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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35)
[무림공적으로 처단되어야 할 자들은 너희 무림이다]
숭산은 눈이 시릴 정도로 붉었다. 정상에서 시작한 단풍은 어느덧 산 어귀까지 치고 내려와 온 산을 붉게 물들였다. 공현에서 소림사로 이어지는 길 주변 또한 마찬가지였다. 붉은 물감을 뿌려놓은 듯 온 천지가 붉었다.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하면 으레 그러하듯 소림사를 찾는 향화객은 줄을 잇는다. 고관대작부터 조그마한 마을의 유지까지,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불공을 드리지 못했던 많은 불자들이 단풍 구경과 더불어 소림사를 찾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는 예년과 달랐다. 소림사로 통하는 산길에는 향화객으로 보이는 이들은 찾아볼 수가 없다. 대신 번쩍이는 갑옷을 걸친 군병들과 허리에 검과 도를 찬 무인들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반역도당.
소림이 떠안은 굴레였다. 귀광두를 파문시키고 그를 잡아 관에 넘기라는 강호 무림의 요구에 소림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장철웅! 배치는 어찌 됐나?”
불랑기를 싣고 가는 수백 대의 수레를 만족한 얼굴로 쳐다보며 천태진은 물었다.
“소림사 주변을 완전하게 포위했습니다.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갈 틈이 없습니다.”
“그래....... 좋구나. 금의위에게 전하라. 지금 이 시간부터 소림에서 빠져나가는 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목을 베라고.”
“존명!”
낮게 소리친 장철웅은 천태진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선두로 몸을 날렸다.
“앞으로 삼 일 후, 소림은 지상에서 사라진다!”
저 멀리 소림사 건물을 보며 천태진은 스산하게 웃었다.
바로 그 시간.
소림 산문 무광대사 일행도 계곡 입구에 진을 치기 시작하는 황군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연 사제, 얼마나 남았는가.”
한참 동안 황군을 주시하던 무광의 시선이 무연에게로 향했다.
“칠백 명 남은 이후로는 변화가 없습니다.”
무연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제자들을 잘못 키웠구먼. 이 세상에 목숨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무광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되도록 많은 제자들이 떠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칠백여 명으로 줄어든 다음부터는 더 이상 떠나는 제자들이 없었다. 마지막을 소림사와 같이 하려는 제자들이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군.”
“그렇습니다, 방장 사형. 먹구름이 하늘을 가린다 하더라도 단지 며칠에 불과할 뿐이지요. 구름이 걷히면 다시 그 푸름을 드러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맞네, 사제. 수천 년 세월에 비하면 우린 순간에 불과할 뿐이지. 무광이라는 이름보다, 무연이라는 이름보다 소림사란 이름이 남는 거란 말이네. 순간을 위해 영원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나.”
“아미타불!”
나직이 불호를 외며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허허! 사형, 우린 제자들을 너무 잘 키웠습니다.”
무광과 무연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요정이 요인을 향해 말했다. 분노하지 않고 차분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크게 보였다.
“점점 더 커질 걸세. 우리보다 더.......”
요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광과 무연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 따스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저들은 얼마 가지 못할 거네.”
산문을 향해 다가오는 천태진 일행을 보며 요인을 씁쓸하게 말했다.
“아미타불! 어서 오십시오, 영반 시주. 사정이 여의치 않아 여기서 영접하게 되는군요.”
산문 앞으로 다가온 천태진을 향해 무광은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당신들은 오만하군. 황실을 무시할 정도로 소림사가 큰 곳이었던가?”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천태진은 무광 일행을 향해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이 나빴다. 잘못했다고, 살려달라고 빌어야 할 입장에 있는 자들이 아닌가.
그런데 방장인 무광을 비롯한 산문에 나와 있는 모든 승려들의 얼굴은 잦은 손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처럼 태연하기 그지없다. 왈칵 짜증이 치밀었다.
“오만이 아닙니다. 죄가 없기에 침묵하고 있을 뿐입니다.”
천태진을 빤히 쳐다보며 무광은 억양 없이 말했다.
“귀광두가 소림의 제자라고 알고 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요?”
“남경왕 또한 황제 폐하의 친동생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창제독이나 금의위 영반도 한때는 남경왕과 친하게 지냈던 것으로 알고요.”
“건방진!”
천태진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남경왕 주홍과 더 가까운 사람은 귀광두가 아니라 황제 폐하가 아니냐는 말이고, 척결의 대상에 가장 먼저 포함되어야 할 사람은 황제를 비롯한 황실의 중신들이 아니냐는 말이었다. 천태진은 지그시 무광을 노려보았다.
“삼 일을 기다려 줄 것이다. 주홍을 도와 반역을 시도했음을 만천하에 알리고 스스로 소림에 불을 질러라! 그 길만이 너희들이 사는 길이다. 물론 여생을 옥에서 보내게 되겠지만.”
“아미타불!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할 수는 없소이다, 시주. 그리고 우리 소림은 많은 왕조를 겪었소이다. 지금과 같은 협박도 수없이 당해 보았고요. 하지만 소림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저 하늘처럼.”
