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의 「어떤 그림」 평설 / 박남희
어떤 그림
이병률
미술관 두 사람은 각자
이 방과 저 방을 저 방과 이 방을 지키는 일을 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졌다
사람들에게 그림은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자신들은 서로를 바라보다
만지고 쓰다듬는 일이 중요하단 걸 알았다
두 사람은 각자 담당하는 공간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두 사람만의 합의 하에 새로 정한 임무처럼
항상 방을 나란히 옮겨다녔다
그림이 그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그림 안에 넣겠다고
그림이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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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스스로 무수한 공간을 설정하면서 그 속에서 안정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공간은 경계를 낳고, 경계는 인간의 본성에 숨어있는 배타성을 발현한다. 그런데 인간의 배타성을 사회화 시키면 주체의 권력이 된다. 『감시와 처벌』의 저자 미셸 푸코는 권력과 지식의 상관관계를 통해 근대사회의 권력이 지식과 결탁하여 개인의 신체에 어떻게 억압으로 작용하는지를 제레미 벤담의 원형감옥(Panopticon)을 예로 들어 설명한 바 있다. 미셸 푸코에 의하면 근대사회는 거대한 원형감옥이다. 그런데 이러한 근대사회는 권력의 감시와 억압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점에서 온전한 사회는 아니었다. 따라서 현대는 ‘탈-원형감옥’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대로 전환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라는 저서를 통해 탈근대적 근대를 액체 근대, 즉 유동성의 시대로 명명한다.
이병률의 시 「어떤 그림」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푸코와 바우만을 거론한 것은 이 시가 단순히 미술관을 지키던 두 사람이 정분이 나서 미술관의 방을 지키는 자신의 본분은 망각한 채 애정행각에 빠져드는 과정을 그린 시로만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푸코의 원형감옥에서 죄수를 감시하는 것이 감시탑이라면 이병률의 시에서 미술관의 두 방을 지키는 것은 두 사람이다. 그런데 2연에 오면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고 “자신들이 서로를 바라보다/만지고 쓰다듬는 일이 중요하단 걸” 알게 되면서 서로 맡은 임무를 버리고 “두 사람만의 합의 하에 새로운 임무”를 모의하게 된다. 여기까지 이 시를 표면적으로 읽으면 눈 맞은 두 남녀의 사랑행각을 그린 시로 읽히지만, 이 시를 푸코와 바우만의 시각과 연결시켜서 바라보면, 근대적 억압이 해체되어 탈근대적 유동성의 시대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알레고리 시로도 읽힌다. 미술품을 지키던 두 사람이 자신의 책임과 경계를 허물고 서로 소통하는 행위는 흡사 바우만의‘액체 근대’의 한 단면을 연상시켜준다. 그런데‘액체 근대’는 공동체라는 테두리를 잃은 개인이 불안 가득한 자유를 누리며 지속 불가능한 무한경쟁 상태의 삶을 살아가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액체 근대’의 불안정성은 이 시에서 전복된 결말로 귀결된다.
이 시는 유동적인 사회 속에서 사랑도 유동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두 방을 지키던 개인이 각자의 방의 경계를 허물고 만나서 새로운 규칙 속 사랑을 이어가는 것은 ‘액체 근대’로 정의된 유동적인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유동적인 시회 속에서는 어떠한 것도 쉽게 전복된다. “그림이 그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그림 안에 넣겠다고/ 그림이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는 말미의 진술은, 그림을 감시해야 할 두 사람이 오히려 그림에게 감시를 당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전복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이 시에서 유동적인 두 사람을 유동적이지 않는 그림이 “그림 안에 넣겠다고” 따라다니는 모습은 근대적 억압이 사라진 탈근대 속의 새로운 억압이라는, 탈근대의 한계를 아이러니하게 보여준다.
—시전문지 《아토포스》 2023년 겨울호
박남희(시인)
첫댓글 그림 안에 넣겠다고
그림이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이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