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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BCZVBxl3sM?si=o_idGdtx9n93_8SZ
Schumann: Carnaval 사육제 - Sokolov
슈만은 1810 년 6울8일 쯔비츠카우에서 태어났습니다. 이곳은 라이프찌히 남방 약 80Km 정도의 소도시로
탄광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제법 활기 있는 공업도시 이기도 했습니다.
슈만의 아버지 아구수트 슈만은 신교의 목사의 아들로 이곳에서 서점과 출판업 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상인이 아니였으므로 자신이 저술을 하거나 시를 번역하는 등 문학에도 비교적
깊은 관심과 조예를 갖었던 성질한 지식인이였습니다.
슈만의 어머니는 결혼전에는 요한나 크리스티네 슈니아벨이라고하여, 그의 아버지가 살고있던 집의 주인으로서,
시청의 공의로 있던 사람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남편보다 두 살이 손위였으며 감상적이며 환상적이고
또 몽상적인 성격의 여인이였습니다. 슈만은 이러한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각각 이질적인 여러 성격을 물러
받았던 것입니다.
슈만은 원래 6남매였으나 자라기는 5 남매로 자랐스며, 그중 슈만이 막내였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형제 사이는 꽤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정은 그저 즁류 정도의 살림이어서 형제들은 경제적인 빈곤을 모르면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 그 자체가 음악적인 분위기를 가지 고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슈만의 경우 교육은 그의 집에 하숙하고 있던 가정교사에 의해서 시작되어 6세 때에 사립학교로 들어갔으며,
4년 뒤에 다시 사립학교로 가면서 18 세때까지 여기 재학했습니다.
음악교육으로서는 그가 다니던 사립학교의 교사로,쯔비카우리의 마리아교회의 오르간 주자로 일하면서
이 도시의 아마츄어 애호가들에 의해 조직된 관현악단과 합창단의 지휘도 맡고 있는, 말하자면 이 도시의
음악생활의 중심적 인물이라고도 할수있는 요란 고트리프트 쿤츠에게서 일곱 살 때부터 피아노 렛슨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로부터 1 년이 모쳐 못되어 벌써 몇 곡의 작은 무곡 등을 작곡하여 그 풍부한 악재의 싹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 자신이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못햇던것을 후회하고 있었을 정도였기 때문에 그의 아들이
음악에서 재능을 발휘하 는 것을 자랑스러게 알았으며, 따라서 슈만의 음악열에 이해있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아들에게 우수한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려주어서 그 반응을 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카알스바아트에서 때마침 있었던 모셰레스의 피아노 연주회에 9 살 되는 그의 아버들 슈만은 동반했습니다.
슈만은 이 연주에서 이루 말할수 없는 감동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이때의 프로그램을 평생 보관했으며,
또 이때 받은 감동의 결과로 더 한층 피아노에 열중했습 니다. 그가 하이든,모짜르트, 베토벤 등 대작곡가의
서곡이나 교향곡을 피아노 연탄용으로 편곡하여 친구들과 함께 그 연주를 즐긴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이어서 그는 관현악 편곡에도 손을 때게 되었고, 친구들을 뫃아 자그마한 관현악을 만들어 자신이 피아노를
담당해서 그러한 것을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것이 토대가 되어 후일 관현악을 사용한 작품들도
작곡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들의 성장을 눈여겨 보던 그의 아버지는 15세의 슈만은 베버(Weber) 에게 의탁하려 생각하고 그
에게 부탁의 편지를 습니다. 그러나 이 무렵 가극 "오베론"의 작곡에 열중하고 있던 베버는 이 편지를 묵살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슈만의 음악선생 쿤츠는 이미 슈만을 가르치는 데에 자기의 역부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런일 사이에서 1826년 8월, 그를 가장 이해해 주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며, 또 그전 해에는
그의 누이 에밀리에가 자살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육친과의 사별과 가정환경의 변화는 슈만의 성격에도 많은 변화를 주게 되었습니다.
슈만은 그 이전부터 아버지의 취미를 따라 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고금의 문학서를 탐독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시나 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만 이 시대에 이르러서 특히 영국의 시인 바일런과 독일의 낭만주의 작가
장 파울에 깊이 사숙하게 되었습니다.
어떻든 그는 이러한 것의 영향을 받았던지 내성적이고 몽환적인 경향을 보여갔으며 때로는 병적인 흥분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리이디라든가 난니라는 이름없는 소녀에게 덧없는 모정을 느끼고 기사도적인 환상을 가졌던 것도
이무렵이었습니다. 또 그가 상펜이나 씨이거에 집착하기시작한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였습니다.
