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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산초담 3
가사(歌詞)를 지으려면 반드시 글자의 청탁(淸濁)과 율(律)은 고하(高下)를 분간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음률(音律)은 중국과 달라서, 가사를 짓는 이가 없다.
공용경(龔用卿)과 오희맹(吳希孟)이 왔을 때,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호)이 차운하지 않자,
세상에서는 체면을 유지했다고들 하였다.
그 후에 소퇴휴(蘇退休)가 시강(侍講)의 운에 차운한 시에,
傷心人復卷簾看 마음이 서글픈 이 발 걷고 다시 보니
目斷凄凄芳草色 꽃다운 풀빛 위에 눈길이 멈추네
라는 구절은 화공(華公)이 여러 차례 칭찬하였으니, 모두 음률에 맞아서인지,
아니면 다만 그 말씨의 아름다움을 취한 것인지?
나의 누님이 언젠가 ‘시를 지으면 운율에 맞다’고 차칭하면서
소령(小令)짓기를 좋아하기에,
내 속으로 남을 속이는구나 하였는데,
《시여도보(詩餘圖譜)》를 보니 구절마다 옆에 동그라미와 점으로,
어떤 자는 전청(全淸)ㆍ전탁(全濁)이고 어떤 자는 반청(半淸)ㆍ반탁(半濁)이라 하여
글자마다 음을 달았기에 시험삼아 누님이 지은 시를 가지고 맞추어 보니,
어떤 것은 다섯 자 어떤 것은 세 자의 착오가 있을 뿐,
크게 서로 어긋나거나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제야 걸출ㆍ고매한 천재적인 소질로 겸손하게 힘썼기 때문에
많은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이처럼 성취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의 ‘어가오(漁家傲)’ 한 편은, 모조리 음율에 맞고 다만 한 자가 맞지 않았다.
사(詞)는 다음과 같다.
庭院東風惻惻 뜰에는 봄바람 스산하고
墻頭一樹梨花白 담머리엔 한그루 배꽃 희어라
斜倚玉欄思故國 옥난간에 기대어 고향 그리나
歸不得 갈 수는 없고
連天芳草凄凄色 하늘과 맞닿은 우거진 꽃다운 풀빛만이
羅幙綺窓隔寂寞 비단방장 비단창도 쓸쓸히 닫겼는데
雙行粉淚霑朱臆 단장한 얼굴에 두 줄기 눈물 붉은 가슴 적시네
江北江南煙樹隔 강북과 강남은 무성한 나무가 가리었는데
情何極 이 그리움 어이하리
山長水遠無消息 산 높고 물은 아득 님 소식은 없으니
‘주(朱)’ 자는 마땅히 반탁(半濁) 글자를 써야 하는 자리인데 ‘주(朱)’ 자는 전탁(全濁)이다.
나의 중형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斗柄垂寒野 쓸쓸한 들에 북두성 자루는 드리웠고
灘沙閣敗船 부서진 배 여울 모래에 놓였구나
-소재(蘇齋) 상공이 몹시 칭찬하여 당인(唐人)에 못지않다고 하였다.
나의 중형의 거산역(居山驛) 시
長路鼓角帶晨星 새벽 별빛 아래 먼 길 떠나는 고각 소리 들리는데
倦向靑州古驛亭 터벅터벅 청주 고역정으로 향한다
羅下洞深山簇簇 나하동 그윽하고 산은 웅기중기
侍中臺廻海冥冥 시중대(侍中臺)를 감도는 바다는 아득아득
千年折戟沈沙短 천년 전 부러진 창 모래에 묻혀 짧고
十里平蕪過雨腥 십리 황무지는 비 온 뒤에 비린내 나네
舊事微茫問無處 옛일은 아득해라 물을 데 없고
數聲橫笛不堪聽 두어 가락 젓대 소리 차마 어이 들을 건가
삭계례(朔啓例)에 따라 그 시가 대궐에 들어가니,
주상이 보고 몇 번이나 감탄하고는 오륙구(五六句)에 이르러서는,
“작구법(作句法)이 의당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조사(詔使) 황번충(黃樊忠)이 거련관(車輦館)의 반송(蟠松)을 읊었는데,
그 맨 끝구에 한(韓) 자를 압운하니,
나의 중형이 한 선자(韓宣子)가 각궁(角弓)을 읊은 일을 인용하여 짓기를
還同魯嘉樹 도리어 노 나라 가수(嘉樹)처럼
封植敢忘韓 북돋아 길러서 한 선자를 잊을쏜가
라 하였다. 이숙헌(李叔獻) 선생이 그 당시 원접사였는데 이 시를 버리고 쓰지 않자,
고제봉(高霽峯)이 크게 한탄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홍당릉(洪唐陵)이 몰래 황공(黃公)에게 보이니,
황공이 전편을 손으로 베껴 가져오게 하고는 한동안 고개를 끄덕이었다.
