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2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여호와의 전 temple of the LORD
슥 6:9~15
<어머니의 불전행(佛典行)>
어린 시절 저희 어머님은 절에 다니셨습니다.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던 때의 이야깁니다.
아버님이 경찰이셔서 경찰관 아내들과 어울려 초파일이면 절에 가셨습니다.
그때마다 쌀을 시주하셨다고 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지요?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을 섬기면, 하늘이 감동한다는 뜻입니다.
어머님이 드린 지극 정성으로 ‘하늘이 감동하면’ 어떻게 될까요?
어머님이 빌고 빈 그 내용대로 하늘이 섭리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님은 무엇을 빌었을까요?
가정의 대들보이신 아버님의 건강과 직장에서의 승진 등을 빌었을 겁니다.
다음으로 자식들의 건강과 공부 잘하기, 부모 속 안 썩이기, 형제간의 우애…
그리고 친척들과의 원만한 관계 등을 빌었을 것입니다.
맨 마지막으로 자신의 건강 문제 등을 해결해 주기를 빌었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모든 어머니의 공통적인 바람입니다.
어머니의 바람이 그대로 이루어질지, 안 이루어질지, 그 관건은 무엇입니까?
얼마나 정성을 들이냐에 비례한다고 믿었습니다.
정성을 드린만큼 자기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절에 가는 날이면 새벽부터 일어나 정한수 떠놓고 빈 다음, 목욕재계합니다.
깨끗한 몸으로 가는 것이 정성을 더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시주할 쌀을 살핍니다. 뉘라도 들어있으면 이리지러 뒤적이면서 골라냅니다.
그렇게 절에 가서 빌고빌어 정성을 다했습니다.
☞ 어머님이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여호와의 전 vs 부처의 전>
한국의 기독교인 중에는 저희 어머님과 같은 전력을 지닌 경우가 많습니다.
불교나 토속종교를 가지고 있다가, 기독교인이 됩니다.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사실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이 종전에 섬기던 지극정성의 대상만을 교체하는 선에 그칩니다.
초파일에 불상 앞에서 머리 조아리고 빌던 신앙에서,
십자가 예수님 앞에서 똑같이 머리 조아리고 비는 신앙으로 바뀝니다.
이렇게 신앙 생활을 하는 기독교인이 상당수에 이른다고 봅니다.
이는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책임으로 귀착이 되는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물론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선에서 멈추는 명목상의 기독교인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 누군가의 전도에 의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면 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첫째,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반드시 읽어야 하지만, 기독교인 중에는 문맹인이 있습니다.
글을 읽을 수 없다면 목회자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듣고, 주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둘째, 교회공동체에 속해야 합니다.
먼저 믿은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소속하여 그 안에서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먼저 믿은 이들의 신앙하는 모습을 보면서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예배, 찬송, 기도, 감사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실천해야 합니다.
셋째,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크리스찬이 되는 일은 성령의 역사에 따라 일어난 사건입니다.
성령님께서 섭리하시고 역사하심으로써 기독교인이 되는 섭리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처음 기독교인 될 때는 성령님의 인도와 섭리가 있었음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되고 난 후 성경을 알고 예배를 알면서 성령을 알게 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여호와의 전”입니다.
오늘 본문 스가랴서에는 “여호와의 전”에 대하여 나옵니다.
“여호와의 전”은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막연히 알았던 그러한 종교의 전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 이전에 머리를 조아렸던 여타의 전(殿)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 여호와의 전을 알아야 합니다.
<성전의 역사(변천)>
“여호와의 전”에 대하여 성경은 소상히 밝힙니다.
기독교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창조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간섭하지 않는 이신론의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말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에 대응하신다는 뜻입니다.
인류 역사는 늘상 변화를 겪습니다.
성경에서 드러내는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는 인류 역사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낳아 가르치고 결혼시켜서 세상에 내보낸 이후에 관심을 끊을 수 없습니다.
부모는 죽을 때까지 자식을 걱정하고, 그때그때 돕고자 합니다.
하나님도 똑같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은 깊숙이 개입하십니다.
그런 사례 중 ‘여호와의 전’ 즉, 성전과 관련한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성전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변천 과정을 알려줍니다.
기독교인은 이것을 잘 알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전의 의미 : 하나님 계신 곳이 성전입니다.
성전의 의미는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과 만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계신 곳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계신 곳을 알고 하나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만나려면 부모님 계신 곳을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계신 곳을 드러 냅니다. 이를 ‘계시’라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기를 드러내는 장면이 출애굽기에 있습니다.
출 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기가 계신 곳을 알리는 장면입니다.