“너희들만으로 끝난다면 오산이다, 무광. 중원 전역에 있는 모든 중들이 죽는다. 머리 자른 놈은 모두 반역도당으로 죽는단 말이다. 그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너희들이 져야 할 거다.”
“그 또한 부처님의 뜻이라면........ 살펴 가십시오.”
“삼 일이다, 무광! 앞으로 삼 일.”
짓씹듯 말한 천태진은 몸을 돌렸다.
“휴우!”
천태진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무광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실이 아닌 무림세력의 공격이었다면, 북황련이나 남천벌의 공격이었다면 죽음을 무릅쓰고 대항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황실. 대항해서도, 대항할 수도 없다. 황실에 대항함은 소림이 반역도당이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꼴밖에 되지 않고, 그렇게 되면 소림은 영원히 지워지기 때문이다.
“남경왕은 황제의 동상이 아니냐는 말, 지금껏 네가 한 말 중에 최고였다. 그만 들어가자꾸나.”
요인은 엷게 미소 띤 얼굴로 무광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위보다는 동생이 더 가까운 친척 아닙니까. 틀린 말이 아니지요.”
“맞다. 백산 사숙보다는 황제의 죄가 더 크지, 암만! 그나저나 사숙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던 요정은 망연한 눈으로 남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번만큼은 행복하게 살았으면 싶었는데 자꾸만 어긋나는 백산의 운명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마, 세상을 향해 분노를 토해 내고 있겠지. 하늘이 그분에게 허락한 유일한 것이니까, 아미타불!”
요정을 따라 고개를 돌렸던 요인은 남쪽 하늘을 향해 합장했다.
분노.
요인의 말처럼 백산은 대룡호에 타고 있는 무림인들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느닷없이 가슴을 비집고 들어온 분노는 걷잡을 수없이 타올랐다. 탐욕스런 얼굴로 광혈지옥비를 쳐다보는 자들, 그리고 그들을 선동하고 뒤로 빠져 버린 이대호까지. 누구랄 것 없이 역겨울 뿐이었다.
“저놈이?”
탐욕스런 눈으로 광혈지옥비를 쳐다보던 이정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붉은 혈광과 함께 귀광두의 몸에서 쏟아지는 살기는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강호를 종횡한 지 삼십 년, 많은 싸움을 겪었지만 상대를 앞에 두고 지금처럼 숨이 막혔던 적은 없었다. 문득 두려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나는 흡정마공을 믿는다.’
어정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만패불사란 별호를 얻게 된 것은 순전히 내공심법 때문이었다. 이름조차 적혀 있지 않은 고서(古書). 우연히 습득한 고서에는 가공할 내공심법이 적혀 있었다. 익히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것은 타격을 받으면 상대의 내공을 흡수하는 흡정마공의 일종이었다.
맞으면 맞을수록 상대의 내공을 흡수하는 무공. 그래서 일부러 패했다. 수없이 패했고, 목숨을 잃을 지경까지 갔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흡정마공은 목숨을 부지시켜 주었다. 많이 패하면 패할수록 내공이 높아지는 무공, 사지(四肢)가 잘리지만 않는다면 그처럼 좋은 내공심법도 없었다.
“좋다, 놈! 광혈지옥비를 지녔다지만 묵안혈마 본인은 아닐 터.”
어정 또한 다른 이들처럼 백산을 묵안혈마 본인이라 믿지 않았다. 다만 운이 좋아. 광혈지옥비를 얻은 자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준비하세!”
호흡을 가다듬은 어정은 나부양과 유천을 향해 소리쳤다.
“형님!”
둘째인 천면호 나부양이 곤혹스런 얼굴로 어정을 불렀다. 이편을 주시하고 있는 수많은 이목 때문이었다. 비록 귀광두가 강자라고는 하지만 자신들 역시 무림에 이름나 있는 실력자들. 합공을 한다는 사실이 께름칙했다.
“무슨 소린가? 놈은 무림공적일세! 정사가 합심하여 없애야 할 마두란 말이네.”
어정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맞다, 어정. 한꺼번에 전부 덤벼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다. 혹여 내 눈에 띄지 않으면 살아날 희망이 있단 말이다.”
속삭이듯 중얼거린 백산의 걸음걸이가 점차 빨라졌다.
어느 순간 무림삼기를 향해 다가들던 백산은 오른손을 쭉 내밀었다. 세 자루의 비도가 무림삼기의 전면으로 광폭한 기세를 머금고 나아갔다.
“허억!”
나직한 비명을 내지른 세 명은 재빨리 뒤편으로 몸을 날렸다. 어떤 형식도 없이 무작정 비도가 쏟아져 나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 더구나 광혈지옥비가 풍기는 기운이라니. 자신들도 모르게 도망치듯 몸을 날린 것이다.
“경공 하나는 무림삼기의 명성에 걸맞게 빠르구나.”
순식간에 이 장을 물러나는 삼인을 보며 백산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죽일........”
