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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인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간신히 살아나오는 절친 친구의 모습을 보며 이런 시를 지어 친구에게 헌사했습니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코올 병에 담가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 못해 해면같이 부풀어 오른 두 뺨 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 박아 박군아 헌영아! 사랑하는 네 안해가 너의 잔해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들이 네 손을 잡는다. 이빨을 악물고 하늘을 저주하듯 모로 흘긴 저 눈동자 오!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오냐 박군아 눈을 빼어서 갈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주마! 너와 같이 모든 한을 잊을 때까지 우리들이 심장의 고동이 끊칠 때까지.”
그리고 그 중간에 독립을 열망하며 지은 시인데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도 수록된 유명한 “그날이 오면”을 끼워 넣었습니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이 “그 날이 오면”이라는 시는 심훈의 가장 유명한 시입니다. 30대 때에 장티푸스에 걸려 요절했으니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심훈하면 생각나는 시는 단연 ‘그날이 오면’입니다. 심훈은 일본제국주의 강제식민통치로부터 대한민국이 독립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만약 그가 더 살아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보고 얼마지나지 않아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고 여전히 분단된 이 한반도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통탄했을까요? 또한 그가 일본의 고문을 받고 구치소에서 나오는 친구를 위로하며 독립투사로 추켜세웠던 친구가 김일성과 함께 동족상잔의 비극 6.25 한국전쟁을 일으킨 사람, 동족의 피비린내를 주도적으로 만들어낸 사람 바로 박헌영이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한탄했을까요? 그렇게 권력과 이념에 빠져 동족의 비극을 일으킨 친구 박헌영이 휴전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그는 얼마나 이념과 권력에 허무함을 느꼈을까요? 그가 칭송했던 친구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독립한 이후에는 자유와 평화와 인권이 보장받는 나라를 만들어 주기를 기대했는데 오히려 그 친구는 민족과 국가에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심훈은 절대로 그 친구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그런 시를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친구를 위해 만든 이 시, 친구를 칭송하는 이 노래는 정말 슬픈 노래입니다. 위로의 노래이지만 염원의 노래이지만 너무나 아픈 노래입니다. 진정 허무한 노래입니다. 인간이 만든 노래, 특히 인간이 어떤 인간에 대해 존경을 표시하며 시를 만들고 노래를 만들 때 그것이 나중에 정말 배신의 칼날이 되어 자신을 괴롭힐 때가 많습니다. 많은 음악가, 많은 문학가, 많은 유명인들이 애인을 노래하거나 민족과 존경하는 사람을 예찬하지만 배신을 당하고 정말 배반의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영웅으로 묘사하며 작품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그들이 죽기도 전에 자신이 만든 작품에 대해 후회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 작품은 살아남았고 그 작품은 작자의 유명세로 인해 대단한 작품이 되었지만 그 배경을 보면 정말 식견이 부족했다는 오점을 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삶속에 이렇게 배반의 반복이 일어나고 우리의 삶에 비수가 꽂히는 일들이 많습니다. 세상에서 대부분의 참 믿음직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우리에게 큰 아픔과 상처를 주고 배신, 불신을 주게 되는 경우를 참 많이 보게 됩니다. 하지만, 영원불멸이고 영원한 믿음이고 영원한 칭송의 대상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갔지만 영원히 그들을 사랑하시고 돌아오기를 원하시고 회복의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처음부터 사랑하셨던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앞에 바로서는 은혜를 기대하시며 기다리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이 경험하는 불행한 일들과 그럼에도 그들을 찾으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저와 여러분도 우리의 삶속에서 항상 은혜가 넘치고 회복의 역사를 경험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를 경험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환경, 첫째는 슬픔이 임했습니다.
