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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신년 제2강
말씀을 전파하라
말씀 / 디모데후서 4:1-22
요절 /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순교가 임박한 시점에서 에베소 교회의 책임 목회자로 세움 받은 디모데에게 쓴 유언적 목회 편지입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 자신이 일생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아왔으며 전도자로서 어떤 자세와 소망으로 달려왔는가를 말해줍니다. 특히 오늘 말씀에서 복음 전파에 따르는 고난과 희생을 두려워해 주저앉아 있는 디모데를 격려하고 말씀 전도자의 열정을 불일듯하도록 돕기 위해 말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가 무엇에 힘써야 하는지, 왜 힘써야 하는지 방향의 말씀으로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디모데를 향해 엄히 명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순교가 임박한 사도 바울이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유언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Preach the Word!” ‘전파하라, preach’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고지하라는 것입니다. 집에서 보면 전기세, 관리비 등을 납부할 때 고지서가 날라 옵니다. 고지서를 보내줘야 비용을 지불할 수 있습니다. 고지서를 보내주지 않으면 비용도 알 수 없을뿐더러 비용 안 냈다고 책임 추궁을 할 수도 추궁을 받을 일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고지서를 보내주듯 말씀을 각 사람에게 고지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맡은 자들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올바르게 가르쳐주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 책무를 잘 감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말씀을 영접하지 않는 그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맡은 자의 책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않으면 그 책임은 말씀 맡은 자에게 물으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제가 더 경각심을 가지고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고 가르치고 힘써 전파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캠퍼스 영혼들에게 말씀으로 섬기도록 목자로 세움을 받은 우리가 말씀을 올바르게 제대로 힘써 전하고 가르치는 일대일 사역을 올 한해 힘써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강조하는 ‘말씀 전파’에서 ‘말씀’은 어떤 말씀을 가리킬까요? “Preach the Word.” 여기 ‘Word’가 소문자가 아니라 대문자입니다. 대문자 ‘Word’를 어디서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이 말씀을 NIV성경으로 보면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John 1:1)로 기록됩니다. 여기 대문자로 쓰인 ‘Word’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즉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하나님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로 표현됩니다. NIV성경으로 보면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John 1:14)로 여기서도 ‘Word’가 대문자로 기록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즉 말씀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예수님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이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만이 이 시대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이 예수님만이 죄와 죽음의 세력을 파하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만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을 주십니다. 이 예수님만이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주십니다. 이 예수님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또 영어성경과 마찬가지로 원어성경에도 정관사 ‘the’의 의미를 가진 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the Word’, ‘그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앞의 3장에서 가르쳐 준 그 말씀입니다. 3장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에서 고통하는 시대에 유일하게 구원의 희망을 주는 ‘그 말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5-17) 바울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익혔고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으로는 흠을 잡기 쉽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내면에 일어나는 죄성을 이기지 못하고 번번이 패배하며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해방시켜 생명과 성령의 능력을 얻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고통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성경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b) 또 성경 말씀은 오늘날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유일한 능력의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이 성경 말씀이 전파되는 곳마다 놀라운 생명 구원과 진정한 자유함과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하고 싶은 많은 말 중에 디모데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왜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하나님 앞에서 보면 또 예수님 앞에서 보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좌우하는 것이 바로 말씀 전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최후 심판을 하실 때 멸망 받느냐 구원받느냐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심판을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 최후의 심판을 하시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심판을 받느냐 구원을 받느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완성하실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느냐 참여할 수 없느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심판과 구원을 좌우하는 것이 말씀 전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 전파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멸망 받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중요하기에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령합니다. 그것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경우 감옥에 갇혀있는 시간은 말씀을 전파하기에 때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유의 때든지 감옥에 갇혀있을 때든지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사도행전에서도 살펴봤듯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자기를 지키는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빌1:13).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행28:30,31). 그는 갇혀있으면서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든 말씀을 전파하고자 편지를 써서라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처럼 바울 자신이 했던 것처럼 어떤 때 어떤 상황일지라도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항상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힘써야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은 쉽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말하지만 막상 전하려고 하면 쉽지 않습니다.
