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 / 안경덕
삶은 이별과 늘 공존한다. 이제 몇 시간 뒤에는 내일이다. 내일과 동시에 오늘과는 이별이다. 꼭 해야 하는 예정된 이별이 만남만큼 많다. 계절, 사람, 시간과는 약속된 이별인 셈이다. 죽음의 이별은 영영 만날 수 없어 슬프다. 하지만 그 인연이 끝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함께 나누었던 정겨운 추억과 사랑이, 삶의 향기와 발자취를 우리의 가슴에 남겨주고 떠나지 않던가.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 장소는 여러 곳에서 이루어진다. 어쩐지 항구의 이별이 가장 애련할 것 같다. 처녀 때 선원과 맞선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중매인에게 일언지하 거절하셨다. 이유는 뱃사람이라는 강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선원은 미지의 바다에서 매일 높은 파고와 싸워야 하기에 성향이 환경 따라간다고 지레짐작했던 모양이다.
그 선원과 맞선 보고 결혼으로 이어졌더라면 항구에서 가슴 아픈 이별을, 만남의 기쁨을 여러 번 체험 했으리라. 부부가 오랜만에 만났을 때 새로운 정이 솟아날 것은 자명하고, 서로서로 위하는 절실한 마음이 배가 될 거라고 믿어서였을까. 친구 남편이 직장 관계로 해외로 나가 있을 때 부러웠다. 아쉬움, 그리움, 기다림으로 뭉친 그들의 사랑이 무척이나 돈독했다. 실지로 이별의 서러움을 겪는 이나 몇 번 당면해 본 이는 배부른 공상이라 할 테다. 하지만 갖지 못한 것, 해보지 못한 것을 동경하는 마음을 쉬이 내려놓지 못 한다. 인지상정이 아닐는지.
바다에 배가 닻을 올려 떠나고, 돌아와 닻을 내려 안착하는 곳이 항구다. 선원에게는 항구가 또 하나의 집이랄까. 우리네의 집도 항구가 아닐는지. 맞벌이가 드물던 시절엔 날마다 주부들은 아이는 학교로, 남편은 일터로 보내는 준비된 이별을 했다. 그리고 외로운 등대지기가 됐다. 등대지기의 기다림을 식구들은 잘 몰랐다. 항구를 향해 하나둘 귀향해 오는 배 마냥 저녁이면 드문드문 귀가하는 식구가 선원이었다고나 할까.
집은 고단한 몸을 쉬게 해주고, 지친 마음에 위안을 준다. 세상사 아무리 힘들어도 안온한 집이 있기에 어제의 고달픔은 거뜬히 잊고 오늘을 산다. 그처럼 망망대해 외롭게 떠 있는 배도 돌아갈 항구가 있어 거친 파도와 거센 비바람과 맞설 수 있을 테다. 만선의 깃발을 휘날리며 항구로 돌아오는 선원의 푸근한 마음, 초등학생이 시험 점수가 백 점일 때 자랑하고 싶은 부푼 마음, 새댁이 매운 시집살이 하다 친정 갈 때 나를 듯한 마음은 모두 한결같으리라. 좀 더 빨리 집으로 내 달리고 싶은 그때의 심정만큼 절절한 일은 흔치 않다.
내가 체험 못 한 아픈 이별을 영화에서 더러 봤다. 기차가 점차 멀어져간 플랫폼에서 떠나는, 임을 못 잊어 석고상 마냥 서 있는 쓸쓸한 장면, 뱃고동 소리 뚜 울리며 서서히 사라져 가는 배, 그 배가 작은 점으로 보일 때까지 바라보는 장면은 하나같이 쏴 하게 안겼다. 둘 다 쓰라린 이별이지만 왠지 항구의 이별이 더 아릿했다. 그래서일까. 항구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의 노랫말에는 이별과 사랑이 빠지지 않는다. <울며 헤진 부산항> <항구의 일 번지> <돌아와요 부산항>이란 제목의 노래에 애간장이 탔을, 목이 멨을 주인공들의 슬픔이 배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던 저릿한 영화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슬픔, 만남의 충만과 기쁨이 교차하는 항구는 이별의 장이자, 만남의 광장이다. 세계의 무역이 이루어지고, 해외로 나가는 큰 관문이니만큼 하루에도 수많은 애환이 쌓이는 곳이다. 그 사연 따라 하늘도 울고 웃는다. 사연으로 말하자면 부산 남항을 빼놓을 순 없다.
‘목포는 항구다’라는 가요처럼 ‘자갈치는 항구다’라는 가요도 있으면 좋겠다. 자갈치는 남항을 끼고 있다. 자갈밭에 들어선 그 이름이 자갈치 시장이다. 6·25전쟁 후 피난민들의 생활 터전으로 시장이 더욱 왕성해 갔다. <굳세어라 금순아>노랫말에 영도다리는 피난 때 헤어진 부모형제 친지 친구 간 만남의 장소로 유명해졌다. 자갈치 시장이 사람을 불러 모은, 그 힘 덕분이 아닐까. 아무튼, 긴 세월만큼 수많은 사람이 삐 대고 간, 자갈치 시장은 그들이 포개 놓은 발자국이 역사다. 사라진 자갈의 아쉬움을 채워 주느라 자갈처럼 많은 사람이 날마다 자갈치 시장에 북적거린다. 그게 발판이 되어 오래전부터 부산의 명소이자 자랑이요, 큰 재산이 됐다.
알싸한 갯바람을 맞으며 온갖 생선과 활선어를 경매하고 운반해 나르는 상인들이, 가두 좌판 앞에서 여러 가지 생선 파는 아지매들이 부산의 새벽을 가장 먼저 열 성싶다. 그들의 넘치는 생동감과 억척스러움이 남항을 잠 깨운다. 서로 배려하고 아끼는 넉넉한 마음이 훈풍을 불러온다. 벗 삼은 비릿한 갯내와 땀 냄새가 정을 한층 더 도타워지게 하나 보다.
자갈치 바다의 뱃고동 소리가 무뎌진 세포를 일어서게 하고, 모여 든 팔도 사람의 시끌벅적한 기운이 상인들에게 힘을 실어준다. 시장을 찾는 사람들은 수평선 위로 갈매기들의 멋진 군무에, 상인들의 강인함에 활력을 느낀다. 나는 해운대, 광안리, 송도 바다는 가슴에 낭만을 심어 주고, 자갈치 바다는 탄탄한 삶으로 안긴다고 하고 싶다. 또 큰 배가 출항하는 이별의 항구는 클래식 음악처럼 은은하다면, 남항은 우리 소리처럼 걸쭉하다면 어떨까.
자갈치 시장을 내 집 드나들듯 하는 사람은 싼 어물을 사는 것도 목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곳곳의 정겨운 사투리가 어우러진, 후덕한 인심에 이끌려서인지도 모른다. 끈끈한 삶이 묻어나는 자갈치, 언제나 꿈이 영글고 살아 숨 쉰다. 항구의 남자는 갈매기도 사랑한다고 하듯 항구의 도시, 부산사람들은 자갈치시장을 무던히 좋아한다.
첫댓글 선생님 글 공감 갑니다
저도 젊은시절 해기사 승선생활을 해봐서
잠시 그시절 추억이 생각남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