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대한 감성이 맞닿은 탓으로 틈틈이 음악 파일을 주고받는 교수가 있습니다. 문학박사인 그는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명수 교수입니다. 굳이 실명을 공개하는 것은 필자가 비장한 마음으로 이웃 나라 일본의 대중문화사에서 가장 뜨거운 사랑을 받아온 엔카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1937~1989)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바로 김 교수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이슥한 밤에 늘 보내오는 깊은 울림의 음악 중에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소통에서 이야기의 봇물이 터지기 시작하면서 필자가 지난 30년 전에 많은 시간을 보냈던 가수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오랫동안 먼지가 쌓인 상자가 열렸습니다. 이후 서로 ‘미소라 히바리’ 노래를 보낼 때마다 가수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히바리 이야기로 박사학위가 나오게 되었다’며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글을 재촉하는 부채질을 잊지 않았습니다.
빛깔마저 바랜 오랜 세월 동안 쌓아두었던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자료를 다시 찾아내어 살펴보면서 예전에는 간과하고 있었던 행간의 내용이 번개처럼 스쳐 갔습니다. 한동안 깊은 생각을 거듭하며 운명적이라는 느낌을 앞세워 노래하는 종달새 ‘미소라 히바리’ 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웃 나라 일본에 쇼와(昭和)시대의 가장 빛나는 인물로 평가받는 가수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중심은 그가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가수라는 전설과 같은 오랜 풍문에 대해서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역사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는 중요한 내용이 너무나 많은 까닭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일본 대중문화의 정신으로 가장 사랑받는 가수의 몸에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억압의 땅에서 살아온 눈물겨운 재일 한국인의 소망이 소문에 소문만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실체적인 사실에 대한 논리적인 검증을 추구하지 못한 채 소문만을 붙들고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시간 동안 일본은 많은 작업을 통하여 터무니없는 소문의 해프닝으로 잠재우고 있습니다. 이에 오늘날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 ‘거짓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인의 작태’라는 모욕적인 인터넷 댓글을 남발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와 같은 ‘미소라 히바리’의 이야기를 써가면서 지금은 희미하게 그 개연성만을 붙들고 있지만 만약에 그러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우리의 젊은이들이 역사에 담긴 진실의 등불을 환하게 켜 들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이글을 시작합니다.
일본 가요사에서 가장 위대한 국민가수로 평가받는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1937~1989)에 대한 위상은 1989년 6월 24일 ‘히바리’가 신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가장 명예로운 상 ‘국민영예상’(国民栄誉賞)을 추서 받은 내용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본 최대의 잡지 문예춘추가 특집을 통하여 ‘전후 폐허의 어둠에서 일본이라는 주식회사를 만든 국민과 함께’ ‘그 사가(社歌)를 부른 가수’ ‘미소라 히바리’로 평가하였던 내용은 이러한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본 문화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미소라 히바리’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소문은 일본의 재일 한국인 사회에서는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히바리가 세상을 떠난 후 1989년 7월 우리나라 잡지 주간여성에 ‘미소라 히바리’ 그는 한국인이었다는 특집기사가 실렸습니다. 이는 작곡가 ‘손목인’(1913~1999)이 일본의 재일 한국계 가수 ‘미야코 하루미’ (본명-北村春美. 1948~)에게서 전해 들었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기사가 쓰였던 것입니다. 작곡가 ‘손목인’은 경남 진주에서 출생하여 1932년 도쿄 제국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였다가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편입하였습니다. 