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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71
5월25일 [연중 제8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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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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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txEe3-I1a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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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깊이 파묻힐 때>
씨감자를 묻은 지 벌써 한 달 반 정도가 지났습니다. 번듯한 텃밭이 아니라 짜투리 땅에 남은 씨감자를 대충대충 심었습니다. 정말 볼 품 없는 씨감자를 묻으며 다들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 번 비가 오고, 쨍쨍 해가 뜨고를 반복하면서 다들 자신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어떤 형제는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싹이 올라오고, 쑥쑥 자라나, 이제는 푸른 잎으로 무성한 제대로 된 감자밭이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뜻밖의 모습에 흐뭇해하며 머지않아 풍성한 결실을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눈에 비친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참으로 보잘 것 없고, 정말 부족해 보이는 ‘나’이지만 하느님께 ‘푹’ 잠길 때, 온전히 그분께 깊이 파묻힐 때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할 축복과 은총이 뒤따를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가 아주 자신 있게, 무척이나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보시다시피’란 어떤 말입니까? 아마도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스승님께서 잘 파악하고 계시는 것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인정하는 것처럼.’
그만큼 베드로 사도의 자기 버림과 예수님 추종은 철저한 것이었습니다. 적당 선에서가 아니라 온전히, 미지근한 것이 아니라 열렬히, 7-80%가 아니라 120% 투신하는 적극적 버림이요, 적극적 추종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주어진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전적인 버림이 가져다준 충만한 자유였습니다. 전적인 투신이 가져다준 원초적이며 근원적 행복이었습니다.
비록 베드로 사도의 주머니 속에는 땡전 한 푼 없었지만, 그의 마음은 세상 온 천지를 다 얻은 충만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비록 베드로 사도의 현세적 삶은 가난과 굶주림과 박해의 순간들로 점철되었지만, 그의 얼굴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비록 베드로 사도의 일상은 고통과 십자가의 연속이었지만 그의 눈은 벌써 이 세상 그 너머에 자리한 피안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잘 버림으로, 그분께 푹 잠김으로, 120% 투신함으로 인해 행복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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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ajB2miarRX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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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릴 수 없는 것은 즐길 수 없고, 즐길 수 없는 것은 잃게 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던 부자가 가진 것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버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였더니 부자가 슬픈 마음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정말 예수님 때문에 버리면 백 배를 받게 될까요? 외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과 재산을 버렸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많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버려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백 배로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 것을 버리고 사제가 되면 정말 많은 가족과 재산과 명예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가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노력해서 그것을 쟁취하고 가져서 누리면 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지려고 하는 것은 이미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스트레스받는 것을 누릴 수 있을까요? 두려운 것을 즐길 수 있을까요?
EBS 포커스, ‘집착’에 여자 친구에게 집착해서 스토커가 되어버린 한 청년이 사례로 나옵니다. 처음 2년은 여자 친구와 좋았습니다. 막일해서 일 년에 버는 수백만 원을 다 여자 친구를 위해 썼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참을 수 없어서 여자 친구에게 죽여버리겠다는 식의 메일과 문자를 보내고 여자 친구 SNS에 자신과 찍었던 사진을 올리며 나중엔 찾아가서 위협도 했습니다. 여자 친구가 신고해서 경찰서에 갔다가 결국엔 군대에 억지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군 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빨리 제대를 할 수밖에 없고 지금도 여전히 여자에 대한 집착 때문에 삶을 온전히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한 여자가 나왔는데 자신이 버는 모든 돈을 자기 외모를 가꾸는 데 쓰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카지노에서 딜러가 되고 싶었는데 그냥 재미로 시험을 함께 치르러 간 친구는 붙고 자신은 떨어진 것이 큰 상처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가 외모 때문이라 믿고 외모를 가꾸는데 모든 에너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집착에 관한 사례를 예로 들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 집착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집착은 사랑받지 못해 자존감이 떨어진 사람이 자신의 자존감을 되찾아 줄 어떤 것을 지나치게 소유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즐기고 누릴 수 있는 것은 집착하지 않는 것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버릴 수 없는 것은 즐길 수 없습니다. 집착하는 것은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즐기지도 못하고 잃고 맙니다. 에밀레종과 같을 것입니다. 자꾸 종을 쳐서 망가질까 두려워 박물관에 가져다 놓았는데 종을 치지 않으니 진짜 종이 갈라져 더는 종을 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즐긴다는 것은 무엇이든 소진된다는 뜻입니다. 소진되어도 되는 것만 즐길 수 있습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떠나보낼 수 있을 때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애인도 마찬가지고 물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류시화 시인이 명상 센터에서 한 프랑스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 여성은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일곱 살에 아버지가 갑자기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직장을 다녀야 해서 마르타는 외할머니에게서 자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온전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컸습니다.
마르타는 결혼을 해서 두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시아 문학을 전공해 대학교수가 되었으며 부족함 없이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혼자서 일주일 동안 아일랜드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마르타는 남편에게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고 또 누구도 그녀의 결정을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남편은 떠나야 했고 자신의 외할머니가 그랬듯이 마르타의 어머니가 와서 아이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그녀는 명상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돌연 자신을 떠남으로써 자기가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강박감 때문에 그녀가 먼저 결별을 선언했다는 것입니다. [출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더숲]
마르타란 자매는 왜 남편을 잃게 되었을까요? 남편을 소유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소유하고 싶어지면 동시에 잃게 될 두려움이 커집니다. 잃게 될 두려움을 가지고 그것을 즐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즐길 수는 없고 두려움만 주는 그것을 계속 붙들고 있을 수 있을까요? 자기 스스로 그것을 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가졌다고 믿는 것마저 잃고 마는 것입니다. 아끼면 똥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즐기는 사람이 부자가 됩니다. 부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재물을 즐기지 못하면 결국 가진 것을 잃게 됩니다. 자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믿는 자에게서 떠나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재물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누리지 않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누리려면 모든 것에서 가난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집착하는 것을 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가난하도록 권고하시는 이유는 모든 것을 누리며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누릴 때는 가진 것이 없지만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행복합니다.