어정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검을 뽑아 보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는 사실에 극도로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었다. 흥분해 봐야 스스로에게 이로울 게 없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터득했기 때문이었다. 살기를 흘리며 백산을 노려보던 어정은 나부양에게 전음을 보냈다.
[봉선군주를 이용하세.]
[알겠습니다, 형님!]
고개를 끄덕인 나부양은 어정의 뒤로 이동했다. 광혈지옥비를 겪어본 첫 느낌은 자신들의 힘으로 감당할 무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서둘러 끝내기 못하면 이 자리에 뼈를 묻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밀려들었다.
“그래, 진작 그랬어야 했다. 네놈들은 한 놈씩 있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병신들이란 말이다!”
광포하게 고함을 지르며 양손을 동시에 뻗었다. 일수에 무림삼기 세 명을 없애 버릴 심산이었다.
“큭!”
태연한 얼굴로 이편을 쳐다보는 어정의 모습에 백산은 코웃음을 쳤다. 뭔가 준비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지만 그들이 죽는다는 건 변함없다. 여섯 자루의 비도가 막 어정의 몸을 난자하려는 순간, 어정의 등에서 얼굴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허억!”
깜짝 놀란 백산은 낮게 비명을 지르며 비도를 거둬들였다.
그 순간.
“타핫!”
어정의 검에서 흘러나온 투명한 광채가 백산의 전면으로 폭풍처럼 쇄도해 들었다. 절묘한 순간을 노린 기습이었다.
콰앙!
호신강기처럼 백산을 감싸고 있던 혈기가 엷어지고 그 사이로 어정의 검강이 빛살처럼 파고들었다.
“으음!”
나직한 신음을 뱉어내며 백산은 한 걸음 물러났다. 뒤로 물러난 백산은 양손을 내려 품을 더듬었다. 주하연의 몸이 잡혀들자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어정을 향해 비도를 날리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애잔한 얼굴을 하고 있던 건 분명 하연이었다.
너무 놀라 내공이 흐트러졌고, 그 순간 어정의 공격이 작렬한 것이다.
“오빠! 무림삼기 중 천면호는 역골공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탐화랑군 유천은 환영공을 익혔고요.”
“그런 게 있으면 진작 말해야지.”
확인이라도 하듯 주하연의 등을 쓰다듬으며 백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삼기라는 허명은 암습을 통해 얻었구나.”
망연한 얼굴로 서 있는 어정을 보며 백산은 비릿하게 웃었다.
“빌어먹을........”
어정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자신들 세 사람이 했던 합공은 무림삼기로 활동한 이래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아니 실패할 수가 없는 방법이다. 공격하는 상대는 한순간에 불과하지만 자신과 가장 친했던 자의 얼굴로 변한 천면호를 보며 당황하게 되고, 치명적인 허점을 드러내게 된다. 방금 귀광두처럼.
어정이 노리는 건 바로 그 순간이다. 전 내공을 끌어올려 대기하고 있다가 상대의 허점을 향해 검강지기를 쏟아 붓는다. 설령 금광불괴지신에 달한 무인이라도 검강지기에 당하면 내상을 입기 마련이다.
그런데 귀광두는 멀쩡했다. 금강불괴지신이란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하니 검강이 통하지 않는 자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 더구나 방금 썼던 방법은 녀석이 봉선군주를 안고 있기에 다시 써먹을 수도 없다.
난감한 얼굴을 한 어정은 두 동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어정의 난감함은 곧바로 해소되었다.
“놈은 무림공적이오. 내상을 당한 지금이 기회요. 한꺼번에 달려들어 없애야 합니다!”
군웅들을 선동하는 이대호의 외침이 선미에서 들려왔고, 이에 고무된 무인들은 각자의 무기를 앞세우며 백산을 향해 달려들었다. 선미에서, 갑판에서, 선실 위에서 수십 개의 도검이 날카로운 기운을 뿌리며 백산의 등을 노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곤혹스런 얼굴로 서 있던 무림삼기는 백산을 향해 몸을 날리며 각자의 무기를 뿌렸다. 어정의 검에서는 투명한 기운이 흘러나와 전면으로 쏘아져 나갔고, 천면호의 양팔 소매 밖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암기들이 파편처럼 튀어나갔다. 그리고 유천의 입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쿡!”
백산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솟구치고,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돌개바람이 생겨났다.
“달려들면 전부 죽인다!”
회오리바람 속에서 나직한 고함이 터지고 붉은 광채가 달무리처럼 둥글게 원을 그렸다.
챙! 챙챙챙! 챙챙!
엄청난 광경이었다. 열두 자루의 비도가 한 묶음이 되어 원을 그리자 무인들의 무기가 수수깡처럼 잘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잘린 검과 도는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밖으로 튕겨나가고, 그것들은 달려들던 무인들의 몸에 암기처럼 틀어박혔다.
“크아악!”
“아악!”
“으아악!”
동시다발적으로 비명 소리가 울렸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대룡호 갑판으로 비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한 번 불기 시작한 붉은 회오리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경악한 눈으로 서 있는 무림삼기를 향해 무섭게 돌진했다.
갑판을 장식했던 나무가 뜯기고 주변에 떨어져 있는 시체들이 재차 허공으로 떠올랐다.
