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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차文化踏査 國立中央博物館(7-5); 우리 江山을 그리다(3)
제3부 實景을 裁斷하다.
(70) 제3부 實景을 裁斷하다.
(71) 우리 山水畵에 보이는 대표적인 세 가지 視點
=심원[深遠]: 위에서 내려다 보는 視點
=평원[平遠]: 앞쪽에서 뒤쪽까지 꿰뚫어보는 視點, 水平視
=고원[高遠]: 아래에서 올려다 본 視點, 仰視
(72) 필운대에서의 봄 꽃놀이[弼雲臺 賞春圖] -謙齋 鄭敾 -조선, 1740~50년대
-비단에 옅은 색[絹本淡彩]
弼雲臺는 현재 仁王山 남쪽 기슭 培花女高가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朝鮮時代에는
漢陽 最高의 봄나들이 장소였다. 이 그림은 社稷洞에서 仁王山을 오르며 弼雲臺를 바라본
장면을 그린 것이다. 오른쪽 멀리 푸른색으로 그린 뾰족한 산은 冠岳山이며, 그 옆의
樓閣은 崇禮門(南大門)이다. 謙齋 鄭敾은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은 안개로 가려 餘白을 주는
동시에 멀리 있는 冠岳山을 畵面 안으로 끌어와 近景과 遠景의 풍경을 모두 아우르는
視點을 선택했다. (*敾: 기울 선)
(73) [漣江壬戌帖] -謙齋 鄭敾
*謙齋 鄭敾이 漣江(臨津江의 옛이름)에서 壬戌年(1742)의 뱃놀이를 그린 그림첩
<漣江壬戌帖>은 謙齋 鄭敾이 陽川縣令(현재 서울 陽川區 지역)으로 在職할 때 제작한
畵帖이다. 英祖 18년(1742) 10월 보름날, 壬戌年을 맞아 京畿道觀察使 蒼厓 洪景輔가
京畿 동부지역을 巡視 중에 京畿道 管內 최고의 詩人 漣川縣監 靑泉 申維翰과 최고의
畵家 陽川縣令 謙齋 鄭敾을 朔寧 羽化亭으로 불러들여 漣川의 熊淵까지 뱃놀이를 즐겼으며,
謙齋는 이를 〈羽化登船〉과 〈熊淵繫纜〉두 점으로 그렸다.
그림의 제목처럼 朔寧 羽化亭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는 장면과 熊淵에 도착하여 닻을 내리는
장면을 각각 담은 것이다. 이 모임은 같은 壬戌年(1082)에 가졌던 北宋 때 文人 蘇東坡의
逸話에서 비롯되었으며, 660年前의 故事를 추모하여 再演한 행사였던 셈이다. (*漣: 잔물결 연
*蒼: 푸를 창 *厓: 언덕 애 *維: 벼리 유 *朔: 초하루 삭 *繫: 맬 계 *纜: 닻줄 람)
(74) 임진강에서의 뱃놀이[漣江壬戌帖 중 羽化登仙圖] -謙齋 鄭敾 -조선, 1742년
-비단에 옅은 색[絹本淡彩]
1742년 10월 보름날 밤, 京畿道觀察使 洪景輔는 臨津江에 배를 띄우고 遊覽했다.
당시로부터 660年 前의 그날 北宋의 東坡 蘇軾(1037~1101)이 <後赤壁賦>를 남긴 故事를
再現한 이 행사에 謙齋 鄭敾도 참여했다. 謙齋는 배를 띄우는 광경을 <羽化登仙圖>에
그리고 도착장면을 <熊淵繫纜圖>에 담았다. 가로로 긴 화면에 時間의 흐름에 따른 장면이
펼쳐진다. 謙齋 鄭敾은 北宗畵와 南宗畵의 技法을 자유롭게 혼합하여 實景을 文人畵法으로
묘사했다.
中國 古典의 장소를 朝鮮 江邊으로 옮겨와 再構成한 韻致있는 그림이다. (*韻: 운 운)
(75) 임진강에서의 뱃놀이[漣江壬戌帖 중 熊淵繫纜圖] -謙齋 鄭敾 -조선, 1742년
-비단에 옅은 색[絹本淡彩]
京畿道觀察使 洪景輔가 臨津江에 배를 띄우고 遊覽하고 도착하는 장면의 그림.