우리도 모든 것의 100배를 가지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이미 100배를 가진 것처럼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실제로 100배가 많아지더라도 그것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한 번에 다 잃습니다. 다만 지금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삶을 누리십시오. 더 가지면 행복하겠다고 믿으면 그것도 잃게 되고 지금 가진 것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버려야 누릴 수 있습니다. 가지려 하는 것은 누릴 수 없습니다. 누릴 수 없는 것은 결국 잃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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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2월25일 [연중 제8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 10,28-31: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어제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청년은 재산에 대한 집착 때문에 슬픈 표정으로 예수님을 떠나갔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가지고 영생을 준비할 줄 모르고 재물에다 자신의 삶을 의지하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시면서 슬픈 얼굴로 돌아가는 청년을 안타깝게 바라보셨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재산의 번영, 부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 축복의 표지라고 믿고 있었고 어떤 사람이 재물이 많고, 번영하면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그를 축복해 주신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던 제자들은 그 말씀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부자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믿었는데 놀랐다.
여기서 성미가 급한 베드로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28절) 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무엇을 버리는 것일까? 그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나의 능력, 나의 재물 이 모든 것을 이기적인 마음으로 나 자신만의 안위와 쾌락을 위하여 사용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모습으로 살려고 하는 나의 인간적인 모습을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나를 버리는 것이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을 견디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이에 대한 보상은 세상에서도 갚아주시고 또한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초대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현세의 보상을 많이 체험하였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박해도 많이 받았지만, 자신이 쉴 수 있는 집들과 교우 형제자매들과 어머니 같은 여교우들, 자녀들을 대신하여 대자 대녀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을 만나게 되었다. 토지를 버린 사람은 교우들의 토지에서 필요한 것을 얻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재물이란 ‘사용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지, ‘주인이 되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재물이란 자기의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고,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 주어진 것으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보다는 그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 재산이 그를 불행하게 한다고 하셨다.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 살게 해 주시고,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며, 나의 재능과 내가 지금 잠깐 관리하고 있는 것들 모두가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맡겨주신 것임을 알고 그것들을 맡겨주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집착 때문에 나의 관념이나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기도 한다. 인간은 재물이나 사상이나 관념의 노예가 되면 자신의 주변을 올바로 보지도 못하고, 이웃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게 된다.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그래서 주님 안에 복된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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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주교회의 사무국장)]
주님께서는 당신 통교의 수단이며 활동의 장인 역사 안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분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스승이시요 주님이시며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5)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주님의 보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는 듯이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당신을 위하여, 또 특히 마르코 복음서에만 서술되어 있는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은 현세에서 어려움도 있겠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부를 누리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현대 사회에서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즘 세상의 논리로 보자면 현실의 보상이 내세의 보상보다 훨씬 중요하며, 어떤 때는 현실의 보상이 전부인 양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또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판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과 그분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한 첫째가 될 수 있고,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보여 준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과 세상의 완성 기준을 그리스도에 두고 이 세상을 완성하고자 희망하며 일하되, 언제나 예수님의 방식을 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께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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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따름과 보상>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29-31)
1) 이 말씀은 신앙인들이 실천해야 할 ‘버림’과 ‘따름’에 관한 말씀이기도 하고, ‘버림’과 ‘따름’을 제대로 실천한 신앙인들이 얻게 될 ‘보상’에 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순서대로 읽으면,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풍성한 보상과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이고, 반대 순서로 읽으면, “풍성한 보상과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바란다면 모든 것을 버려라.”입니다.) 앞의 8장을 보면,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라는 예수님 말씀이 나옵니다.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리는 일”은 “자신을 버리는 일”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실제로 가족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족은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대상이고, 함께 구원받아야 할 영적 동반자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가족을 버린다는 말은, 구원받는 것을 방해하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애착심과 집착 등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현세에서 받는 박해를 참고 견디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누구든지’ 라는 말은 예외가 없음을 나타냅니다. (예외가 없다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하기만 하면 ‘누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보상과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억울하게 탈락하는 경우도 없고,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 경우도 없습니다.)
2) ‘십자가’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방법이고, 과정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 영원한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목적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우리가 그곳을 향해서 갈 때, 사람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각자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만나게 됩니다. “그냥 십자가를 건너뛰고 하느님 나라로 직행할 수는 없나?” 직행하는 사람이 더러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지고 감으로써 목적지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 하느님의 신비에 속한 일입니다.) 어떻든 메시아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온갖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해방을 얻으려면 우리 쪽에서도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여서 극복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기꺼이 받아들여서 지고 갈 때에만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 자체도 ‘신비’에 속한 일입니다.)