“놈!”
붉은 회오리를 쳐다보며 어정은 이를 악물었다. 어찌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단 일 수에 십여 명의 무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자신들의 공격은 허무하게 스러졌다. 원거리 공격으로는 잡을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두 동생과 눈빛을 교환한 어정은 붉은 회오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공격을 하지 않으면 가만히 서서 당한다는 강박관념도 있었지만, 흡정마공을 믿었다. 목만 잘리지 않는다면 죽지 않는 무공을.
어정의 뒤를 따라 전 내공을 끌어올린 나부양과 유천이 따랐다. 그리고 주춤했던 무인들이 재차 백산의 등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무림공적이라 했더냐? 내가 너희들을 무림공적으로 선포하겠다. 이 묵안혈마가 너희들을 도륙하겠단 말이다!”
붉은 혈광을 휘날리며 백산은 나아가던 속도를 더욱 배가시켰다. 눈앞으로 투명한 강기를 간직한 어정의 검이 다가왔다. 그의 검이 노리는 곳은 다름 아닌 주하연이 안겨 있는 가슴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면호 나부양의 손을 떠난 암기도, 유천이 뿌린 비도도 전부 주하연을 노리고 다가들고 있었다.
“개자식들!”
낮게 소리친 백산은 혈풍뇌전심법을 더욱 강하게 끌어올렸다. 회오리치던 붉은 바람이 칼날 같은 강기로 변했고, 그 사이로 열두 자루의 비도가 춤을 추었다.
“아악!”
“컥!”
두 번째 울리는 처절한 비명 소리들. 백산의 등 뒤로 다가들었던 자들은 자신의 무기조차 휘둘러보지 못하고 갑판으로 털썩털썩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커억!”
붉은 광채를 발하는 손 하나가 어정의 목을 틀어쥐었다. 하지만 어정은 자신의 목이 잡혔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흑요석처럼 검은 보석 두 개가 자신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광혈지옥비뿐만 아니라, 귀광두는 눈조차 묵안이었다.
“만패불사라 했더냐. 패하되 죽지 않는다고 했더냐. 보겠다. 목이 잘려도 다시 살아나는지 보겠단 말이다.”
낮게 소리친 백산은 비도 두 자루를 천천히 끌어당겼다. 놀랍게도 두 자루 비도는 나부양과 유천의 목을 관통해 있었다. 아직 죽지 않았는지 두 사람은 공포에 절은 얼굴로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저럴 수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쌍방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진사인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어냈다. 광혈지옥비의 실체는 상상을 초월했다. 수십 명의 무인들이 동시에 달려들고 있으나 귀광두의 일 장 안으로 다가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무인들이 귀광두와 이 장 떨어진 곳에서부터 도륙당하기 시작해서는 일 장 앞에 도달할 즈음이면 형체를 분간할 수 없게 된다.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리고, 허리가 잘린다.
죽어간 자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와 내장이 사방에 널렸음에도 불구하고 아홉 자루의 비도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모든 일들이 무림삼기 세 사람을 상대하면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동시에 두 가지 공격을 감행한 사람이 귀광두였다. 어정의 허공에 번쩍 들어 올려져 버둥거리고 있고, 나부양과 유천은 광혈지옥비에 목이 관통되어 끌려가고 있다.
문득 진사인은 제 목을 쓰다듬었다. 만일 무림삼기와 같이 덤벼들었다면 자신들 또한 나부양이나 유천과 같은 입장에 처했을 거리는 생각이 들었다.
우두둑!
뼈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진사인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허공에 번쩍 들어 올려졌던 어정의 목이 갈대처럼 부러지고, 동시에 나부양과 유천의 목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쳐라! 죽이란 말이다!”
선미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이대호는 무인들이 주춤하자 독려하고는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는 무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몸서리치는 공포는 그들의 발과 손목을 묶고, 입을 닫게 하고 말았다.
그러나 멈추고 싶다 하여 멈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분노를 동반한 붉은 회오리는 선미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선실이 뜯겨 나가고, 선실 위에 몸을 숨기고 있던 무인들은 두 도막으로 잘린 채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노을처럼 붉은 기운이 퍼져 나갈 때마다 피분수는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어느새 대룡호 주변 강물이 붉게 변했다. 배에서 떨어진 시체들이 둥둥 떠다니며, 강은 한 폭의 지옥도를 연상케 할 정도로 끔찍하게 변했다.
“아아악!”
“크악!”
무기를 뽑아 들던 무인의 마지막 비명 소리와 함께 분노한 인간의 포효가 뒤를 따랐다.
“카아악!”
그리고 붉은 광채 하나가 강물을 뚫고 물속 깊숙이 사라졌다.
“기습에 대비하라!”
어느새 개방 무인들이 준비한 배로 오른 이대호는 사방을 둘러보며 고함을 질렀다.
“허허! 우린 왜 살려 주었다고 생각하는가?”
