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풍무(132)
“이 새끼는 먹을 땐 개도 안 건든다는데!”
등 뒤에서 다가오는 강한 기운에 얼굴을 확 구긴 모사는 재빨리 허공으로 솟구치며 고함을 질렀다. 마지막 남은 접시에 미련이 남은 듯, 허공에 머무른 상태에서도 모사는 접시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 접시에 남아 있는 음식을 집어 입 안으로 가져가며 장손훈을 쳐다보았다.
“얼레? 한가락 하는 놈이었네.”
모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장손훈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폭발적이었다. 과거 백무천의 화룡파천비공에 버금가는 엄청난 열기가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 같은 하찮은 놈을 위해 쓰기는 아까운 무공이다, 놈!”
진득한 살기를 흘리며 장손훈은 양손을 거칠게 내뻗었다. 열화천붕도와 한빙수령창을 얻기 위해 오십 년 전부터 시작된 전쟁이다. 오십 년 전에는 수신가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빙궁(氷宮)을 멸문시켰고, 이제 남은 곳은 본가인 수신궁이다.
수신가를 멸문시키고 두 개의 신기를 얻게 되면 주작천가는 용황사천가 중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다. 그를 위해 기다린 세월이 오십 년이었다.
그런데, 괴상한 놈들이 나타나 일을 방해하고 있다. 더욱 기가 막힐 노릇은 놈의 행동이다. 허공에 머무른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음식을 먹고 있다.
“자식! 사막에서 모래나 처먹고 살 것인지 이 추운 곳까지 와서는.”
전면에서 다가오는 붉은 열기를 향해 모사는 양발을 쾌속하게 내질렀다. 때가 덕지덕지 낀 모사의 양발이 검게 물들더니 전면에 방패 모양의 둥근 쟁반을 만들어냈다.
콰광!
대기가 출렁이는 커다란 폭음과 함께 모사의 신형이 뒤쪽으로 훨훨 날았다. 한데 날아가는 그의 모습이 특이했다. 강기끼리 부딪친 반발력으로 날아가는 게 분명할 터인데 그는 전혀 충격을 받은 기색이 없다. 마치 헤엄을 치듯 양팔과 다리를 휘휘 저으며 나아가는 것이었다. 아주 편안한 얼굴로.
“이 경공은 내가 창안한 건데 와공영보술(蛙空泳步術)이라 불러.”
“개자식!”
장손훈은 진득한 욕설을 뱉어냈다. 와공영보술이라니. 허공에서 개구리가 헤엄치는 모양의 보법이란 말이 아닌가. 아닌 정말로 개구리가 헤엄을 치는 것처럼 손발을 움직이고 있다. 간간이 몸을 뒤집는 여유까지 보이면서. 치가 떨렸다.
“죽여 버리겠다! 폭풍열화강(爆風熱火?)!”
일순 장손훈의 몸에서 폭풍 같은 열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가 딛고 있던 바닥 주변이 뜨거운 열기에 녹아, 순식간에 일 장 넓이의 구덩이가 생겨났다. 장손훈의 양손을 떠난 붉은 열기는 허공을 향해 나아갈수록 부챗살처럼 범위를 넓히더니 모사의 전면을 장악해 버렸다.
“와공영쾌(蛙空泳快)!”
모사의 대응도 신속했다. 재빨리 몸의 위치를 바꾸더니 한껏 오므렸던 양팔과 양발을 빠르게 내저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은 허공으로 쑥쑥 밀려 올라갔다. 팔다리를 한 번씩 저을 때마다 일 장 가량 솟구쳐 올라간 그의 신형은 마침내 광장 천장에 다다랐다.
“저럴 수가.”
장력을 쏟아내던 장손훈은 경악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높이는 무려 삼십 장. 설령 허공답보의 경공을 펼칠 수준이 된다 해도 불가능한 거리다. 허공답보는 순간적으로 공간을 밟고 나가는 경공일 뿐,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경공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 거리를 헤엄치듯 날아가는 자가 있다니. 삼십 장이면 장력이 미치지 못하는 거리가 아닌가. 속도 또한 엄청났다. 폭풍열화강의 강기가 나아가는 속도에 맞춰 놈은 몸을 움직인 것이다.