3)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문장 그대로 읽으면 ‘백 배’나 되는 보상을 ‘현세에서’ 받는다는 말씀이 되는데, ‘집’과 ‘토지’를 백 배나 받는 것은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형제, 자매, 어머니, 자녀를 백 배나 받는다는 말씀은 상징이나 비유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 공동체라는 큰 가정에 속하게 된다는 말씀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세속 사람들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풍성하고 충만한 영적 은혜’를 상징하는 말씀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사도 4,32-35) 당시의 교회 공동체는, ‘모든 것을 버려서 모든 것을 얻은 사람들의 공동체’였는데, 그들이 은혜를 받아 누린 일은, 버린 것의 백 배나 되는 보상을 받은 것과 같은 일입니다.>
4) ‘내세에서는’이라는 말을,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의 뒤로 옮겨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백 배나 되는 보상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은 모두 내세에서의 일이 됩니다. 이 경우에, “그렇다면 현세에서는 박해만 받고 끝나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내세에서 받게 될 은혜는 내세에서만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곳 현세에서 시작되어서, 저쪽 내세에서 완성되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시작할 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평화를 누리는 일도 시작됩니다. 현세에서 받는 박해는 그 영원한 은혜와 기쁨을 우리에게서 빼앗지 못합니다. 박해는 신앙여정 중에 겪는 온갖 희로애락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허무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마르 8,36)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온 세상’은, 부귀영화, 무병장수 등 현세에서 얻어 누리는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것들은 모두 이 세상이 사라질 때(1요한 2,17) 함께 사라질 허무한 것들입니다. ‘제 목숨’은 하느님 나라에서 얻어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을 가리킵니다.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히 남아 있게 됩니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는 말씀은, ‘허무하다.’, 또는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5) 그런데 허무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라는 가르침이 이 세상의 ‘이웃의 사정’을 완전히 외면하라는 가르침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이 땅’에 있습니다. 이웃 사랑 실천은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현실도피 생활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에 맞서 싸워야 하고, 하느님의 선을 이 땅에서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이 땅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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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부터 눈이 뻑뻑해지더니 자고 일어나면 충혈이 되었습니다. 인공눈물을 넣고, 안약을 넣었지만 여전히 불편하였습니다. 안과에 전화해서 예약을 잡고,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59년간 저를 위해서 눈은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영화를 볼 수 있었고,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고, 구름과 달 그리고 꽃과 나비를 보았습니다. 그렇게 수고해준 눈을 위해서 감사의 표시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비용이 좀 들지라도 눈을 위해서 치료를 받기로 했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했습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 자신을 돌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영적인 성숙을 위해서 기꺼이 시간과 비용을 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이 몸을 떠나면 그 많은 재물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재물을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정년퇴임하는 분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가족들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는 선물을 하였는데 본인을 위해서는 선물 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 가족을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 수고한 본인을 위해서 선물을 하나 하겠다고 마음먹었답니다. 혼자서는 가기가 머쓱해서 친구와 함께 갔고, 정년퇴임 선물로 작은 반지를 하나 골랐다고 합니다. 직장 생활이 바빠서 평일미사에 참례하지 못했는데 본인의 영적인 선물로 평일미사에 참례하겠다고 하였답니다. 선물(膳物)은 좋은 뜻을 담아 주는 것입니다. 선물(present)은 오늘을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오늘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길이 열립니다. 그러기에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를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가정의 달 5월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이웃과 본인을 위해서 정성어린 선물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네 손의 첫 열매를 바치는 데에 인색하지 마라. 제물을 바칠 때는 언제나 즐거운 얼굴을 하고 십일조를 기쁘게 봉헌하여라.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네게 주신 대로 바치고 기꺼운 마음으로 능력껏 바쳐라. 찬양 제물을 바치는 이는 나를 공경하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우리에게 가난과 그로인한 고통이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척박하고, 소출이 적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익빈부익부의 골이 더욱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 생각한다면 우리들 또한 그 선물을 이웃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곳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목적지가 다르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최선을 다해서 되돌아 와야 합니다. 산에 오를 때 가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앞서가던 일행이 되돌아오는 경우입니다.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뒤에 있던 사람이 첫째가 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은 오르면 오를수록 위험하기 마련입니다. 그 탑의 정상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올라야할 천국의 계단은 나눔의 계단이어야 합니다. 희생의 계단이어야 합니다. 선물을 주는 계단이어야 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의 바벨탑은 무한 경쟁의 수레바퀴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계단은 누구나 갈 수 있습니다. 경쟁도 치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가지 못하는 계단입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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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동하 세례자 요한 신부님]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앞으로 받게 될 몫>
오늘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복음을 따르는 사람이 앞으로 받게 될 몫을 밝히십니다. 현세에서는 많은 축복을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 하십니다. 지금은 복음 때문에 박해도 받겠지만 영원한 생명을 누릴 때에는 첫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 하십니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을 전하러 오신 하느님이시며 기쁨이신 예수님께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과부, 이방인, 앓는 사람과 같은 낮고 비천한 사람들을 품으시면서 하느님의 기쁨을 나누십니다. 하느님의 기쁨을 나누시다 현세에서는 박해의 끝인 죽음을 축복으로 맞이하시며 모든 것을 버리십니다.
모든 것을 버리시어 으뜸이 되시면서 내세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생명의 길을 터놓으십니다. 현세와 내세에서 축복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명백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은 자신을 버리는 아픈 고통을 먹어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눈앞에 펼쳐진 크고 작은 고통을 힘겹지만 피하지 말고 받아먹어야 합니다. 더불어 크고 작은 고통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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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마진우 요셉 신부님]
<주님의 잔과 주님의 식탁>
여러분이 주님의 잔도 마시고 마귀들의 잔도 마실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식탁에도 참여하고 마귀들의 식탁에도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1코린 10,21)
주님의 잔은 수난의 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이 살아 숨쉬는 잔이지요. 마귀들의 잔은 쾌락의 잔입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영원한 파멸의 독이 숨어있는 잔입니다.
주님의 식탁은 자유로움과 기쁨, 평화가 가득한 곳입니다. 반면 마귀들의 식탁은 온갖 음모와 술책, 편법과 악의가 가득한 곳입니다.
두 잔을 동시에 마시거나 두 식탁에 동시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고 마땅히 주님의 식탁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위치를 분별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귀들의 식탁을 주님의 식탁으로 탈바꿈 하는 이들입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서로를 향한 증오를 가득 채우는 이들이지요. 탐욕스럽고 자신들의 위신을 중요시 여기고 다른 이들을 지배하고 싶어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었다가는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을 것이기에 언제나 겉모습을 꾸미고 다닙니다. 거짓 선으로 치장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분별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그 분별력을 내던지는 사람은 당연히 분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탓을 남에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충분히 해낼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 그것을 포기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사랑과 증오를 분별하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누군가가 파괴하고 있는지 모으고 쌓고 있는지 분별하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누가 욕심을 잔뜩 내고 있는지 아니면 진실한 열정으로 일하고 있는지 분별하지 못합니까?