(76) 세검정의 부채그림[洗劍亭圖] -謙齋 鄭敾 -조선,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紙本淡彩]
洗劍亭은 彰義門 밖 三角山과 北岳山 사이에 있는 亭子로 漢陽都城에서 멀지 않고 좋은
경치를 누릴 수 있는 곳으로 사랑 받았다. 謙齋는 ‘丁’字形 지붕의 洗劍亭과 弘濟川을
중심으로 遠景의 三角山까지 俯瞰法으로 그렸다. 溪谷의 여름풍광이 부채 바람에 시원함을
더해줄 듯 하다. 扇面은 위쪽으로 넓게 확장되는 형태로 사람의 視野範圍외도 유사하여
實景의 現場感을 잘 살릴 수 있는 특징이 있다. (*俯: 구부릴 부 *瞰: 굽어볼 감 *扇: 부채 선)
(77) 해인사의 부채그림[海印寺圖] -謙齋 鄭敾 -조선,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紙本淡彩]
謙齋 鄭敾은 金剛山과 漢陽 그림으로 잘 알려졌지만 嶺南地域의 경치도 화폭에 담았다.
謙齋는 1721년부터 1726년까지 河陽(현재 경북 慶山市)縣監을 지냈는데, 陜川 海印寺
부채그림은 그 무렵에 그린 것이다. 謙齋는 海印寺 주변의 伽倻山 풍경까지 畵面에 담아내기
위해 俯瞰視를 취했다. 그 결과 사찰입구의 紅霞門부터 가장 안쪽에 자라 잡은 藏經板殿까지
海印寺 全景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채의 半圓形畵面을 이용해 단풍이 붉게 물든 가을 山寺의
情趣를 한껏 담았다. (*伽: 절 가 *倻: 가야 야 *霞: 노을 하 *趣: 뜻 취)
(78) 송파나루의 배를 부르는 그림[松坡喚渡圖] -眞宰 金允謙 -조선,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松坡津은 漢陽과 京畿道 廣州를 잇는 繁華한 나루였다. 通行과 貨物運送을 감독하던 官衙를
江 건너편에 묘사하고, 그 아래쪽으로 碇泊한 나룻배들을 그렸다. 漢江건너 松坡津과
大母山을 水平的 視線으로 포착했다. 나룻배를 기다리는 인물의 視線으로 江 건너편을
바라본 構想이 흥미롭다. 眞宰 金允謙은 書畵에 識見이 높았던 稼齋 金昌業(1658~1721)의
庶子로, 현실적인 視點과 간결한 표현이 어우러진 個性的인 實景山水畵를 그렸다.
(*繁: 번성할 번 *衙: 마을 아 *碇: 닻 정 *宰: 재상 재 *謙: 겸손할 겸 *識: 알 식 *稼: 심을 가)
(79) 진주담의 부채그림[眞珠潭圖] -眞宰 金允謙 -조선, 1756년 -종이에 엷은 색
金剛山 萬瀑洞에 있는 眞珠潭에 쏟아지는 물줄기와 소용돌이치는 물의 形勢를 간결한
筆線으로 리듬감 있게 묘사했다. 謙齋 鄭敾의 扇面畵는 俯瞰視로 넓은 공간을
再構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眞宰 金允謙은 한눈에 들어오는 실제 風光을 그대로
그린 듯 현실적인 視點을 채택했다. 너럭바위에 앉아 眞珠潭을 바라보는 인물은 畵家 자신의
視點을 隱喩한 것이다. 眞珠潭을 그린 現存하는 實景山水畵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주목된다. (*潭: 못 담 *隱: 숨을 은 *喩: 깨우칠 유)
(80) 지리산 전경[智異全面圖] -眞宰 金允謙 -조선,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金臺庵에서 바라본 智異山 全景이다. 金臺庵은 慶南 咸安에 있는 庵子로, 天王峰에서
이어지는 지리산 북쪽자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畵家는 자연스러운 俯瞰視로
智異山의 능선과 七仙溪谷의 물길을 굽이굽이 묘사했다. 넘실대듯 이어지는 부드러운
봉우리는 土山의 특징이며, 계곡을 따라 숨을 듯 작게 묘사한 마을은 智異山의 巨大한
규모를 강조한다. 智異山은 名聲에 비해 朝鮮時代 實景山水畵에서 널리 다루지 않았다.