이러한 불안정한 정신생활 가운데도 몇 사람의 친한 친구를 그대로 유지할수 있었던 그는 그들과 함께
음악론이나 문학논을 나누면서 시간을 보냇습니다.
특히 공장장을 주인으로 하는 카알스가(家) 의 사람들과의 교제는 그의 음악적 식견을 깊이해주는것이었는데
그가 하이든이나 모짜르트, 베토벤의 현악 4 중주곡을 배운거나 슈베르트의 가곡들을 들은것은 모두 이집
사람들에 의해서였습니다.
한편 슈만의 이러한 경향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강하게 반대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음악가의 생활이 안정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유로 반대했던 것인데 슈만읜 어머니의 이러한 의사에
순종하여 18세 때에 라이프찌히로 가서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당시가 슈만의 청춘의 위기라고도 말할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대학에서 그는 철학이나 역사를 즐겨 청강했습니다만 법률에는 흥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친구들과 사귀면서도 피아노에서 위안을 구하고, 또 여행에서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구하고 하여,
자연미가 빈곤한 라이프찌히의 대도희적인 분위기에는 친숙하지 못해 향수병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슈만은 이러한 여행 가운데서 후에 그의 아내가 된 클라라와 같은 이름인 한 매력적인 아가씨에게 끌렸던것도
흥미있습니다. 이때 여행을 같이 다니던 친구에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학생 로오젠이 있었습니다.
그는 라이프찌히에서 정신적인 고독을 탄하고 있던 슈만에게 하이델베르그로 옮기도록 권했습니다.
비록 이와같은 라이프찌히에서의 생활이었습니다만 슈만은 작곡에 관해서는 열심히 공부햇으며,
또 피아노 방면에서도 뛰어난 피아노 교육가였던 프리이드리히 비이크를 알게 되어서 정식으로 렛슨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슈만은 비이크의 철저한 지도로 자기류의 파아노 주법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게되었습니다.
피아노에관해서 천재적이었던 음악소녀 클라라 비이크를 알게된것이 이때였습니다.
어떻든 라이프찌히에서 1 년 남짓을 있었을 뿐으로 그는 훨씬 안정되고 조용한 분위기의 하이델베르그로 옮기고
말았습니다. 당시 하이델베르그의 음악적인 환경은 물론 라이프찌히에 비해서 수준이 낮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의 법률 교수가 음악을 즐겼기 때문에 그 써클에서 음악적인 분위기는 충분히 즐길 수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슈만의 피아노 연주는 곧 하이델베르그에서 소문날 정도로 수준이 높은것이여서 자주 연주 요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그의 교제도 넓어져서 그는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여러곳을 여행하여 그때문에 생기는 비용의
부담을 자주 어머니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작품으로서는 "나비작품2" 가운데의 5 곡 정도가 이 시대에 작곡이
시작되고 있으며 "아베그 변주곡 작품1" 도 완성되었습니다.
이 변주곡은 만하임에 여행했을때 그곳 고관의 딸인 메타 아베그양에 열이 올라서, 아베그의 스펠(綴子)를
음명으로 받아들여 주제를 쓰고 여기에 무도회의 인상을 담아 넣은 변주를 이은 것입니다.
1830 년 4 에는 두 사람의 친구와 함께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대 바이얼리니스트 파가니니의 연주를 들었습니다. 그
리고 이것이 또 슈만의 마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슈만은 어떻게 해서든 파가니니와 같은 대 연주자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7 월 말에 이러한 뜻을 그의 어머니에게
호소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라이프찌히의 비이크 선생에게로 돌아가 본격적인 공부를 하고 싶은데 장래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비이크 선생과 상의해 달라는 것이었씁니다.
뜻밖의 편지에 어머니는 놀라기는 했으나 곧 아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비이크에게 이 뜻을 전했습니다.
이 의논을 받는 비이크는 여러가지 조건을 붙여서 슈만은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래서 10월에 슈만은 다시 라이프찌히로 돌아가서 비이크의 집에서 하수하면서 피아노를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연주기교에 혈안이 되었던 슈만은 전심전력을 다해 공부에 열중했으며 또 비이크도 정성껏 가르쳐 주었으므로
슈만의 진보는 눈부셨습니다. 그러나 12월에 들어서면서 비이크가 지방도시의 선생이라는 데에 불만을 느낀 슈만은
대도시인 빈으로 나가 대피아니스트인 훈메르에게 사사하고 싶다는 희망을 갖게되어 한때는 그의 친구나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밑을 떠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비이크는 그의 딸 클라라를 데리고 6 개월 예정의
연주여행을 떠났습니다.