가공하다는 말밖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장손훈은 두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피하는 걸로 상대를 이길 수 없다, 놈! 정면으로 부딪쳐야 승리할 수 있단 말이다.”
낮게 소리친 장손훈은 바닥을 사정없이 차대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폭풍열화강 사정권에 상대를 넣기 위해서는 자신이 다가가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붉은 화염을 뒤편으로 남기며 솟구치는 장손훈의 모습은 한 마리의 불새를 보는 듯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럴까?”
거미처럼 천장에 매달린 모사는 장손훈의 모습을 보며 싱긋 웃었다.
“내게 팔불출 형님이 하나있는데 그 형님이 가르쳐준 무공이 있어, 지주공(蜘蛛功)이라고. 네가 경공으로 올라올 수 있는 거리는 이십 장, 장력이 도달하는 거리는 십 장 정도니까.”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던 모사의 신형이 천장을 타고 움직였다. 그의 말대로였다. 거미가 기어가는 것처럼 이동하는 모사의 신형은 엄청났다.
콰앙!
“어이쿠! 또 계산이 잘못됐네. 생각보다 강해.”
두 자 깊이의 구멍이 뚫린 곳을 보며 모사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빌어먹을!”
바닥으로 내려서며 장손훈은 나직한 욕설을 뱉어냈다. 놈의 말처럼 자신이 경공으로 올라갈 수 있는 한계는 이십 장이다. 거기에 장력이 나아가는 거리까지 합치면 삼십오 장, 일격에 놈을 없애지 못하면 바닥으로 내려서야만 다음 공격을 할 수가 있다.
장손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부하들의 모습이 보였다. 주작천가 가신 네 명은 긴 수염을 가진 자들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는 듯했고, 금우비는 조우령과 쌍장을 교환하고 있었다.
단지 오른팔이 없는 한 명만이 어두운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며 서 있을 뿐이다. 싸움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자는 석두였다. 그는 여전히 젊어진 얼굴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던 터라 눈앞에서 벌어지는 싸움엔 별 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천화궁 무인들을 상대로 보지 않았던 탓이기도 했다.
그런 석두의 모습을 장손훈은 착각했던 거였다. 무공이 약해 싸움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우선 네놈이 먼저다! 네놈만 내려오지 못하게 하면 승산은 우리에게 있다, 놈!”
천장을 힐끔 쳐다보던 장손훈은 재차 바닥을 차며 솟구쳐 올랐다. 자신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자는 독공의 고수라 판단했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삽십 장 높이에서 독공을 난사한다 해도 아래쪽에 도달하면 그 위력은 감소될 수밖에 없고, 그 정도면 대부분 열양공을 익힌 천화궁 무인들이 이겨내리라 여겼다.
상대를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한 장손훈의 실수였다.
독공에 있어서 심검의 경지라 일컫는 독성지체를 이룬 무인이 아래쪽에도 한 명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다.
“갑자기 밥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웬 트림이.....꺼어억!”
뿌웅!
주작천가 무인을 피해 도망치듯 움직여 다니는 섯다의 몸에서 두 가지 소리가 번갈아 터졌다. 입으로는 연신 트림을 해대고 그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엉덩이에서는 방귀 소리가 요란하게 흘러 나왔다.
양손과 발 또한 쉬지 않았다. 앞을 막아서는 천화궁 무인들을 향해 슬쩍슬쩍 내젓는 손길에 죽음의 그림자가 덮였다.
“크아악!”
“아아악!”
으깨지고 부서지는 시체들이 속출했다. 섯다가 지나간 뒤로는 목을 틀어쥔 시체들이 하나둘 식 생겨나기 시작했다. 섯다의 트림과 방귀에 직접 노출된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싸움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수많은 무인들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가는 상황. 그 시체들 속에 한두 명이 더 포함된다는 사실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상황이었던 탓이다.
천화궁 무인들 틈을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던 섯다가 어느 순간 우뚝 멈춰 섰다.
“이봐! 지금부터 셋을 셀 거야. 그럼 천화궁 자식들은 대부분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무론 죽지야 않겠지만.......”
뒤따르던 자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은 섯다는 천천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끄아악! 독(毒), 독이다!”
섯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광장 안 이곳저곳에서는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조금 전 그가 지나왔던 곳을 기점으로 천화궁 무인들은 한두 명씩 목을 틀어쥐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심독(心毒)?”