이 그림은 眞宰 金允謙이 晋州의 召村驛 察訪을 지낼 때 嶺南의 곳곳을 寫生한 그림 중
하나이다. (*召: 부를 소)
*察訪: 朝鮮時代에 各 道의 驛站 일을 맡아보던 從六品 外職 文官의 벼슬. (*站: 역마을 참)
(81) 태종대[太宗臺] @김윤겸 필 영남기행화첩[金允謙 筆 嶺南紀行畵帖]
-보물 제1929호- -조선시대 산수화 1점(14폭)
嶺南地方은 漢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어 朝鮮時代 探勝客의 발길이 드물었다.
이 화첩에 그린 釜山과 慶尙道 일대는 實景山水畵의 대상이 거의 되지 않았던 곳이다.
眞宰 金允謙은 慶尙道 晋州牧에 속한 召村驛 察訪을 지낼 때 嶺南 一帶를 탐방한 것으로
보인다. <太宗臺>는 작은 섬인 生島까지 묘사하여 畵家가 實景을 충실하게 寫生한 것을
알 수 있다. 景物의 간략한 형태표현과 산뜻한 淡彩 效果는 眞宰 金允謙의 個性을 잘
보여주고 있다. (*淡: 맑을 담)
(82) 송대[松臺] @김윤겸 필 영남기행화첩[金允謙 筆 嶺南紀行畵帖] -보물 제1929호-
-조선시대 산수화 1점(14폭)
*金允謙 筆 嶺南紀行畵帖 -보물 제1929호-
眞宰 金允謙은 文人畵家인 老稼齋 金昌業(1658~1721)의 庶子로 父親의 그림 취미를 이어
個性的 畵風을 이루었다. 庶子라는 身分的 限界로 士大夫로 顯達하지는 못했으나
召村驛 察訪을 지냈다. 金允謙은 朝鮮後期를 대표하는 文人畵家 豹菴 姜世晃과 같이
활동했으나, 畵風上 전혀 다른 個性과 특징을 보여준다. 그는 事物을 극도로 단순화시켜
간단하고 짧은 筆線으로 묘사하고, 투명한 淡彩를 살짝 곁들여 抽象美가 풍기는 그림을 그렸다.
眞宰는 조선시대 文人畵家 중 特有의 個性과 넓은 지역의 다양한 實景山水를 남겨 繪畵史上
독특하고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김윤겸의 작품은 꽤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 중
<嶺南紀行畵帖>은 주로 釜山, 慶南 일대의 景勝을 그린 14폭의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첩의 작품 순서는 沒雲臺, 永嘉臺, 紅流衕, 海印寺, 太宗臺, 松臺, 迦葉菴, 迦葉衕瀑, 月淵,
蓴巖, 蛇潭, 換鵝亭, 下龍游潭, 極樂菴의 順이다. 이 화첩은 모두 實景을 그린 것으로
각 지역의 명칭이 向右側 또는 左中段에 기재되어 있다. (*稼: 심을 가 *顯: 나타날 현
*嘉: 아름다울 가 *衕: 거리 동 *葉: 땅이름 섭 *蓴: 순채 순 *蛇: 긴 뱀 사 *鵝: 거위 아)
(83) 백악산[白岳山] -眞宰 金允謙 -조선, 1774년 -종이에 엷은 색
白岳山(北岳山)은 景福宮 뒤에 있는 바위山으로 三角形의 山勢에 花崗岩의 흰빛이 돋보여
朝鮮前期부터 契會圖의 배경으로 종종 그렸다. 이 작품은 白岳山을 單獨主題로 그린 비교적
이른 時期의 그림이다. 남쪽 정면에서 바라본 視點으로 그렸으며, 稜線의 윤곽선을 따라
米點을 찍어 立體感을 드러냈다. 화면 위 여백에는 ‘醒窩’라는 號를 사용한 그림을 보고 느낀
感動을 詩로 써놓았다. (*契: 맺을 계 *醒: 깰 성 *窩: 움집 와)
*契會圖: 文人들의 계모임 광경을 그린 그림
*米點: 東洋畵에서, 樹木이나 山水 따위를 그릴 때 가로로 찍는 작은 점. 中國 宋나라
米芾 父子가 시작하였다. (*芾: 우거질 불)
(84) 眞宰 金允謙의 [白岳山] 중 [醒窩의 詩]
茅茨寄宰北城隈(모자기재북성외), 開門白嶽朝暮親(개문백악조모친),
蒼然壁立萬仞勢(창연벽립만인세), 孰能移來數尺紙(숙능이래수척지).