슈만은 선생님이 없는 사이에 혼자서 기계를 고안아여 지력을 훈련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손가락을
상하게 하여 오른쪽손의 검지를 피아니스트로서는 소용이 없는 것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슈만은 찜질을 비롯한 온갖 요법을 시도해 보았습니다만 결국 회복하지 못해 한때는 왼쪽 손의 손가락만을 필요하는 첼로로 전향하거나
신학으로 방향을 바꾸려고 생각했씁니다. 그러나 결국은 음악에 대한 강한 정열로 말미암아 이제까지보다도 더욱 작곡에 열중하게 되었고, 술과 담배도 절제하여 가능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창작에 전력을 집중했습니다.
슈만은 이 이전에도 라이프찌히의 왕립 가극장의 지휘자인 하인리히 도른을 따라서 화성을 비롯한 음악이론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도론은 여섯 살 아래인 슈만과 바로 가까와졌습니다만 음악제자로서의 슈만은 꽤 골치아픈 존재였던가 봅니다. 한 1년 반 렛슨을 받은 뒤 그는 1832년 4 월부터 독학으로 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 다.
1832 년 가을에서 다음해 봄까지 슈만은 쯔비츠카우에서 지냈습니다. 이해 11월에 클라라가 비이크와 함께 이곳에와서 연주회를 가졌으며 이 기회에 슈만의 교향곡 G 단조의 1부분이 이 지방의 오케스트라에 의해서 초연되었습니다만
이 작품은 관현악의 취급이 미숙했을 뿐 아니라 구성적으로도 습작적인 것이어서 거의 화제에 오르는 일없이 끝나고
말았습니다만 이 교향곡은 1833 년 6 월에 라이프찌히에서한번 연주됐을뿐 다시 햇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 슈만이 발표한 피아노곡으로 그의 이름은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평론에 있어서도
1832년 라이프찌히의 음악신문에 지고했던 "여러분! 모자를 벗으시오. 천재입니다" 라는 명론문으로쇼팽을
소개하여 점차 기반을 굳혀 갔습니다
.
1833 년 라이프찌히에 돌아온 슈만은 이제까지의 신문이나 잡지의 평론의 경향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의논해서 음악잡지발행에 나섰습니다. 많은 곤란이 있었지만 이 잡지의 제1호는 1834 년 4 월에 "라이프찌히 신음악시보" 라는 이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곧 잡지의 편집권이 슈만에게 넘어오게 되어 슈만은 다비드 동맹이라는 가상 단체를 만들어, 독일 음악의 전통을
지키고 낭만주의의 옹호를 위해 이 잡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다비드 동맹은 이교도를 토벌하는
성서의 고사에서 착상된 것이었습니다. 어떻든 이 잡지에는 슈만 자신을 비롯해서 비이크와 클라라 부녀 멘델스존
등을 맹원으로 포함하여 출발했으며 호를 거듭하면서 유럽 각지에서도 기고가 있게 되었으며, 바그너도 자주
엣세이를 보내오곤 했습니다. 비록 슈만의 직접 집필에 의한 비평이 지나치게 극단적이라 하여 반론을 받기는 했어도
이 잡지가 음악비평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에 큰 공적이 있었던 것은 부정할수 없습니다.
이무렵, 슈만은 클라라와 극히 친밀한 교제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클라라에게는 뛰어난 음악성 외에도 따뜻한
인간미가 풍부해서 이러한것이 슈만을 끌었던 것입니다.
1883년 가을, 형수인 로자리에와 형인 유리우스가 잇다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슈우만에 심한 충격을 주었고
그 결과 그는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슈우만은 가을에서 겨울에 걸친 한동안의 긴긴 밤을 고독에서 오는 공포감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뒤에 슈우만의
생명을 빼앗게 되는 정신착란의 발단은 이 무렵보터 보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때의 신경쇠약 증세는 젊은 피아니스트인 루드비히 슝케, 카알 피크트, 그리고 피크트의 처로서 꽤
수준높은 파아니스트이기도 했던 헨리에테 등 과의 가까운 교제로 그 이듬해 봄까지는 거의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
이럴무렵, 슈우만은 에르네스티네 폰프리켄 이라는 한남작의 딸과 사랑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음악애호가로서 앗슈지방에 쌀고 있었으나 음악교육을 위해 그 딸을 비이크의 집에 하숙시키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딸 크라라가 슈우만과 가까워지는 것을 못마땅히 여긴 비이크가 이론공부를 구실로, 크라라를 드레스덴에
보냄으로써 슈우만과의 사이를 격리했을 때였습니다 .
