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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고령 미숭산, 지산동 고분군 탐방 산행 ♡
(대가야, 지산동고분군, 유네스코, 숲체험탐방로)
(gpx 오류로 초반 거리 상실)
1. 산행일시
-. 2025년 2월 19일 (목)
-. 09:44 ~ 13:26 (3시간 42분)
2. 산행경로
-. 일자 종주 산행 (10.5km)
미숭산자연휴양림(312m) - 미숭산성 - 미숭산(734m) - 청금정 - 주산(310m) - 고령 지산동 고분군 - 대가야박물관 - 주차장(60m)
3. 산행소감
모처럼의 긴 명절 연휴를 즐기고 있다.
다만, 요즘 건강한 척 하는 몸뚱이를 맹신해서 건방지게도 술로 혹사시켰다.
속이 쓰리고, 머리도 띵~ 하니 상태가 좋지 않다.
어쩔 수 없다.
운동으로 풀 수 밖에.
나에게는 산보다 더한 해장은 없는 듯 하다.
맑은 공기와 선명한 초록을 보며 오늘 하루 하염없이 걸어보자.
오랜만의 주중 산행이다.
목요일의 맹주 산악회 버스에 잠시 몸을 실어본다.
경남 합천과 경북 고령을 경계짓는 미숭산 (美崇山, 734m) 으로 향한다.
8년 전에 아주 멀리부터 약 20km 의 종주산행을 했더랬다.
지나놓고 보면 km수만 많았지 큰 기억이 남지 않는다.
요즘은 거리는 짧지만 그 산의 내력과 주변경치, 볼거리를 최대한 임팩트있게 즐겨보려 한다.
휴양림을 들머리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산행거리도 짧고, 높낮이도 큰 출렁임이 없어 편한 마음이다.
선답자께서 다녀간 GPX도 있으니, 한결 가볍다.
다만 아침에 비운 속이 영 편안칠 않다.
다리는 짱짱하다.
하늘도 구름 한점 없이 파랗다.
그토록 추웠던 겨울은 이제 슬슬 봄처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듯 하다.
잠들어 있던 뱃속을 마구 흔들어대니 슬슬 신호가 온다.
자연이 날 부른다.
잠시 은폐,엄폐를 한 채 큰일(?)을 치르니 개운하다.
역시 난 산 체질!
이제 본격적으로 날라가 보자.
살랑살랑 오르다 보니, 미숭산 정상에 다다랐다.
주변 풍광이 꽤나 좋다.
산불방지기간이다 보니, 정상 초소에는 산지기님께서 잘 지켜주고 계신다.
분명 다녀왔지만 좀처럼 알기힘든 주변 산군을 귀동냥 앱동냥하며 알아본다.
비계산, 우두산 그리고 반대편의 가야산 까지.
신라를 항시 경계했던 가야의 심경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성계에 반기를 든 미숭장군의 마지막 사자후도 어렴풋하게 들려 오는 듯 하다.
이제 경남 합천을 지나, 경북 고령으로 뚫고 가련다.
약 6km의 숲체험탕방로가 너무도 말끔히 다듬어져 있다.
우리가 온다고 어느 선인님께서 빗자루로 쓸어놓으신 걸까.
곳곳에 운동기구며, 약수터, 정자(聽琴亭), 쉼터가 잘 갖추어져 있다.
굳이 등산화를 장착 안하더라도 부드럽게 즐길 수 있는 산책로이다.
그 옛날 우륵의 가야금 소리가 이 풍광과 버무려졌으니 얼마나 멋드러 졌을까.
주산성 정상을 찍고, 산정상부에서 아래를 쳐다보니 올록볼록 말끔한 잔디 고분군들이 눈에 들어온다.
굳이 역사체험이 아니더라도 가족, 지인들과 소풍 나와 인생사진 찍기에도 딱인 듯 하다.
커다란 고분 옆 소나무 한그루, 그리고 그 옆 나무그네.
