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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대기업은 왜 도태됐나 '교토식 경영' 저자 스에마쓰의 분석]
“직원 수천명의 목이 날아가는 상황에서, 왜 임원들은 일본전산(日本電産) 등으로 재취업하고 있는 것인가. (샤프가 외국에 인수되는) 이런 꼴이 된 것은 너희들 때문이야.”
“우수한 사람을 경영자로 일찍 데려왔다면 샤프가 이런 식으로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금융기관 등 외부에서 온 이사 5명은 임원 보수를 반환하세요.”
지난달 23일 일본 오사카(大阪) 시내에서 열린 샤프 정기 주주총회. 다카하시 고조(高橋興三) 사장 등 현 경영진이 일괄 사퇴하고, 샤프가 대만 훙하이(鴻海·폭스콘) 그룹으로 인수되는 방안이 의결되는 현장에선 일본답지 않게 고성(高聲)이 오갔다. 다카하시 사장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경영의 속도가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지난 5월 6일 일본 도쿄(東京)의 도시바(東芝) 본사. 기자들로 가득 찼어야 할 쓰나카와 사토시(綱川智) 신임 사장의 기자회견장은 텅텅 비었다. 일본 최대 연휴인 골든위크 기간 중 금요일 저녁 5시에 회견이 열렸기 때문이다. 부정 회계 발각 1년 뒤 열리는 사장 교체 기자회견이었기에 좋지 않은 기사가 나갈 것을 우려한 도시바 측이 일부러 오기 힘든 시간을 골랐다는 후문이 돌았다.
전 세계 기업의 우상이었던 일본 기업들의 비보(悲報)가 최근 끊이지 않는다. 일본 자동차 업계에선 2010년 도요타의 대규모 가속페달 결함 사건을 시작으로 미쓰비시(三菱)·닛산(日産) 스즈키자동차까지 연이어 연비·배기가스 조작 스캔들이 터졌다. 일본의 얼굴이던 가전산업에선 샤프에 이어 도시바의 백색 가전 부문까지 중국 메이디(美的) 그룹에 인수됐다. 일본인의 자존심에도 금이 갔다.
일본 경제지 닛케이(日經) 비즈니스는 “일본 대기업들이 ‘부카(VUCA·변동과 불확실성, 복잡성과 모호함의 영어 앞글자를 딴 단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됐다”며 “중국 기업이 2주면 걸릴 일을 일본 기업들은 4개월씩 걸린다”고 비판했다.
지난달 7일 일본 교토(京都)에서 만난 스에마쓰 지히로(末松千尋·60) 일본 교토대 경제학과 교수는 “일본 기업은 제조 혁신에만 신경 썼을 뿐, 경영 혁신에는 무관심했기에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스에마쓰 교수는 도쿄대와 스탠퍼드대를 졸업한 후 닛키(日揮) 매킨지컴퍼니 재팬에서 전략 컨설턴트로 이름을 알렸다. 2002년 교토 기업들의 경쟁력을 연구한 베스트셀러 ‘교토식 경영’으로 스타덤에도 올랐다. 그를 만난 건 최근까지도 이어지는 교토 기업들의 승승장구 비결을 묻기 위해서였지만, 그는 일본 대기업에 대한 쓴소리부터 시작했다.
中 기업 2주 걸릴 일을 넉달 끌어
기술력 1등? 경영은 후진적
인사·마케팅·영업 부문에선
혁신에 대한 욕구 자체가 없어
일본식 와(和)문화 때문
―최근 일본 대기업들이 왜 위기에 빠진 것인가요. 일본과 비슷한 발전 구조를 가진 한국에서도 참고할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대기업들이 공장에서 제조 공정을 개선하는 작업만큼 마케팅이나 인사, 관리, 영업 등 백오피스 부문에서 생산성을 개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기업들의 기술은 아직 세계 1위입니다. 하지만 이를 관리하고 결정하는 경영 부문은 굉장히 후진적입니다. 그리고 기업들은 이를 개선하고 혁신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습니다. 기업들이 제조만 잘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기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경영이 중요합니다.”
―기업들은 위기에 빠지면 당연히 경영을 개선하려고 하지 않나요.
“개선을 하려면 높은 사람들, 즉 경영진과 정치인들이 기득권을 내려놔야 합니다. 그들은 그걸 내려놓을 생각이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일본 특유의 ‘와(和)’를 중시하는 문화 때문이기도 합니다. 화합을 중시하기 때문에 문제를 드러내고 이를 고치려는 논쟁을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전 최근 22개 국가의 200개 기업, 400건의 회의를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전 일본 기업 회의만의 눈에 띄는 특징을 발견했습니다.