당연하게, 크라라에게 쏠리던 슈우만의 열정은 당년 18세의, 천진난만하고 음악적 재능이 있으며, 또 가문도 좋은
소녀 에르네스티네에게 쏠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두 사람 사이는 뜨거워져, 7월에 이르자 슈우만은 그의 어머니에게 대한 편지에서 "요컨데 아내로
맞아도 좋을 사람"으로서 에르네스티네를 추천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이럴 무렵의 7월25일, 크라라가 집으로 다니러와서 이 두사람 사이의 관계를 알게 되고, 그래서 이 미묘한
삼각관계는 자그마한 분쟁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러한 일들은 에르네스비네의 아버지인 남작의 귀에 까지
들어가게 되어서 9월에는 에르네스티네가 아버지에게 끌려 앗슈의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슈우만은 그 뒤로도 두어차례 앗슈를 방문하여 그녀를 만났습니다만 그때 그녀가 남작의 적출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심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주고받는 편지에서 나타나는 교양의 정도도 높은 것이 못되었습니다. 특히 편지에 나타나는 문법적인
오류나 철자의 오용은 문학적 소양이 깊은 슈우만으로서는 환멸을 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점차 열이 식기 시작한 슈우만은 그 이듬해부터 의식적으로 크라라를 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같은 사건들의 음악적인 선물로서 "사육제작품9"와 "교향연습곡 작품13"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1835년 가늘, 26세의 멘델스조온이 게반트 하우스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로서 라이프찌히로 왔습니다.
슈우만은 이 명성만으로 알고 있던 멘델스조온과 비이크의 집에서 처음 만나 그 인품과 음악적 재능에 완전히
매혹되고 말았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멘델스조온을 통해서 그와 공연하는 연주가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으며,
또 라이프찌히를 방문하는 많은 음악가와도 가까와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쇼팽이나 모세레스와 직접 교제하게 된 것도 이러한 기회를 통해서였으며, 또 영국의 소프라노가수 크라라
노벨로와 면식을 갖게 된 것도 이러한 기회를 통해서였습니다. 노벨로는 1837년에 멘델스조온의 초빙으로
라이프찌히에 왔었으며, 슈우만은 그의 노래가 뛰어난 것이라는 점에서 뿐 아니라 그의 이름이 크라라라는 데에
더욱 끌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이 그녀를 애칭으로 부른 표제의 피아노곡집"노블레덴작품21"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크라라 비이크는 1835년 11월 9일에 멘델스조온의 지휘로 게반트우스에서 데뷔했습니다. 이 연주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슈우만은 이것을 마지 자기에게 돌아오는 영광과도 같이 반겼습니다.
크라라는 여기에 뒤이어 곧 연주여행에 떠나게 되었습니다 만 바로 그 출발의 전야 슈우만과 최초의 키스를 나루게
되었습니다. 후일 크라라의 회고에 의하면 "기절하는 것이나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고 합니다.
12월에는 크라라가 쯔비츠카우에서 연주회를 개최한다고 해서 슈우만도 자기의 고향을 오래간만에 찾았으며 여기서
크라라와 두번째의 키스를 교환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듬해 1월에는 크라라가 휴가로 드레스덴에 있었기 때문에 슈우만도 그곳을 찾았으며, 마침 비이크가 그곳에
없었기 때문에 젊은 두 사람은 거리낌없이 사랑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해 1836년 이른봄인 2월 4일에는 슈우만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며, 슬픔에 잠긴 슈우만은 오히려 더욱
크라라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크라라의 아버지 비이크는 두 사람의 결혼에 동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며,
그러한 징조가 구체적으로 나타났을 때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하려고 하였습니다.