다시금 연애시절 설레임이 돋아나는 듯 하다.
이곳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2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확인된 고분만 700여 기가 넘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순장 고분이라 하니 당시의 엄격한 시대에 안 태어난 게 천만다행이다.
이 얼마나 좋은가.
조금만 심적 여유를 갖고, 건강을 챙기며, 전국의 산을 탐하며 그 지방의 유래와 역사까지 알아가니 나에게 이만한 힐링은 없는 듯 하다.
몇 시간 호사를 누리고 나니, 어느새 속도 편안해지고, 정신도 또렷해 진다.
혼자 떠나는 나만의 여행에서 또 일주일의 생명연장에 성공했다.
4. 산행지 개요
● 미숭산 (美崇山, 734m)
1.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신리와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 나대리에 걸쳐 있는 산.
2. 명칭유래
미숭산은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미숭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 대항해 군사를 모으고, 미숭산에 성을 쌓아 고려를 되찾고자 싸움을 벌였던 곳이다.
당시 대세는 조선과 이씨 왕조 쪽으로 기운 상태였기 때문에 이미숭은 결국 고려 회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했다고 전해진다.
본래 산의 이름은 상원산이었으나 뒤에 사람들이 이미숭 장군의 이름을 따서 미숭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3. 자연환경
미숭산은 비교적 높고 험준한 산지이다.
미숭산 북쪽의 사월봉, 북서쪽의 문수봉, 그리고 동쪽의 주산(主山)[310.3m]과 미숭산이 연결되어 있으며, 이들 산지는 내곡천의 분수계를 이룬다.
내곡천은 동류하여 고령군 대가야읍 쾌빈리에서 낙동강의 한 지류인 회천과 합류하고, 내곡천 상류부의 신동저수지와 중류부의 중화저수지의 물은 농업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미숭산과 주산을 잇는 능선에는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고, 곳곳에는 철쭉이 자연 군락을 이루며, 멀리 가야산(伽倻山)[1,430m]이 바라다 보여 경관이 수려하다.
4. 현황
높이는 734.3m이다.
미숭산의 봉우리에서 북서 방향으로 약 700m 떨어진 곳인 미숭산과 문수봉 사이에는 나상치 혹은 나상현이라 불리는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는 과거에 고령군과 합천군을 연결하는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정상 주변에는 미숭산성(美崇山城)의 성터와 성문의 잔해 및 성문 터 옆의 샘 등 이미숭 장군과 관련된 유적이 남아 있다.
등산 코스는 주산삼림욕장 입구[인근 대가야왕릉전시관]-주산-청금정 전망대-반룡사 하산로 고갯길-미숭산 정상-임도-대가야읍 신리로 이어지며, 약 4~5시간 정도 소요된다.
가야산이 보이는 경관으로 많은 등산객들이 찾고 있으며, 산행 코스에는 등산로 및 표지판이 잘 되어 있다.
● 주산 (主山, 310m)
1.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와 연조리에 걸쳐 있는 산.
2. 명칭유래
원래 대가야시대에 수비병들이 금산(錦山)[289m]에서 망을 보고 주산에 외적이 침입하던 것을 알렸다고 한다.
즉 외적이 침입해 오면 망산(望山)이라고도 하는 금산에서 서쪽에 있는 주산(主山)을 향해 적의 내습을 알렸다고 한다.
고령의 주산을 이산(耳山)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산에서 적의 침입을 알리는 소리를 들으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주산과 금산의 위치로 볼 때 대가야에 위협이 되는 세력은 동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은 신라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3. 자연환경
비교적 낮은 산지이다.
주산의 서쪽 능선은 미숭산(美崇山)[734.3m]과 연결되어 있고 미숭산 북동쪽, 문수봉(文壽峰)[672m] 동쪽, 사월봉(四月峰)[400.1m] 남쪽을 잇는 사면은 내곡천의 분수계를 형성한다.
