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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마지막 길
시편 140:1~13
그 동안 우리는 시편을 여러 시간에 걸쳐서 생각했습니다. 이제 그 마지막 부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앞으로 네 시간에 시편 강해를 끝낼 예정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과 다음의 네 개의 시편, 그러니까 시편 141편에서 144편까지는 하나의 긴 시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내용이 비슷한 데가 많이 있습니다.
이 시편은 142편 표제에 기록한 대로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도망 다니다가 굴 속에 있을 때 지은 시라고 말합니다. 원수의 손에서 건져 달라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원수는 내가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갚아 주십니다.
시편 109편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이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저는 이 말씀을 사랑합니다. 나는 나를 해하려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나를 괴롭히고 대적을 합니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다윗은 통치하기 전에 고난을 받았고 높임을 받기 전에 낮아졌습니다. 그를 사랑하고 높이 평가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려고 했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그를 미워하며 시기하고 그에게 악을 행하려고 했던 많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르며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가시는 곳마다 그의 말씀을 듣고 그가 행하시는 기적을 보기 위하여, 문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시기하여 그를 책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쫓아다니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갈 때 시장해서 밀 이삭을 잘라 비벼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안식일에 타작을 했으니 안식일을 범했다고 했습니다. 병들어 다 죽게 된 사람이 하도 불쌍해서 고쳐 주었더니 또 하는 말이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있느냐고 비난했습니다.
어떤 때는 예수님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어서 그를 잡으려고 음모를 꾸미기도 했습니다. 간음하던 여인을 잡아가지고 예수님께로 와서 하는 말이 “선생님, 이 여인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사람을 돌로 치라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의 동기가 그들이 몰라서 예수님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이렇게 대답해도 법에 걸리고 저렇게 말해도 걸리게끔 하려고 하였습니다. 가령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대로 돌을 들어 이 여인을 치라.” 했으면 그들은 곧 말할 것입니다. 사랑을 부르짖던 사람이 사람을 돌로 치라고 한다 할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용서해 주어라.” 하게 되면 이 사람은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함정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저희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에 기가 막힌 표정으로 아무 말씀도 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인가 땅에 글을 쓰고 계셨습니다. 이때 빨리 대답하라고 재촉을 합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머리를 드시며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 하시고 계속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너무 놀랍습니다. 그때 달려들던 사람들이 어른으로부터 어린아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다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 사셨습니다. 그러시다가 나중에는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1절에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강포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 다윗은 이 말씀에서 적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특색은 매우 위험한 인물로 표현했습니다. 한 마디로 악한 사람이요, 강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사울 왕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4절에도 같은 말씀을 반복했습니다.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강포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저희는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강포한 자는 악인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다윗을 대항해서 조직을 만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뱀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도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내용인즉 두 마디의 기도로 되어 있으나 실상은 통하는 내용입니다. 다만 악은 시험의 결과를 말할 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시험은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획책한 가운데 일어나는 사건을 말합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 말로는 시험이라고 번역을 했으나 의미가 전혀 다른 시험이었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시험을 영어로는 ‘temptation’이라 하고 우리를 세우려고 하는 시험은 ‘test’라고 번역했습니다.
가령 야고보서 1장 13-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이렇게 하나님은 악으로 시험하지 아니하십니다.
여기에 말한 시험은 ‘temptation’입니다. 이것은 악한 것입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마귀의 소행입니다. 욥이 뜻밖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것도 시험입니다. 시험은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달콤한 것도 있습니다. 뱀이 하와에게 와서 시험한 것은 달콤한 것이었습니다. 요셉에게 보디발의 아내가 나타났던 시험도 달콤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금식 기도하시는 데 사탄이 와서 시험한 것 역시 달콤한 것이었습니다. 요셉도, 예수님도 이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시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시험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심령을 망하게 하려는 마귀의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다른 한 가지의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어로 ‘test’라고 번역했습니다. 아주 잘된 번역입니다. 창세기 22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그 다음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번제로 드리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느 정도나 되나 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하신 일입니다. 아브라함을 넘어뜨리려는 동기에서가 아니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그의 믿음을 더욱 성장케 하려는 뜻입니다. 이것은 ‘test’입니다.