중국 사람은 시의 공정을 아는 것이 이러하다.
근세 어떤 선비가 지리산(智異山)에 유람갔는데,
한 외진 숲에 이르니, 폭포는 이리저리 흐르고
푸른 대 우거진 가운데 한 띳집이 있는데,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섰다가,
선비를 보고는 몹시 반기며 손을 맞아 솔 아래 앉혀 놓고
막걸리에 나물국으로 대접하고는 말하기를,
“이 늙은 것이 평소에 머리 빗기를 좋아하여 하루에 꼭 천 번은 빗어내린다오.”
하면서 쪽지를 내어 놓는데, 그 속에 든 것이 바로 머리를 빗는다는 소두시(梳頭詩)였다.
木梳梳了竹梳梳 얼레빗으로 솰솰 가려 낸 다음 참빗으로 훑되
梳却千廻蝨已除 천 번이나 훑어내니 이는 벌써 없어졌네
安得大梳長萬丈 어떻게 하면 만 길 되는 큰 빗 구하여
盡梳黔首蝨無餘 백성의 이 모조리 훑어 없앨꼬
성혼 호원(成渾浩原 호원은 자) 선생이 청양군(靑陽君)을 애도한 시에,
宦遊浮世定誰眞 속세에 벼슬살이 진정 뉘가 참인고
逆旅相逢卽故人 역려에서 만나니 바로 친구일레
今日祖筵歌一曲 오늘의 이별 자리 한 가락 노래로
送君歸臥舊山春 고향 봄동산에 가서 누울 그대 전송하네
차천로 복원(車天輅復元 복원은 자)의 글은 당시 사람들이 웅문(雄文)이라 일컬었다.
글(文)이란 기(氣)로써 주를 삼아야 하건만
복원(復元)은 하찮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았고,
사륙문(四六文)은 전아(典雅)해야 하는데도
복원의 사륙문은 순정치 못하고 거칠다.
시는 그보다 더 못하다.
그의 일본기행고(日本紀行稿)가 매우 많아 천여 수나 되지만,
읊을 만한 글귀는 하나도 없다.
다만 명천(明川)으로 귀양 갈 때 지은
天外怒聲聞渤海 하늘가에 성난 소린 발해의 파도
雪中愁色見陰山 눈속에 시름겹긴 음산의 빛이로다
라는 구절은 정말 웅혼(雄渾)하다. 그러나 전편이 다 그렇지는 못하다.
만약 복원이 조금만 사리를 추구하여 많이 짓거나
빨리 짓는 데 치우치지만 않았다면,
고인의 경지에 이르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복원(復元)이 이필이 형산에 돌아가기를 비는 표[李泌乞還衡山表]를 지었는데,
屢犯客星於帝坐 객성이 임금자릴 여러번 침범하고
常叩卿月於天閽 늘 경월이 천혼을 두드렸네
라는 구절이 있어 세상에서 적절하다고 일컬었다.
우리 중형이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가는 윤칠계(尹漆溪)를 보내는 시
卿月暫辭天北極 경월이 잠시 대궐을 하직하자
福星先照洛東江 복성이 먼저 낙동강을 비추누나
라는 구절이 있으니, 차천로의 표에 비하면 나은 것 같다.
한익지(韓益之)가 어떤 일로 파직되어 농사를 짓기로 하고 온 식구가 원주로 내려갔다.
