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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1:12~24 구원의 보장성과 지속성
(롬 11:12-24)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 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개신교의 교리는 구원의 보장성에 대해서는 강력히 강조되어 왔지만 그 지속성에 대해서는 깊고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면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대개가 한 번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그 구원이 영원히 보장된 것처럼 믿어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런 가운데서 남은 신앙생활이 상급을 위한 신앙생활이라는 생각을 해 오고,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교리적 개념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개념으로 볼 때 결코 상급이란 것은 멸망 받을 죄인이 영생을 얻는 것 자체가 최고 상급인 것을 일단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었던 존재들이 하나님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상속으로 받는 것을 상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그리스도를 아끼고 감사하면서 기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임재하고 있는 상급(그리스도)이 영원한 보장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교리적으로는 영원성을 강조하고 있고, 또 성경도 그것을 영원성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 영원히 거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28:20, 요 14:18, 롬 11:2)
그러나 우리가 이 시간 엄격하게 살펴서 우리가 어떤 입장에 처하든지 그 구원이 확실히 그리고 영원히 보장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성경은 부정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믿음의 지속성을 통해서만이 우리에게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원리적 입장에서 ‘나’라고 하는 개체와 ‘주님’이라고 하는 개체는 다른 개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즉, 그분은 그분으로서의 개체가 있고, 나는 나로서의 개체가 있으며, 언제든지 나는 나로서의 개체적 행동을 할 수가 있고 그분은 그분으로서 주관적 행동을 하실 수가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단, 그분의 뜻과 나의 뜻이 일치가 되어 합일점을 찾았을 때에만 그 분과 내가 하나일 뿐이지, 그분의 뜻과 나의 뜻이 일치가 되지 못할 때에는 할 수 없이 이별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원리적 입장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삼상15장 사울의 변심)
로마서 본문은 믿는 자가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할 내용으로 구원의 보장성을 강조하는 말씀이 아니라 구원의 지속성을 특별히 논하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이방인으로서,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조심해야 될 것은 현재 우리의 구원의 지속성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대개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기간적으로 보면 2,000년의 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2,000년 주기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의 기록을 보면 구원의 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시대는 구원의 말기 즉 말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로마서적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들은 구원의 말기에서 찍힘을 받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긍’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2000년을 한 주기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면서 기독교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후 2000년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은 시기적으로 기독교의 말기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한계가 하나님 입장에서 2,000년으로 볼 때 아담 → 노아, 아브라함 → 예수까지 언제든지 이 ‘자긍’이라는 것, 다시 말하면 노아 시대 말기적 현상 이후 아브라함 직전까지 일어난 사건이 무슨 사건입니까? 바벨탑 사건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긍’사건입니다.
하나님을 제쳐놓고 인간들만의 지혜와 능력을 통해 하나님을 능가하겠다는 발상이 ‘자긍’입니다. 원문 적으로는 자기 자랑입니다.
역시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초기에는 전적으로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그분에 의한 구원만을 강조했던 것을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그 순수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말기에(마지막 때에) 와서는 기독교 자체가 [자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다시 한번 자긍 사건(찍히는)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이방인의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지금 기독교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구원의 요소는 빠져버리고 예배의 형태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결과는 인간화입니다. 또한 그것이 세속화이고, 하나님의 뜻이 우선이 아니라 인간의 모임이나 인간의 기쁨이나 만족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분명히 알 것은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생명 적인 요소만을 강조해야지 형체를 강조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나중 사람들(후손들)은 그 요소를 모른 채 형태만 받아들이게 되고 결국은 껍데기만 붙들고 있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주일이면 정해진 시간에 예배당에 모여 순서에 따라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면 다 되는 것만(형체) 남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말기의 현상입니다. 타종교와 다를 것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종말의 시기에 인간화된 기독교는 자긍하는 모습으로 세상에 서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찍힘의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제 로마서 11장으로 돌아가서 보면, 유대인들이 자긍했기 때문에 찍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고, 그 찍힘의 내용은 자긍해서 입니다.
자긍 이란?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 된 것을 자랑하다. (선의 또는 악의로), 뽐내다, 사람들끼리 서로 영광 돌리다,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바울은 저들의 찍힘을 당한 이유가 바로 우리들이 접붙임을 당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접붙임을 당한 이방인의 가지가 자라날 것인데 기독교 말기에 있어서도 틀림없이 유대교적 말기 현상이 똑같이 나타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과연 어떤 현상입니까? 이제는 이방인의 구원의 충만한 수가 차면 나머지 유대인의 충만한 수를 접붙이기 위해서 이방인의 수중에서 전에처럼 자긍하는 가지를 다시 잘라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로마서 11장은 이방인의 자긍을, 즉 이방인의 기독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어떤 시대의 이방인에 대해서인가요? 기독교 말기 때의 이방인들입니다. 언제든지 말기에 ‘자긍’사건이 일어나니까요.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지금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때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구원의 보장성을 강조해야 할 것입니까? 아니면 구원의 지속성을 강조해야 합니까? 당연히 지속성입니다. 왜? 잘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제는 지속성의 지혜를 배워야 할 때입니다. 지금의 교회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 인본주의가 물질 만능주의로 변질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잘라내는 시대입니다. 즉 하나님의 엄위가 나타나는 시대란 말입니다. ‘엄위’라는 말은 원문 적으로는 아주 잘라 내버린다는 말입니다.