스타 기업 줄줄이 몰락
잘 나가던 도시바·샤프
대만에 인수되고 회계 부정
문제 개선하려 하지 않고
책임지려고 하는 사람도 없어
먼저 다른 나라 회의들과 달리 일본 기업 회의에서는 ‘혁신(이노베이션)’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나라 기업 회의에선 말끝마다 ‘혁신’이란 단어가 나왔거든요. 그리고 어느 누구도 작은 의견 하나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경영 상황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신규 사업이나 새로운 마케팅을 제안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혁신에 대한 욕구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좋은 퍼포먼스를 낼 수 있겠습니까. 쇠락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한국이나 일본 기업에서는 수직적인 문화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상사 앞에서 함부로 말을 못 하는 게 아닙니까.
“원래 일본 기업의 조직 문화는 수직적인 문화가 아닙니다. ‘바텀업(bottom-up·밑에서 위로 올라오는)’입니다. 이것이 1970년대부터 일본 기업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일본 경영의 비결입니다. 일본 공장 분위기는 일본 대기업의 경영자 회의와 분위기가 다릅니다. 개개인이 장인이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쓸모없는 시간을 없앨지, 어떻게 하면 비용을 줄일지, 어떻게 하면 더 빨리 신기술을 개발할지 서로 의견들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공장 책임자는 현장에서 이를 듣고 빠르게 개선 지시를 내립니다.
물론 위에서 지시를 내리는 경우도 있지만, 공장 내 자잘한 일들의 조그마한 개선은 위에서 알 수도 없고 개입할 수도 없기 때문에 바텀업으로 올라와 공장 내에서 결정이 내려집니다. 이런 기업 문화가 ‘기술의 일본’을 만들었고, 일본의 고도 성장기를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기업 규모가 커지면서 이런 분위기가 윗선(경영진)까지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공장에서 성장해 올라간 사람들은 공장 밖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저는 수직적인 기업 문화, 수평적인 기업 문화 이 둘 중 어떤 것이 좋다고 결론 내리기 어렵다고 봅니다. 수직적인 기업 문화도 현명한 경영진이 옳은 길을 보여주고 빠르게 결정한다면 기업 입장에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본 기업들의 문제는 의사 결정을 내릴 사람도, 이를 책임질 사람도, 이 결정에 대해 모니터링할 부서나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들 실재(實在) 하지 않는 무언가를 위해 일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대기업이 불황에 휘청일 때
일본의 '히든 챔피언'
일본전산·호리바·니치콘…
잃어버린 20년 견디게 한 기업들
'교토식 경영' 출간 14년 지났지만
기업들 매출 여전히 늘고 있어
일본의 장기 불황은 1990년대부터 시작됐다. 그동안 독일은 통일 국가를 이뤘고, 소련은 해체됐으며, 중국 경제는 G2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일본 경제는 잃어버린 20년을 겪은 후에도 아직 세계경제 대국 3위다. 한국은 아직도 일본을 따라잡지 못했다. 비교적 큰 내수시장(1억2700만명)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스에마쓰 지히로 교토대 교수는 일본이 20년 불황을 견뎌낸 비결로 일본전산(日本電産), 호리바(堀場), 니치콘(ニチコン), 무라타(村田), 교세라(京セラ) 같은 교토 인근 지역의 강소(强小) 기업들을 지목했다. 이들은 최고의 기술을 바탕으로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지키며 불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독일의 ‘히든 챔피언’ 같은 존재다.
교토는 ‘천년의 고도(古都)’로 불린다. 교토고쇼(京都御所) 등 고개를 어느 쪽으로 돌리든 1000년이 넘은 문화유산들로 가득하다. 교토의 또 다른 모습은 첨단 IT 기업들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교토와 오사카 등지의 IT 기업들을 묶어 ‘교토·오사카 밸리’라고도 부른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는 소설 ‘고도’에서 “천년의 고도가 서양의 새로운 것을 가장 빨리 받아들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고 썼다.
―‘교토식 경영’이 출간된 지도 14년이 지났지만 일본전산, 무라타, 호리바 등은 아직도 안정적으로 매출이 늘고 있습니다. 글로벌 경제 변수에도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이들의 최대 거래처 중 한 곳인) 애플의 상황이 좋지 않아 걱정을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 잘 대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들이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혁신 경영을 하기 때문입니다. 교토 강소 기업들은 벌써 의료, 드론 등 앞으로 발전이 예상되는 분야로 눈을 돌리고 역량을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벌써부터 기존 시장이 아닌 새로운 시장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습니다.”