아모스 5장 2절입니다.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이 당한 고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엎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엎어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일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으켜줄 사람도 없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정말 큰 슬픔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침공이후 벌써 1년이 넘는 기간동안 계속 전쟁중입니다. 일방적으로 밀리던 우크라이나에 대해 미국과 유럽이 도와주면서 전세가 역전되어 빼앗겼던 영토를 많은 부분 다시 수복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비용이 들어가면서 이제 우크라이나를 돕는 나라들도 이젠 힘이 빠져서 “왠만하면 그냥 이 정도 영토가 빼앗긴 것으로 만족하고 휴전해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고 많은 영토가 빼앗겼는데 그럼에도 그냥 그만 이 선에서 멈추기를 유럽과 미국은 원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정만 60만이 넘는 히브리 민족을 당대의 최강국가였던 이집트와 싸워 빼내서 광야에서 40년을 먹여 살리셔서 결국 가나안에 진입시켜 그곳에 정착시키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어느 정도의 비용을 쓰셨을까요? 이스라엘백성의 출애굽과정에 어느 정도의 경제적 지원이 있었는 지 우리는 상상하기 조차 힘듭니다. 그들을 향한 계획을 품으시고 하나님의 계명을 주시며 하나님의 땅에서 살아갈 때 지켜야 할 것들과 자신이 받을 제사까지 정하시고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것만 요구하시는 언약을 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만 인식하며 살아간다면 모든 삶을 책임져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땅이 생기고 먹고 살 만해지니까 자신들은 왕이 없다’라고 하며 왕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왕이 생기자 왕이 자신들과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남쪽 왕, 북쪽 왕 따로 분열하여 나라를 갈라놓았습니다. 특히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굳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왕을 유지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자신들이 다 바꿉니다. 쿠데타까지 일으키며 심심하면 왕조를 바꿉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율법과 제사장, 성막, 성전등도 변질시켰고 권력자들끼리 생각한대로 새로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돈의 상징인 소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우기며 우상을 만들었고 자신들이 즐길 수 있는 방식으로 제사 형태를 바꾸어 제사를 드립니다. 이 모든 일을 보신 하나님께서 슬픔과 분노의 노래를 지으시고 예언자에게 부르도록 하시는 데 그것이 아모스서입니다. 오늘 본문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모스 5장 1절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오늘 본문의 앞 부분은 애가입니다. 사실 정확한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애가’라기 보다 ‘조가’라는 것이 의미가 잘 통할 단어일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위한 노래’입니다. 이 죽은 자들을 위한 노래를 살아있는 자들에게 불러줍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지은 ‘애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미래는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이 미래에 대해 예언할 아모스가 이미 이스라엘의 미래를 외치고 있습니다. 아무런 선지자 교육도 받지 않은 선지자, 아무런 제사장직분을 받지 못했던 제사장 아모스가 북쪽 이스라엘에서 예언을 합니다. 그럴 때 그 지역의 제사장과 선지자는 분명 그를 시기하고 모함하고 죽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제사장이 되려면 제사장의 아들이어야 했고 선지자가 되려면 선지학교를 나와서 활동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북쪽 이스라엘이 원래 제사법과는 너무나 멀리 간 제사양식, 너무나 하나님의 말씀과는 멀리 나간 인간 멋대로의 말씀사역들속에서 제사장 같지 않은 제사장, 선지자같지 않은 선지자들 뿐이었습니다. 이런 북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드고아의 목자인 아모스를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 그가 예언했던 2절을 보십시오. “처녀 이스라엘이 쓰러졌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못다핀 꽃 절은 생명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아름다운 인생을 꿈꾸시고 인도하시는데 죄로 인해 멸망당하고 꽃을 피우지 못한 이스라엘을 한탄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계획을 잠시 접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군사적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아모스 5장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군대로 동원한 장정 천 명이 있던 도시가 이제 100명만 남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100명을 동원할 수 있던 도시에서는 10명만 남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전투에 나간 병사의 삼분의 일이 피해를 보고 전쟁가능한 사람의 숫자가 반이하로 떨어지면 거의 회복불능의 국가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아모스서에서는 아모스가 하나님의 예언을 선포하며 이스라엘 인구의 10분의 9가 사라지고 십분의 일로 줄어듭니다. 이는 집집마다 자식을 잃은 곡소리에 더해 이스라엘이 주변의 다른 이방민족의 놀림거리, 조롱거리, 노략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서도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면 우리 맘대로 잘 살아갈 것 같고 내가 내 인생을 관리하며 더 잘 될 것 같아보여도 결국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살아갈 때 가장 잘되도록 세팅이 된 존재입니다. 저와 여러분 혹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수동적인 것같고 뭔가 조정받는 것같아 싫으십니까?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정말 주변의 놀림, 주변의 조롱, 주변의 노략을 당하며 실패자가 될 확률이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결국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나면 언제 패망이 찾아오고 멸망의 삶을 살아갈지 알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생기는 아픔과 어려움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뭔지 깨닫고 이 아픔과 슬픔속에서 바른 길을 찾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를 경험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환경, 둘째는 세상적인 해결책을 찾아다녔습니다.