그는 1934년 조선일보 후원으로 열린 콜롬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한 음악대회에서 3등으로 입상한 고복수를 자신이 소속한 오케레코드사에 선발하여 첫 작곡 작품인 ‘타향’을 녹음하게 하였습니다. 바로 오늘날에도 애창하고 있는 가요 ‘타향살이’입니다. ‘목포의 눈물’ 그리고 ‘짝사랑’ 등과 같은 한 시대를 풍미한 주옥같은 노래를 작곡한 ‘손목인’ 작곡가가 재일 한국계 가수 ‘미야코 하루미’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었던 기자는 ‘미소라 히바리’의 죽음을 맞아 ‘히바리’ 아버지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기사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한 달이 지난 1989년 문예춘추 8월호에 ‘미소라 히바리’의 탄생에 대한 특집이 실렸습니다. 당시 문예춘추는 ‘미소라 히바리’가 태어나 자란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이소고구(横浜市 磯子区 滝頭)의 거주민에서부터 시대별로 ‘미소라 히바리’와 연관된 주요한 인물을 전 방위적으로 인터뷰하였습니다. 특히 한국의 잡지에 실린 ‘히바리’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기사에 대하여 당시 주간여성의 백승태(白承悦)차장의 인터뷰에서 히바리가 한국계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져 ‘이는 오래전부터 전해져 온 상식과 같은 이야기’라는 대답을 통하여 정확한 실증이 없는 소문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 문예춘추는 미소라 히바리의 아버지 ‘가토 마스키시’(加藤 増吉. 1911~1963)의 고향인 오늘날의 닛코(日光)인 ‘도치기현 카와치군 도요오카무라’(栃木県 河内郡 豊岡村)의 토착 주민으로 현지 ‘이마이치 시의회 부의장’(今市市議会副議長)을 맡고 있었던 ‘가토 츠’(加藤 實)라는 인물의 인터뷰를 실었습니다. 그 내용은 히바리의 아버지 집안이 에도 시대부터 이곳에 거주하여온 집안으로 마을의 반장격인 ‘구미가시라’(組頭)를 맡아 자신의 집안보다 직급이 위인 집안으로 히바리의 할아버지 카토 ‘초사쿠’(加藤 長作)때에 집안이 몰락하여 자신의 집 토지를 소작하고 있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본 엔카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의 재일 한국인에 대한 논란은 ‘미소라 히바리’ 자신이 생전에 공개적으로 언급한 명확한 증거가 존재하지 않고 있지만, 그 사실에 대한 개연성은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랴’는 속담처럼 소문에 소문을 이어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낳고 또 낳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일본의 주요한 언론은 많은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특히 문예춘추는 여러 차례에 걸친 특집을 통하여 이러한 반론을 거듭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짚고 가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 열도를 뜨겁게 달군 ‘한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문화가 해외로 전파되는 현상에 대하여 ‘한류’라는 명칭이 사용된 배경은 KBS 드라마 ‘겨울연가’가 2002년 3월 종방된 이후 2004년 일본에 수출되면서 일본 열도에 ‘겨울연가’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점에서부터입니다. 주연을 맡았던 배용준은 함께 출연하였던 최지우와 가장 인기 있는 스타가 되어 왕족과 같은 고귀한 신분을 뜻하는 ‘욘사마’(勇さま)라는 호칭으로 일본 최대의 한류스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MBC에서 방영되었던 54부작 드라마 ‘대장금’이 2004년 3월 종방 되면서 같은 해 10월 일본의 국영방송 NHK에 방영되면서 열연하였던 이영애와 함께 우리의 고유한 전통문화에까지 한류의 바람이 일었습니다. 이러한 열풍은 ‘박용하’ ‘이병헌’ ‘권상우’‘ 원빈’ ‘송승헌’ ‘이준기’ ‘장근석’으로 이어졌고 ‘보아’ ‘동방신기’ ‘소녀시대’ ‘카라’와 같은 가수들도 한류스타의 바람을 일으킨 주역이었습니다.
이러한 한류의 바람이 어느 날 태풍이 그친 고요처럼 다가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에 대하여 2012년 8월 10일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시기로 알고 있지만 엄밀하게 살펴보면 2011년에 발생한 ‘후지TV’ 사건에서부터 시작된 내용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후지 TV’ 사건을 살펴보면 일본의 영화배우 ‘다카오카 소우스케’(高岡奏輔. 1982~)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아사히 TV 계열의 드라마 '천국의 Kiss'를 통하여 1999년 데뷔하였습니다. 이후 많은 활동으로 2005년 다카사키 영화제에서 최우수 신인 배우상을 받았으며 2011년에는 일본영화 프로페셔널대상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유명배우입니다. 그는 2005년 ‘이즈츠카 즈유키’(井筒 和幸. 1952)감독의 영화 ‘박치기’에서 재일조선인 ‘리안성’역을 맡아 극 중의 ‘경자’역을 맡았던 여배우 ‘사와지리 에리카’(沢尻エリカ. 1986)와 열연으로 인기 배우의 대열에 합류하였습니다. 당시 이 영화는 2006년 국내에서도 개봉되었습니다.