배가 종실(宗室) 순치수(順致守)의 별장에 닿았는데,
수(守)는 마침 활을 쏘고 약을 캐던 터라 사람을 달려 보내어 누구냐고 물어왔다.
익지(益之)는 대답을 하지 않고 절구 한 수로 대구하기를
公子風流自不群 공자의 풍류가 무리에 뛰어나니
春來漁釣杏花村 봄이 오자 살구꽃 마을에 낚시질하네
扁舟過客勤相問 쪽배 탄 나그네가 정겹게 문안드리니
我是衿陽舊使君 이 사람은 금양의 옛 원이라오
-라 하자 수가 배를 타고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이익지(李益之)가 최가운(崔嘉運)을 따라 영광(靈光)에 노닐 적에,
사랑하는 기생이 있어 자금(紫錦)을 사주려는데,
그 비단 살 돈을 마련할 수 없어,
익지가 시로써 다음과 같이 빌었다.
商胡賣錦江南市 장사아치 강남 저자에서 비단을 파니
朝日照之生紫煙 아침 해가 비치자 자주빛 안개가 피어나는구나
美人欲取爲裙帶 미인은 그걸 사서 치마며 허리띠를 만들려는데
手探囊中無直錢 주머니 더듬어야 돈은 없구려
가운(嘉運)이 말하기를, "손곡(蓀谷)의 시는 한 자가 천금이니 감히 비용을 아끼랴.”
하고는 한 자에 각각 세 필씩 쳐서 그 요구에 응해 주었으니,
그 재주를 아낌이 이와 같았다.
동파(東坡)의 시에
惆悵沙河十里春 슬프다 사하 물가 십리의 봄
一番花老一番新 한 차례 꽃 이울자 다음 꽃 새로워라
小樓依舊斜陽裏 비낀 저녁 놀에 작은 누각 예 같건만
不見當時垂手人 그 당시 춤추던 이 어디 갔는지
손곡(蓀谷)이 죽은 아내를 슬퍼한 시에도 또한 동파의 말을 답습했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羅幃香盡鏡生塵 깁 방장엔 향내 가시고 거울엔 먼지
門掩桃花寂寞春 닫힌 문엔 복사꽃만 쓸쓸한 봄날
依舊小樓明月在 작은 누각엔 옛날처럼 달은 밝은데
不知誰是捲簾人 발 걷고 달 즐길 이 그 누구런가
이 시는 무르녹게 곱고 정겨워 전사람의 말을 쓴 줄도 모를 정도다.
익지(益之)가 기생을 너무 좋아한 것으로 남에게 비방을 받으면서도
정에 끌린 것이 이러하단 말인가.
당 나라 장우(張祐)와 최애(崔涯)가 창루(娼樓)에 제시(題詩)를 해 주었는데,
만약 칭찬을 하면, 네 말[馬]이 끄는 수레가 그 문을 메우고,
그 시가 기생을 헐뜯으면 손님도 끊겼다.
신차소(申次韶) 선생이 상림춘(上林春)이라는 기생에게 준 시에
第五橋頭煙柳斜 제오교 머리에 내 낀 버들 비꼈고
晩來風日轉淸和 밤들자 바람 자고 날씨도 해맑아라
緗簾十二人如玉 노르스름한 열두 난간에 아가씨 옥과 같으니
靑瑣詞臣信馬過 대궐 안 시인들도 말 가는 대로 찾아드네
라 하니, 기생의 명성은 이로 인해 십배나 올랐다.
이익지(李益之)가 옥하선(玉河仙)이란 기생을 비웃기를
頭如刷箒色如銀 빗자루 같은 머리털 그나마 센데다가
黙坐無言似鬼神 암말 않고 앉은 꼴 귀신 같구나
遍身綺羅疑借著 몸에 걸친 비단옷도 얻어 입은 듯
只宜終嫁郭忠輪 고작해야 곽충륜에게나 시집가겠군
이라 하였다. 충륜(忠輪)은 장님인데 돈은 있었다.
이 기생은 유명했었으나 익지(益之)의 시가 나오자 문득 그 집이 쓸쓸해졌다.