또 여기 ‘항상 힘쓰라’의 원어 의미는 ‘곁에 두다, 가까이에 있다’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NIV성경은 ‘be prepared’로 번역합니다. ‘준비되어 있으라’는 말입니다. 말씀을 늘 가까이에 둬서 준비하고 있다가 언제 어느 때든 누구에게라도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말씀을 전파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이나 시대 상황보다 전파하는 사람의 자세가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말씀을 전파하는 우리가 준비되는 게 중요합니다. 환경은 좋을 수도 있고 안 좋을 수도 있지만 사람은 준비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디모데는 복음 전파에 따르는 핍박과 고난이 사라지면 전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연소해서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으니 좀 더 신앙의 깊이와 경륜이 쌓이면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바울 목자님이 출옥하고 나면 또 자기의 건강이 좋아지고 나면 그때 말씀을 전파하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말씀 전파하기 좋은 때가 오기를 바라지만 성경의 관점은 우리와는 다릅니다. 어쩌면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항상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요즘 캠퍼스나 사회 상황을 보고 나의 현실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오늘날 캠퍼스나 사회는 복음의 수용력이 많이 떨어졌다. 오늘날 선교하기는 쉽지 않다. 취업하기도 어려운데 다른 사람 생각할 여력이 없다. 직장에서 살아남기도 어렵고 내 앞가림하기도 힘들다.” 사실 알고 보면 항상 어려웠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로마의 핍박 시기도 있었고 중세 암흑기도 있었고 우리나라로 보면 일제 핍박도 있었고 1980년대 사회 혼란과 더불어 민주화 운동 시기도 말씀 전파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말씀 전파가 어려워 보이는 때에도 오히려 순교자들을 통한 복음의 확장 역사가 일어났고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우리나라도 사회혼란 시기, 말씀을 전파하기 어렵게 보이던 그때에도 놀라운 말씀 역사, 제자양성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말씀 전파에 좋고 나쁠 때는 없습니다. 복음 전파를 힘들게 하는 요소만 시대에 따라 달라졌을 뿐 항상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런 환경에 매일 수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환경과 상황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환경이든 안 좋은 환경이든 항상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전해도 그만 안 전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상황, 조건, 기분, 감정에 따라 순종해도 그만, 순종하지 않아도 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항상 힘써야 합니다. 말씀 전파는 사랑하는 주님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당부이기도 합니다. 이 같은 말씀 전파가 생명을 살려냅니다.
극동방송 이사장으로 알려진 김장환 목사님의 인생 메모 중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극동방송을 듣는 분은 귀에 익은 내용일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이 쉬지 않고 방송되는 극동방송을 듣게 하십시오.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지금 생명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하는 것은 생명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을 전하는 우리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5). 생명을 전하는 우리의 삶은 성경이 말하고 있고 또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으로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전파할 때 어떤 자세로 사람을 도와야 합니까? 2b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전도자가 말씀을 전파할 때 가져야 할 자세는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고 또 같은 사람이라도 상태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 전파자는 사람과 상태에 따라 섬세하게 도와야 합니다. 때로는 분명하게 죄를 깨닫고 뉘우치도록 돕고 때로는 강한 책망을 통해서라도 죄를 떠나도록 경계하고 때로는 격려하고 위로하며 실제적인 부분을 도와주며 권면하기도 해야 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오래 참음입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오래 참는 것이 아닙니다. 병행하여 가르침이 꼭 필요합니다. 오래 참으면서도 말씀에 기초해 분명히 가르치고 권면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고 말세가 가까울수록 올바른 교훈을 받지 않으려 합니다. 지금 시대가 딱 그렇습니다.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받아들이려 하기보다는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합니다. 자기 욕심과 기분과 스타일과 만족을 채워줄 만한 것들을 찾아 나섭니다. 요즘 시대 흐름은 인본주의, 개인주의, 물질만능주의, 무신론이 판을 치고 쾌락 사랑하기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성경 말씀이 고리타분해 보이고 노잼입니다.