아모스 5장 5절입니다.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우리는 앞에서 아모스 5장이 애가로 시작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후에 부른 노래입니다. 죽은 사람들을 위한 조가입니다. 이스라엘은 꽃도 피어보지 못하고 죽은 민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무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상태의 암울한 이스라엘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더 암울한 이스라엘의 상황이 뭔지 아십니까? 이스라엘은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벧엘, 길갈, 브엘세바”등을 찾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도 해결책을 “벧엘, 길갈, 브엘세바”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벧엘, 길갈, 브엘세바”로 가서는 안 됩니다. 왜냐면 그곳에는 하나님을 잘못 섬기게 하는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벧엘에는 여로보암이 금송아지 우상을 세웠습니다. 제사장들은 왕에게 돈을 내고 제사장이 된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이 아닌 지배계층에게 충성했습니다. 남유다의 제사장들과 달리 그들의 임명자는 하나님이 아닌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모스는 이렇게 비뚤어진 신앙 전통을 가진 성소들이 무너질 거라고 예언합니다. 원래 이 장소들은 믿음의 장소였습니다. 벧엘은 야곱이 돌기둥을 세워 하나님을 만난 것을 기념했던 장소였고 세겜을 떠난 뒤에 단을 쌓아 회개했던 장소였습니다. 사울과 다윗, 솔로몬의 단일왕국시대에는 거룩한 예배의 장소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던 곳이었습니다.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에 입성한 첫 장소로서 그곳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켰던 장소였습니다. 브엘세바도 하나님의 영광과 믿음의 상징이 되었던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던 곳이고 하나님께서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신 곳이고 사무엘이 그의 아들들을 사사로 세운 곳입니다. 믿음의 유서가 깊은 곳 하나님의 역사를 간직한 곳입니다. 그런데 이 땅을 모두 우상을 숭배하는 중심지로 바꿔놓았습니다. 유서깊은 장소, 믿음의 역사가 있던 장소를 타락시켰습니다. 믿음의 대가 끊기고 저주의 상징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축복의 상징을 저주의 상징으로 다 바꾸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던 장소를 우상을 섬기는 장소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속에 우리가 은혜와 축복의 경험들을 우상화하여 겉으로는 예수님을 모시고 신앙생활 잘 하는 척 하지만 잘못된 신앙행위를 하는 것은 없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데 다른 곳에서 찾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6장 2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밭에도 나가지 말라 길로도 다니지 말라 원수의 칼이 있고 사방에 두려움이 있음이라”
예레미야 6장이나 42장에서 하나님께서 왜 “밭이나 길로도 다니지 말라”는 말씀이나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말씀을 주실까요? 그 의미가 바로 오늘 본문과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기에 그게 좋은 해결책인 줄 찾아가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하시는 것 앞에서는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벧엘을 찾고 길갈을 찾고 브엘세바를 찾는 줄 아십니까? 본질이신 하나님이 해결해주는 것보다 자신의 무슨 행위가 자신을 구해줄 줄 알고 그 행위자체마저도 잘못된 것인 줄 모르고 그 행위만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행위마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예배드려야죠, 열심히 찬양하고 기도해야죠, 열심히 헌금도 드리고 열심히 성경공부도 하고 신앙적으로 해야 할 많은 영적 훈련들과 영적 삶을 살아야겠죠? 그런데 그 속에 알맹이가 빠지면 안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마다 신을 예배하는 방식을 스스로 만들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나님을 섬길지 말지 또 계신 지 안 계신지를 판단합니다. 현대 교회 안에서도 그런 모습을 봅니다. 교단이나 교파를 넘어서 어떻게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자기만의 종교를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찾기보다 돈, 명예, 권력등을 하나님보다 더 우선적으로 내세우며 마치 그것이 하나님인 듯 신앙생활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42장 19절입니다.
