의 나이 일흔셋이었다.
2. '하느님의 종' 양재현 마르티노는 동래 좌수(座首)의 직책을 갖고 부산 동래의 북문 밖에 살았다. 어느 날 이정식 요한 회장을 만나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한 그는 1868년의 박해 때에 신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동래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형벌과 문초 중에 자신이 신자라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며, 배교를 강요하는 관장에게 "절대로 천주교 신앙을 버릴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양 마르티노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옥졸의 꾐에 빠져 '돈을 주겠다' 고 약속한 뒤 몰래 그곳을 빠져나왔고, 옥졸은 관장에게 '죄수가 몰래 도망쳤다' 며 거짓 보고를 하였다. 그는 다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으나 그의 신앙은 더욱 굳견해졌다. 양 마르티노는 혹독한 형벌 중에도 "천지의 큰 부모이신 천주를 배반할 수 없다"며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형벌을 받은 뒤 다시 동래 관아로 이송되어 이정식 요한 회장과 다른 교우들을 만나게 되었다. 동래 관장의 사형 선고로 말미암아 그는 이 요한 회장과 교우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처형 전에 양 마르티노는 십자 성호를 긋고 칼날을 받았다. 1868년 여름, 그의 나이 마흔 하나였다.
3. 되새기기 - 이 요한 회장은 자선과 기도에 열중하였고, 형벌 중에도 신앙을 용감히 증언하였다. 양 마르티노는 인간적인 연약함을 보여 주었지만 더욱 굳건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겪는 갖가지 어려움을 이겨 내며 신앙을 다지는 신앙인이 되자. 이 세상의 부귀영화에 안주하지 않고 진리를 따라 살아간 신앙 선조들의 삶을 본받기로 하자.
출처: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편찬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