시체로 가득한 주변을 둘러보며 진사인은 장진에게 물었다. 바로 앞에서 보았지만 믿어지지가 않았다. 대룡호에 있던 오십여 명의 무인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자신들이 유일했다. 무림삼기를 비롯한 오십여 명의 무인들을 없애는 데 일다경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 무인이 강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형님과 난 살기를 흘리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난 겁니다.”
조금 전 상황이 정리가 되는 듯 장진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그가 물로 뛰어들기 전,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악마의 눈이라 불러야 할 그 검은 눈이 왜 그리 슬퍼 보였던지, 가슴 저 밑바닥에서 싸한 기운이 치미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먹물처럼 검은 눈은 슬픔을 가득 담고 있었다.
“저기.......손님!”
망연한 눈으로 강물을 쳐다보는 두 사람의 귓전에 잔뜩 검에 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룡호 선장이었다.
“쿡!”
선장의 모습을 본 진사인은 피식 웃었다. 그에게서 지린내가 잔뜩 풍겨 왔던 탓이었다.
“갈 수 있겠는가.”
“끄, 끝났습니까?”
“대룡호에서는 끝났네. 자넨 배를 건졌고.”
“아이고!”
진사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선장은 털썩 주저앉았다. 악몽 같았던 시간이었다. 젊은 시절에 전쟁터에도 나가 보았지만 지금처럼 끔찍한 광경은 처음이었다. 지옥 구경을 하고 나온 기분이었다.
“저기 무호로 돌아가면.......”
되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에 말을 꺼냈으나 선장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강물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진사인 때문이었다.
“참! 시체는 우리가 치워 줄 테니까 자네들은 물을 퍼 올려서 갑판을 닦게. 합비로 가야 그나마 돈을 벌 것 아닌가.”
“끄응! 알겠습니다.”
선장은 애써 풀려 버린 다리를 곧추세웠다. 앞에 있는 두 사람 또한 무인들. 그들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힘겹게 발을 놀려 노잡이들을 불러 모았다.
잠시 후, 대룡호로부터 많은 시체들이 강물로 던져졌다. 흑백쌍마 두 사람은 시체를 치우고 선장과 노잡이들은 코를 틀어막은 채 강물을 퍼 올려 갑판 이곳저곳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다른 곳으로 가 버린 건가?”
시체를 치우면서도 진사인의 시선은 강물에서 떠나지 못했다. 한참 전에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간 귀광두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온다!”
일순 진사인은 눈을 빛냈다. 전 내공을 수면에 집중하고 있던 그의 귓전으로 미약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살았던 진사인은 물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유독 민감했다. 내공을 집중하던 진사인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과앙!
“크아악!”
“아악!”
붉은 혈광이 수면을 비춰 듦과 동시에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 진사인의 시선이 머물렀던 자리였다. 일부 개방 무인들은 배가 파괴되면서 즉사했고, 일부는 부서지는 배를 박차고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엄청나군!”
진사인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핏빛 덩어리는 주변으로 달무리처럼 커다란 원을 남기고 다시 수면 속으로 잠겨들었다.
후두둑!
붉은 덩이리보다 늦게 잘린 팔다리가 추락하듯 수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찾아라! 놈은 물속 어딘가에 있다. 놈이 나오는 순간 천리추종향을 던져라!”
이대호는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저, 저기!”
개방 무인 한 명이 수면을 가리키며 더듬거렸다. 마치 붉은 노을이 퍼지듯 수면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피해!”
부하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렸던 이대호는 몸을 솟구치며 고함을 내질렀다.
콰앙!
“크아악!”
“아악!”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몸을 솟구쳐 올랐던 개방 무인들은 붉은 피를 분수처럼 쏟아내며 수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가장 빨리 솟구쳐 올랐던 이대호를 제외하고 나머지 무인들은 전부가 도륙당하고만 것이다.
“고래군!”
다른 배로 내려서는 이대호를 바라보며 진사인은 중얼거렸다. 문득 어린 시절 바다에서 보았던 광경이 생각났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해마신(海魔神)이라 불렀다. 잠수를 하고 있던 놈이 물 밖으로 나올 때면, 언제나 한 척의 배가 파괴되었다. 그리고 그곳에 타고 있던 어부들은 고래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놈의 입에서는 아무것도 남아나질 않는다.
지금 보고 있는 귀광두의 모습이 그랬다. 대룡호는 모선이었고 개방 무인들이 타고 있는 배는 작살을 던지기 위한 작은 배다. 수면으로 붉은 기운이 비춰 들면 어김없이 모든 것들이 파괴된다. 귀광두는 바다의 학살자 해마신이었다.
“소선들을 피해 노를 저어라!”
수면을 응시하던 진사인은 노잡이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일순 대룡호는 빠르게 수면을 박차고 나갔다. 한시바삐 지옥 같은 곳을 떠나고 싶은 노잡이들이 결사적으로 노를 저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뒤편에 숨어 무림인들을 선동했던 이대호는 전장을 떠나지 못했다. 이십여 년을 참고 기다렸던 기회. 장중의 등장으로 접어야 했던 후개의 꿈을 다시 꿀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수하들의 죽음보다 더 중요했다.