섯다를 뒤따르던 주작천가의 무인이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색무취의 무영독의 경지를 넘어 독공 고수가 익힐 수 있는 마지막 경지. 검법을 익힌 무인들이 심검을 말하듯 독공에도 그에 필적하는 무공이 있었다.
심독(心毒)이라 부르는 경지였다.
하지만 심독의 경지에 올라섰다는 무인은 일찍이 없었다. 심검보다 더 성취하기 힘든 무공이 심독이었던 탓이다. 심검과는 달리 심독은 한 가지 기능이 더 있다. 바로 독으로 인한 죽음이 그것이다. 심검은 상대와 같은 수준이라면 막아낼 수 있다.
하지만 심독은 다르다 심검에 무영독의 기운이 포함되어 있는 상태가 심독인 것이다. 심검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무공. 그 심독을 상대가 펼치고 있었다.
“어떻게......”
“심독은 말이다, 독물만 처먹고 한 오십 년 정도만 살면 성취할 수 있어. 몸에 나 있는 터럭 하나까지 전부 독이 포함되어 있을 때 말이야.”
코딱지를 튕기듯 구부렸던 오른손 중지를 밖으로 튕겨내며 섯다는 희미하게 웃었다.
“커억!”
불에 덴 듯 화끈한 고통이 이마에서 느껴지자 나직한 비명을 지르며 장한은 대여섯 걸음 물러났다.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 방금 상대의 공격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을 뿐인데 당하고 만 것이다.
무영독이라 했던 독공이 분명했다.
그런 장한을 보며 섯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독성지체를 이뤄야 해. 마음만 먹으면 숨결이나 방귀, 또는 땀에도 독을 심을 수 있는 경지 말이야.”
이마부터 시작하여 조금씩 사라지는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섯다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곳 역시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거미처럼 천장을 이동해 다니던 모사는 한쪽 구석으로 몰려 더 이상 움직일 곳이 없었다.
“저 자식 공연히 모사를 건드려 가지고.”
섯다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천장에 금을 긋듯 손을 쭉쭉 움직이는 모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혀를 차는 섯다와는 달리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장손훈의 얼굴은 득의만면한 기색이 완연했다. 얼마나 많은 공격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부하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몇 명이 숨을 거뒀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오직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독공의 고수인 놈을 구석으로 몰기 위해 끊임없이 솟구쳐 올랐다. 수십 번의 공격을 한 듯했지만 여전히 단전은 충만했다. 파상적인 공격을 퍼부었다면 단전이 텅 비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번의 공격을 펼치면 다시 바닥으로 내려가야 하고, 그 시간이면 내기를 일주천 하기에는 충분하다. 여전히 처음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였다.
“어디로 갈 거냐, 놈! 그따위 얼음으로 화공에 대항해 보겠다는 말이더냐!”
기다란 얼음을 뜯어내는 놈의 모습에 장손훈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천장에는 움푹 파인 자국들로 즐비하다. 그 모든 구멍들이 전부 폭풍열화강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런 걸 잘 알고 있는 놈이 무기로 준비한 것이 얼음이라니.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큭! 아래쪽 상황도 모르는 녀석이. 너만 죽으면 끝이야, 임마!”
슬쩍 미소를 머금은 모사는 천장에 박아 넣었던 왼손을 빼냄과 동시에 양발을 사정없이 찼다. 일순 천장에 깊숙한 족적이 남고 모사의 신형은 가공할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몸에 회전력마저 걸었는지 팽이처럼 돌아가는 그의 몸에서는 검은 광채가 파편처럼 쏟아져 나왔다.
“폭풍열화강(爆風熱火?)!”
장손훈의 입에서도 광포한 고함이 터졌다. 마지막이 되리라 확신했다. 검은색으로 변하여 돌고 있지만 놈의 무공은 독공. 극에 달한 폭풍열화강은 독공을 무력화시키고 놈을 태워 버릴 것이다.
콰앙!
“끝났군,”
폭풍열화강에 휩싸여 불꽃으로 변해 가는 상대를 보며 장손훈은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길었던 접전의 끝이었다. 내려설 자리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허억!”