그러나 우리의 눈이 욕심으로 가려진 뒤로 우리는 사랑보다는 이해관계가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눈이 명예욕으로 가려진 뒤로 우리는 진실보다는 나의 위신이 소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눈이 권력욕으로 가리워진 이후로 우리는 정의보다는 나의 권력을 보장해주는 힘이 더 소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마귀에게 스스로의 자유를 내어 맡기고 그들의 종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고 자유로운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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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아무리 좋아도 예수님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를 버리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제 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도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망하여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보물을 약속하시지만, 내세의 문제는 아직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기에 현세를 사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단순히 내세만을 위한 문제가 아니라고 밝히십니다. 그들이 현세에서 어려움도 겪겠지만, 현세에서 자신이 내어 놓은 것을 백 배 이상 되돌려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점은 오늘 제1독서인 집회서 말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갚아 주시는 분이시기에 일곱 배로 너에게 갚아 주시리라.”
사실, 집회서의 말씀처럼 우리가 하느님께 내어 드리는 것, 곧 우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버리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들입니다. 그런 하느님께 내가 받은 목숨마저 되돌려 드리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게 기꺼운 마음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놓는 사람은 더 큰 축복을 얻어 누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따금 삶에서 이를 실천하는 이들을 만나곤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때 더 큰 행복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누리는 행복이 영원하다면, 그 행복은 얼마나 큰 행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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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마르10, 28-31)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했다. 베드로가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였는가? 그리고 그 동기가 무엇인가?
아직까지도 제자들은 구원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이다. 다만 구원받는다는 것이 출세하는 것이라는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을 하시니 자기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말씀이다.
자기들이 생각했던 구원 또는 하느님 나라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런 가능성이 거의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급해졌고 앞으로 자기들의 운명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물으면서 스승님의 의도를 알고 싶었던 것 같다. 이 말은 주님을 따르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말해준 훌륭한 말이다. 주님을 따르려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라야 한다.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자세이다. 그러나 내용이 문제이다.
즉 모든 것을 버린 그 동기가 무엇인가? 가 중요하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자기들이 출세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버린 것이지 정말로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버리다"라는 단어를 베드로도 사용하였고 예수님도 사용하셨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다. 베드로는"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버린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를 위하여" 버린 것이다.
그런 모습은 앞에서 예수님이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로 예고하셨을 때에 바로 그 뒤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한 것에서도 드러났고 또 세 번째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하셨을 때에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 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도록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서 버려야 하는지를 분명히 밝히셨다.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버려야 한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버려야 할 것들은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녀, 토지 등 어느 것 하나 쉽게 버려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그들의 삶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어쩌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은 바로 예수님이 버리라고 말씀하신 것들을 더 많이 갖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애지중지하는 그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니 그 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자기가 더 잘 되기 위해서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어도 자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분과 그분의 것을 위해서 자기가 가장 소중한 것들을 그리고 그것들이 없으면 당장 내가 불편하고 살아가기 힘든데 그 모든 것들을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신 이상자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들은 우리의 생각이고, 계산이고, 이해 타산적이지만 분명한 것은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니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순순한 지향으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까?
그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또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우리가 수도생활을 하든 신앙생활을 하든 처음의 동기는 누구나 베드로처럼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시작하게 된다. 처음부터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것들을 모두 버리고 신앙생활이나 수도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다 자기가 신앙생활을 하게되면 이러 저러한 면에서 더 좋아질 것이다 라는 의도로 신앙을 갖는 것이고 또 수도생활이나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 수도원이나 신학교에 들어가는 이들도 나름대로 자기를 위해서 시작하게 된다.
즉 수도자 또는 신부가 되면 "이러저러한 면에서 자기에게 더 좋을 것이다." 라는 계산이 서기 때문에 시작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수도생활이나 성직자가 되고자하는 聖人은 없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자신의 이익 또는 욕망에서 시작은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작은 베드로처럼 자기의 욕심으로 모든 것을 버리지만 그 동기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또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순수해져야 한다, 정말로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생활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정말로 버린 사람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동안 우리 나름대로 소중하다고 지니고 있던 모든 것들과 사람까지도 버릴 수 있는 가치와 의미를 예수님 안에서 또 복음 안에서 찾아야 한다.
즉 무엇을 버리기 위해서는 버리는 것보다 더 큰 것이 발견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손해보면서 버리는 사람은 바보이다. 아니 예수님도 원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작은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럴려면 매일 복음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면서 내가 갖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복음 안에서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복음 안에서 큰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매일 복음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면서 그 가치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복음의 큰 가치는 매일 복음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통해서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한 사람만이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맛볼 수 있게 된다. 이런 사람만이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고 진정 자유롭게 생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만이 바오로 사도가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같이 고난을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필립3,8-10)라는 말을 알아 들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일 매일 예수님과 복음의 가치를 새롭게 깨달아 감으로써 예수님과 복음 이외의 모든 것들을 조금씩 버리는 생활이어야 한다. 그것이 신앙의 성숙이요, 발전이다. 이런 사람들은 현세에서 박해를 받을 것이다.
그 동안 자기가 가장 귀중하게 생각했던 것들과 사람들을 버리는데 박해를 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른 사람한테보다도 우선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박해를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버림이 자기와 다른 이들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기쁘게 박해를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이다.
"버림"의 가치와 의미를 숙고하는 하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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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부자청년 이야기’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 하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버린다는 것’의 의미가 단지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버리는가에 있음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소중한 것들을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버려야만 하는가?