4. 현황
높이는 310.3m이다.
주산은 대가야의 순장묘 등 고분군이 발견된 지역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산일뿐만 아니라 고령군민과 외지인들이 많이 찾는 명산이다.
대가야시대에 축조된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주산의 남동쪽 능선을 따라 크고 작은 무덤들이 무리지어 축조되어 있다.
높이 6m, 지름 25~27m 규모인 지산동 51호분을 비롯하여, 지산동 32호분까지 규모가 큰 고분이 이어져 있으며, 특히 지난 1978년 발굴, 조사 결과 우리나라에서 첫 순장묘로 밝혀진 지산동 44호분 등 유명한 고분이 다수 존재한다.
주산의 남쪽 능선 아래에는 대가야박물관과 대가야왕릉전시관이 조성되어 있어 대가야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주산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 외에도 충혼탑-주산-청금정-미숭산-신리를 잇는 등산로가 발달되어 있다.
● 고령 지산동 고분군 (高靈 池山洞 古墳群)
1. 개요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왕릉로 55(지산리)에 위치한 반파국/대가야 시기에 축조된 대형 고분군이다.
폭넓게는 반파국 멸망 이후 신라, 고려, 조선 시대에 추가로 축조된 고분까지 모두 포함하여 지산동 고분군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현재까지 총 704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행정구역 명칭이 '지산동(洞)'이 아닌 '지산리(里)'임에도 '지산동 고분군'이라 불리는 것은 지정 당시 행정구역인 '고령군 고령면 지산동'을 따랐기 때문이다.
가야의 금관으로 잘 알려진 리움미술관 소장 금관(대한민국의 국보)이 출토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정확히는 도굴로 세상에 나온 것을 이병철 회장이 구매한 것이다.
그 때문에 당시에는 이 고분군에서 도굴되었다는 사실은 확실하지만 정확히 어느 고분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훗날 45호분에서 도굴된 것임을 확인하였다.
1963년에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2023년 9월 17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개최된 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에서 경상남도·경상북도·전북특별자치도 등에 소재한 여러 가야계 고대 국가의 고분군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역사
기록이 없기 때문에 처음으로 조성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일단은 반파국(대가야)의 1대왕인 이진아시 때부터 이 곳에 무덤을 만들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현재처럼 대규모로 무덤을 조성한 시기는 반파국이 고대국가로 성장한 5세기 초부터 6세기 중엽까지인 것으로 보인다.
이 고분군이 유명한 이유는 문헌상으로만 전하던 순장이라는 매장 풍습의 실체를 확인했다는 점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는 순장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막상 무덤 속에서 순장된 시신이 어마어마하게 나와 놀랐다고 한다.
규모가 크다 보니 반파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존재가 잊히지 않았다.
조선의 유학자인 남명 조식은 고령에 갔다가 지산동 고분군을 보고 그 감상을 시로 지어 남겼을 정도였다.
지산동 고분군에 대한 현대적 연구는 구한말인 1906년에 일본인인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 교수에 의해 시작되었다.
2.1. 수난의 역사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부터 일본 제국은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할 증거를 찾으려 각지에 위치한 가야 시기 조성된 고분을 발굴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쳤다.
이는 지산동 고분군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이후 금림왕릉으로도 전하는 舊 39호분, 현재는 47호분으로 불리는 왕릉급 무덤을 마구잡이로 파헤치고 허름한 보고서조차도 남기지 않았다.
이런 상황 탓에 우리 손으로 발굴하기 전까지는 무슨 유물이 출토되었는지, 고분 내부는 어떠한 구조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이후에도 외진 곳에 위치한 이 고분들은 도굴꾼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어 어지간한 큰 무덤엔 도굴갱이 1~2개는 꼭 뚫려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뚫기 귀찮아서 수많은 도굴꾼들이 선대 도굴꾼이 뚫었던 도굴갱으로 계속 드나들며 무덤을 도굴했으며, 결국 왕이 안치되었던 주곽(主槨)과 왕의 유품들과 저승에 가서 쓸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하던 부곽(副槨)은 모두 도굴되었다.