―신사업에 진출하는 건 다른 대기업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방향이 같을 순 있겠지만, 일본 대기업들은 역량을 한곳으로 모으는 통합이 잘 안 됩니다. 통합이 잘 안 되니 흐름을 바꾸는 것도 힘듭니다. 하지만 교토 강소 기업들은 규모가 작고, 혁신에 대한 열망이 강하고, 민첩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전환을 훌륭하게 해냅니다. 모터로 유명한 일본전산도 원래는 PC 내 디스크드라이브 등의 모터를 주로 생산했지만, 아이팟 등의 제품이 인기를 끌자 스마트폰 부품 등 소형 정밀 부품으로 완벽하게 방향 전환을 해냈습니다. 최근에는 자동차 부품에 이어 드론 부품 쪽으로도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습니다. 이런 완벽한 전환은 많은 의사 결정을 단시간 내에 해낼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교세라는 빠른 의사 결정을 위해 회사 조직을 20명 이하로 운영하는 ‘아메바 경영’을 실시합니다.”
절실해서 민첩하다
언제 말할지 모른다는 위기감
PC부품 만들다가 드론 사업까지
미국서 영업하고 세계시장 뚫기도
'괴짜' 존중하는 실리콘밸리 닮아
―교토 기업들이 다른 지역과 비교되는 독특한 특징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절실함과 위기감 때문입니다. 일본 대기업들은 대부분 수직 계열화가 돼 있습니다. 소재 제조부터 제품 판매까지 대기업 집단 안에서 이뤄집니다. 이런 체제는 안정적일 수 있지만,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계열사 입장에서는 제품을 적당히만 만들어도 본사에서 사주기 때문에 혁신에 목마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교토 기업들은 안정적으로 자신들의 물건을 구매해줄 본사가 없습니다. 이들은 제품을 팔기 위해 미국에서 영업을 시작했고, 세계시장으로 범위를 확대했습니다. 배기가스 측정기를 만드는 호리바제작소의 첫 거래처는 미국 캘리포니아였습니다. 일본전산의 나가모리 시게노부(永守重信) 회장 역시 회사 창업 이듬해 단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영업해 3M 수주에 성공했습니다. 그 후 IBM과의 거래를 성사시키며 비약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교토 기업들은 일본보다도 해외에서의 지명도가 더 높습니다. 외국인 주식 비중도 다른 대기업에 비해 높습니다."
―해외에서 일본에 대한 이미지가 좋았기 때문 아닌가요.
“그들이 외국에 진출했던 시기는 생각보다 이릅니다. 교세라의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회장이 세라믹 콘덴서를 판매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던 시기는 1962년입니다. 무라타의 무라타 아키라(村田昭) 명예회장도 1957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3년 만에 일본 기업 최초로 모토로라, GE 등과 계약에 성공했습니다.
롬(Rohm)의 사토 겐이치로(佐藤硏一郞) 회장이 실리콘밸리에 반도체 개발 거점을 만든 시기는 1961년입니다. 일본 브랜드의 프리미엄을 누리긴 어려울 때지요. 이들이 거래처를 다변화하고 해외로 진출했던 건 언제 망할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었습니다. 주거래 은행들이 있는 도쿄 기업들과 달리 교토 기업들은 주거래 은행이라는 개념도 거의 없습니다. 일본전산은 금리가 조금만 높아져도 거래 은행을 바꿔버립니다. 그리고 이들은 현금 흐름과 정보 개방을 중시합니다. 교세라는 매일 수입과 지출을 계산해 직원 정보 시스템에 공개합니다.”
―교토·오사카 밸리와 실리콘밸리와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둘 다 글로벌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경영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교토 기업들은 다른 일본 기업보다 빨리 연공서열을 폐지하고 성과급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실리콘밸리의 ‘괴짜’ 문화처럼, 교토 기업들도 직원들의 개성과 독립성을 중시하고, 간섭을 덜 해 자유롭다는 점도 비슷합니다. 호리바의 경우 경영 방침이 ‘재미있고 엉뚱하게’인데, 호리바는 직원들이 프로젝트를 실패할 경우에 미국식으로 가점을 줍니다."
―친(親)기업 경제부흥 정책인 아베노믹스에 대한 평가가 궁금합니다.