(롬 11:20~22)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 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하나님의 엄위는 넘어지는 자에게 임하게 되어 있는데, 넘어짐은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지 않는 자를 의미하며 그들은 찍혀 잘리는 신세가 됩니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롬 11:12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이방)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 이리요”
그렇다면 넘어짐, 즉 그들의 실패가 무엇입니까? 11:22절의 넘어짐은 ‘떨어지다’의 의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붙어 있지 않은 상태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접붙인 가지가 살아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나무의 뿌리의 진액 때문입니다. 그럼 이것은(가지는) 보장성인가요? 지속성인가요? 지속성입니다. 즉 진액을 계속 공급받는 지속성의 문제로 살고 죽는 것이 좌우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그동안 우리들의(이방인의) 구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 가지가 계속 붙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지속성 때문입니다. 생명의 진액입니다. 원문으로는 ‘자양분’으로 나와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 때문에 이 가지가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말라져 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는 교회를 다니면서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가지의 열매 만 생각을 한 것입니다.
뿌리(진액)는 생각하지 않고 가지의 사명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긍’이고 그래서 주님은 이 ‘자긍’을 잘라버린다는 것입니다.
요 15:1~7절에 보면, 거하는 것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이 가지에 붙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지속적으로 붙어 있을 때 구원이 열매로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이방인인 우리는 어디에 와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포도나무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지속성입니다.
누구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주님(말씀 안에)에게 거해 있어야 뿌리로부터 영양이 공급받게 되고 진액을 빨아들임으로 그리스도적인 것들이 열매로 맺게 되는데 그 상태가 되어야 거룩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긍’이란 무엇입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 접붙인 가지가 진액을 받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습니까? 죽었습니까? 살아 있습니다.
그러면 살아 있는 그것 자체가 언제까지 가지가 유지되는가? 뿌리로부터 진액을 받고 있을 때까지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는 사실 우리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다’라는 이것이 자긍입니다. 이때부터 찍히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다.라는 확신만 가지고 있고 생명은 없는 자들이 자긍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찍힘을 당하는 데상 자들이며, 원인입니다.
우리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보장성은 그냥 지식입니다. 아! 이제는 알았어....
그렇게 예수를 믿으면 되겠구만, 그러면 구원 받는구만...그러니까 사람들이 나 예수 믿었느니까 나 구원 받았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상급을 위해서 일을 해야겠구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보장성입니다. 이것은 엄위의 원칙에 적용을 받는다는 얘깁니다.
결론적으로 볼 때 롬11:17~21을 살펴보면, 믿음으로 설수록 도리어 겸손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를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구원이 보장되었다고 하는 자긍 가운데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부름을 받아 구원의 반열에 들어섰고, 그 안에서 지속성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롬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무엇을 공급받게 된다는 말인가요? ‘인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무에 비유해 볼 때 그 하나님의 인자란 무엇인가요? 진액입니다. 자양분을 말합니다. 그 진액은 결국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곧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는 것은 그분의 살과 피를 먹는 것입니다.
요 6:53~5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결국 나무에 접붙임을 받아 진액을 받는다는 것은 인자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요 그것으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롬 11: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여기서 저희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원가지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불신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면 그들을 다시 원 나무에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다시 접붙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거하면 뿌리의 진액을 받기 시작하고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런 사람이 구하고 찾고 두드릴 것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진액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을 받는 것이 진액인데,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는 진리(말씀)요, 사랑입니다.
롬 11:28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복음으로 인하여는 왜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원수 된 자가 되었는가?
택하심, 즉 보장성으로 말하면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덕을 본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택하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복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골 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그런데 그 이방인들이 과거 이스라엘의 순종치 않던 것과 똑같이 순종하지 않는 자리에 들어가니, 이제 과거에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긍휼의 손길이 이방인에게 돌아갔던 것처럼 다시 긍휼의 손길이 이스라엘에게 돌아가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돌감람나무 본성에는 언제든지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드러내고자 하는 본성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그 본성을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살린다는 것은 그것이 진액이 되어 나를 치료하고 생명을 공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돌 성을 죽이고 참 성은 살려 계속적으로 생명을 공급하는 양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 산 제사로 드려지는 삶인입니다.
2025년에 우리는 이 삶을 지속적으로 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