그는 53회 칸 영화제에서 국제 비평가 연맹상을 받은 일본의 여배우 ‘미야자키 아오이’(宮﨑あおい. 1985)와 2007년 결혼하여 2011년 이혼하게 됩니다. 그는 이와 같은 시기에 소속되어있던 후지TV가 한국 K-POP에 대한 안내와 프로의 편성이 집중되어 한류의 인기를 과대광고하고 있다는 글을 SNS에 올리면서 일본의 극우세력이 이에 편승하여 대규모의 혐한 시위가 일어났던 이른바 후지TV 사건의 장본인입니다.
이러한 시점에 한국의 한류 문화 K-POP의 시너지로 인하여 일본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의 점유율이 떨어진 원인이라며 이러한 시위는 적합하지만, 그 시기는 늦었다고 말한 인물이 일본의 논픽션 작가 ‘요시다츠카사’(吉田司. 1945~)입니다. 그는 구마모토현의 미나마타만 에서 발생한 유기 수은 중독증 ‘미나마타병’(水俣病) 환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게게센키’(下下戦記)로 1988년 ‘오야 소이치’(大宅壮一)논픽션 상을 받은 이후 대표적인 작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1999년 ‘스타 탄생과 신 부흥기의 정신’(スター誕生ひばり・錦之助・裕次郎・渥美清そして新・復興期の精神)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가부키 배우에서 영화배우로 성공한 ‘요로즈야 켄노스케’(萬屋錦之介. 1932~1997)와 쇼와 시대의 대표적인 배우 ‘이시하라 유지로’(石原裕次郎. 1934~1987) 그리고 텔레비전 전환 시기의 배우로 일본영화사에 한 페이지를 남긴 ‘아츠미 기요시’(渥美清. 1928~1996)와 ‘미소라 히바리’와 같은 스타의 탄생을 통하여 일본 부흥의 정신이 이루어졌음을 설파하였습니다. 이후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2003년 ‘히바리와 유지로의 쇼와 수수께끼’(ひばり裕次郎 昭和の謎)라는 책을 통하여 ‘미소라 히바리’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을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전개하였습니다.
‘미소라 히바리’의 한국계 혈통에 관한 실로 헤아릴 수 없는 논란과 반론은 우리나라에서도 화제가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는 KBS 기자와 일본 특파원을 역임하고 전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던 전여옥 전 의원이 1993년 ‘일본은 없다’라는 책을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내용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1997년 재발행된 책은 ‘슬픈 일본인’(悲しい日本人)으로 일본에서도 출판된 책으로 이후 유재순 재일 르포작가는 자신의 원고 ‘일본인 그는 누구인가?’ 가 표절되었다는 사실을 주장하였습니다. 2004년 7월 ‘오마이뉴스’가 이러한 내용을 인터뷰하여 보도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전여옥 전 의원은 명예훼손에 의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여 2007년 1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으며 2012년 최종 패소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재판부의 판결기록을 보면 유재순 작가의 원고 중에서 미소라 히바리‘의 외할아버지가 한국인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었으나 유재순 작가가 취재를 통하여 이를 수정하여 그의 아버지가 한국인으로 주장한 내용이었지만 전여옥 전 의원의 ‘일본은 없다’ 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수정되지 않은 채 그대로 실린 사실을 중시하여 판결의 주요한 바탕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많은 화제를 가지고 있으며 의문으로 존재하는 ‘미소라 히바리’의 한국계에 대한 내용을 일본에 명확하게 제시할 증거와 기록은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필자는 ‘미소라 히바리’의 한국계에 대한 실체적인 자료와 기록에 앞서 우리가 왜 ‘미소라 히바리’가 재일 한국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 개연성의 실마리를 찾아보려 합니다. 여기서 잠시 ‘미소라 히바리’의 아버지 ‘가토 마스키시’(加藤 増吉. 1911~1963)의 장례식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1963년 2월 히바리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히바리의 여동생 ‘사토 세츠코’(佐藤 勢津子. 1939~)가 우리가 ‘남묘호렌게쿄’로 알고 있는 ‘니치렌슈우’(日蓮宗) 의 독실한 신자이었습니다. 당시 이러한 여동생 ‘사토 세츠코’의 주선으로 요코하마시 고난구(横浜市 港南区)에 소재한 (唱導寺)에 안장되었습니다. 이후 ‘미소라 히바리’는 매년 정월 3일과 추석에 사원에 폐가 되지 않도록 하려는 뜻으로 일반인들이 알아볼 수 없는 평범한 옷차림으로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였습니다.