비이크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비록 슈우만이 작곡도 하고 비평도 한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 장래에도 걸어볼 만한 기대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주된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그 자신이 이룰 수 없었던 음악적 야심을 그의 딸을 통해서 이룰 수 있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항 아래서 슈우만의 정신상태가 안정을 얻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창작면에서는 도리어
더한층의 의욕을 보였고, 또 훌륭한 작품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가운데에는 물론 크라라게 대한 모정을
내용으로 하는 것도 적지 않습 니다. 이 무렵 슈우만은 다시 연주가나 작곡가와의 교우범위를 넓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슈우만과 크라라와의 상면은 아버지 비이크의 방해로 완전히 금지되었으며, 편지까지도 주고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격리는 1837년 여름에 이르러, 친절한 음악애호가로서 광산기사인 동정자의 중개로 겨우
편지만은 주고 받을 수 있는 루우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해 연말에서 이듬해에 걸쳐 크라라가 장기의
연주여행을 떠나게 되어 두 사람은 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연주여행중 크라라는 비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한편 세월이 흐르면서 비이크도 점차 결혼에 대한 심한 반대 의사가 누그러졌던 모양입이다. 그는 젊은 두사람이
라이프찌히에서 멘델스조온 등과 같은 호화스런 생활을 하려 든다면 그 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지,
라이프찌히에서만은 결혼시키지 않겠다는 조건을 낼 정도로 후퇴했습니다.
당시 크라라는 비인에서 꽤 알려진 여류 피아니스트로서 행세할 수 있었으며 또 슈우만 자신도 원고료나 작곡에
의해서 수입을 얻을 수 있다면 생활을 지탱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한 슈우만은 자기의 잡지도
비인으로 가지고 나가 좀 더 넓은 무대에서 활동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838년 10월 슈우만은 이러한 계획 아래 비인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비인은 심한 보수정치 체제아래 있어서, 당국자는 각지의 자유주의 운동이나 혁명의 파급을 두려워 하여 언론이나 출판의 자유를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이
이듬해 4월 슈우만은 다시 라이프찌히로 돌아돌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잡지 출판에 관한 노력은 이렇게 해서 수포로 돌아갔습니다만 그는 이때의 비인 체제에서 음악적으로는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묘를 찾아 평소에 그가 존경하던 선배의 생애를 회상했으며,
슈오베르트의 형을 찾아서는 유고 가운데에서 C장조의 교향곡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뒤에 멘델스조온과
상의하여 이 교향곡의 초연을 위해 노력했으며, "천국적인 길이"라는 명구를 곁들인 엣세이로 이곡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라기프찌히로 돌아돈 뒤에도 슈우만은 크라라와의 결혼에 관해 비이크와 교섭을 거듭했습니다만 비이크부터는
난제에 거듭되는 난제가 제시될 뿐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수 없었습니다. 결국 클라라와 의논한 그는
비이크의 승락없이도 결혼할 수 있는 허가를 법정에 신청하기로 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클라라의 아버지 비이크의 방해는 있었습니다만, 끝내 법정의 허가를 얻어, 클라라의 21회 생일의
전날인 1840년 9월 12일에 겨우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슈만은 1839년 까지 주로 피아노곡만을 발표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결혼이 임박한 1840년에 들어서자 속속
가곡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슈만 자신조차가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가곡에 대한 창작의 영감은 끊일 줄 모르고
샘솟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결혼후에도 잠시 계속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해는 슈만에게 있어서 "가곡의 해" 라고 불리우는 해가 되었습니다. 이 한해에 작곡된 가곡의 수는
슈만이 그의 생애에 작곡한 전 가곡수의 반 이상이나 되는 것이였습니다. 이것은 클라라에 대한 애정이라든가
결혼에의 불안, 또는 동경 같은 것이 그의 경우 이미 피아노곡으로는 소화 할 수없는것이 되었다는 것을 말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는 가곡에 있어서도 이제까지의 피아노곡의 작곡경험을 충분히 살린 피아노 반주를 주고 있습니다.
어쨋든 오랜 소망 끝에 이루어진 결혼생활은 행복한 출발을 했습니다. 클라라는 슈만의 작곡을 위해서는 자신의
피아노 연습을 삼갈 정도로 조심스러웠습니다. 이 신혼부부는 바하의 "평균율 피아노곡집"을 협동으로 연구하고
그것이 끝나가자 빈 고전파의 현악 4 중주 곡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슈만의 창작도 마음의 안정감을 찾았기 때문인지 규모가 큰 것을 찾기 시작하여 1841 년은 "교향곡의 해" 1842
년은 "실내악곡의 해" 라고 불리울 정도로 이제까지 본격적으로 손대지 않았던 분야게 손을 뻗쳐갔습니다.