요한복음 6장 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빌립의 믿음을 ‘test’해 보시려고 디베랴 바닷가에 모여 있는 많은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 손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아시면서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시험을 봅니다. 이것을 영어로 ‘test’ 또는 ‘examination’이라고 합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학생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학생들이 시험을 통해서 실력이 향상되기를 바래서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험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험 자체를 없애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마귀가 존재하는 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시험은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시험에 들지 않아야 합니다. 시험에 걸려 넘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이 시험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시험을 잘 이기면 큰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욥은 시험을 받았습니다. 정말 어려운 시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잘 참고 이겼더니 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귀가 얼마나 간교한지를 우리가 미리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교활합니다.
“저희가 중심에 해하기를 꾀하며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2절) 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본의 아니게 남에게 손해를 끼치게 되는데 악인을 중심으로 다른 사람을 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싸우기 위해서 매일 모인다는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어떤 때는 차가 급정거를 할 때에 사람들이 밀리면서 다른 사람의 발을 밟는 실례를 범할 수가 있습니다. 본의 아닌 실수요, 실례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미리 모여서 의논을 하고 이런 경우에 “네가 다른 사람의 발을 밟으면 그 사람이 거기에 주의가 집중될 테니까 그때 그 사람의 주머니의 돈을 훔쳐라”고 해서 의도적으로 이런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이긴 하지만 악인입니다. 저희는 악을 행하기 위해서 늘 모입니다.
본문에 “매일 모인다”고 했습니다. 왜요? 한 가지 방법만 가지고는 안되니까 매일 모여서 악을 도모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 냅니다. 다시 말하면 악을 행하는 데 열중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당시의 일을 기억하세요? 예수님을 해치려는 사람들은 매일 모여서 의논하고 연구하고 모략했습니다.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 고쳐 주신다고 안식일을 범하는 죄를 범했다고 비난하면서 저희들은 모여서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의논했습니다.
로마서 3장 11절 이하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닮은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는 하나님이 두려워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를 향해 하신 말씀입니까? 유대 사람들, 그들이 바로 이런 죄를 범하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목구멍이 열린 무덤 같아 입만 열면 더러운 말, 비난하는 말, 원망하는 말로 썩은 냄새가 나지 아니합니까? 우리의 혀가 진실을 말하는 대신 속임을 베풀지 않았습니까? 우리 입에 저주와 악독으로 가득 차 있지 아니합니까? 우리의 발이 피흘리는 데 빠지지 아니하였습니까? 주님, 우리를 이런 자리에서 건져 주시옵소서!
본문 4절에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강포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저희는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했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간교와 간사한 생각으로 계획을 짜놓습니다. 그들은 선한 사람들을 쫓아가며 밀쳐서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죄와 환난에 빠지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재산을 부수고 그의 생명을 탈취하여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그들은 힘있는 사냥꾼같이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 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다”고 본문 5절에 말했습니다.