(*醒: 깰 성 *窩: 움집 와 *茨: 지붕일 자 * 隈: 굽이 외 *仞: 길 인)
(85) 용음뢰[龍吟瀨] @ 김희성의 그림모음[不染齋主人眞蹟帖] -不染齋 金喜誠
-조선,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不染齋主人眞蹟帖>은 不染齋 金喜誠의 그림과 그가 수집한 그림들을 모아 만든 畵帖이다.
그 가운데 [龍吟瀨], [畵巖], [極樂菴]은 慶南 咸陽郡 安陰의 名勝을 그린 그림이다.
金喜誠은 산과 바위에 陰影을 가해 立體感을 나타내고 전체적으로 綠靑色을 옅게 칠해
여름철의 분위기를 잘 살렸다. 眞宰 金允謙과 豹菴 姜世晃의 畵評이 화첩 가장자리에 남아있어
不染齋 金喜誠의 그림에 대한 이들의 認識을 확인할 수 있다. (*瀨: 여울 뢰 *染: 물들 염)
(86) 보덕굴[普德窟] @내금강 명승그림[蓬萊圖卷] -眞宰 金允謙 -조선, 1768년
-종이에 엷은 색
<蓬萊圖卷>은 內金剛의 名勝 여덟 폭이 포함된 畵帖이다. 붉게 채색된 단풍은 가을의
情趣를 전해준다. [普德窟]은 萬瀑洞 法起峰 절벽에 구리기둥을 받쳐 세운 庵子이다.
眞宰 金喜謙(1711~1775)은 계곡 건너편에서 바라본 普德窟을 화면 중앙에 그리고,
景物을 X構圖로 배치했다. (*窟: 굴 굴)
*普德窟(表訓寺普德庵)
高句麗 榮留王 10년(627) 普德이 修道하기 위해 자연굴을 이용하여 절을 창건하고,
高麗 毅宗 10년(1115) 懷正이 중창했으며 현재의 건물은 朝鮮 肅宗 1년(1675)에 再建하고
純祖 8년(1808)에 重修했다. 寶德庵은 內金剛의 유명한 萬瀑八潭의 하나인 噴雪潭의
오른쪽 20m 벼랑에 매달리듯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기묘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歎聲을 자아내게 한다. 普德窟이란 이름은 옛날 이곳에서 ‘普德각시가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동굴을 이용한 前室을 여러 가지 형태의 지붕으로 층층이
조화롭게 세운 技巧 있는 건축이다. 內金剛의 五賢峰, 靑鶴峰, 香爐峰 등을 배경으로
구리기둥 하나에 의지하여 空中에 떠 있는 듯한 奇妙한 庵子이다.
(*毅: 굳셀 의 *懷: 품을 회 *噴: 뿜을 분 *歎: 탄식할 탄)
(87) 묘길상[妙吉祥] @내금강 명승그림[蓬萊圖卷] -眞宰 金允謙 -조선, 1768년
-종이에 엷은 색
[妙吉祥]은 萬瀑洞 벼랑에 새긴 高麗의 磨崖佛을 그린 것이다. 景物을 抽象的으로
單純化하고 엷은 채색으로 抒情性을 불어넣은 手法에서 眞宰 金允謙의 個性이 잘 나타난다.
*妙吉祥
內金剛 萬瀑洞 골짜기의 妙吉祥庵터 앞 높이 40m의 웅장한 절벽에 새긴 阿彌陀如來坐像으로,
‘摩訶衍妙吉祥’이라고도 한다. 高麗末期에 妙吉祥庵을 重創한 懶翁和尙이 직접 새겼다고 한다.
불상 높이 15m, 너비 9.4m이며 얼굴 높이는 3.1m, 너비 2.6m이다.
손가락 하나가 보통사람의 몸체보다 굵고, 두 다리의 높이는 사람의 키를 훨씬 넘는다.