“죽음으로 물미공적을 처단하라! 천붕회의 힘을, 개방이 최고임을 증명하라! 방도들은 물속에서 놈을 찾아라!”
힐끔 고개를 들어 서쪽 하늘을 쳐다보던 이대호는 다급한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해거 사산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잡지는 못하더라도 귀광두의 몸에 흔적은 남겨야 했다.
“놈! 네놈은 절대 내 손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 절대로!”
대부분 수하들이 강물로 뛰어들자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이대호는 대룡호를 흘끔 쳐다보고는 이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는 귀광두를 찾아다니지 않았다. 한 곳을 향해 몰려가는 수하들을 보고는 방향을 틀어 강가로 헤엄쳐 가기 시작했다. 강변에 도착한 이대호는 한편 마른 풀숲으로 은밀하게 옮겨가서는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쿡쿡쿡!”
하늘을 보며 이대호는 낮게 웃었다. 천리추종향(千里追從香)을 준비시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신강기를 펼치고 있는 상황에서는 천리추종향을 뿌려 봐야 귀광두의 몸에 닿지도 못한다.
하지만 물속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물에 풀린 천리추종향이 물결을 따라 흐를 터이고 그것들은 피부로 흡수된다. 개방 무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또 하나의 올가미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대호의 음모를 알지 못한 백산은 빠르게 잠수해 내려오는 개방 무인들을 향해 비릿한 조소를 흘리고 있었다. 과거 제천맹이 그랬던 것처럼 천붕회에 속한 문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강호 무림을 지키겠다는 건 그저 허울에 불과했다.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천붕십일천마를 이용했을 뿐이다.
‘세상은 변하는 거니까. 하지만 기껏 오십 년이다. 천붕십일천마가 전부 죽은 것도 아니란 말이다!’
내심 고함을 지르며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찼다. 그의 몸에서 재차 붉은 광채가 솟구쳐 오르며 열두 자루의 비도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백산은 노래를 불렀다. 열두 자루의 광혈지옥비가 쏟아내는 죽음의 노래를.
붉은 광채가 움직일 때마다 주검이 생겨났다. 빙천비가 백색 광채를 발하면 개방 무인을 비롯한 주변 물이 얼었다. 생천비가 춤을 추면 생기가 가득한 주검이, 사천비가 움직이면 공포에 절은 주검이 생겨난다.
하나 둘, 백산을 향해 다가들던 개방 무인들은 붉은 잔흔을 물속에 남기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왼손과 오른발을 동시에 올려 물을 쳐내고, 뒤이어 오른팔과 왼팔을 들어 올리며 쳐낸 물을 끌어온다. 다시 왼팔과 오른발이 나아가며 빙글 한 바퀴 돌자 그의 몸 주변으로 노을처럼 붉은 광채가 퍼져 나가고, 조각조각 분리된 시체들이 하저로 가라앉는다.
잊기로 했다. 개방과 함께 했던 세월을 잊고, 남궁세가와 함께 했던 세월을 잊을 것이다. 팽월을 제자로 삼았던 세월을 잊을 것이고, 사부를 의부로 모셨던 세월을 잊을 것이다. 그리고 죽일 것이다. 가로막는 놈들을 죽일 것이고, 막아서는 자들을 죽일 것이다.
쿠쿠웅!
백산은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었다. 살아남은 개방 무인들은 소용돌이가 펼치는 무상신법을 봐야 했다. 물속을 뭍처럼 이동하는 가공할 소용돌이의 움직임을.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본문을 잊지 않았다. 천붕회 소속 문파의 문도라는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죽기 직전, 각자가 쥐고 있던 천리추종향을 소용돌이를 향해 뿌렸다. 그리고 갈가리 찢긴 채로 하저로 가라앉았다.
얼마나 비도를 휘둘렀을까. 입을 맞춰 주하연이 숨을 쉬게 해준 게 몇 번이었는지. 어느덧 달려드는 자들은 없었다. 수면으로 비춰 드는 달빛을 보며 백산은 천천히 떠올랐다.
“괜찮아?”
씁쓸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백산은 나지막하니 물었다. 그녀의 입술은 퍼렇게 얼어붙은 채다.
“조금 춥네.”
주하연은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눈을 부릅뜨고 그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개방 무인들의 몸이 잘릴 때나, 그들의 몸에서 피가 번져 나오고 내장이 비어져 나올 때도 눈을 감지 않았다. 백산과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었다.
“금방 따뜻해질 거야.”
화천비의 기운을 일으켜 젖은 몸을 말리며 백산은 수면 위를 천천히 걸었다.
“오빠! 우리 그냥 가자. 아무도 찾을 수 없는 먼 곳으로. 대막도 좋고, 천축도 좋고, 아니면.......”
왈칵 설움이 밀려왔다. 사랑하는 사람을 얻었는데 몸 하나 편히 쉴 곳이 없다. 가진 거라고는 옷가지 몇 벌과 등짐 속 말린 육포가 전부다. 그런 백산을 노리는 세상을 이해할 수가 없다. 죽을 줄 알면서도 달려드는 그들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만 두면, 모른 척하면 강물이 붉게 물들거나 백산의 눈이 검게 변하지 않을 것 아닌가.