장손훈은 경악한 얼굴로 전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빙빙 돌아가는 검은 광채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한 번 폭풍열화강을 펼치기 위해 내기를 끌어올렸다.
“이럴 수가........”
장손훈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지금껏 아래로 내려서면서 내기를 일주천 했기에 단전은 거의 비어 있다. 몸 이곳저곳에 퍼져 있는 내기를 단전으로 모아야 다시 한 번 무공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빌어먹을!”
눈앞까지 다가든 검은 광채를 보며 눈을 감고 말았다. 아니, 머릿속이 검게 변했기에 눈을 감았다고 여겼다.
“피하는 놈이 이겼잖아, 임마!”
장손훈의 이마에 얼음을 박아 넣은 채 모사는 속삭이듯 말했다.
털썩!
거칠게 바닥으로 떨어진 장손훈의 시체는 잠시 부르르 떨더니 이내 가루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빙모, 밥 좀 더 달라니까 어떻게 된 거야!”
장손훈의 마지막을 쳐다보던 모사는 고개를 돌리며 버럭 소리질렀다. 하지만 빙모 조우령은 모사의 말에 대답할 경황이 없었다.
“어쩜 이럴 수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이 처음 들어와 음식을 요구했을 때부터 모든 천화궁 무인들이 쓰러질 때까지의 광경이 꿈만 같았다. 자신 또한 빙천수라마공을 극성으로 익힌 고수고, 장손훈 정도는 상대할 능력이 있다.
하지만 저들처럼 장손훈이나 금우비를 아이 다루듯 할 자신은 없다. 아니, 그들 두 사람이 합공한다면 분명 자신이 패했을 게 분명하고, 수신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런데 저들 덕분에 수신가 무인들은 거의 피해가 없다.
천화궁 무인들에 당한 부하들보다 독공 고수의 독에 중독되어 쓰러진 부하들이 더 많았다.
“뭐 해? 부하들 시켜서 저기 너부러진 놈들 밖에 내다 버리고 정리해야지!”
아래쪽으로 내려온 모사는 조우령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넸다.
“네? 아, 네.”
툭 치는 손길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조우령은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놀랍게도 죽은 줄 알았던 천화궁 무인들 대부분은 숨이 붙어 있었다. 의아한 얼굴로 섯다를 쳐다보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수신가 무인들과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맞아. 저놈들은 운이 좋았어. 앞으로 십 일간은 비몽사몽이겠지만 그래도 목숨은 건졌잖아. 그리고.......”
“네?”
“밥 좀 더 달라고 했잖아. 밥 말이야, 먹는.......”
조우령 눈앞으로 고개를 디밀던 섯다는 말끝을 흐리면서 귀신이라도 본 듯 화들짝 물러났다. 조우령의 얼굴 때문이었다. 백발 때문에 분위기가 달라 보였을 뿐, 가까이서 본 그녀의 얼굴은 영락없는 조천영이었던 것이다.
“너무 놀라지 마라, 임마! 여기 있는 여자들 대부분이 비슷하게 생겼다.”
섯다의 반응에 모사가 웃으며 말했다. 조천영을 닮은 건 비단 조우령뿐만이 아니었다. 조우령이 가장 많이 닮긴 했지만 대부분 여자들의 얼굴이 비슷비슷했던 거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근친혼의 영향이지 다른 게 있겠냐. 뭐 대단한 씨앗이라고 그렇게까지 했는지. 아마 얼굴 비슷한 것 말고 다른 병도 있을 거다.”
모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촌 간에 이루어지는 근친혼이야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수신가는 그 정도가 심한 듯 보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비슷비슷한 얼굴들, 그들의 근친혼은 수천 년간 이뤄졌음에 분명했다.
“허! 개종자도 아니고. 그런데 여기 계속 있어도 되는 거야?”
“나는 씻으러 갈련다. 때가 십 년 묵었단다.”
어이없다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두 사람의 귓전에 소살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십 년? 그러니까 형님은 우리가 중원을 떠난 지 십 년이 지났다, 이 말이오? 니미럴! 엄청 흘렀구먼. 그럼 형님은?”
황당한 얼굴로 소살우를 쳐다보던 모사는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십 년이면 백산이 깨어날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뻔하겠지, 뭐. 뒈지려고 절벽을 뛰어내리고 있든지, 아니면 목을 매든지 하고 있지 않겠냐. 제 버릇 개 줬겠냐?”