磨崖佛 옆 바위에 조선시대의 文臣 尹師國이 쓴 '’妙吉祥’ 글씨를 陰刻하였다. 마애불 앞에는
높이 3.66m의 妙吉祥庵 石燈이 남아 있다. (*摩: 문지를 마 *訶: 꾸짖을 하 *衍: 넓을 연
*祥: 상서 상 *懶: 게으를 나)
(88) 금강산전도[金剛山全圖] -復軒 金應煥 -조선, 1772년 -종이에 엷은 색
復軒 金應煥이 檀園 金弘道를 위해 謙齋 鄭敾의 <金剛全圖>를 모방하여 그린 그림이다.
金剛山의 全貌를 俯瞰視로 종합한 構圖와 土山은 米點으로, 岩山은 垂直皴으로 구분하여
표현한 手法은 謙齋 鄭敾의 畵風과 類似하다. 그러나 봉우리 사이의 옅은 안개와 부드러운
淡彩效果는 金應煥의 새로운 手法에 따른 것이다. 여유 있는 空間構成과 부드러운 筆線은
謙齋와 구분되는 金應煥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俯: 구부릴 부 *瞰: 굽어볼 감 *皴: 틀 준)
歲壬辰春 擔拙堂爲西湖倣寫金剛全圖(세임진춘 담졸당위서호방사금강전도) /
임진년(1772) 봄에 擔拙堂(金應煥)이 西湖(金弘道)를 위해 金剛全圖를 모방해서 그리다.
(*擔: 멜 담 *拙: 옹졸할 졸 *倣: 본뜰 방)
(89) 유람관련 글[遊覽帖 記]-유람관련 시[遊覽帖 詩]
@금강산 유람기념그림[東遊帖] -六玩堂 李豊瀷
-조선, 1825~1838년경 년경 -종이에 색[紙本彩色]
*東遊帖
<東遊帖>은 金剛山 등 東海岸의 名勝地를 探勝하고 名勝絶景을 화폭에 담고
詩書도 곁들인 10卷의 畵帖이다. 제1권은 朴宗勳의 書 등, 제2권은 李豊翼 자신의
東遊帖記, 제3권에는 詩가 있다. 제4권은 海金剛 前·後面, 海山亭, 三日浦, 神溪寺,
제5권은 玉流洞, 飛鳳瀑, 九龍淵, 楡岾寺, 제6권은 외강담, 曉雲洞, 隱仙臺望十二瀑,
妙吉祥, 제7권은 摩訶衍, 眞珠潭, 분운담, 제8권은 黑龍潭에서 본 普德窟 萬瀑洞,
內圓通菴, 須彌塔, 제9권은 명운담, 明鏡臺, 長安寺, 斷髮嶺이, 제10권에는 甕遷,
叢石亭, 四仙亭, 披襟亭을 묘사했다. (*翼: 날개 익 *楡: 느릅나무 유 *岾: 땅이름 점
*曉: 새벽 효 *摩: 문지를 마 *訶: 꾸짖을 하 *衍: 넓을 연 *甕: 독 옹 *遷: 옮길 천
*披: 헤칠 피 *襟: 옷깃 금)
*六玩堂(友石) 李豊瀷(1804~1887)
純祖 29년(1829) 春塘臺試에 급제하여 權知承文院正字가 되고, 憲宗 4년(1838)
兵曹正郞, 1847년 大司諫, 高宗 10년(1873) 大司憲·吏曹判書를 역임했다.
著書는 <六玩堂集>과 < 東遊帖>이 있다. (*玩: 희롱할 완 *瀷: 강 이름 익 *塘: 못 당)
(90) 환선정[喚仙亭]-해금강전면[海金剛前面] @금강산 유람기념그림[東遊帖]
-六玩堂 李豊瀷 -조선, 1825~1838년경
六玩堂 李豊瀷이 1825년 8월 金剛山을 유람하고 지은 28점의 詩文과 金剛山
實景山水畵를 엮어 만든 詩畵帖이다. 각 장면은 <海東名山圖帖> 등 檀園 金弘道의
그림과 흡사하다. 19세기에는 檀園을 模寫한 그림으로 金剛山遊覽을 기념하는
書畵帖을 꾸미는 일이 크게 유행했다. 이 화첩에서 畵家는 構圖와 筆法 등 檀園의
畵風을 충실하게 모방했다. 筆致가 다소 纖弱한 대신 彩色을 적극적으로 구사하여
장식적인 인상을 준다. (*喚: 부를 환 *纖{: 가늘 섬}
*喚仙亭
叢石亭의 서쪽기슭에 있는 亭子로 전설에 의하면 옛날 神仙들이 올라 서로 부르며
즐기던 정자이므로 <喚仙亭>이라고 했으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고 한다.