“유다의 남은 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두고 하신 말씀에 너희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 하셨고 나도 오늘 너희에게 경고한 것을 너희는 분명히 알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문제해결의 방법을 우리속에서 찾거나 우리의 전통가치관속에서 찾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는 예전부터 교회에서 이렇게 해왔어라고 말하는 교회속에서 배워왔던 방식속에서도 잘못된 노력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내 생각대로 하나님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만든 벧엘, 우리가 만든 길갈, 우리가 만든 브엘세바라는 우상을 내려놓고 하나님앞에 나아가서 은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를 경험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환경, 셋째는 하나님을 찾을 때 문제가 해결됩니다.
아모스 5장 6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
오늘 본문에서는 정말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 하나님의 해결책을 아모스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우리 인생의 해결책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위기의 순간을 겪고 결국은 다 잃어버리고 이제 패망의 수순을 걷고 있는 이스라엘이지만 이제 도무지 회생가능성이 없고 이제 완전히 끝이라고 생각되는 이스라엘이지만 이 때에도 희망은 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깨달아야 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라는 사실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관점으로는 남은 것이 없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관점은 남은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전쟁에 참가해서 나라를 지킬 사람이 10퍼센트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찾으라”고 하십니다. 헛된 희망을 품으라는 말씀이 아니고 남은 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때 살아날 길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아모스 5장 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이스라엘이 해야 하는 일은 여호와를 찾는 일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라는 말씀속에서 “찾는다”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을 찾으라는 말씀일까요? 그 말씀은 바로 하나님앞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라”, “섬기라” “그의 뜻을 구하라”라는 말씀입니다. 간절히 찾아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안에서 간절히 찾아야 하나님 안에서 해결되는 것입니다.세상적으로 찾는 것이 아닌 우리의 열심을 가지고 간절히 찾는 것이 아닌 하나님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7,8절입니다. 같이 일겠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여러분 이 말씀은 신앙생활하는 우리도 좋아하지만 교회에 안나오는 사람들,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웬만큼 알고 있는 말씀이며 꽤나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왜 좋아하시는 지 아십니까? 뭔가 노력하고 뭔가 찾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적극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기의 삶은 자기가 해결하는 것이다라는 가치관을 심어주기에 종교적인 색깔이 없고 인간이 좋아할 만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마태복음 7장의 이 말씀이 과연 그런 뜻일까요? 이 말씀은 “구하면 얻고 찾으면 찾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라는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 전제가 마태복음 7장 전체에 깔려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는 온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우리를 다스리고 모든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 이 모든 것을 해결하여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냥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해결된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간절히 믿고 제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뢰할 때” 하나님안에서 해결책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지는 것을 경험하고 우리의 소원과 합력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안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 일을 경험하고 슬픈 상황에 놓일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속에서 정말 일이 막히고 답답한 상황에 놓일 상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도 하나님만 의지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만 신뢰하고 하나님을 찾으면 문제가 해결됨을 믿습니다.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나아갈 때 우리의 우선순위, 우리의 삶의 기준이 하나님앞에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다 해결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슬픔의 해결자되시는 하나님을 찾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요즘은 이제 마스크를 쓰지 않고 마트에서 쇼핑하고 마스크를 쓰지 않고 여행을 다니고 마스크를 쓰지 않고 학교 수업을 듣는 상황까지 코로나팬터믹 상황이 거의 종료될 듯한 상태까지 찾아왔습니다. 3년이 넘는 기간동안 정말 두려움과 걱정으로 코로나팬더믹 상황에서 조심스럽게 살아왔습니다. 이 정도의 치명적 바이러스유행은 생전 처음인 분들이 거의 99.9인지라 정말 이 상황은 정말 난감하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항상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지켜나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었고 여전히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전도등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살아온 우리 모두를 칭찬합니다. 어려운 시기에 함께 해주시고 기도해 주시고 응원 격려해주시는 분들이 있었기에 또한 이 어려움을 잘 헤쳐나가고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 이 위기를 통해 우리가 진정 깨달아야할 것을 오늘 본문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위기속에서 인간적인 해결책과 인간적 방식으로 해결한 것은 없는가? 정말 본질적인 하나님앞에서의 신앙으로 문제를 해결한 것인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 코로나의 위기속에서 가정마다 직장마다 교회마다 참 힘든 상황, 슬픈 일들, 어려운 환경을 주신 이유를 깨닫고 회개하며 인간의 해결책으로 이 난국을 헤쳐나가지 말고 더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안에서 은혜의 체험, 회복의 체험을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