“그게 낫겠지? 나도 그 생각했다. 아무래도 무림과 나는 궁합이아닌가 봐. 우리 좀 달릴까!”
주하연의 엉덩이를 치켜 올린 백산은 수면을 박차며 전면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적당히 바람을 맞을 정도만 수면을 밟으며 달렸다. 바람을 맞으면 더러운 기분이 좀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슬쩍 수면을 찰 때마다 달빛을 받아들인 수많은 물방울들은 무지갯빛 광채를 허공에 남겼다.
“아름답네!”
현실을 잊은 듯 주하연은 탄성을 질렀다. 백산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수면은 온통 빛 가루를 뿌려놓은 듯 아름다웠다. 수면 위로 떠오른 물방울은 보석이었다. 수많은 보석들이 춤을 추고 있는 듯했다.
일 다경 정도 달렸을까. 전방의 검은 물체를 발견한 백산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어이구! 저 녀석들,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야.”
주하연의 등을 토닥이며 백산은 싱긋 웃었다. 물속으로 뛰어들기 전 타고 있었던 대룡호였던 것이다.
“타시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백마 장진은 백산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젠 우리 빚은 없는 거다.”
대룡호로 오른 백산은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주면 우린 고맙고. 일단 들어가세.”
대룡호에서 살려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아마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지금쯤 시체가 되어 물고기 밥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장진은 내공을 끌어올려 주변을 살폈다.
“강변엔 아무도 없어. 그러니 너희들이 무림공적을 도왔다는 소문인 나지 않을 테니까 마음 놔도 돼.”
백산을 씁쓸하게 웃었다. 대룡호에 오르기 전 상단전을 열어 강변을 탐색해 보았으나 어떤 인기척도 감지되지 않았던 것이다.
“왜 우리를 도와주는 건가? 무림공적을 도와주면 그대들도 무사하기 힘들 텐데.”
선저에 마련된 선실로 들어온 백산은 두 사람을 쳐다보며 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광혈지옥비를 탐냈던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호의적으로 나오니 기분이 묘했다.
“글쎄, 자네의 검은 눈이 슬퍼서랄까. 편할 대로 생각하게.”
백산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장진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천하제일인이라고 불릴 정도의 강한 무공을 지녔지만 그는 힘 있는 자들의 미끼에 불과한 입장이다. 그의 처지가 왠지 불쌍해 보였고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이 배 이틀 정도 강을 타고 올라가면 안 돼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군주님. 어차피 중간에 선실도 수리해야 하니까 천천히 올라가도 의심하는 자들은 없을 겁니다.”
“고마워요. 이왕 부탁한 김에 한 가지만 더 할게요. 음식 좀 가져다주세요. 무호에서 준비했던 음식이 있었는데.......”
주하연은 말끝을 흐렸다. 음식을 챙기는 사람은 자신이다. 그런데 싸우는 와중에 어디로 흘렸는지 음식을 쌌던 보퉁이가 보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배를 정박시켰으니까 주변에 객잔이 있을 겁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딘가?”
나가려는 장진에게 백산이 물었다.
“소호(巢湖)에 들어와 있네.”
“소호? 그럼 번화가도 있겠네?”
“맞네. 중간 기착지고, 호수가 있어 부호들의 별장이 많은 곳이지. 그대들이 먹을 음식을 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잘됐네.”
슬쩍 미소를 지은 백산은 장진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음식을 사올 때 몇 가지만 더 사다 주게. 왜 여자들이 목욕할 때 쓰는 물건들 있지. 돈이 되는 대로 전부 사다 주면 고맙겠네.”
광치에게 받은 주머니를 꺼내 내밀며 백산은 말했다.
“알았네.”
주머니를 받아든 장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백산은 다시 선실로 내려왔다.
“맘 편히 쉴 수 있겠어요.”
침상 위에 엎드려 백산을 빤히 쳐다보던 주하연은 배시시 웃었다. 토막잠을 자긴 했지만 지난 며칠 간 제대로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대룡호에서만큼은 잠을 푹 잘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장진 아저씨께 뭘 부탁했어요?”
문득 생각난 듯 주하연은 물었다. 음식 말고 다른 것들도 부탁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었다.
“궁금해?”
“그럼요. 오빠가 하는 일은 전부 궁금하고 알고 싶어요.”
하지만 그녀의 궁금증은 오래 가지 않았다. 소호 강변으로 나갔던 진사인이 먼저 돌아온 손에 조그마한 봉지를 쥐어 주었다.
“오빠!”
봉지 안에 든 가루를 쳐다본 주하연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백산을 불렀다. 녹두를 갈아 만든 세안제와 목욕할 때 쓰이는 입욕제였던 것이다.
“데려오기로 했으면 고생은 시키지 말아야 하는데. 우선은 이걸로 만족해야겠다. 잠깐만 기다려라, 물 떠올게.”
백산은 멋쩍게 웃었다. 왕부에서 곱게만 자란 주하연에게 너무 큰 시련을 주는 것 같아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처음 시작이야 어떻게 되었건 평생 그녀와 함께 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이미 목욕을 했는데 또 무슨.......”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하연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고 또 미안했다.