흥미 없다는 듯 소살우는 휙 몸을 돌렸다.
“인간아! 벌써 삼십 년이다. 이제 그만 놔줘라! 얼굴까지 바꿨으면 형님으로 인정해야지, 언제까지 소령의 그림자를 안고 살 거냐?”
“나도 그러고 싶어. 그런데 생각처럼 안 되는 걸 어쩌라고, 새꺄! 형님을 보면 소령이 떠오르는 걸 어쩌라고, 임마! 그거 알아? 십 년 동안 소령의 생일상 한번 차려 주지 못했단 말이다. 에이, 씨팔!”
“저런 등신!”
소살우의 등에 대고 이죽거리긴 했지만 모사의 얼굴은 편치 못했다. 중원이 가까워질수록 소살우는 힘들어하고 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면서 백산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아들이었던 그를.
“섯다야, 무슨 방법 없겠냐. 저러다 저 인간 다시 북방으로 간다고 하겠다.”
“글쎄, 낸들 뾰족한 수가 있겠냐. 겪어 보질 않았으니 저놈의 인간 마음을 알 수도 없고.”
섯다 또한 모상의 심정과 다를 바 없다는 듯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제가 도울 수 있으면....... 웬만한 영약 종류는 수신가에 꽤 있습니다.”
두 사람을 유심히 쳐다보던 조우령이 넌지시 말했다. 그들의 사연을 알지 못하지만 죽음과 관련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 수가 있었다. 자실을 시도하는 어떤 사람 때문에 북방으로 갔을 거라고 지레짐작한 그녀는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에 말을 꺼낸 것이다.
“도움?”
곁에 조우령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섯다와 모사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모사야, 지금 나 대단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나도!”
서로를 쳐다보며 빙긋 웃던 두 사람은 뜯어보듯 조우령을 쳐다보며 물었다.
“지금 은혜를 갚겠다고 한 것 맞소?”
“정말로 은혜를 갚고 싶은 거요?”
모사와 섯다는 거의 동시에 물었다.
“수신가에서 할 수 있는 거라면.......”
오한이 드는 것 같아 조우령은 부르르 떨며 대답했다. 하지 말아야 할 약속을 하는 것 같아 내심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히 가주만 할 수 있는 일이오. 다른 사람은 아무리 많아도 못하지. 그런데 일가는 이루셨소?”
“네?”
일순 조우령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수신가의 가주가 된 이래 혼례에 대해 묻는 사람은 처음이었던 탓이다.
“혼자란 말이네. 그럼 올해 나이는 몇이오?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시오. 한 인간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얼굴이 환해진 모사는 다그치듯 물었다.
“올해 서른다섯입니다.”
“흠! 서른다섯이라....... 좀 많기는 한데.”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제자리에서 빙빙 돌던 모사는 이내 한껏 무게를 잡고 입을 열었다.
“먼저 우리 소개부터 하지. 이 친구와 난 한때 독천쌍마래 불렸고, 방금 안쪽으로 들어간 눈이 작은 형님은 고아마도 소살우라 불렸고, 그 전에 들어간 종자들은 혈각천마와 구천마검이라 불렸네. 그리고 우리가 큰형님이라 부르는 사람은 묵안혈마라 불렸고.”
“천붕십일천마(天崩十一天魔)!”
조우령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 않았다. 모두가 심검의 경지에 올라, 어디서 이런 자들이 나타났나 했었다. 그런데 그들은 전설로 불리는 천붕십일천마였다니. 폐쇄적인 수신가지만 오십 년 전부터는 간간이 강호 소식을 듣고 있었다.
아울러 천붕십일천마의 수장이었던 묵안혈마의 부인은 북해빙궁 출신인 조천영이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녀는 먼 할머니뻘 되는 분이 아니던가.
“하지만 얼굴은....... 설마 반노환동?”
의심스런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더구나 이제 시삽대 초반의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다란 수염들.
“맞아! 우린 천붕십일천마라 불렸어. 승천무극대혼진에서 빠져 나와 중원으로 돌아가는 길이고. 지금부터 우리 사연을 간단하게 말하지.”