“누가 아베노믹스를 친기업이라고 평가하던가요. 아베노믹스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세금 인상과 국채 대량 발행을 통한 재정 공급입니다. 국가 주도로 시장을 창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왜 기업 친화적이라고 받아들이지요? 물론 아베노믹스가 목표로 하고 있는 엔화 약세 상황은 일부 대기업의 요청으로 실행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베노믹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벤처 육성은 생각하고 있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아베노믹스는 대기업에 친화적이고, 기득권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책입니다. 물론 벤처 육성을 위한 보조금은 많이 지급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정부에서 이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건 벤처를 육성하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인플레이션을 만들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벤처뿐 아니라 여러 곳에 돈을 풀고 있을 뿐입니다. 교토 기업 같은 혁신적인 기업들이 일본 다른 곳에서도 많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보조금만으로는 안 됩니다. 기업들의 혁신을 막는 규제부터 풀고, 정부가 기업에 간섭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일본이 상대적으로 규제 완화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요. 현 정부의 규제 완화는 규제 완화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일본 대기업들은 사실상 관료가 기업을 지배하는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런 관료 시스템이 가지는 기득권을 일본 정부는 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부 정치인은 그런 관료 기득권 구조에 손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힘이 약하고, 관료 조직이 세기 때문에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규제 완화를 하려고 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관료가 기득권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한 규제 완화는 불가능합니다.”
―교토 기업들은 어떻게 규제를 뚫을 수 있었나요.
“기본적으로 도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중앙 정부로부터 간섭받는 일이 적었습니다.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 ‘도세’의 사이토 시게루 사장은 ‘내가 도쿄에서 창업했다면 주말마다 접대 골프를 하느라 시간을 날려버렸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일본의 중심이었다는 의식이 남아 있어 도쿄에 대한 반골 기질도 있습니다. 교토 경제권 자체가 작다 보니 해외를 상대로 영업을 해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측면도 있고요. 교토 기업들은 기득권과 싸우며 성장했습니다.
교토 기업 중 MK택시는 GPS 장치를 탑재해 휴대전화로 택시를 부르는 서비스를 일본 최초로 도입했지만, 사업 초기에는 나고야 등 일부 대도시에서 사업 신청 자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본 택시 업계의 반발 때문이었지요. MK택시는 이에 대항해 무료 택시를 운행하며 시장을 뚫었습니다. 교세라 역시 통신 산업에 진입할 때 초거대 기업인 NTT를 상대로 경쟁해야만 했습니다. 이나모리 회장은 ‘기득권이나 기존의 관념을 깨기 위해서는 혁명에 가까운 극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었지요. 일본 정부와 관료, 대기업에도 이런 정신이 필요합니다.”
전자산업 핵심 부품 콘덴서 시장 50% 장악한 '무라타 제작소'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삼성전자는 무라타의 주요 고객이지만, 삼성전기는 무라타의 최대 경쟁자다. 삼성이 고객이자 적(敵)인 셈이다.
삼성전기의 콘덴서 세계시장 점유율은 작년 1분기 26%를 정점으로 현재 22% 수준까지 떨어졌다. 반면 무라타의 점유율은 40%대 초반을 유지해오다 최근 들어 50%에 근접하고 있다. 물론 엔저 덕도 봤겠지만, 적장(敵將)인 한국 기업의 스피드 경영의 장점까지 흡수해 천하제패를 노리는 형국이다.
무라타가 얼마나 기민하게 움직이는 조직인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작년 5월 한 스마트폰 제조 대기업 임원이 거의 울상이 돼 무라타 본사를 찾았다. 자사가 곧 출시할 제품에 들어갈 부품을 무라타가 아닌 다른 업체에 맡겼는데, 그만 문제가 생겨버린 것. 출시 날짜가 임박하자 어쩔 수 없이 무라타에 대신 납품해줄 수 있는지 타진하러 온 것이었다. 과거 일본 부품기업 같으면, 예정에 없던 최신 부품을 그것도 대량으로 갑자기 납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무라타는 고객사가 찾아온 바로 그날 신속대응팀을 가동, 휴일까지 반납하며 공장을 완전 가동시켜 고객사가 원하는 날짜에 원하는 양을 납품하는 데 성공했다.
경쟁력의 원천은 고객과의 대화 능력
무라타는 시장 정보를 남보다 먼저 포착해 빨리 대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년 전 당시로선 존재감이 적었던 중국 스마트폰업체 샤오미의 납품선을 뚫었던 게 좋은 예다. 담당 본부장이 베이징으로 날아가 레이준 CEO를 만나 담판을 지었다. 현재 샤오미 스마트폰 1대에는 500개의 무라타 콘덴서가 들어간다. 샤오미의 올해 예상 판매 대수는 6000만대다.