70년대에 들어서 44호분과 45호분을 발굴했을 때에는 토기 조각과 화살통, 환두대도 일부, 관장식 조각 일부만을 겨우 수습했을 만큼 도굴의 피해가 극심했다.
참고로 현재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가야 유물들 중 주곽에서 출토된 것은 많지 않다.
도굴꾼들은 주곽 중심으로 도굴을 자행하였고 부곽이나 순장곽은 도굴하지 않았는데, 파는 데 드는 힘은 똑같은데 유물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장곽 쪽은 그나마 도굴되지 않았고,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유물들은 주로 순장곽, 즉 순장덧널에서 출토된 것이 많다.
그래도 1990년대 이후 대대적인 사적 관리와 체계적인 발굴이 시작되자,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유물을 비롯하여 여러 대형분과 중요 고분들이 학술적으로 발굴되었다.
일련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금동제 귀걸이나 금동관, 환두대도 등 여러 위세품들을 비교적 온전히 보전한 고분들이 발견되어 지산동 고분군의 위계적 위치를 조명하게 해주었다.
3. 특징
한국사의 모든 고분군 중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로 순장을 했던 고분군이다.
무덤 주인공이 묻히는 주부곽 주변에 순장곽을 수십개씩 설치했는데, 이런 다곽 순장묘는 오직 고령 지산동에서만 존재하는 특징이다.
수십명을 순장했고, 말이나 소 같은 동물까지 추가로 순장했다.
고분군 가운데로 도로가 관통하며 그 부근에 '대가야박물관'이 있다.
고분군은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무덤을 백제나 신라처럼 산중턱 혹은 평평한 곳에 만들지 않고 산정상 능선 부근을 따라 축조했다.
높은 곳이 하늘과 맞닿은 신성한 장소라는 당시 가야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지산동 고분군이 자리잡은 능선 쪽은 나무가 없어서 시야가 탁 트였기 때문에 올라가면 고령군을 전부 내려다 볼 수 있다.
특히나 안개 낀 날도 사진이 잘 나온다. 고분군 사이에 안개가 낀 장면을 밑에서 보면 나름대로 좋은 구도가 나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도 너무 높지 않고 계단도 잘 갖추어 주민들에게는 좋은 등산로이자 공원이며 산책로다.
대가야박물관은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할 뿐만 아니라 이 고분군의 경비 업무도 겸한다.
지산동 고분군은 인구가 바글바글한 곳이 아니라 고령군 내에서도 약간 외진 곳에 있어서 잘못하다가는 도굴꾼의 타겟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고분군 위에는 조명 시설이 일부 있고 가끔 순찰을 다닌다고 한다.
또한 워낙 무덤이 많아서 그런지 파괴되거나 유실된 고분도 은근히 많이 보인다.
예를 들면 당연히 무덤이 있었을 자리에 무덤이 없거나 야트막한 언덕 아니면 웅덩이 같은 흔적으로만 남아 있고 무덤의 권역을 표시하기 위해 쌓은 돌들이 노출되어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가야시대에 쌓은 돌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이야기.
결국 위의 사진의 평평한 지대가 원래는 모두 무덤 자리였다는 것이다.
평지가 된 건 유실된 봉분의 위치가 제대로 파악이 안 되어서 복원을 못한 듯하다.
워낙 수가 많다보니 2023년 말 기준 발굴된 무덤이 2%에 불과하다.
세계유산 등재에도 불구하고 발굴 진척이 늦었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85년 만에 발굴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3.1. 내부 구조
전체적으로는 거의 구덩식 돌덧널무덤인데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곳 지산동에는 확인된 건 모두 구덩식 돌덧널무덤이고 굴식 돌방무덤은 약간 떨어진 고아리에 벽화고분 형태로 1기만 존재한다.