그 대답은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지’, ‘복음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예수님과 복음’이 그 모든 것들을 버릴만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를 비록 잘 모른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채알지 모르면서도 매료당할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는 끊임없이 복음과 예수님을 더 사랑하려고 애쓰면서, 그 의미와 가치를 깨달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을 넘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을 넘어, 진정 복음인 복음을 알아가면서 진정 예수님이신 예수님을 알아가는 여행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차차 예수님과 복음을 깨달아가면서, 우리는 예수님 이외의 것들을 조금씩 버려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리 값지고 좋은 것들도, 그것들이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갑니다. 또한 나에게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버리는 일은, 진정으로 사랑할 때만이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에 대한 사랑이 작아서일지 모를 일입니다. 사실, 사랑이야말로 진정 소중한 것을 위해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버릴 수 있게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중심이요 궁극적인 것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도 아빌라는 데레사처럼 이렇게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고 아무 것도 너를 두렵게 하지 말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갈 뿐,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소유한 이는 부족함이 없으니(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예수님과 복음을 사랑한다면,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대변혁이 생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구하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 자신을 위한 다른 것을 구하는 데서는 꼴찌가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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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주님!
모든 것을 버리되, 버리고 온 제 자신도 버리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되, 당신을 따르고 있는 제 자신도 버리게 하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께서 목숨을 버리시며 이루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당신의 것이 되어, 온전히 당신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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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10,31)
<제대로 믿고 끝까지 믿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10,2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복을 백배나 받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독서인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지 마라. 제물을 바칠 때에는 언제나 즐거운 얼굴을 하고, 십일조를 기쁘게 봉헌하여라.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네게 주신 대로 바치고, 기꺼운 마음으로 능력껏 바쳐라. 주님께서는 갚아주시는 분이시기에, 일곱 배로 너에게 갚아 주시리라."(집회35,6.12-13)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연중시기'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땀 흘리신 것을 기억하면서 이 땀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와 주님을 위해 '보다 더' 땀을 흘립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전하는 말씀을 굳게 믿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땀을 흘립니다. 너와 주님을 위해 희생과 봉사를 하고, 가진 것을 나눕니다. 그것도 즐겁고 기쁘고 기꺼운 마음으로 그리고 되돌아올 것을 바라지 않으면서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바친 것에 일곱 배의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현세에서는 백 배의 복을 받고, 죽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땀을 흘리고 있는가? 나의 땀인 희생과 봉사와 나눔의 목적은 무엇이며, 나는 어떤 마음 자세로 땀을 흘리고 있는가? 지금 여기에서 그리고 너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인가?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로마14,8)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얻기 위해서, 오늘도 즐겁고 기쁘고 기꺼운 마음으로 땀을 흘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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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젠가 뉴스에서 보았던 기사입니다. 아래의 퀴즈를 한 번 맞춰보십시오.
“영국에서 가정집 생활용품의 위생 상태를 알아보는 실험을 진행했다. 면봉으로 각 표면의 박테리아를 검출하는 방식이었다. 박테리아가 많이 나왔을 것 같은 순서대로 다음 용품을 나열해보자.”
보기: TV 리모컨, 주전자 소잡이, 화장실 변기, 주방 수도꼭지
저의 예상은 리모컨과 변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상외로 1등은 주방 수도꼭지였고, 그 뒤를 이어 주전자 손잡이, TV 리모컨, 화장실 변기의 순서였습니다. 사람의 손이 닿는 곳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자동차 키, 컴퓨터 키보드, 마우스 등에서 많은 박테리아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막연하게 깨끗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 정도면 잘 사는 거지.’라는 막연하게 잘살고 있다는 식의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죄’라는 나쁜 병균이 나를 뒤덮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점검하고 생각하면서 주님의 깨끗한 자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니까 우리도 막연하게 좋아하는 것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재물의 유혹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가족도 버리고 재산까지도 버리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당연히 우리의 첫째 자리를 차지할 것이 많은데, 우리의 첫째 자리는 무조건 주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 방해가 되거나 경건한 삶에 걸림돌이 되는 유혹이라면 과감하게 버리는 용기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즉, 육적인 일보다는 영적인 것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손해 보는 것 같은 일들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이득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막연한 생각들을 버리십시오. 주님 안에서 그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남들보다 잘하려고 고민하지 마라. 지금의 나보다 잘하려고 애쓰는 게 더 중요하다.(윌리엄 포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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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살 길은?>
미세 먼지가 심한 날에는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는 안내 문자가 옵니다. 중국발 황사의 영향이고 동시에 산업화로 인한 대기오염에서 이 미세 먼지가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환경에 관심을 두고 환경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특히 지구 온난화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들이 계속 생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친환경 정책, 탄소를 방출하지 않는 정책 등을 수립하고 이를 실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은 주로 선진국에서 하는 말입니다. 개발도상국에서는 친환경 정책을 펼치면서 국가 발전을 이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 나라의 경제를 붙잡고 있는 것은 대부분 서구 기업입니다. 적은 인건비, 각종 규제 완화로 인해 지국에서 할 수 없는 것을 마음껏 하면서 환경오염과 지구 온난화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화를 말합니다. 자기 나라만 잘되면 그만이 아니라 모두 함께 잘 사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난민을 수용하는데 많은 찬반 의견이 있습니다.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경제학자들은 경제적인 이유에서도 받아들이는 것이 바르다고 합니다. 난민을 받아들이면 5% 이상의 경제성장력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두가 힘을 합쳐서 지구의 문제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모두가 하나를 이루고 진정한 평화를 이뤄야 할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가 유일하게 살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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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비우는 만큼 채워주신다>
세상 사람들은 소위 출세를 하려고 애를 씁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며 권력을 누리려고 합니다.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잇속을 챙기려 합니다. 그러나 그 출세라는 것이 세상에서는 성공일지 모르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랐습니다.”(마르10,28)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구원받는다는 것을, 출세하는 정도로 생각하였나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고 자랑삼아 말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내가 모든 것을 버렸으니 한자리 주십시오.’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 예고하셨을 때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가에서 논쟁한 것에서 드러났고, 세 번째 예고를 하셨을 때에도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도록 해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린 이유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버려야지, 자신을 위해서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을 위해서 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고, 자신을 위해서 살려면 예수님을 버려야 합니다. “사실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버린 사람은 그것을 버렸다는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좋아했던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함께야)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가진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권력을 지닌 것을 첫째로 여기지만, 하늘에서는 많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를 봅니다. 무엇을 위해 썼느냐가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내가 잘 먹고 잘 입고 편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느님 앞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영원한 생명, 구원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룰 수는 없지만 버려야 할 것을 하나씩 기쁘게 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고 내가 버린 것은 무엇인가요? 아니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요? 재물, 권력이나 명예. 자식이나 건강을 첫째라고 생각한다면 그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주님 마음에 드는 꼴찌의 자리를 차지하여 마침내 천상에서 첫째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인간관계나 소유물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모든 것에서 마음을 비우고 주님만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비우는 만큼 그분께서는 채워주실 것입니다.” 지상의 것들을 버리는 것이 그에 상응해서 천상의 것들을 채우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얻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베드1,13-15의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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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 중심의 삶>
-떠남, 버림, 나눔, 비움, 따름-
엊그제에 이어 어제도 하루내내 행복한 마음이었고 지금 역시 계속되는 행복감입니다. 44년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가르쳤던 6학년때 제자들 여러명이 엊그제 수도원을 방문하여 늦었지만 ‘스승의 날’을 축하해 줬고, ‘스승의 은혜’에 이어 여러 동요들의 축가들(?)을 열창해 줬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노래들을 담아 동영상으로 보내줬고, 어제는 산책 중 내내 들었고, 이어 많은 사랑하는 지인들과 나눴습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 감동과 감격을 좀더 널리 나눠 행복을, 감동을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복과 감동, 아름다움과 기쁨의 나눔이 우리를 행복하게, 기쁘게 하고, 마음을 정화하여 순수하게 합니다. 감동의 나눔을 통한 마음의 순수입니다. 동영상을 전한후 받은 메시지입니다.