무라타는 작년 1월 일본 전자업계를 뒤흔든 '아이폰 쇼크' 때에도 타격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매출이 늘어났다. 아이폰5가 판매 부진으로 감산(減産)에 들어가자, 부품 기업들이 위기를 맞았는데도 무라타는 삼성전자의 갤럭시폰 판매가 크게 는 덕에 아이폰5의 부진을 만회하고도 남는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다른 부품업체의 경우 아이폰 의존도가 너무 높아 타격이 컸다. 반면 무라타는 중국 스마트폰 업체들까지 고객으로 확보해 어느 한 시장에 종속될 우려가 적다는 강점이 있다.
인터뷰에서는 아주 완곡하게 얘기했지만, 무라타는 3~4년 전부터 시장 변화의 방향을 읽고 적극적으로 중국 고객 발굴에 나섰다. 무라타는 중국 스마트폰 업체를 위한 휴대폰 설계 외주 회사인 대만의 미디어텍과 10년 전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무라타는 미디어텍 같은 회사를 통해 앞으로 어떤 스마트폰 업체가 뜨고 질 건지를 미리 파악한다. 전 세계에 10만개에 이르는 거래 기업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도 귀중한 판단자료가 된다.
―무라타의 경쟁력의 원천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고객과의 대화 능력입니다. 고객이 요구할 때 시제품을 최대한 빨리 내놓을 수 있는 능력, 고객이 원하는 양을 안심하고 주문할 수 있는 생산 능력도 중요합니다. 예전에는 좋은 제품을 만들면 그것으로 됐다는 생각이 일본에 있었지만, 이제는 고객의 고민을 먼저 읽고 풀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박단소(輕薄短小)'란 말이 있는데, 세라믹콘덴서 분야에서 그걸 가장 잘하는 회사의 하나가 무라타일 것이다. 특히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것은 아주 작아야 한다. 대표 제품인 0.2㎜ 콘덴서의 경우, 한 개에 100억개 이상 세라믹 입자가 들어 있는데, 이 중 하나만 잘못돼도 회로가 끊어질 수 있다. 세라믹과 다른 재료를 겹겹이 쌓을 때 2~3㎚(10억분의 1미터)만 잘못돼도 다른 층이 형성돼 버린다.
―무라타는 미래를 내다보는 차세대 제품 개발도 잘하는 것 같습니다.
"매출에서 업그레이드 제품이나 신제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40% 정도입니다. 이를 위해 매출의 7% 정도를 R&D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3년 전부터 선행(先行) 연구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10년, 20년 앞의 기술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사업부는 지금 당장 손익을 보며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장기적 기술 개발엔 제대로 투자를 할 수 없으니까요."
내가 전부 다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무라타는 1950년대말부터 미국에 진출할 만큼 처음부터 글로벌 마인드가 아주 강했다. 또한 내부에 없는 기술은 M&A를 통해 외부에서 적극적으로 들여왔다. 최근 10년간에만 14개 기업을 인수했다. 현재 무라타의 사원 4만8000명 중 절반이 넘는 2만5000명이 해외에 있다.
무라타 사장은 "내가 전부 하려고 하지 말고, 바깥의 다양한 아이디어와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밖을 향하는 의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무라타도 한 때는 '지마에(自前)주의', 즉 뭐든 스스로 다 한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덧붙였다.
인수 기업 중엔 미세전자제어기술 업체인 핀란드 VTI도 포함된다. 무라타는 VTI의 기술에 무라타의 기술력을 합해 자동차의 자세 제어 센서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무라타 사장은 "보쉬(세계 최대 자동차 부품업체)에도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현대자동차에서도 사용한다"고 전했다.
"작년에는 수정 발진자 업체인 도쿄전파와 인덕터코일 업체인 도코를 인수했습니다. 우리가 안 가진 기술을 가진 회사를 매수해서 더 좋은 물건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장기입니다. 필요한 것은 외부에서 가져와 무라타 방식으로 수준을 높이는 것입니다."
무라타의 인수 기업 리스트를 보면, 무라타의 강점인 세라믹 기술로 대응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해 나간다는 방향성이 명확히 보인다. 뛰어난 재료·생산 기술에 통신·센서 기술을 접목해 스마트카, 웨어러블, IOT(사물인터넷) 등의 시장에 빠르게 대응해 나가겠다는 전략이다.