(*叢: 모일 총 *喚: 부를 환)
*海金剛
外金剛 동쪽 東海岸에 있으며, ‘海金剛’이란 이름은 경치가 금강산을 닮았다고
南宅夏(1643~1718)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三日浦와 南江下流에서 북쪽으로는
金蘭窟·叢石亭 일대와 남쪽으로는 永郞湖·花津浦에 이르는 약 30㎞ 구간이다.
(91) 비봉폭[飛鳳瀑]-진주담[眞珠潭] @금강산 유람기념그림[東遊帖]
-작가 미상 -조선, 1825~1838년경
*飛鳳瀑
금강산의 玉流洞 世尊峰(해발 1,132m)의 서쪽에 있는 높이 139m, 너비 4m의
폭포로, 폭포수가 길게 떨어지고 물방울이 날리며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봉황새가
날아가는 것 같이 아름답다고 飛鳳瀑布라고 하며, 또 봉황바위가 날개를 편 봉황새와
같다고 비봉폭포라고 한다. 飛鳳瀑布는 九龍瀑布, 十二瀑布, 朝陽瀑布와 함께
金剛山 四大瀑布이다.
*眞珠潭
萬瀑洞에 있는 眞珠瀑布 아래에 있는 깊이 7.5m, 넓이 약 412㎡의 沼이며, 기슭의
바위에 <眞珠潭>,< 水簾>이라는 글이 새겨 있다. 眞珠潭은 外金剛八潭 중에서도
제일 아름답다고 한다. (*簾: 발 렴)
(92) 흑룡담에서 바라본 보덕굴[黑龍潭望 普德窟]-명경대[明鏡臺]
@금강산 유람기념그림[東遊帖] -작가 미상 -조선, 1825~1838년경
*普德窟: 사진 (85) 참조
*明鏡臺
長安寺에서 북동쪽 1km 지점인 百川洞 골짜기에 있는 높이 90m, 너비 30m의
花崗岩 바위로, 바위 면이 반듯하고 赤褐色을 띠고 있어 마치 거울을 산에
세워놓은 것 같다고도 하고, 바위 밑 계곡물에 비치는 그림자가 거울을
聯想시킨다고 ‘明鏡臺’라는 이름이 붙었다. (*褐: 갈색 갈)
(93) 강원지역 명승그림[海山圖帖] -蕤堂 金夏鍾 -조선, 1816년 -비단에 엷은 색
<海山圖帖>은 金剛山과 關東, 雪嶽山의 名勝을 포괄하는 25面의 山水畵로 구성된 畵帖이다.
奎章閣의 官僚인 小華 李光文(1778~1838)은 春川府使가 되어 金剛山 유람을 계획하며
24세의 畵員 蕤堂 金夏鍾을 데리고 가 實景山水를 그리게 했다. 金夏鍾은 代代로 畵員을
배출한 開城 金氏의 後孫으로 작은할아버지는 正祖의 命으로 金剛山을 그린 復軒 金應煥이다.
金夏鍾은 장소에 어울리는 視點과 構圖를 고민하여 畵面에 各各 다른 視線으로 實景을 그렸다.
먼 곳을 옅게 채색하는 大氣遠近法으로 遠近感을 나타내고 水墨에 靑綠色을 더하여 화면에
生氣를 불어넣었다. (*蕤: 꽃 유)
*大氣遠近法: 눈과 對象間의 空氣層이나 빛의 작용 때문에 생기는 대상의 色彩 및 輪廓의
변화를 포착하여 距離感을 표현하는 技法. 線을 이용하여 깊이와 繪畵空間을
표현하는 線遠近法과 비교된다.