“신부님, 많이 행복하셨겠어요. 하늘같은 마음을 지닌 선생님이 계시기에 그 은혜를 아는 착한 제자들이 있네요! 감사, 감동, 감격입니다. 저도 사랑합니다. 신부님”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따스하네요. 갈수록 가열加熱차게 열심히 부르는 게 넘 좋아요. 신부님 흐뭇해 하시는 모습이, 어린이처럼 활짝 웃으시는 모습이 넘 좋아 캡쳐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무수한 감사와 감격, 감동의 메시지였습니다. 나눌수록 커지는 행복과 기쁨이요 나눌수록 작아지는 불행과 슬픔입니다. 행복과 불행, 천국과 지옥은 선택입니다.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 중심의 삶이, 주님 관계의 삶이, 떠남과 버림, 나눔과 비움의 삶이 깊어질수록 행복이요 천국이지만, 내 중심의 고립단절의 삶이 깊어질수록, 모음, 쌓음, 채움의 삶이 깊어질수록 불행이요 지옥입니다.
삶은 선물이냐 짐이냐? 주님을 택해 주님을 따를수록 삶은 선물이지만 내 중심의 삶이 깊어질수록 삶은 무거운 짐이 되어버립니다. 과연 살아 갈수록 삶은 가벼운 선물의 삶이 되는지요, 혹은 갈수록 무거워지는 짐같은 정주의 삶은 아닌지 자문하게 됩니다. 우선 두가지 예화를 나눕니다.
부끄럽지만 크게 깨달았고 크게 배웠습니다. 참 좋은 수녀님이 무차와 쑥차를 선물하면서 두 잔을 타줬습니다. 마음에 드는 차를 마시라 했고 무차에 이어 쑥차를 천천히 마실 생각에 무차를 마셨습니다. 그런데 이어 쑥차는 수녀님이 들고 마셨습니다. 서로 한 잔씩 나눌 차를 저는 혼자 두 잔을 마시려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자기 중심의 이기적 나인지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아주 예전 저보다 훨씬 어린 젊은 조카 사위가 딸 아이에게 밥을 떠먹이며 천천히 식사하고 있을 때, 이미 밥그릇을 다 비운 내 자신이 참으로 부끄러웠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또 하나는 어제 읽은 예화로 전에도 언젠가 나눴었지만 새롭게 느껴져 또 나눕니다. 지옥과 천국에 관한 예화입니다. 천사의 인도로 지옥에 갔더니 크고 둥근 진수성찬 가득한 식탁인데 모두가 우울하고 어두운 표정에 바짝 마른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팔은 굽힐 수 없었고 모두가 긴젓가락을 갖고 각자 먹으려 하니 도저히 먹을 수 없어 그렇게 굶주려 말라있었고 끊임없이 반복하여 저만 먹으려 하더랍니다. 완전히 자기 중심의 지옥에 대한 적나라한 예화입니다.
이어지는 천국의 일화도 재미있습니다. 천국에 갔더니 밝고 환한 분위기에 웃음이 끊어지지 않는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분위기였다 합니다. 똑같은 진수성찬의 크고 둥근 식탁에 똑같은 사람들인데, 팔을 굽힐 수 없고 긴 젓가락을 가진 것도 똑같은데, 웬 차이인가 잘 살펴 봤더니 각자 맞은 편의 사람들에게 자기 긴 젓가락으로 집어서 서로 먹이더라는 것입니다. 지옥과는 반대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한 사랑의 상대방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새삼 천국과 지옥도, 행복과 불행도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천국같은 환경에서 내 중심의 고립단절의 지옥과 불행을 살 수 있고, 지옥같은 환경에서도 서로 연대와 나눔으로 더불어 천국의 행복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리가 문제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크고 둥근 식탁이 상징하는 바 모두가 높낮이가, 위아래가 없는 서로 평등한 수평관계에 있는 형제관계임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지가 첫째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크고 둥근 식탁에서처럼 모두가 평등한 관계임을, 세상에서의 첫째와 꼴찌가 참으로 무의미함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첫째의 자리, 꼴찌의 자리는 환상이자 착각입니다. 있지도 않고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하나하나가 똑같은 중심 자리가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더도 덜도 아닌 나일뿐입니다.