이러한 목적과 그를 대항하는 저희의 계획은 발견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더욱 효과를 볼 것처럼 보이고, 그가 알아차리기 전에 그들의 손에 망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역사를 통해 보면 하나님은 교활함이 없는 단순한 자들을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한 언제나 그럴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독액을 혀에 주입하는 뱀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합니다. 그들의 말에는 악의가 있습니다. 그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들은 중상과 모략으로 다윗을 파멸시키려고 노렸습니다. 풀 속에 숨어 있는 독사에게 사람이 물리는 것처럼 비밀리에 파멸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 남에게 그들의 독을 주입하려고 노력했고 지옥의 자녀들보다 7배나 더하게 그랬습니다. 사실 독이 있는 혀는 인간을 늙은 뱀처럼 만듭니다. 입술에 있는 독은 그 마음에 독이 가득하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런 악한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본문 5절에 보면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 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나이다” 했습니다. 저희는 자신들을 속이고 저희의 성공을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마귀와 비슷합니다. 그들의 지배적인 파괴의 죄는 교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박해자들의 교만이 지금은 아무리 공포에 가까울 정도로 무섭지만 박해를 받은 사람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왜냐 하면 그들이 교만하면 할수록 더욱 빨리 파멸로 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할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여호와여 나를 건지시며 나를 보전하소서 나를 지키소서” 하고 다윗은 기도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그들이 행하는 것과 같이 행하지 않게 하시며 혹은 그들이 나를 그렇게 행하도록 하지 못하게 하소서 내가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하지 말도록 지키소서.”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악을 많이 나타낼수록 우리는 더욱 열심으로 하나님께 우리를 그의 보호하심 아래 둘 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안전할 것이며 거룩한 평정으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안에서 안정을 찾는 사람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말대로 우리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다윗은 오늘 본문 6, 7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리우셨나이다”
하나님께로 피할 때 승리가 주어집니다. 그의 대적자들이 그에게 대적하여 저희의 혀를 날카롭게 했을 때 그가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혀를 날카롭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었지만 그의 입술에는 은총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증거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다윗이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의 약속 때문에 큰 위험 중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으나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달려 나아갔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이 시간에 주의 전에 모이게 된 것이 아닙니까?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관심에서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했습니다. 주가 나의 하나님이시라면 주는 나의 방패요, 전능한 보호자가 되십니다. 괴롭고 위태로울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외치며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할 때 이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주께 피하면 주님은 우리를 대적의 손에서 지켜주십니다. 주님은 내 구원의 능력이 되시며 구원 그 자체이십니다. “나의 구원은 주께 있나이다. 주는 강한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내 구원의 강한 능력이십니다. 주는 나의 행복이시며 나의 행복을 보전케 하시는 주가 되십니다.”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리우셨나이다” 다윗이 일생을 돌이켜보면 그의 생명을 잃을 뻔한 적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놀랍게 보호해 주셨으며 그 머리에는 골리앗보다 더 좋은 투구를 주셨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블레셋과의 전쟁의 날에 지키셨고 거짓 마음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의 해치려는 음모에 빠지지 않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군대의 공격에서만 지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의 기만에 대해서도 그의 백성을 보전하십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여호와의 오른손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그의 백성들을 도우셨고 현재도 도우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8절에 “여호와여 악인의 소원을 허락지 마시며 그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가 자고할까 하나이다” 만일 악인이 그대로 성하기만 하면 그들이 자고해질까 염려된다는 말입니다. 악인의 번영은 들의 풀과 같습니다. 들의 풀이 늘 푸르고 늘 무성한 것은 아닙니다. 가을에 찬 서리가 내리면 하루아침에 시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 죄 없는 이스라엘 민족을 아주 멸해 버릴 음모를 꾸미던 하만의 경우를 보세요. 하만은 일찍이 파사 나라에 공을 세운 바 있어 아하수에로 왕의 버금가는 총리대신까지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왕궁을 출입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만에게 절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모르드개는 그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에게 당하는 이 모욕을 생각할 때 그가 누리는 영화가 모르드개 한 사람 때문에 목에 가시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하만은 자기의 상한 자존심과 모르드개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그의 동족 유다 족속까지 전멸시키고 그가 미워하는 모르드개만은 극형에 처하려는 잔인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 후에 왕에게 찾아가 간청했습니다. “대왕이시여, 지금 우리 파사 나라의 국교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이 나라 각도에 흩어져 있는데 그들 때문에 우리 나라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니 이 나라의 평안을 위해서는 아예 유대인들을 없애버리는게 좋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하수에로 왕이 조서에 어인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왕이 술을 마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짐작이지만 아하수에로 왕이 12월 13일을 기해서 파사 나라 각 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다 죽이라는 조서에 반지인으로 서명을 했을 때는 술이 취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참하게 죽이려고 계획을 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을 검으로 쳐죽이고 보기 싫은 모르드개만은 하만이 미리 세워 둔 50규빗이나 되는 높은 나무에 매어 달아 죽이기로 하였습니다.