이후 35년간 ‘미소라 히바리’의 매니저로 분신처럼 함께 하면서 일본의 가왕 ‘미소라 히바리’를 탄생시킨 어머니 ‘가토 기미에’(加藤 喜美枝. 1913~1981)가 1981년 7월 68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임종 직전에 ‘미소라 히바리’는 칸노(菅野) 스님에게 독경을 부탁합니다. 이후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이후 히바리는 정기적으로 메구로에 소재한 자택에서 칸노 스님과 함께 어머니의 제를 올렸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2년 후 1983년 10월 남동생 ‘가토 데츠야’(加藤 哲也. 1941~1983)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갔고 다시 2년 후인 1985년 막내 남동생 ‘가토 다케히코’(加藤 武彦. 1943~1985)마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는 비운이 몰아쳐 옵니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내용은 ‘미소라 히바리’의 아버지 ‘카토 마스키시’(加藤 増吉. 1911~1963)가 1963년 2월 세상을 떠난 이후 그해 겨울 동경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일본 조직폭력배의 칼에 찔려 그 후유증으로 12월 15일 세상을 떠난 세기의 프로 레슬러 역도산(力道山-金信洛. 1924~1963)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미소라 히바리’와 매우 절친하였던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난 프로 레슬러 ‘역도산’은 스캔들이 따라 다녔을 만큼 너무나 친밀한 사이였습니다.
이렇듯 1963년 2월 겨울의 막바지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한겨울 세모의 12월 역도산이 연이어 세상을 떠난 1963년이 지난 후 1964년 ‘미소라 히바리’는 한국의 민요 ‘도라지’(トラジ)를 발표하였습니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1937~1989)는 1946년 9살 나이에 요코하마 이소고구의 ‘아테네 극장’에서 첫 데뷔 무대에 오른 이후 43년 동안 자신의 원곡 527곡을 포함한 1500여 곡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러한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 중에 우리말 한국어가 담겨있으며 실제로 그 짧은 가사의 한국말로 노래한 노래는 두 곡뿐입니다. 그 노래는 1964년에 ‘히바리가 부르는 세계의 노래’라는 타이틀 앨범에 담긴 우리의 민요 도라지(トラジ)와 1983년 우리의 가수 조용필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을 리메이크 한 것입니다. 이러한 조용필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곡은 일본의 여러 가수가 불렀던 내용과 같이 노래 중에 한 소절 ‘돌아와요 부산항’에 뿐입니다.
문제는 ‘미소라 히바리’가 1964년에 발표한 앨범 ‘히바리가 부르는 세계의 노래’에 담긴 우리의 민요 ‘도라지’(トラジ)입니다. 이 앨범에는 이탈리아 칸초네의 명곡 ‘돌아오라 소렌토로’(Torna a Surriento)에서부터 성악가 테너들이 극복해야 하는 노래 칸초네 ‘무정한 마음’(Core ngrato)에 이어 세 번째 트랙에 우리의 민요 도라지(トラ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총 12곡이 담긴 이 앨범은 발매된 이후 다른 노래들은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우리의 민요 ‘도라지’(トラジ)는 필자가 조사한 사실에 의하면 단 한 번도 공개적으로 부른 적이 없습니다.
필자는 이러한 사실에서 ‘미소라 히바리’의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하여 접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앨범은 1964년 동경에서 개최된 동경올림픽을 기념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앨범의 다른 11곡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우리의 민요 ‘도라지’(トラジ)가 함께 있어야 할 공감이거나 논리적인 맥락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필자가 고대 문명에서부터 그리스 로마 시대 그리고 중세의 어둠과 르네상스 문예 부흥시대를 거쳐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담긴 수많은 미궁과 의혹에 대하여 살펴왔지만 ‘미소라 히바리’의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한 일본의 태도와 그 행동은 실로 놀라울 만큼 치밀하였으며 이에 대한 그림자가 분명하게 남아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글을 써가려 합니다. 깊은 밤 울림이 있는 음악과 함께 격려의 메시지를 전해오며 운명과 같은 숙제를 안겨준 김명수 교수에게 비장한 마음을 전합니다. 이어서 역도산과 히바리의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미소라 히바리’ 의 노래 한국민요 '도라지'와 리메이크 곡 '돌아와요 부산항'(釜山港へ帰れ) 듣기 http://artwww.blog.me/221204497900
다음 칼럼은 (158)‘ 미소라 히바리와 역도산 ’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