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 중독 사건을 둘러싼 서방권 탐사보도 매체와 러시아 당국간에 '진실 공방'이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다.
나발니는 지난 8월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는 기내에서 쓰러져 옴스크에서 응급처치를 받은 뒤 독일로 후송돼 깨어났다. 그가 쓰러진 이유를 독일 측은 '노비촉 중독'으로, 러시아 의료당국은 대사장애에 따른 '혼수 상태'로 분석, 양측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상태다.
독일 샤리테병원으로 후송되는 나발니(위)와 의식을 회복한 뒤 부인과 함께/ 출처: 러시아 언론및 인스타그램
서방측 탐사보도 매체는 독일의 '노비촉 중독' 발표를 근거로, '누구의 짓이냐?' '배후는?'에 맞춰 취재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결론은 뻔하다. 러시아 정보기관인 연방보안국(FSB) 산하의 독극물팀이 크렘린의 지시에 따라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라는 결론이다.
구소련시절, 군 화학무기의 하나로 개발된 것으로 알려진 독극물 '노비촉'은 지난 2018년 3월 영국에서 발생한 러시아 출신 이중 스파이 스크리팔 대령 부녀에 대한 암살 기도 사건으로 일반에게 널리 알려졌다. '스크리팔 사건'은 러시아군 정보기관(GRU) 장교 2명에 의해 저지러졌다는 게 영국측 공식 발표다.
'스크리팔 사건' 발표와 비교하면 나발니 중독 사건을 파헤친 언론 매체들의 보도는 설득력 차원에서 한참 뒤떨어져 약간 허술해 보이기도 한다. 강제 수사 권한이 없는 언론매체의 한계일 것이다.
스크리팔 암살기도 사건 당시, 영국측이 내놓은 용의자들의 행적 관련 CCTV 사진들/ 출처: 영국 공개 사진
'스크리팔 사건' 발표에는 테레사 메이 당시 총리가 직접 나섰다. 그녀는 "6개월간에 걸쳐 250명의 요원이 CCTV를 1만1000시간 이상 뒤졌고, 1,300명 이상의 관련자들로부터 진술을 들었다”며 "공항 입국부터 도시의 모든 CCTV를 연결해 동선을 파악한 뒤 용의자를 지목했다"고 설명했다. 용의자들이 움직이는 곳마다 설치된 CCTV 자료를 증거로 제시했다. 범행 시간도 시간대별로 구성해 발표했다.
그럼에도 러시아측은 지목된 용의자들이 비즈니스 목적으로 영국을 여행했다는 반박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주목하는 것은 폭로가 이뤄진 시점이다. 푸틴 대통령의 연례 기자회견이 17일로 예정돼 있다. 모스크바 주재 외신기자들을 중심으로 푸틴 대통령에게 이 문제를 직접 질문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크렘린 측의 대응도 눈에 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15일 언론을 상대로 한 일일 브리핑을 취소했다. 이유는 대통령 특별 기자회견 준비로 시간이 없다는 것. 일정 부분 사실일 수 있다.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 푸틴 대통령의 기자회견 준비를 이유로 언론 일일브리핑 취소/얀덱스 캡처
2001년부터 시작된 푸틴 대통령의 연례 기자회견은 그 규모가 큰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12월 19일 열린 기자회견은 전세계, 러시아 전역에서 온 기자들이 회견장을 가득 메웠고, 회견도 4시간 18분간 진행됐다. 질문도 70개 이상 나왔다.
올해는 신종 코로나(COVID 19) 사태로 화상으로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만큼 준비할 게 그만큼 많아 보인다. 푸틴 대통령은 모스크바 근교의 노보-오가료보 관저에서, 기자들은 세계무역센터에서 모여 일문일답을 가질 것이라고 한다. 각 지역 기자들은 각 지역에 마련된 장소에서 푸틴 대통령과 만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스코프 대변인의 일일 브리핑 취소는 '나발니 사건' 폭로 기사와 떼어놓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언론들이 크렘린의 반응을 들어볼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답변 기회를 푸틴대통령에게 주겠다는 의도는 아닐까 싶다. 16일 하루 더 일일 브리핑 기회가 남았으니, 지켜볼 수밖에 없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전날 '독일 병원으로 후송 직전 나발니에 대한 추가 암살 기도가 있었다'는 영국 선데이타임스 기사에 대해 "말도 안된다"며 "더 이야기하지 않겠다"며 기가 찬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앞서 미국 CNN와 탐사보도 전문매체 '벨링캣', '인사이더' 등은 통화및 여행 기록, 기타 자료 등을 취재 확인한 결과, 나발니 독살 시도에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FSB 특수요원들의 신원을 특정했다고 14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의사를 포함해 최소 8명으로 이뤄진 '독살팀'은 지난 2017년 이후 지속적으로 나발니와 그 측근들을 감시했다고 한다. '올레그 타야킨'을 팀장으로 한 이 팀 요원들은 선불폰을 사용하는 등 추적을 피하려고 노력했으나, 언론의 취지에 꼬리가 잡혔다는 것이다.
