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易) 이론에 항상 등장하는 것이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입니다.
하도낙서와 관련해서 우리가 바르게 알아야 할 사항은 아래와 같습니다.
1. 고대(古代)의 하도와 낙서가 진정 어떤 모양으로 생긴 것이었는지 그 참모습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2. 오늘날 우리가 보는 하도와 낙서는 후대(後代)에 와서 상상에 의해 창안(創案)된 것이다.
3. 통상적으로 하도와 낙서를 역의 근원(根源)으로 여기며 주역(周易)과 결부시켜 논하기도 하나, 주역과 전혀 관련 없다는 설도 있다. 하도 낙서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4. 하도와 낙서를 명리와 관련짓기도 하는데,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그림을 어떻게 명리와 관련짓겠는다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다.
5. 하도낙서에 대한 책이 드문 것은, 역시 하도낙서가 어떻게 생긴 건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설사 책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공상 소설책일 수밖에 없다.
첫댓글 설화일 뿐이지요
역사학자의 말
역사서를 구할 때는 책에 기록이 된 사실을 모두 가설로 본다
그러다가
어느 지역에서 유물이 출토되면
그때부터는 가설이 아니라 역사가 된다
팔괘도 혹은 간지등은 고대 갑골문으로 거북이 등짝에 역사서에 기록이 되어 있어요
"복희씨가 하늘로부터 하도낙서를 받았다"
"문왕이 복희씨의 하도를 연구하여 팔괘를 창안해 냈다"
그래서 가설로 여기다가
대규모 발굴로 인해 문왕팔괘도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설이 아니라 역사가 된 겁니다
그걸 북송의 유학자인 소옹이 유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유학에 들여 와서 퍼트렸다는 겁니다
소옹은 당시 북송학자로
그 당시만 해도
감히 황제무덤을 파헤져 문왕팔괘를 어찌 찾으려 하겠나요?
현대에 와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유명한 율리어스 신화도 처음에는
시에 등장하는 전설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어는 고고학자는 그 시에 등장하는 세밀한 광경이 전설이 아니라고 믿고
그 유역부근을 찾아 낸 겁니다
그게 오늘날에는 가설이 역사가 된 것이죠
유물론 터가 등장해야 진실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중국 상나라, 은나라도 처음에는 전설속의 동화라고 주장했지요
그러다가 대규모 유물터가 발견이 되면서
상나라는 역사로 인정이 된 겁니다
다만 그 당시는 신정일치의 정치를 하는탓에
왕은 곧 천신이다
라는 하늘사상을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태어난 신화가 드라마틱하여 다양하죠
고구려 고주몽 신화
박혀거세 신화
그렇다고 말도 안된다고 하여
고주몽과 박혀거세가'실존인물이 못 되는가요?
아니죠
역사는 역사와 전설로 드라마틱하게 포장하여 전개하도록 기록하는 겁니다
역사학자는
그 전설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실제만 뽑아내는 힘을 가진 안목이 있는 분들이죠
그런 안목이 없으면
상나라 박혀거세 복희씨
등이 허구의 인물이다
라고 실속없는 이야기하는 겁니다
전설같은이야기에서 역사를 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맞습니다. 소설은 소설로 봐야 되는 데 그것을 현실로 착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고대의 유물에 외계인의 형상과 그림이 잔뜩 있는 데 그럼 외계인은 존재하는 것일까요?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 대한 글은
상서 고명편
논어 자한편
예기 예운편
주역 계사전 등에 있습니다.
있으니, 존재감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어떻게 생긴 건지, 실제로 본 넘은 없습니다.
본 넘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까요. 이름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본 넘을 억지로 만들어 낼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역시 모르면 모른다고 애기하시는 님은 정직한 학자이십니다.
중국의
후한(後漢) 시대 직전부터 하도낙서의 도형화가 시도되었습니다.
이후 많은 설들이 있었지만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지요.
하도 낙서의 실제 모양을 아무도 몰랐다는 얘깁니다.
나중에는
당시에 외계인이 만들었지 않았을까 의심할 법한 얘기들을 조작해 내는 일을
宋代에 와서 하기 시작했습니다. 거의 소설 수준으로 각색되면서 말입니다.
중국 넘들의 허풍과 조작 능력이 발휘된 거죠.
최고십니다. 중국 넘들의 소설은 항상 재미를 가져다 줍니다. 그렇기에 그 중독자들이 뭔가를 아는 것처럼 나대고 있는 것입니다. 광복절을 건국절로 둔갑하려는 일부 중독자와 매한가지입니다.
명리학의 본격적인 발전은 송나라시대부터 발전했어요
그러니까 주자학이 팔괘도를 수용하여 받아들이면서 시작한 시대와 연결이 됩니다
소옹[1011년]은 북송이고
서자평 서승 등은 모두 남송 (1127~1279) 시대 인물.
명나라 (1368~1644) 시대
만육오, 유백온
어떤 측면에서는 격물치지라는 용어가 유학책애서 나온 용어이므로
명리학과 유학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볼 수는 없겠죠
따라서 북송인물인 소옹이 펴낸 하도낙서를 시작으로
명리학도 송대부터 본격적인 발달을 가져온 겁니다
그럼 그 이전에는 없었는가?
있었는데
그냥 거북등에 팔괘도 그려놓고
거북점을 치는 식의 유물들이 많이 발견이 됩니다
다만 그 것을 가지고 명리학을 논할 분위기는 못되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시대의 거북등에 새겨진 팔괘는'단순한 복점인 겁니다
그래서 최초의 사주학은 삼명학이고
오행학이면서 점복학인 겁니다
록명법으로 거북점 치듯이 팔괘도를 돌리는 것이죠
그게 그나마 사주학에 와서
기둥을 세웠지만
첨치는 수준으로만 남고 그후로는 발전이 안된 겁니다
그러다가 소옹이 책을 발행하여
널리 펴지게 되면서
명리학도 점복인 사주학에서 탈피하여 자평명리학이 된 겁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4.08.24 00:22
알고보면 이싱 전심도 흥정입니다
문자로 도를 표현하면
노상에서ᆢ
@다물 그건 아니죠
억지로 갖다붙한다면 뭐라도 이심전심이겠지만요.
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건 물건을 흥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갑진 도를 닦아보신 경험이 있나요?
@다물 글을 보시고 스스로 판단하실 줄 아시는가요?
도는 닦는 게 아닙니다
생활이지요
이런 질문들은 주제와 상관이 없고
시비에 가깝습니다
그만 하세요
명리학이 발전한 것이 아니라 사회상 즉, 문명과 문화가 발전했기에 학자들의 가치관도 그에 맞추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각자의 공상을 첨부하여 많은 논문들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정치 세력과 연결 고리가 있는 학자들의 논문이 우선 채택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런 행위는 비일비재 합니다.
전우창님 글이 맞는 말이군요.
인당 전우창님의 글을 보고 생각들 해보아요. 한번씩 이해 안되는 글도 있지만 이런 글을 좋은 글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