이런 시대에 복음을 맡은 우리 전도자, 목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복음을 받아들이길 싫어하는 시대 속에 고난을 받을지라도 전도자로서의 직무를 책임감 있게 감당해야 합니다. 사실 복음을 전할 때 배척받는 것도 고난이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복음을 전하러 나가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고난일 수 있습니다. 복음 전하는 삶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열매가 없을 때는 더욱 낙심되고 복음 전하기 싫어집니다. ‘기회비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간과 물질과 열정을 드린 것에 비해 열매가 없는 상황들이 반복되다 보면 하기 싫습니다. 전도자로서 삶을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고난 없는 영광, 고난 없는 상은 없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6,7절을 보십시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라는 말의 원어 의미는 ‘내가 이미 완전히 부어졌다(스펜도마이)’ 또는 ‘내가 이미 완전히 봉헌되어졌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바울의 죽음, 즉 순교가 가까이 왔음을 의미합니다. 죽음 앞에서 바울은 전도자로서 자신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고백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과 영광을 위한 싸움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싸움입니다.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말합니다. 그는 인생 마라톤 경주에서 주저앉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 위기를 여러 번 겪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달려갈 길,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이런 바울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8절을 읽겠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은 지금 죽음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만일 전도자로서 세상의 인정과 명예와 안정을 추구했다면 어둡고 차디찬 로마 감옥에 갇힌 자신을 생각하면서 깊은 회의와 연민에 빠지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에는 주님이 주실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영광스러운 소망과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 모든 성도들에게도 자신과 동일한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을 확신하며 격려해 줍니다. 사도 바울은 이 소망을 통해 우리 믿는 모든 자들에게 동일한 의의 면류관을 받는 소망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성도들에게 장차 주님 재림 시에 주실 면류관으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이야기합니다. 그때는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완벽한 의를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에게는 불의가 조금도 없습니다. 또 영생을 주십니다.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놀라운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전도자요, 목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같은 의와 영생과 영광의 소망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또 바울은 면류관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빌4:1)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2:19) 바울은 자신의 복음 전파를 통해 열매 맺은 제자들이 주님 다시 오실 때 주님 앞에서 자신의 면류관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파에 항상 힘썼습니다.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고 경계하며 권면할 때 수반되는 해산과 양육의 모든 수고를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개척할 때도 이 면류관을 바라보며 모든 겸손과 눈물로 에베소 양들을 섬겼습니다. 유대인들의 간계와 방해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과 고난들을 참고 견디며 주와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다. 양들을 위해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사람 눈치 보지 않고 거리낌 없이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세상 풍조와 이단 사설로부터 에베소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며 양육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인생은 참으로 위대해 보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만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만 의로우신 재판장으로부터 의의 면류관을 받기에 합당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라고 말하므로 우리 믿는 모든 성도에게도 받을 수 있는 소망으로 확증시켜 줍니다. 의와 생명과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나를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격스러울까요? 우리도 각자의 인생을 끝마치면서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과 권면을 남길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이 땅에서의 말씀 전파와 복음 역사를 위한 우리의 수고와 헌신을 주님이 상으로 면류관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배척당해 상처 입은 마음, 복음의 씨를 뿌렸지만 열매를 거두지 못해 힘든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주와 복음 역사를 섬기면서 남몰래 흘렸던 아픔과 눈물을 다 닦아주실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 주님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복음의 일군들을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단12:3)
9-22절은 디모데에게 하는 개인적인 부탁과 사람들에 대한 안부를 전하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 순교를 담담히 받아들이며 의의 면류관을 소망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높은 수준의 영성이 있습니다. 그런 동시에 바울을 보면 디모데가 하루빨리 와 주기를 바라고 감옥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겨울 전에 두꺼운 겉옷을 가져다주기를 바라는 사람으로 필요한 것을 구하는 지극히 정적이고 인간적인 모습도 보입니다. 바울도 인간적인 돌봄과 위로도 필요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이 달랐던 것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자기 곁에 계셔서 힘을 주시므로 살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도 마지막 말은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란다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람으로서 인간의 돌봄과 위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근본적으로 주님을 힘입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소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해 볼 때 주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우리가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사모하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파에 항상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주실 의와 영생과 영광의 면류관을 소망하면서 진정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생명을 살리는 전도자의 사명과 직무를 충성스럽게 섬기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