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들불야학이라고 들어보셨는지?>
나는 1965년부터 1975년까지 서울 영등포 신대방동에 있는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돈 보스코 센터라는 곳에서 수도생활을 했다. 그때에는 시골에서 중학생 또래 아이들이 수도 없이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우리는 그 런 아이들을 모아 숙식을 함께 하면서 공장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나는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다. 살레시오 수도회를 세운 돈 보스코라는 분이 산업혁명이 시작할 때 이태리에서 그런 식으로 교육 사업을 했다. 내 바로 밑에 남동생도 대학생 친구들과 함께 광주 용봉야학을 했다. 오래 동안 아주 헌신적으로 열심히 했다.
오늘 저녁 6시 30분부터 9시까지 광주 예술의 거리에 있는 민들레 소극장에서 들불열사 박기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1978년 4월 박기순은 김영철, 최기억, 전복길, 등과 함께 노동야학을 준비하고 같은 해 7월에 광주 광천동 성당 교리실에 ‘들불야학’을 설립했다. 야학을 하는 동시에 노동을 하고 사는 학생들과 생활수준을 맞추었다. 그것이 노동야학이었다. 서로 배우고 마음이 통하고 한 몸이 되는 과정이었다. 노동자들과 함께사는세상을 그리던 그 강학들과 학생들이 5.18 광주민중항쟁 동안 투사회보를 제작하여 배포했다. 항쟁을 주도하는 양상이었다. 그 들불 7열사가 박관현, 윤상원, 신영일, 김영철, 박용준, 박기순, 박효선이다. 5.18을 전후해서 다 죽었다. 그때 들불야학 강학으로 함께 죽지 못한 빚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성찬성 소개로 내 매제가 된 임낙평으로서 박관현 평전과 윤상원 평전을 쓰고 평생을 사회운동에 몸 바치고 있다.
박기순은 1978년 12월 25일 새벽 노동자들이 사는 쪽방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떴다. 1982년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올린 윤상원, 1980년 12월 27일 광주 도청에서 총 맞아 죽은 윤상원은 박기순 시신 앞에서, 1978년 12월 27일 일기에 실려 있듯이, 이렇게 읊조렸다. “불꽃처럼 살다 간 누이야 / 왜 말없이 눈을 감고 있는가? / 두 볼에 흐르는 장밋빛 / 서럽디 서럽도록 아름답고 / 난 몰라라 무엇이 그대의 죽음을 말하는가를 / 아무리 쳐다봐도 너는 살아 있었다 / 죽을 수 없었다 / 흰 솜으로 콧구멍을 막고 / 흰 솜으로 그대의 열린 입술을 막았을 때 / 난 속으로 외쳤다 / 콧구멍과 입을 막으면 참말로 죽을 거라고 / 그대는 정말 죽었는가? /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두고 / 모든 사람은 섧게 운다 / 모닥불이 탄다 / 기순의 육신이 탄다 / 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 / 기순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되어 / 우리의 가슴 속에서 피어난다 ”
옛날 대학생들은 위장취업을 한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과 한 몸이 되려 했다. 그런 대학생들이 노동야학을 했다. 광주에서는 민중이 학살당하는 것을 본 들불야학 강학들과 노동자 학생들이 투사회보로 광주상황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그러다가 죽어갔다.
첫댓글 http://m.blog.daum.net/sionvoice/443313?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sionvoice%2F443313
5.18 당시 살아남은 분의 수기입니다. 이런 분들의 희생 덕에 그나마 우리가 전단지 돌리고 집회하면서 총맞을 걱정은 안하는 정도의 민주주의가 이뤄진 게 아닌가 합니다. 여기서 밀리면 또 총맞을까 걱정을 해야하는 세상이 될 지도 모르지요.
윤상원 열사와 박기순 열사의 영혼결혼식에서 처음으로 메아리쳤던 "임을 위한 행진곡"
두 분 열사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민주주의를 외쳐야 한다.
김영철 열사는 살아도 살 수 없어서 평생 미쳐서 살다가 가셨다.
앞서서 가신 분들이 계시니 따르는 산 자들은 누가 되어야 하는가?
네네~~!!이런사실도 사실은 우리는 잘 몰랐읍니다!! 결과만 알뿐이지요!!광주전남도청 지키러가면서 거기서 본 총자욱도 생각납니다!!이모든것이 제대로 보전돼고 왜곡되지말고 전해져야할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저 불의한자들의 처단이 필히 이루어져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