가정적으로는 1841년 9 월에 큰딸 마리에를 낳은것을 필두로 하여 43년 4월달에 둘째달 엘리제,
45년 3월에는 세째딸 유리에를 낳았으며 그 뒤로도 아이 다섯을 두었습니다. 당연히 연주가인 클라라는 주부와
어머니라는 일의 부담에 시달려야 했으나 그녀의 지적인 처리로 그럭저럭 꾸러나갈수는 있었습니다.
한편 슈만은 클라라와 함께 연주여행을 할 때 , 너무 클라라만이 환열을 받는 것에 화가 나서 여행의 계속을
거부한다는 경우도 생겼으며, 또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슈만이 짊어져야 하는 경제적인 부담도 점점 무거워져가는 등 어려운 일이 겹쳤습니다. 더구나 애써 완성한 대작 뒤에는 심한 피로가 오기 일쑤였으며, 그 대작이 예상했던 수입과 평가를 가져오지 못했을 때에는 신경이 적지 않은 충격을 주는 것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점차 신경쇠약에 빠져갔으며, 1842년에서 그 이듬해에 걸쳐서는 거의 창작 활동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해서 슈만은 더한층 내성적이고 내면적인 사람이 되어갔으며,
외부와의 신선한 접촉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이럴 무렵의 4 월 멘델스존이 설립하여 그 자신이 원장으로 취임한 라이프찌히 음악원에서 작곡 등의 교수로 슈만을
초빙했습니다. 비록 영예로운 자리기는 하나, 성격적으로도 신경적으로도 많이 약해져 있던 슈만에게는 극히 고된
일이였으며, 그래서 그의 신경은 더욱 피곤해졌습니다.
1843년 1월에는 베를리오즈가 라이프찌히를 방문하여 슈만은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해에 들어서서 더육
슈만 부처를 즐겁게 한 것은 비이크로 부터 화해의 제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제의는 클라라의 해산이 입박한 데에다 슈만이 아직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기되었습니다.
이러는 사이 2월로 들어서면서 슈만은 서서히 창작력을 되찾기 시작했으며, 오라토리오 풍의 대작" 낙원과 리베" 를
완성하여 12월초에는 그 초연을 치룰 수 있게까지 되었습니다. 이 초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비이크가 당시 살고
있던 드레스덴에서도 연주되어 호평을 받았습니다. 결국 이러한 것들이 계기가 되어 이해 크리스마스날 슈만 부처와
비이크는 7년만에 드레스덴에서 화해의 대면을 하고 즐거운 하루밤을 지냈습니다.
슈만은 결혼 전부터 클라라에게 러시아 여행을 약속했었습니다. 그는 이 무렵 경제적으로 생활도 어려워 졌기 때문에
수입도 얻을 겸 하여 오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부부 동반으로 연주여행에 나섰습니다.
1844년 1월 25 일 라이프찌히를 출발하여 5월말에 돌아왔으니 여행은 4개월이 걸린셈이며, 이 동안 형 카알 부처가
집과 아이들을 돌봐 주었습니다.
이 연주여행에서는 이르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으며, 특히 페테르부르그에서는 황제 부처의 초대도 받았습니다만
교통기관의 불편으로 신체적으로는 많은 피곤을 치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행은 슈만의 심기를 일전시키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짬짬히 괴테의 "파우스트"의 음악화를 구상하는 등 음악상으로는 상당히 충실한 면을 보였습니다.
이 여행에서 돌아온 뒤 그는 작곡에 전념할 생각으로 잡지 주필의 자리도 남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해 여름부터 병세는 악화하기 시작한듯, 슈우만은 이상하게 죽음을 두려워 하거나, 높은 언덕이나
고층건물에 대해서 이상한 공포감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전지요양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 이들은
1844년 12월에 라이프찌히 음악원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드레스덴으로 옮겨 살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드레스덴은 궁정도시로 안정된 곳이기는 했습니다만 음악적으로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오직 페르디난드 힐라만이 그들 부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으며 또 드레스덴 악계에 새 바람을
불러들이기 위해 협력해 주었습니다.