(94) 장안사[長安寺] @[海山圖帖] -蕤堂 金夏鍾 -조선, 1816년
長安寺는 金剛山 四大寺刹의 하나로 內金剛 萬瀑洞의 유명한 名勝地였으며, 長慶峰 아래
飛虹橋(萬川橋) 건너편에 터가 있다. 新羅 法興王 때, 또는 高句麗 陽原王 11년(556)
僧侶 蕙亮이 신라에 歸化하면서 創建했다고 전한다.
高麗 光宗 때(970년) 燒失되어 成宗 1년(982) 懷正이 重建했으며 忠惠王 4년(1343)
元나라 順帝의 高麗人 奇皇后의 布施로 파손된 건물을 重建하고 새 樓閣을 지었다.
朝鮮朝에 두 차례나 燒失되어 英祖 4년(1728)과 正祖 15년(1701) 重創·重建된 뒤 1842년
府院君 趙萬永의 보시로 300여 칸의 大刹로 增築하였다. 長安寺는 6殿·7閣·樓·2門 외에
10여 채의 附屬建物이 있었으나 6·25戰爭 때 燒失되어 築臺·碑石 등만 남아 있다.
(*虹: 무지개 홍 *亮: 밝을 량 *懷: 품을 회)
(95) 명경대[明鏡臺] @[海山圖帖] -蕤堂 金夏鍾 -조선, 1816년
*明鏡臺: 사진 (91) 참조
(96) 헐성루에서 바라본 금강산[歇惺樓望 前面全景] @[海山圖帖] -蕤堂 金夏鍾
-조선, 1816년 (*歇: 쉴 헐 * 蕤: 꽃 유)
(97) 보덕굴[普德窟] @[海山圖帖] -蕤堂 金夏鍾 -조선, 1816년
*普德窟: 사진 (85) 참조.
(98) 진주담[眞珠潭] @[海山圖帖] -蕤堂 金夏鍾 -조선, 1816년
*眞珠潭: 사진 (90) 참조
(99) 해금강[海金剛] @[海山圖帖] -蕤堂 金夏鍾 -조선, 1816년
*海金剛: 사진 (89) 참조
(100) 小華 李光文(1778~1838) [又題海山圖帖] 중에서
*蕤堂 金夏鍾(1793~?) (*蕤: 꽃 유)
朝鮮後期에 眞景 風俗畵로 檀園 金弘道와 雙璧을 이룬 金應煥의 孫子이며, 僉使를 지낸
畵員 兢齋 金得臣의 아들이다. 父親을 계승하여 金弘道의 畵風을 따랐으며, 벼슬은 僉使를
지냈다. 일찍이 圖畵署 畵員으로 뽑혀 儀仗旗를 그리는 일을 비롯하여 宮中의 記錄畵製作에
참여했다. 人物畵도 잘 그려 兄인 松庵 金建鍾과 함께 <純祖御眞遠遊冠本>(1830)과
<哲宗御眞>(1852, 1861)의 제작에 참여했다.
謙齋 鄭敾과 檀園 金弘道의 眞景山水畵 畵風을 이은 <雪嶽全景圖>, <海山帖圖>및
金剛山과 嶺東地方의 명승을 담은 <夢遊金剛圖帖>등 여러 작품이 전한다.
(101) 구룡폭포[九龍瀑] -李正洙(1945~) –디지털 印畵
-大韓民國, 2007년
外金剛 九龍洞 峽谷에 있는 九龍瀑布는 金剛山 最高의 폭포로, 절벽과
바닥이 거대한 花崗岩으로 이루어져 높이 74m에서 물줄기가 쏟아지는
壯大한 景觀을 자랑한다. 폭포 아래 龍湫인 九龍淵은 金剛山을 지키는
아홉 마리 龍이 살았다는 傳說이 있으며, 最低水深은 13m에 달한다.