똑같이 이름난 기생이로되, 한 시로 그 값을 올릴 수도 내릴 수도 있었으니,
어찌 다만 기생뿐이겠는가? 대개 선비도 이와 같았다.
임자순(林子順)은 스스로 소치(笑癡)라 호하였다.
우리 중형이 언젠가 기생들의 고사를 모아 글을 지었는데,
화치(和癡)의 고사를 따서 이십사령(二十四令)을 지었다.
자순(子順)이 칠언시로 제하기를
揀得名花二十四 추리고 가린 명기 스물넷인데
笑癡之物一無之 소치의 차지는 하나도 없네
人間萬事皆虛僞 인간 만사 다 거짓이라고
處處風流說笑癡 곳곳마다 풍류랑은 소치라 말들 하네
라 하였는데, 그의 글은 흔히 볼 수가 없다.
이른바 《수성지(愁城志)》라는 것은 문자가 생긴 이래로 특별한 글이니,
천지간에 절로 이런 문자가 없어서는 안 된다.
익지(益之)의 시를 세상 사람들은 기생에 대한 실수 때문에 트집을 잡지만,
그의 동산역시(洞山驛詩)에
隣家少婦無夜食 이웃집 어린 며느린 저녁거리도 없어
雨中刈麥草間歸 비맞으며 보리 베어 풀섶길로 돌아오네
靑薪帶濕煙不起 축축한 생솔가지 불도 안 붙는데
入門兒女啼牽衣 문 들어서자 어린 것들 옷 잡고 칭얼대네
라 하였으니, 시골 살림의 식량 딸리는 보릿고개 실정을 직접 보는 듯하다.
그의 이삭줍기노래[拾穗謠]에는
田間拾穗村童語 논에서 이삭 줍는 어린이 하는 말
盡日東西不滿筐 온 종일 이리저리 주워야 소쿠리도 안 차요
今歲刈禾人亦巧 올해는 벼 베는 이 솜씨 하 좋아
盡收遺穗上官倉 한톨이라도 흘릴세라 관창에 다 바쳤대요
라 하였으니, 흉년에 시골 사람의 말을 마치 친히 듣는 듯하다.
영남도중(嶺南道中)이란 시에서는
老翁負鼎林間去 영감은 솥 지고 숲길로 가버렸는데
老婦携兒不得隨 할멈은 어린 것을 데리고 따라가질 못하네
逢人却說移家苦 사람 만나 떠돌아다니는 괴로움 넋두리하되
六載從軍父子離 종군하기 육년이라 부자도 이별이라오
부역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살 수 없어 유리 신고하는 모습이 실려 있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이 시를 보고 가슴 아파하며 놀라 깨달아,
고달프고 병든 자를 어진 정치로 잘 살게 한다면,
그 교화에 도움됨이 어찌 적다 할 것인가.
문장을 지음이 세상 교화와 관계가 없다면 한갓 짓는데 그칠 뿐일 것이니,
이러한 작품이 어찌 소경의 시 외는 소리나 솜씨 있는 간언보다 낫지 않겠는가.
이망헌(李忘軒 망헌은 이주(李冑)의 호)이 진도(珍島)로 귀양 갈 때,
이낭옹(李浪翁 낭옹은 이원(李黿)의 자)을 작별하는 시에
海亭秋夜短 바닷가 정자에 가을밤도 짧은데
一別復何言 이번 작별에 새삼 무슨 말 할꼬
怪雨連鯨窟 궂은비는 깊은 바닷속까지 연하였고
頑雲接鬼門 험상궂은 구름은 변방에까지 이었네
素絲衰鬢色 흰 구레나룻에 파리한 안색
危涕滿痕衫 두려운 눈물 자국 적삼에 그득
更把離騷語 이소경(離騷經)의 말을 가지고
憑君欲細論 그대와 꼼꼼히 따질 날 그 언제런가
그가 제주도로 이배(移配)될 제, 배가 막 뜨려는데 친동생이 뒤쫓아 왔다.