그 당시 불붙은 떨기나무 있는 곳은 모세에게 ‘성전’ 곧 ‘여호와의 전’이었습니다.
모세는 나중에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켜 시내산으로 이끌었습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을 어떻게 계시할까요?
<첫번째 여호와의 전 ; 성막>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에서 불붙은 떨기나무로서 모세 한 사람에게 자기를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서 광야로 이끌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집단 즉, 공동체에게 자기를 드러내 주십니다.
이스라엘민족이라는 공동체가 하나님과 공식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을 마련합니다.
이는 첫 번째 성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성전은 성막입니다. 성막은 텐트로 이루어지는 성전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막은 필요할 때는 접어서 옮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성막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주셨습니다. 첫 번째 성전인 성막시대입니다.
<두번째 여호와의 전; 솔로몬 성전>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갖게 된 여호와의 전은 천막성전이었습니다.
이때가 주전(BC) 1446년 경입니다.(주보 참조)
이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있는 곳으로 천막을 옮겨가면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주전(BC) 1000년 경,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천막성전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대리석 집에 기거하는데, 하나님은 천막에서 우리와 만나 주신다”
“하나님과 만나는 ‘성전’을 궁궐처럼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다윗의 기특한 마음을 받아주십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 대에 가서 대리석과 백향목으로 성전을 축조하도록 하십니다.
이동이 가능한 성전에서 예루살렘이라는 한 도시에 견고하게 건축된 성전이 되었습니다.
이 성전이 주전 586년에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파괴되고 맙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바벨론 제국에 멸망을 당하고 백성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포로로 끌려간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길을 모색합니다.
그곳에는 성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포로지에서 이스라엘 백성 열 가구에 한 장소를 마련하여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열 가구에 한 장소를 회당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시나고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지에서 아쉬운 대로 회당에서 예배를 했습니다.
회당예배가 시작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솔로몬 성전이 그립습니다.
<세 번째 여호와의 전; 스룹바벨 성전>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바벨론 제국은 페르시아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종교의 자유를 허락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성전을 다시 지어도 좋다고 허락합니다.
이스라엘 민족 중 일부가 포로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대부분 유다지파 출신이었습니다.
유다지파를 제외한 다른 지파 출신들은 대부분 바벨론에 눌러앉았습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말보다는 ‘유대인’이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합니다.
‘유대인’은 유다지파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70년 전에 허물어진 성전을 재건축합니다.
이때 주도적으로 나선 사람이 스룹바벨입니다.
스룹바벨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전을 재건축합니다.
이 성전을 일컬어 “스룹바벨 성전”이라 합니다.
<네 번째 여호와의 전; 헤롯성전>
주전 515년경에 세워진 스룹바벨 성전은 솔로몬 성전에 비해서 초라했습니다.
이후 500년이 지나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된 헤롯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고자 성전을 대대적으로 개축합니다.
증개축 공사는 예수님의 생애중에 이루어집니다.
이 성전을 일컬어 “헤롯성전”이라고 부릅니다. 네 번째 성전입니다.
<다섯 번째 여호와의 전; 성도가 성전>
제자들이 성전이 거창하게 증개축되는 것을 보고, 주님께 말합니다.
눅 21: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제자들이 거창한 성전을 보면서 자랑하듯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눅 21: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서기 70년 로마장군 티투스에 의해서 철처히 파괴됩니다.
이제 이 땅에 건물로 존치하는 성전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면 성전이 없어진 것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성전은 이제 무형의 성전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신실한 성도, 믿고 구원받은 성도 개개인이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라면 우리 개기인이 성전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한다면, 성전이 우리 안에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성전은 이렇게 변천되어 왔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어떤 건물을 찾아가서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불교 신자가 절에 시주하러 가듯이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맺음>
오늘날 교회 건물은 성전이 아닙니다.
교회 건물은 예수 믿은 이들이 모이기 위한 공간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첫째, 성경을 읽어라, 둘째, 교회 공동체에 속하라,
셋째,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날 교회당 건물은 여호와의 전이 아니라, 성도 공동체가 모이는 장소입니다.
성도가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감사를 표현하는 장소입니다.
성도는 모일 때 성도입니다. 성도라는 말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성도’ 할 때 ‘도’자는 무리 도(徒)자를 씁니다. 기독교신자는 모여야 합니다.
모여서 함께 주님을 찬양하고, 함께 예배합니다. 함께 감사하면서, 함께 섬깁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잘 분별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뭐라 말씀하시는 지를 잘 분별하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지극 정성의 종교가 아닙니다. 지극정성으로 하늘을 감동시키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 지극 정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것 하기를 원하시는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 그 뜻을 파악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