참으로 이를 깨달아 알 때 섬김의 겸손으로 즐겨 ‘구원의 꽃자리’ 꼴찌의 자리를 택할 것입니다. 바로 복음의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모두를 버린 베드로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을 따라 부단히 떠남의 삶을 살았던, 쌓음이 아니 버림의 삶을, 모음이 아닌 나눔의 삶을, 채움이 아닌 비움의 삶을, 순전히 예수님 중심, 형제 중심의 삶을 살았던 베드로와 그 일행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으로 주님을 위해 모두를 버림으로 모두를 소유한, 무엇보다 영원한 참 보물인 영원한 생명인 주님을 지닌 참 행복하고 부유하고 자유로운 제자들임을 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남성적인 권위의 아버지만 빼고는 다 받는 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하늘의 아버지 한분뿐이요 모두는 아버지의 자녀들임과 동시에 형제들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받을 필요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삶의 중심인 예수님을 따라 버리고 나누고 비울수록 날로 주님과 사랑과 신뢰 깊어지는 충만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텅빈 허무의 삶이 아니라 주님으로 가득한 텅빈 충만의 행복과 기쁨의 천국의 삶입니다. 죽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시작된 영원한 생명의 천국임을 깨닫습니다.
전례와 삶은, 신앙과 삶은, 기도와 일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날씰과 씨줄로 짜여진 피륙과 같습니다.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실재입니다. 바로 집회서의 말씀이 이를 증명합니다.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내용이라 생략하기가 너무 아까와 거의 다 인용합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제물을 많이 바치는 것이고, 계명에 충실한 것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은혜를 갚는 것이 고운 곡식 제물을 바치는 것이고 자선을 베푸는 것이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악을 멀리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고, 불의를 멀리하는 것이 속죄하는 것이다.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지 마라. 의로운 이의 제물은 제단을 기름지게 하고 그 향기가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올라간다. 외로운 사람의 지사는 받아들여지고, 그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인색하지 마라. 제물을 바칠 때는 언제나 즐거운 얼굴로 기쁘게 봉헌하여라. 네게 주신대로 바치고, 기꺼운 마음으로 능력껏 바쳐라. 일곱배로 갚아 주시리라.
그분에게 뇌물을 바치지 마라. 받아 주시지 않으신다. 불의한 제사에 기대를 갖지 마라. 주님께서는 심판자이시고, 차별대우를 하지 않으신다.“
미사전례 따로 삶 따로가 아니라, 미사전례와 삶이 하나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 사랑과 형제 사랑이, 전례와 삶이 하나로 만나는 구원의 꽃자리임을 깨닫습니다. 하루로 확산擴散되는 미사전례은총이요 미사전례로 수렴收斂되는 나날의 하루임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하느님과 분리되어 고립단절되어 살 수 있는 우리들임을, 하느님 구원섭리의 수중에 있는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성 베다 학자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미 지상에서 천국을 살았던 천사와 같은 7-8세기 걸쳐 살았던 영국의 성인입니다. 7세에 수도원에 들어와 몇 차례의 짧은 여행을 제외하고는 늘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성경연구와 교육과 저술 활동애 몸을 바쳤습니다. 성인은 평생을 수도원에서 기도하고 노동하며 단순하게 살고자 노력한 수도자로 뛰어난 학자이면서도 참으로 겸손하였고 영국 교회사를 저술함으로 ‘영국 역사의 아버지’로도 불렸습니다.
1899년 교황레오 13세는 성인을 교회학자로 선언하였고, 성 보니파시우는 성인을 ‘성령의 빛이자 교회의 빛’, ‘우리 스승이자 베다 존자로’라 불렀습니다. 성인인 단테의 신곡중 천국편에 등장하는 유일한 영국인이기도 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베네딕도회 수도사제 성 베다였습니다. 평생 온전히 주님을 따라 자기를 완전히 비웠기에 이런 충만한 삶을 살았던 베다 성인입니다.
기념, 기억하라고만 있는 성인축일이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에서 성인의 삶을 살라고 선물로 주어지는 성인축일입니다. 주님과 형제들을 위해 부단히 자기를 버리고 나누고 비워가면서 한결같이 ‘떠남과 주님 따름의 여정’에 충실할 때 주님을 닮아 각자 고유의 성인이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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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과 우리 사이에 소유와 내어드림이 어떤 의미인지 숙고하게 도와 주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
예수님의 이 말씀은 먼저 우리에게 버림의 '지향점'을 주목하게 하십니다. 무언가를 봉헌하거나 나누거나 내어놓을 때 그것이 재물이든 자기 자신이든 시간이든 그 이유는 명백히 주님, 그리고 복음 때문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되받을 요량으로 계산해서 하는 행위나 짐짓 관대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자기 영광이 목적이라면 마음을 보시는 주님께 별 소용이 없는 헛수고가 될 뿐입니다.
이어서 주목하게 하시는 말씀은 "박해"입니다. 소유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세상은 탐욕을 용인하고 과시에 열광하며 부의 축적에 면죄부를 남발하고 정당성까지 부여합니다. 철저히 물질적인 가치관에 찌든 세상은 욕망을 불의한 과정마저 허용되는 선인 것처럼 둔갑시키고, 가난은 마치 절대 악처럼 혐오합니다. 물질이 정신과 영혼의 가치마저 장악해 버린, 가치 전도의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런 세상에서 자발적 버림과 비움, 떠남과 나눔이 이해받기 어려운 영성이 되어 버린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수순일 겁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시대와 지금이 이천 년의 간극을 지니고 있음에도 적용에 전혀 무리가 없다는 게 놀라울 뿐입니다.
당시의 박해는 매우 직접적이고 위협적이기까지 했지요.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정도였으니까요. 인권과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현대 사회에서 박해는 은근한 조롱과 무시, 혐오와 차별, 소외와 낙인찍기 등으로 표현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복음적으로 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물살에 역행하는 고되고 험한 광야길에 비길 수 있을 겁니다.