朝鮮의 畵家들이 즐겨 그린 九龍瀑과 비슷한 構圖로 폭포의 모습을 렌즈에
담았다. (*湫: 다할 추)
(102) 금강산과 강원지역 명승그림[海嶽全圖帖] -復軒 金應煥 -조선, 1788~1789
-비단에 엷은 색
復軒 金應煥(1742~1789)이 1788년 正祖의 御命으로 檀園 金弘道와 함께 金剛山을 유람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한 畵帖이다. 총 60面의 화면 중에서 다른 畵家의 금강산그림에는 없는
龍谷潭, 慈雲潭, 舞鳳瀑, 栢鼎峯이 포함되었다. 畵面을 꽉 채운 構圖에 景物을 대담하게
單純化시켰다. 畵面全般의 능숙한 濃淡調節과 感覺的인 彩色에 復軒 金應煥의 個性이
드러난다. 金應煥은 ‘山水에 精通’하나 ‘精密한 그림에는 맞지 않다’는 評을 들었는데,
거침없는 筆致의 이 畵帖의 특징과 相通한다. (*栢: 측백 백 *鼎: 솥 정)
(103) 金剛山 길라잡이
(104) [海嶽全圖帖] 前半部
(105) [海嶽全圖帖] 後半部
(106) 단발령[斷髮嶺] @[海嶽全圖帖] -復軒 金應煥
단발령은 太白山脈의 支脈인 먹포령산맥이 金剛川과 장현천의 지류들에 의하여 깎이면서
낮아진 고개로 해발 833m이다. 新羅 末 麻衣太子가 父王에게 下直하고 皆骨山으로 入山할 때
이 고개에서 佛陀의 도움을 받고자 멀리 金剛山의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며 出家를 다짐하는
뜻에서 削髮했다고 하여 斷髮嶺이라고 한다. 고개 남서쪽 산록에는 五兩洞, 북동쪽 산록에는
皮木亭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五兩은 옛날 고개를 지날 때 山賊을 막기 위해 案內人에게
다섯 냥[五兩]의 돈을 주어 護送을 부탁한 데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107) 만천교[萬川橋] @[海嶽全圖帖] -復軒 金應煥
*萬川橋
長安洞에 있는 다리로, 長安寺 터의 남쪽 萬川에 있다. 옛날에는 神仙들이 산다는 금강산
골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다 하여 ‘向仙橋’라고 불렀으며 다리의 난간을 빨갛게
칠했었다고 ‘빨간 다리’라고도 했다.
(108) 장안사[長安寺] @[海嶽全圖帖] -復軒 金應煥
(109) 명경대[明鏡臺] @[海嶽全圖帖] -復軒 金應煥
(110) 수렴폭[水簾瀑] @[海嶽全圖帖] -復軒 金應煥
(111) 백탑[百塔] @[海嶽全圖帖] -復軒 金應煥
*內金剛 明鏡臺 구역 溪谷에 가로로 난 흰 바위틈결로 이루어진 자연돌탑이 많아
百塔(洞)이라고 한다.
(112) 영원암[靈源菴] @[海嶽全圖帖] -復軒 金應煥
靈源菴은 地藏峯(1,381m) 아래 평평한 언덕 위, 靈源洞에 있는 長安寺의 부속 庵子이다.
신라 때 靈源祖師가 修道한 곳이라고 하며, 朝鮮 肅宗 16년 巡察使 윤국사가 王命으로
長慶庵과 같이 건립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靈: 신령 영)
(113) 백천동[百川洞] @[海嶽全圖帖] -復軒 金應煥
*明鏡臺區域에 있는 개울이 外金剛골짜기의 여러 물들이 골짜기의 한가운데를 모여
이루어진 개울이라고 ‘百川’이라고 부른다. 백천 기슭은 거의가 겹겹이 벼랑들로 이루어졌고
물줄기는 앞을 가로막는 바위와 벼랑 때문에 굽이가 매우 심한데 이 지역이 百川洞이다.
(114) 삼불암[三佛巖] @[海嶽全圖帖] -復軒 金應煥
*三佛巖
三佛巖은 金剛郡 內剛里 蓬萊洞에 長安寺에서 表訓寺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磨崖佛로,
바위 높이 8m, 너비 9m인 삼각형의 바위 앞면에 각각 높이 3.7m, 가슴 너비 1.3m의 三佛을
새겼다 세모 뿔 모양 巨巖의 앞면에는 現在, 過去, 未來의 救援을 상징하는 釋迦, 阿彌陀,
彌勒의 3부처 立像을 새겼으며, 왼쪽 면에는 觀音菩薩과 勢至菩薩 立像, 뒷면에는
菩薩像 60여 구의 작은 부처를 새겼다.
-제85차文化踏査 國立中央博物館(7-6); 우리 江山을 그리다(4)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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