조금도 빈틈없이 하만의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이와 같이 하만은 무자비하고 처참한 계획을 다 세우고 있었으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다른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아하수에로 왕도 하만도 전연 생각도 못한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만의 음모가 무르익어감에 따라 하나님의 계획도 함께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모르드개와 온 유대인이 죽게 된 전날 밤이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잠을 청해도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어서 그의 비서를 시켜 역대 일지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 읽게 하였습니다. 읽어 가는 도중에 “문 지키는 왕의 두 내시가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것을 모르드개가 미리 알고 그것을 왕께 고발하여 왕의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는 대목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기사를 들은 왕은 깜짝 놀라면서 “아, 그러면 내 생명을 구해준 은인 모르드개에게 무슨 상을 준 일이 있느냐?” 비서의 대답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 그래 이런 법이 어디 있나? 그러면 그에게 무슨 상을 주어서 표창하면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벌써 날이 밝아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들어오는 사람은 하만이었습니다. 하만은 왕에게 모르드개만은 목매달아 죽이는 것을 허락받으려고 들어오던 차였습니다.
이때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을 보는 순간 하만을 의심하게 되었고 지혜롭게 물었습니다. “하만, 짐이 존귀케 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좋겠나?” 이때 하만의 생각에는 그 사람이 으레히 자기인 줄 생각하고 대답하기를 “대왕께서 사람을 존귀케 하시려면 대왕께서 입으시는 왕복과 대왕께서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관을 취하여 그 사람에게 입히고 씌우신 후 그 사람을 말에 태워 성중에 다니며 그 모든 백성들 앞에서 반포하시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할 것이다’ 하십시오.”
이 말을 듣고 있던 왕이 “아, 그것 참 그렇구먼. 하만, 자네가 이제 말한 대로 내가 타던 말을 끌고 나와 모르드개를 그 위에 태우고 성내에 가서 지금 말한 것처럼 하게.” 이 말을 들은 하만은 맥이 탁 풀렸습니다. 그러나 왕의 명령을 어길 수 있어요? 그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만의 계획은 완전해 뒤집혀졌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섭리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잠이 오지 않는 것, 역대 일기를 읽게 한 것, 일기 중에 모르드개의 공로가 기록된 대목을 읽게 된 것 이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결국은 유대민족이 살고, 음모를 꾸몄던 하만은 그가 모르드개를 죽이려 준비해 놓았던 나무에 높이 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이와 같은 일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모르드개를 위시해서 수산에 있는 모든 유대인이 밤낮 사흘 동안을 금식하며 기도했고 유대인 출신 왕후였던 에스더는 민족의 운명을 위하여 자신도 금식기도한 후에 왕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나아가는 결단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세요.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신원하시며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리이다” 했습니다. 환난 중에서 기도하고 억울한 환경 속에서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진실로 의인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큰 믿음의 비밀
(시 140:1-13)
찬송가 284장
시편 140편은 다윗이 사울에게 피해 다니던 10여년에 걸친 유랑생활을 그 배경으로 해서 지은 전형적인 비탄시입니다.
즉 악인들의 사악한 계교로 인해 사면초가요 진퇴양난의 절망적 상황에서 하나님께 상황을 소상히 아뢰며 부르짖으며 악인에게서 구원해 주시기를 애절하게 호소합니다.
1-5절에서 현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고, 6-8절은 지난 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주셨던 것처럼 보호해 주실 것을, 9-11절에서는 악인에 대한 심판을 확신하고, 12-13절까지는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한 사람이 왕과 국가를 상대했던 그 담대한 믿음을 본받아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로 승리하는 큰 믿음의 성도가 다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