나발니, 서방 탐사보도 매체의 보도를 근거로 범죄사실 고발할 것./얀덱스 캡처
폭로 매체들은 "FSB 요원들이 사용한 모스크바 사무실 주소는 KGB(구소련 정보기관)의 독극물 연구소와 일치했다"며 "이곳은 과거 KGB가 요인 암살용으로 사용한 방사성 물질인 폴로늄을 저장해 놓은 곳"이라고 지적했다. '폴로늄-210'은 지난 2006년 영국에서 발생한 러시아 스파이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암살 사건에 사용된 물질로 알려져 있다.
정보요원 출신인 리트비넨코는 푸틴 대통령을 비판하다가 영국으로 망명한 뒤 피살됐는데, 영국의 수사 결과, 그가 런던의 호텔에서 마신 녹차에는 폴로늄-201이 들어있던 것으로 나타났다.
폭로 매체들은 "나발니의 독살 시도가 이뤄진 시베리아 여행 때는 5∼6명의 요원으로 구성된 2개 팀이 현장에 배치됐으며, 나발니가 묵은 시베리아 톰스크의 호텔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특히 현장 요원들은 나발니가 시베리아 방문 6일간 모스크바 사무실과 계속 소통했다고 했다.
그러나 나발니측도 자신들이 추적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당초 예약한 숙소에 머물지 않고, 지지자들이 소개한 아파트에서 묵는 등 감시를 따돌렸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알려진 바 있다. 나발니 감시는 새로운 사실이 아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독 직전 톰스크 공항에서 차를 마시는 나발니/사진출처:인스타그램
노비촉 물질이 검출됐다는 물병들. 나발니 숙소에서 수거한 것이라고 나발니 측은 밝혔다/출처:SNS
나발니가 앉았던 모스크바행 기내 좌석/현지 언론 캡처
폭로 매체들은 사건 배후를 FSB → 크렘린으로 판단한 증거로는 통화 기록을 제시했다. 알렉산드로 보르트니코프 FSB 국장이 '독극물팀'과 통화한 기록은 물론, 쓰러진 나발니가 옴스크에서 병원으로 급히 후송됐을 때, 현장 요원들과 FSB 간부들 간의 통화 사실도 확인했다는 것이다.
또 FSB의 고위급 간부가 독살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7월 2일 크렘린의 푸틴 대통령 측근과 통화하고, (크렘린 고위 인사를 만나러) 흑해 휴양지 소치를 여행한 기록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매체들은 특히 "지난 7월 역외 영토 칼리닌그라드에서도 나발니 부부를 겨냥한 암살 기도 사건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나발니 부부는 휴가차 간 칼리닌그라드 호텔에 FSB팀이 나타났고, 그들이 모스크바로 돌아간 직후인 7월 6일 나발니 부인의 몸에 이상 징후가 생겼다는 것. 그 증상이 나발니가 독극물 공격을 받았을 때와 똑같았다고 했다.
독일에 머물고 있는 나발니는 CNN 인터뷰에서 “오랫동안 추적을 받아왔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낀다”며 “독살 시도 사건에 푸틴 대통령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100%라고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나발니는 15일 반정부 성향의 라디오 방송 '에호 모스크비'(모스크바의 메아리)와의 인터뷰에서 "비웃을 수도 있지만, (폭로 매체의 보도를 근거로) 형사소송법에 따라 이 범죄 사건을 수사위원회와 FSB에 고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국이 수사에 착수하지 않는 이상, 본인이 고발하는 것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은 나발니의 노비촉 중독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 검찰청 등 수사 당국도 나발니의 수사 개시 요청에 "독일 측에 관련 자료를 보내달라고 여러번 요청했으나, 자료를 보내주지 않으니, 수사를 시작할 객관적 근거가 없다"고 설명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