떠나면서 시 한 수를 읊어 작별하기를
强停櫓鳴痛平生 찌걱거리는 노 굳이 멈추고 한평생을 서러워하니
白日昭昭照弟兄 백일은 밝게밝게 우리 형제를 비추네
若敎精衛能塡海 정위새 와서 바다를 메우기만 한다면
一塊耽羅可步行 한 덩이 탐라도를 걸어서도 가련만
하였으니 천년 뒤도 읽는 이의 애를 끊어지게 하리라.
김경림 명원(金慶林命元 경림은 봉호)이 우리 형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근세에 이현욱(李顯郁)이라는 이가 있어 시마(詩魔)에 걸렸는데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호) 상공(相公)은 그런 줄도 모르고 굉장히 칭찬을 하였다.
이익지(李益之)가 어느 날 상공을 뵈러 가니 상공은 현욱(顯郁)의 시를 보여주며
그에게 고하(高下)를 품평케 하였다.
그러자 이익지는
步復無徐亦不忙 봄이 오는 걸음걸인 느릴 것도 없고 서두는 것도 아닌데
東西南北遍春光 봄빛은 동서남북으로 고루 비치네
라는 구절을 들어, “이것은 정말 문장가의 말투입니다.
우리나라 서ㆍ이(徐李) 같은 분도 일찍이 이런 말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나이도 어리니 필경 시마(詩魔)가 붙은 것입니다.”
하였지만, 상공은 그렇게 여기질 않았으나 얼마 있다가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그가 허영주(許郢州)에게 차운한 시에
春山路僻問歸樵 봄 산길 외져 돌아가는 나무꾼에게 물으니
爲指前峯石逕遙 손가락으로 앞산 돌길을 가리키네
僧與白雲還暝壑 중도 백운도 어두운 골짜기로 돌아간 뒤
月隨滄海上寒潮 달은 푸른 바다 찬 밀물을 따라 오르네
世情老去渾無賴 세상살이 늙을수록 도무지 믿을 수 없는데
遊興年來獨未銷 유흥만은 요즘에도 삭을 줄 모르누나
回首孤航又陳迹 둘러보니 외로운 배 벌써 자취 아득한데
疏鐘隔渚夜迢迢 물 건너 드문 종소리만 한밤에 은은해라
라 하였고, 이익지에게 차운한 시는 다음과 같다.
風驅驚雁落平沙 바람에 휘몰려 놀란 기러긴 편편한 모래밭에 내려앉고
水態山光薄暮多 물맵시 산빛엔 어스름 빛 자욱해라
欲使龍眠移畫裏 용면(龍眠)시켜 이 경치 그림폭에 옮기려 하는데
其如漁艇笛聲何 고깃배의 젓대소린 이를 어쩐다지
말들이 모두 속기가 없고 격이 또한 노숙하다.
시마(詩魔)가 떠난 뒤로는 일자무식이 되어 마치 추매(椎埋)처럼 되어버렸다.
정용(鄭鎔)의 아들 백련(百鍊)이 일찍이 중풍에 걸렸는데 하루는 스스로 말하기를,
“어떤 젊은 서생을 만났는데, 연화관(蓮花冠)을 쓰고 용모는 눈빛[玉雪] 같았다.
그는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당 나라의 아사(雅士) 요개(姚鍇)로
이장길(李長吉 장길은 이하(李賀)의 자)과 친한 친구 사이인데,
안탕산(雁蕩山)에 산 지 2백년이 된다.
조선의 산천이 가장 아름답다기에 한라산에 옮겨 산 지도 천 년 가까이 되었다.
다시 금강산으로 가려고 하다가 자네와 인연이 있으므로 삼각산에 와 살게 되었다.
그런 지도 벌써 30년이 되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여기에 왔다.’고 했다.” 하였다.
그의 시는 다음과 같다.