신라에 병합되기 전에는 부장품 토기도 가야토기였으나, 신라에 병합된 6세기 이후에는 신라토기들이 출토된다.
고분의 내부 구조는 신라와 백제의 고분과는 확연히 형태가 다르다.
우선 왕이 묻힌 으뜸돌방(이하 주곽)이 한가운데에 있고, 왕이 저승에 가서 쓸 물건들을 매장한 딸림돌방(이하 부곽)이 1~2개 근처에 있으며 그 주위로 순장자들을 묻은 순장 덧널이 있는데, 많게는 20개 이상이 확인되기도 했다.
또한 왕이 안치된 주곽에도 순장자가 2명 있었는데 왕을 호위하던 최측근 무사나 신하인 듯하다.
부곽에는 장물들을 보관하는 장물지기를 한 명씩 순장했다고 한다.
주곽의 높이는 최대 크기 2m, 길이는 9m로 어마어마한 크기라, 그만큼 엄청 많은 유물을 부장했으리라 추정한다.
반면 순장 덧널은 길이가 1.6m 남짓에 커봤자 2m 정도인데, 당시 사람들의 신체가 작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4. 순장
지금까지 밝혀지기로는 한국사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순장했다고 확인된 고분군이 바로 지산동 고분군이다.
고구려나 신라에서도 순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고구려는 적석총이라는 무덤 특징상 몇 명까지인지는 특정이 되지 않고, 신라 무덤은 많아야 2~3명 정도로 비교적 인도적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유독 흔히 가야권이라 부르는 삼국시대 경남 일대의 제 가야 각국의 고분군에서는 순장의 사례가 많으며 그 인원도 많으면 3~5명가량이다.
그 중에서 지산동 고분군의 대형분들은 수십 명씩, 가장 큰 44호분에는 대략 40여 명 남짓 순장되었다고 추정한다.
지금의 기준에서야 가혹하지만, 인권이라는 것이 없던 시절임을 고려해보면 순장된 사람들(이하 순장자)은 일종의 위세품과도 같은 개념으로 이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수한 토기, 화려한 부장품들의 존재는 계세사상(繼世思想)이라는, 즉 죽어서도 현세의 삶이 이어진다고 보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순장 또한 그러한 계세사상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피장자의 위계에 따라서 그 수량이 정해졌다. 지산동 고분군 중에서도 왕묘 급의 지름 20 m 이상 대형분들은 순장자가 20명을 상회하거나 그 수준인 반면, 왕릉급 바로 아래의 무덤들에서는 3~5명 정도로 순장자 인원 수가 줄어듦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위계(位階)에 따라 순장자 수가 줄어드는 것은 일반적으로 무덤에서 확인되는 부장품의 화려함의 정도, 수량적 측면이 상위 위계의 인물일수록 많고, 위계가 낮아지면서 그 급이 낮아지는 맥락과 동일한, 즉 순장자=부장품의 개념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가야권의 역사는 문헌이 엉성한 관계로 상세하게 알 수 없기도 하거니와, 고대 문헌에서 일반 백성에 대한 기록은 잘 드러나지 않는 만큼, 순장자의 입장이 어떠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2018년 지산동 고분군 남쪽 권역의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동쪽 순장곽에서 발치에 화살촉이 꽂힌 상태로 순장자의 인골이 처음으로 출토되었다.
법의학적인 측면에서 다각적 검토가 필요하지만,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순장 예정자를 살아는 있으되 저항은 하지 못하도록 발에 활을 쏘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많은 인원을 순장하였던 관계로 대가야 권역의 고분군, 다시 말해 대가야가 축조한 고분군의 대형분들은 인골이 확인되지 않더라도 피장자가 묻힌 주곽(主槨)을 주변으로 빙 둘러져 순장곽(旬葬槨)을 배치한 양상이 자주 발견된다.