이 무렵 이곳 궁정극장의 악장으로는 바그너가 부임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기질이 서로 달랐을뿐 아니라 음악상으로도 또 서로 길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와 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멘델스존에 대한 슈우만의 감정은 무척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더욱 칠밀한 편지왕래를 거듭했으며. 슈우만은 멘델스존의 재능과 작품을 극히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또 슈만은 아내 크라라와 함께 다시 바하 연구를 열심히 시작하게 되고 그 성과를 나타내는 듯한 작품을 만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역시 여의치 않았던지, 이 무렵의 편지에서는 그자신이 병에 관해 간절한 호소를 쓰고 있습니다. 어떻든 그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1846년에 들어서자 그의 창작력은 현저하게 저하했습니다.
이해에는 전년에 스케치한 "제 2교향곡 c장조" 외에 불과 몇개의 성악곡이 만 들어졌을 뿐입니다.
어린이로는 세째딸 유리에에 이어서 장남 에미일이 이해 2월에 출생했으며, 1848년 1월에는 차남 루드비히가 출생했습니다. 크라라는 가계를 돕기위해 흔히 무리한 연주여행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1846년 가을에서 이듬해에 걸쳐서 부부는 또다시 연주여행을 가졌습니다만 11월에 비인에서 있었던 이틀밤에 걸친
연주회에서는 심각한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 습니다. 그것은 이때의 프로그램이 당시의 비인 청중의 수준으로
봐서는 지나치게 높은 것이어서 청중의 흥미를 끌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인에 이은 프라하의 연주에서는 더 바랄 수 없을 정도의 성공을 거두어, 비인에서의 쓰라린 체험을 잊을 수가 있었으며, 이러한 기분의 전환과 자극이 도움이 되었던지 그 이듬해인 1847년에는 충실한 창작을 위해 노력을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한편 그의 생지인 쯔비츠카우에서 7월에 개최된 슈우만의 영예를 위한 음악제는 몹씨도 그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장마 끝에 햇빛을 보듯 오래간만에 즐거웠던 슈우만의 기분은 11월 4일의 멘델스존의
갑작스런 죽음에 의해서 다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더구나 같은 해에 그의 장남도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슈우만의 상심은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마침 이럴 즈음 슈우만에게 남성합창단 리다타아펠의 지휘가 위촉되었는데 이것은 힐라의 후임으로서였습니다.
그는 이 새 일에 대한 보람으로 해서 가까스로 침울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이듬해에 이 단체를 혼성합창단으로 훈련하고 그지휘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그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여성합창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는 여기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나 8월에 리다타아 펠을 사임하면서
이러한 관심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어떻던 이러한 일의 결과로 그의 작품중에서 합창곡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 이 무렵은 프랑스의 2월혁명에 자극되어 독일, 오스트리아에서도 혁신운동이 일어나고 드레스덴에서도 그러한
운동은 급진적으로 번져갑습니다. 이때 바그너가 여기 가담하여 추방된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만.
슈우만 자신도 비록 자유주의적인 입장에 있기는 했으나 약한 신경으도 현실을 감당할 수 없어 1849년 폭동이
끝날 때까지 시외의 자그마한 촌으로 피난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창작에는 열중하여 혁명적인 곡이나
행진곡을 작곡했습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1849년 8월의 괴테의 탄생기념제에 맞을 수 있도록 그동안 숙제로
묵어있던 "파우스트"의 음악화에 열중했으며, 피아노곡 "숲의 정경"도 완성됐습니다.
또 그는 합창단의 지휘경험으로 해서 자신을 얻었던지, 게반트하우스의 지휘자라든가 드레스덴 가극장의 제2악장
자리 등을 얻기 위해 노력도 했습니다.
때마침 힐라가 지휘자로 있던 뒷셀도르프의 관현악단으로부터 할라의 킐른 전임을 계기로 후임을 물색하게되어
슈우만에게 교섭이 왔습니다. 크라라는 보수적인 드레스덴의 공기에는 이미 질력이 나있었기 때문에 두말없이
이것을 수락하도록 슈우만에게 강권했습니다.이렇게 해서 슈우만의 가족은 1850년 9월 1일 뒤셀도르프에 도착
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동안 이 도시에서 벌어진 환영은 슈우만 부처가 이들의 생 애에 일찌기 보지못한 성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슈우만은 관현악단과 합창단의 지휘를 담당하여 만족한 생활을 보내는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1851년 3월에 한 씨이즌 전부를 슈우만 단독의 지휘로 운영한다는 데에 대한 비평이 지방신문에 실리고, 또 합창단과의 사이에
자그마한 분쟁이 생기고 하자, 슈우만의 염인적인 기분이 다시 나타나고 따라서 성과도 점차 침체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슈우만 자신도 그의 지휘가 그렇게 우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또 자신이 그 음 악에
몰두해 버려 지휘를 등한히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자연히 악단원의 경원을 받기에 이르었습니다.