"영원한 생명"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건네시는 보상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현세에서 되받으리라는 물질적 축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총의 선물이지요. 어쩌면 원죄 이후 죽음을 제거 불가한 꼬리표로 달고 살아가는 인간 실존에 가장 위안이 되는 축복이 아닐까 합니다. 막막한 죽음 이후의 삶을 생명과 행복으로 보장해 주시니까요.
제1독서는 어떻게 내어드리고 비워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조언이 가득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것은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집회 35,3)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네게 주신 대로 바치고, 기꺼운 마음으로 능력껏 바쳐라."(집회 35,12)
주님은 물질의 양을 보시지 않고 마음을 보십니다. 문제는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오는지에 달렸지요. 오늘의 독서 대목에 머물다 보면 "기꺼이, 즐겁게, 기쁘게" 내어드리는 이의 마음을 주님도 기꺼워하시고 반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물이든 능력이든 시간이든 존재 자체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사실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채워 주신 것이지요. 이 선물이 우리 안에 고이고 쌓이면 물이 그러하듯 성품을 왜곡시키고 악취마저 풍겨 인간 본연의 선함을 훼손하게 됩니다. 물이 흘러흘러 땅을 적시고 생명을 싹 틔우듯, 주님께서 주신 것이 우리를 통해 제 길을 찾아 흘러나갈 때에야 비로소 유익이 되고 보물이 되어 이웃에게 도움이 되고 또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까지 이끌어 주게 됩니다.
사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이 무엇이 아쉬우셔서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시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모든 것은 주님께서 목숨 바쳐 사랑하시는 모든 피조물을 위한 것입니다. 또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내미는 손길은 그들 안에 계신 주님께 드리는 것이지요. 주님은 가난한 이들과 분리될 수 없을 만큼 단단히 결속되어 계십니다. 그분의 거처가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비움과 나눔은 특별한 신분의 사람들만 실천하는 어떤 지고한 선택적 덕행이라기보다 주님과 함께 사는 이의 일상이 되어야 할 겁니다.
이미 벗님도 체험하고 계시겠지만, 비움과 나눔은 긍정적인 중독성이 있습니다. 실천한 만큼 기쁘고 행복하다보니, 자기 깜냥 안에서 더 바치고 싶어 '어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없나' 두리번거리게 되지요. 이 선량한 중독은 더 깊은 영적 행복을 추구하게 해 준다는 차원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보고 사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게다가 비움과 나눔의 행복은 물질과 소유와 과시가 절대 선인 것처럼 부추기는 세상의 교활한 목소리를 식별하게 해 줍니다. 물질과 소유와 과시의 끝은 결국 인간성 파괴임을 깨달았기에, 우리는 어둠으로 기울어져 가는 세상에서 미소하고 미약하나마 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며 주님과의 사랑을 지키고 복음을 살아가려고 투신하게 되지요.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부활 시기의 문을 닫고 일상에서 복음의 생명을 사는 연중 시기로 들어온 우리에게 오늘 말씀은 도전도 되고 위안도 됩니다. 각자의 삶에서 주님을 사랑하며 복음적으로 살고자 애쓰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세상에서 비운 만큼, 나눈 만큼이 영원한 생명으로 쌓여갈 것이니 우리 모두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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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외아들까지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명을
만민의 아버지가 되기 위한 하느님의 약속을 실현할 열쇠가 되기도 한 그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살해해 하느님께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사리에 맞지 않고 바보짓을 명하신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응답은 어떠합니까?
하느님의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 모래처럼 많은 후손’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아들을 잡아 희생 제물로 바치라니, 아들을 얻기 위해 오랜 세월 학수고대했던 아브라함은 아버지로서 이 모든 게 얼마나 괴로운 타격이었겠습니까! 「고통의 가치」: ‘고통의 실재’ 에서
♣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그를 사랑했습니다. 늘그막에 얻은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라는 명 앞에 인간 이성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브라함에게는 가장 고된 체험까지도 고통 선상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명을 순종하였기에 아브라함이 ‘신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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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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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6tDssayFhR8&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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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 30)
제자의 길이란
가장 좋으신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다.
떠나지 않고서는
만남도 없다.
버리지 않고서는
얻을 것도 없다.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인생의
모든 가치는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을
향하여 있다.
새로운 삶은
신앙의 본질이다.
새로운 삶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애끓는 마음을
다시 만난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이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위로와 격려
십자가의
기쁨과 영광이
우리의 마음을
다시 뜨겁게 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이다.
참된 기쁨이란
우리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기쁨이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하느님 사랑이
영원한 생명이며
참된 자유이다.
우리 생명이
거(居) 할 곳은
오직
하느님뿐이다.
생명의 잔치에
초대받은
우리들이다.
낙심과 절망이
아닌 기쁨과
희망의 나눔이다.
하느님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생명의
주님이시다.
우리의 생명이란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만으로
영원한 기쁨이
된다.
세상의 잣대가
아닌
하느님의 길을
만날 때이다.
꼴찌를 첫째로
만드시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힘을
진실로 믿는
새로운 오늘이다.
믿음을 드리고
생명을 받는
감사의 오늘이다.
오늘 우리는
기쁘게
살아야 한다.
하느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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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 28)
모든 것을 버리는
결별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살리는 복음의
길을 깨닫게됩니다.
복음에 선행되는
결별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깨워주십니다.
모든 것을 버릴 때
우리를 지배했던
모든 것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릴 때
가장 좋으신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움켜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 길은 새로워
지기 때문입니다.
단단한 자아에서
빠져 나오게 하는 것은
결별이기 때문입니다.
결별없이
가벼워 질 수 있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내려놓는
결별 없이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비워내는 결별없이는
온전한 응답을
할 수 없습니다.
결별을 통해
우리는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습니다.
결별의 핵심은
주님께로 돌아가는
봉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들어내는
결별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참된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결별없이
따를 수 없습니다.
삶의 가치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복음의 시작은
다름아닌 모든 것을
버리는 결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맡겨드림이
결별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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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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