萬里鯨波海日昏 만리라 큰 바다에 날은 저문데
碧桃花影照天門 벽도꽃 그림자 하늘문에 비치네
鸞驂一息空千載 신선 수레 한 번 쉬면 천년이 훌쩍 지난다던데
緱嶺靈笛半夜聞 구령의 신선 피리 소리 한밤에 들리누나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棲身三角三十春 삼각산에 깃든 지 삼십년인데
日日每向南雲哭 남녘 구름 바라보며 늘 울었네
松風不如龍吟聲 솔바람 소리는 용음 소리만 못한데
蘭雁又下三陵鶴 난안은 또 삼릉학만 못하도다
三陵鶴不來 삼릉학은 오지를 않고
蜀道峯前秋月黑 촉도봉 앞엔 가을 달만 어둡구나
어떤 이가 난안(蘭雁)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난초가 시들 무렵이면 철새인 기러기가 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렇게 한 해 남짓 지나더니 시마(詩魔)가 떠나자 병도 나았다.
이현욱(李顯郁)의 시마는 장편 대작도 다 지을 수 있었고,
산문(散文)도 다 원숙했는데, 정백련에게 걸린 시마는 격은 현욱보다 나았지만
율시는 절구에 못 미쳤으니, 더구나 그 문(文)이야 말할 게 있겠는가.
요개(姚鍇)의 이름은 전기(傳記)나 소설(小說)에도 보이지 않으니,
혹 당 나라 말기에 절구로 이름난 이가 아닌가 한다.
우리 중형은 그의 오언 절구를 사랑하여 성당(盛唐)에 못지 않다고 여겼다.
그가 노산(魯山)의 구택(舊宅)에 제(題)한 시는 다음과 같다.
人度桃花岸 사람은 복사꽃 핀 강 언덕을 지나가고
馬嘶楊柳風 말은 버들에 스치는 바람 소리에 운다
夕陽山影裏 노을진 산 그림자 속에
寥落魯王宮 노산군댁은 쓸쓸도 하여라
청명날 남에게 주다[淸明日贈人]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二月燕辭海 이월이라 제비가 바다를 뜨니
千村花滿辰 고을마다 꽃이 가득할 때로다
每醉淸明節 청명이면 으레 취한 지도
至今三十春 올 들어 하마 삼십년일세
춘만(春晩)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酒滴春眠後 봄잠 자고 나서 술잔 따르니
花飛簾捲前 걷은 발 앞에 꽃이 흩날리네
人生能幾何 덧없는 인생 얼마나 살리
悵望雨中天 비 내리는 하늘을 창연히 바라보네
추일(秋日)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菊垂雨中花 국화는 빗속에 꽃 드리우고
秋驚庭上梧 뜨락의 오동잎은 가을에 놀래누나
今朝倍惆悵 오늘아침 갑절이나 서글퍼짐은
昨夜夢江湖 어젯밤 시골 꿈을 꾸어서일세
그의 문금(聞琴)이란 시는 이러하다.
佳人挾朱瑟 아름다운 여인 붉은 비파를 끼고
纖手弄柔荑 삐비 같은 섬수를 희롱하누나
忽彈流水曲 갑자기 유수곡 타니
家在古陵西 집이 고릉 서녘에 있네
익지가 또,
明月不知滄海暮 밝은 달은 큰바다 저문 줄도 모르고
九疑山下白雲多 구의산 기슭엔 흰 구름만 자욱
이란 구절을 전해 주었는데, 이런 구절은 이미 꿈의 경지에 든 것이다.
백련(百鍊)의 아우 감(鑑)은 나와 절친하므로, 상세한 얘기를 갖추 들었다.
김충암(金冲庵)의 비로봉에 올라서[登毗盧峯]란 시에
落日毗盧峯 해는 비로봉 위에 지고
東溟杳遠天 동해는 먼 하늘인 양 아스라해라
碧巖敲火宿 푸른 바위에 불을 지펴 자고
聯袂下蒼煙 옷소매를 나란히 자욱한 안개 속을 내려오다
하였는데, 우리 중형의 시는
八月十五夜 팔월이라 한가위 밤에
獨立毗盧峯 비로봉 위에 홀로 서다
桂樹天霜寒 계수나무에 하늘 서리 차갑고
西風一雁影 하늬바람결에 외기러기 그림자
라 하였으니 충암(冲庵)의 시와 같은 가락이라 할 만하다.
첫댓글 잘 감상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