이러는 사이 1852년 여름에는 다시 정신장애가 재발하여 그는 어쩔 수 없이 요양을 떠났습니다. 이 무렵부터
그의 작품에 종교적인 색체가 뚜렷해지는 것은 이후의 그의 정신세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주목할 만합니다.
1853년 가을에는 병도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고 해서 오래간만에 지휘대에 서 봤습니다만 이미 그에게 환영이나
동정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위원회로 부터 사퇴권고까지 받았습니다만 이때만은
그런대로 사태가 무마되었습니다.
그러나 1853년 12월에지휘대에 섰을 때에는 지휘대에서 망연자실하여 지휘를 잊어버리는 경우까지 생겨서
위원회로부터 자작 이외의 지휘를 금하는 뜻의 통고가 있게되자 어쩔 수 없이 뒷셀도르프에서의 지휘활동에도
종지부를 찍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나쁜 일만이 겹친 것은 이닙니다. 봄 씨즌의 음악제에서 젊은 바이얼린의 대가
요제프 요아함과 알게 되어, 그를 위해서 바이얼린 협주곡의 작곡을 맡았으며, 9월 말에는 청년 브라암스의 방문을 받아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특히 브라암스의 작품에는 심취하여 리이프찌히 악보의 출판상을 소개하 는 한편,
오래간만에 "새로운 길"이라는 제하의 평론으로 브라암스의 재능을 칭찬하는 글을 써서 신음악시보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슈우만 부처는 뒤셀도르프에서의 불쾌한 기억을 씻으려 들었던지 또는 가계 때문이었던지 어떻든 이해에
이곳을 벗어나서 연주여행에 나섰습니다. 이 연주여행에서 크라라가 연주한 슈우만의 작품은 특히 홀랜드 지방에서
큰 호평을 받았으며, 뒤이어 요아힘이나 브라암스와도 함께 즐거운 여행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2월에 뒤셀도르프에 되돌아왔습니다만 이 무렵부터 점차 슈우만의 정신은 이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달 10일에는 환각을 호소하기 시작하고, 17일에는 "천사가 보내준 주제를 적겠다."면서 한밤중에 갑자기 뛰어 일어나기도 하고 했습 니다.
26일에는 자신이 못견디도록 이상했던지 자진하여 요양소로 가겠다고 나서기도 했습니다만 그 이튿날인 27일에는
다소 안정을 찾았던지 "천사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쓰다가는 가족들의 눈을 피해 비오는 거리로 나서 라인강에 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그는 구조되어 집으로 실려 오기는 했습니다만 3월 4일에는 본 근처의 엔데니히 정신병원에 수용해야했습니다. 그는 그 이후 그의 아내나 아이과의 면회도 허용되지 않은 채 우울한 병원생활을 했습니다.
한편 크라라는 침울한 마음을 달래면서 생활을 위해 연주활동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고뇌의 시기에
유일한 마음의 의지가 됐던 사람이 브라암스였으며 이러한 의지와 동정 사이에서 크라라와 브라암스 사이에는
우정 이상의, 애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싹트게되었습니다.
슈만은 날에 따라서는 가족이라 친구들에게 꽤 조리가 있는 편지를 쓰기도 하고, 또 가분이 좋을 때에는 피아노를 향해 작곡하기도 했습니다만 점차 쇄약해갔습니다. 그리하여 1855년 9월에는 병원측으로부터 도저히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는 절망의 통고가 있었으며. 이듬해 7월27일에는 곧 만나러 오라는 통지가 있어 크라라는 브라암스와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슈우만은 이 두사람의 임종을 받아가면서 29일 오후 4시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장의는 7월 31일 본에서 생전에 가까왔던 사람들만이 모여서 행해졌습니다. 크라라는 장례 뒤의 일기에 "그의 출발과 함께 나의 모든 행복은 가버렸다. 이제 나를 위해 새 생활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는 글을 남겨 그를 보내고 있습니다.
글쓴이: 베토벨라
https://youtu.be/9JyeWA1ZD8g?si=_npwJ5uvLYkv_o0d
ATOS Trio: Clara Schumann - Trio in g-minor, op.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