이는 대가야 고분군, 특히 수장층이나 왕족급의 위계의 표상이기도 하기 때문에 가야권 영역을 규명하고 판별하는 여러 기준 중 하나로 기능한다.
신라는 지증왕 3년(502)부터 순장을 금지했는데 562년 신라가 대가야를 멸망시키면서 구 가야 영토에서도 순장 금지법이 적용돼 순장이 한 번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대가야박물관 부지에서 신라 병합 이후의 신라식 묘제인 횡구식 석실, 횡혈식 석실분이 34기가 조사됐는데 순장 흔적은 단 하나도 없었다.
● 가야 (加耶)
1. 정의
한반도 남쪽에 있었던 변한의 12개 작은 나라들을 통합해 세운 연맹 왕국이다.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성의 소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상주의 고령가야 등 여섯 나라가 있었다.
562년에 신라에 흡수되었으며, 가야의 문화는 신라의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풀이
고구려, 백제, 신라 등 3국이 국가의 모습을 갖추어 나갈 무렵 낙동강 중 · 하류 지역에서는 여러 작은 나라들이 자리를 잡아 갔다.
이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통일된 국가 체계를 갖추지는 못한 채 ‘간’이라는 부족장들이 각각 자신의 영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곳에서 신비한 일이 일어나 왕국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부족의 간들이 하늘에서 들려오는 신령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구지봉(옛 구수봉)에 가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하고 노래하며 춤을 추면 임금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에 간들이 예언대로 했더니,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황금 상자가 내려왔다.
상자 안에는 여섯 개의 황금알이 있었는데, 그 알에서 여섯 명의 아이가 나와 각각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었다.
나라 이름은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성산가야, 고령가야였다.
이후 가야 왕국들은 서로 도우며 발전했다.
가야에서는 낙동강 하류 지역의 기름진 평야를 바탕으로 벼농사가 발달했고, 품질 좋은 철을 생산해 중국과 왜(일본) 등지에 수출하기도 했다.
발달한 문물을 왜에 전해주었는가 하면, 바다를 주름잡는 해상 강국이 되어 신라를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라와 백제가 세력을 넓히기 시작하자, 가야는 차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가야는 통일 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채 여전히 작은 나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힘이 약했던 것이다.
게다가 가야는 5세기에 백제, 왜와 함께 신라를 공격했다가,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세력이 크게 약해졌다.
결국 562년에 신라에 흡수되어 가야국은 한반도에서 사라졌다.
3. 심화
가야는 통일 왕국을 세우지 못한 채 각각 신라로 흡수되었다.
먼저 흡수된 곳은 여섯 가야 가운데 가장 힘이 강했던 금관가야였다.
532년에 금관가야가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해 멸망한 뒤 차례차례 신라에 합쳐졌으며, 562년에 마지막으로 대가야가 흡수되면서 가야는 완전히 사라졌다.
신라는 가야 유민들을 백성으로 받아들이고 왕족은 귀족으로 대접했다.
삼국 통일을 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김유신도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12대손이며, 가야금을 전한 우륵도 가야 출신이었다.

첫댓글 오랜만에 오셨는데
맛깔스럽고 정성어
린 탐방기에 혼이
나갈 지경입니다.
남다른 준족이다보
니 후딱 하산을 마
치셨군요.
후기를 읽다보니 산
길이 훤히 느껴지네
요. 대단히 수고하
셨습니다.
자주 뵙진 못하지만 선배님들이 지켜주신 목요일 산악회가 있어 언제나 든든합니다.
너무도 볼거리, 즐길거리 많은 산행지 만들어주신 집행부 선배님들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항상 선배님들 안산 건산 즐산 그리고 행산 까지 기도드립니다.
목요 산악회 화이팅!! 입니다.
미숭산~주산 넘어가는 숲체험길에서 바닥에 어느 산인이 새긴 바닥돌이 너무 정감어려 한참을 바라봤습니다.
" 산 좋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