―매출에서 통신 분야 비중이 절반이나 됩니다. 스마트폰 성장률이 둔화하고 있는데 대책은 무엇입니까?
"스마트폰 성장률이 떨어진다 해도 매년 20% 이상씩 성장하고 있으니까 여전히 유망한 시장입니다. 빠른 변화에 맞춰 필요한 제품을 빨리 공급할 수 있다면, 급성장은 아니더라도 지속 성장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통신 쪽 비중이 너무 커지는 것은 위험합니다. 변화가 너무 심하니까요. 그래서 자동차, 환경·에너지, 헬스케어의 세 분야에 초점을 두고 씨를 뿌려가고 있습니다."
수십 년의 실패 사례 축적해 교육 자료로 사용
―실패 사례도 성공 사례 못지않게 중요시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서마다 실패 사례 연구회가 정기적으로 열립니다. 어떤 문제 때문에 실패했는지, 거기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지 공유하는 모임입니다. 일본말로는 '가코토라(과거의 트러블)'라고 하는데, 이런 사례를 수십 년간 축적해서 직원 교육용 자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실패 사례가 새 고객에게 대응할 때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창업 가문이 계속 경영을 맡아오고 있는데 오너 기업에 대한 비판은 없습니까?
"오너 기업의 기준이 무엇인가요? 물론 교토 기업 중에 전문경영인 체제가 많긴 합니다. 교세라의 현재 사장은 창업 가문이 아닙니다. 옴론과 롬도 그렇고요. 저는 물론 창업자의 아들이지만, 무라타는 상장기업이고 제 가족 지분은 2%가 안 됩니다. 오너 기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사장이 되셨나요?
"무라타의 주식은 금융기관이 36%, 외국 법인이 40%를 갖고 있습니다. 최대 주주는 JP모건체이스은행(9.6%)입니다. 전임 사장(형)이 추천했지만, 이사회와 주주총회에서 적임자라고 판단해 동의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경영을 잘못하면 언제든 경영권을 내놓을 각오가 돼 있습니다."
―4대 사장도 무라타 가문에서 나올까요?
"정해진 게 없습니다. 우선 제 자식은 무라타에 입사하지 않았습니다. 형의 아들이 무라타에서 일하고 있지만, 4대 사장이 창업자 가문이 될지 전문경영인이 될지는 모릅니다."
―기업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경영 이념을 잘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회사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세상에 어떤 가치를 줄 수 있는지를 모든 직원이 마음으로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걸 못하면 아무리 대단한 시스템과 자원을 갖췄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무라타의 사시(社是)에 다 나와 있습니다. '기술을 연마해 과학적 관리를 실천하고, 독자적인 제품을 공급해 문화 발전에 공헌하고, 신용 축적에 힘써 회사의 발전과 협력자의 공영을 꾀하고, 이것을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운영한다'입니다."
―큰 회사라면 전부 사시가 있고, 근사한 말들이 가득 써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 성공하지 못할까요? 그 멋진 내용이 담긴 사시를 직원들이 항상 의식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지침으로 받아들여지느냐의 문제입니다."
교토식 경영의 특징
업계 전체의 이익 우선… 특정 대기업과 독점거래 안해
스에마쓰 지히로 교토대 교수가 쓴 책 '교토식 경영'에 따르면, 교토 기업은 '일본식 경영의 신봉자라기보다 파괴자'이다. 교토식 기업은 부품업체가 많고 최종 제품을 거의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대중에게 잘 노출되지 않지만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스에마쓰 교수가 교토 기업의 가장 큰 특성으로 꼽는 것은 '네트워크 외부성(network externality)'이다. 아무리 큰 대기업 고객이라 해도 독점거래는 하지 않고 업계 전체 이익을 우선시 한다. 그 결과 전체 이익의 파이를 키우고, 그것이 내 이익을 증가시키는 상생(win-win)의 관계다. 무라타의 주력제품인 적층세라믹콘덴서, 호리바제작소의 엔진 배기가스 계측기, 일본전산의 하드디스크용 모터 등은 세계시장 점유율이 50% 혹은 그 이상이다. 이런 점유율은 특정 고객에게 묶이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스에마쓰 교수는 지금까지 일본 기업은 내부 관계에만 초점을 맞춰왔고 그것이 문제였다고 지적한다. M&A와 같은 사업과 인재의 교류가 잘 안되는 것도 네트워크 외부성을 부정한 결과라고 그는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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