망연한 얼굴로 자신들을 쳐다보는 조우령을 향해 모사는 백산과 얽힌 사연을 처량한 목소리로 세세하게 늘어놓았다. 물론 눈물을 찍어 내는 행동 또한 서슴지 않았다.
“세상에, 그러니까 두 분은 저에게 백산이란 그분의 자식을 낳아 달라고.......”
어이가 없는 듯 조우령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영혼이 빙의되어 다시 살아났다는 말조차 믿지 못할 일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그와 혼례를 올려 자식을 낳아 달란다. 자신의 얼굴을 닮은 아들을.
“가주가 남이라면 이런 부탁을 하지도 않아. 어차피 천영 형수님과는 먼 친척일 테고. 설사 가까운 친척이라 해도 수신가에서는 흠도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극비 중의 극비네. 오리 오 형제가 죽어 땅속에 묻힐 때 가져가야 할 비밀 말이네.”
일순 모사와 섯다의 몸이 검은색으로 변했다. 앙천마마묵독공을 극성으로 운기했을 대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듣지 않으면 저희들을 전부 죽일 작정입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조우령은 물었다. 만일 이들이 원한다면 수신가의 멸문은 불 보듯 뻔하다. 기껏 이백여 명 남아 있는 세가인들 중 무공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백여 명에 불과하다.
“도박이라고 생각해도 돼. 강시로 만든 형님이 정상적인 몸을 되찾았는지 아니면 자살을 해서 죽었는지, 그건 아무도 모르니까.”
“전부 죽이겠다는 말이군요.”
“조금 전 천화궁 놈들 있잖아, 사막까지 몇 명이나 살아갈까?”
“으음!”
급기야 조우령은 신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백오십여 명의 천화궁 생존자들. 독에 중독된 그들은 십여 일간 비몽사몽을 헤맬 거라고 했다. 끝없이 이어진 설원에서 십여 일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죽었다고 봐야 한다.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 달라는 말이 아냐. 자식 하나만, 아들이 됐든 딸이 됐든 하나만 낳아 주고 떠나면 된다고.”
“휴우! 저는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대신 수신가를 중원까지 데려다 주세요.”
조우령은 고개를 떨궜다. 전부 죽음을 택하느니 묵안혈마가 죽었다는 데 희망을 걸어 보는 게 나을 듯싶었다. 더구나 그 일은 자신 혼자만 희생하면 되는 것 아닌가.
“정말 잘 생각했네, 가주. 내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약속하네. 절대 가주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는 걸세. 이제 서른 살밖에 안 된 나이에 송옥반안 뺨치는 얼굴까지. 솔직한 말로, 천영 형수님 닮은 자식만 아니라면 가주에게 이런 부탁도 하지 않았을 거네. 내가 생각하는 신붓감은 최하 열여덟 살이거든. 이제 십 년 묵은 때를 벗기러 가볼까.”
조우령을 향해 싱긋 미소를 머금은 모사는 휘적휘적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섯다가 만족스런 얼굴로 따랐다.
“가주님!”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있던 수신가 가신들이 조우령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음파가 차단되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뭔가 큰일이 일어난 건 확실했다. 그건 가주인 조우령의 낯빛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의 그녀는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별일 아닙니다. 이제 수신가는 중원으로 들어갑니다.”
“가주님!”
수신가 가신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수신가 천년의 염원이었다. 하지만 근친혼 때문에 얻어졌던 천음신맥의 저주는 수신궁 밖으로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사내아이는 태어나자 대부분 죽고, 여아는 절반 정도가 살아남는다.
그들 또한 천음신맥을 타고 태어나는 주저는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수신가 인물들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수신궁이었다. 그것도 열화천붕도와 한빙수령창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저사령계에 들어가면 지극화정균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분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저들은 우리가 중원에 뿌리내리도록 도와주고 난 그의....... 거래일뿐입니다.”
조우령의 마지막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수신가를 중원으로 옮길 참이었다. 천음신맥의 저주도 있었지만 햇빛 아래로 나가면 가진 바 능력의 절반도 쓰지 못하는 약점 때문에 수신가는 중원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천붕십일천마라는 절대적인 무인들이 곁에 있으니, 지저사령계에 도착할 때까지는 그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즐~~~~감!
즐감하고 감니다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깁니다.
즐감.감사합니다.
즐독 입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0^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