“너 머리에서 심하게 냄새 나, 임마.”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주하연의 머리칼을 잡아채 코로 가져가며 백산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설마......!”
화들짝 놀란 주하연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제 머리칼을 코에 가져대 대었다.
“정말이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르자 주하연은 얼굴을 붉혔다.
“그렇다고 꼭 말을 해야겠나? 창피하게.”
백산의 뒷모습을 좇으며 주하연은 조그맣게 씨근덕댔다. 지금껏 이 머리를 백산의 턱 아래 뒤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창피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깨끗이 씻어.”
커다란 물통을 들고 선실로 들어온 백산은 한쪽 구석에 물통을 내려놓고 화천비로 물을 데웠다. 잠시 후, 뿌연 수증기가 선실 안을 가득 채웠다.
“먼저 씻어라. 난 나가서 물 더 떠오마.”
“알았어요! 등 밀어줘야 해요.”
밖으로 나가는 백산의 등에 대고 소리치고는 후다닥 옷을 벗고 통 안으로 들어갔다.
“아, 따뜻해!”
목까지 몸을 담그고 얼마쯤 있자 몸이 노곤하게 풀렸다. 향긋한 입욕제를 풀어 넣고 세안제인 조두를 물에 개어 비볐다. 손바닥 가득 생기는 거품을 보며 주하연은 환하게 웃었다. 물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올라오고 조두를 비빈 손바닥은 미끈미끈하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하얀 거품을 온몸에 발라 곳곳을 닦아냈다. 그녀가 특히 신경을 써서 씻은 부분은 당연히 머리였다.
“오빠, 등!”
물통을 들고 안으로 들어온 백산을 보며 주하연은 통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등을 디밀었다.
“여기!”
조두 가루를 백산의 손바닥에 부어준 다음 물을 끼얹었다.
“빡빡 문질러 줘요. 머리는 어때요?
”냄새 좋은데?“
미소를 지은 백산은 주하연의 등에 천천히 문질렀다. 아닌 게 아니라 주하연의 머리에서는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는 냄새가 풍겨왔다. 진사인이 가져온 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고급품인 것만은 분명했다.
“됐어요, 저기 헹굴 물 주세요. 그 물은 데우지 않아도 돼요. 헹굴 땐 시원한 물이 좋거든요.”
“아예 얼려서 줄까?”
“싫어요. 지금도 꽤 찰 텐데.”
눈을 흘긴 주하연은 물통을 받아 들고 머리 위로부터 천천히 끼얹었다.
“아이고, 추워라!”
오싹 소름이 돋자 재빨리 통 안에서 뛰쳐나와 백산이 건넨 천을 받아 들고 몸을 닦았다.
“오빠도 씻으세요.”
“나?”
“오빠 몸에선 냄새 안 나는 줄 알아요?”
“끄응!”
백산은 낮게 신음을 내질렀다. 조금 전 주하연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받고 말았다. 하는 수없이 물을 떠와 몸을 씻었다. 그녀에게 등을 고스란히 맡긴 채.
보퉁이 안에 두었던 새 옷을 꺼내 입고 장진이 가져온 음식으로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침상에 나란히 누웠다.
“근데, 제대로 씻기는 한 거예요?”
백산의 팔을 빼앗아 팔베개를 하고 있던 주하연은 갑자기 그의 가슴을 헤치며 코를 킁킁댔다.
“조둔가 하는 걸로 열심히 닦았는데....... 아직도 냄새 나?”
백산은 옷을 이리저리 들추며 킁킁거렸다.
“아니? 오빠 몸이 좋아서. 처음 만났을 때 내가 그랬잖아. 이런 몸은 꼭 한번 만져 보고 싶었다고.”
백산 위로 올라타며 주하연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에라, 이 여우야!”
눈을 흘기며 주하연을 껴안는 순간 어느새 새촘한 입술이 입에 와 닿았다.
‘얘가?’
백산은 깜짝 놀라 주하연을 쳐다보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혀를 쑥 밀어 넣었던 과거와는 달리 주하연은 입술만 가져다 댄 채 죽은 듯 했다.
잠시 주하연의 얼굴을 쳐다보던 백산은 그녀의 입 안으로 가만히 혀를 밀어 넣었다. 더 이상 어린애로 대할 수가 없다. 그녀와 평생을 같이하기로 했고,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남편으로서의 의무.
차갑던 선실 안에 뜨거운 기운이 휘몰아쳤다. 가볍게 시작되었던 입맞춤은 어느 순간 격렬하게 변했다. 입을 맞춘 채로 두 사람은 서로의 옷을 벗겨 나갔다. 어둠 속에 뿌연 동체가 드러났다.
“사랑해요!”
이 짧은 한 마디가 왜 이리 어려운 걸까. 주하연은 깊게 숨을 토해 냈다. 그를 간절히 원했다. 그의 여자가 되기를 원했고, 그의 사랑을 얻기를 원했다. 그가 원하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은 사람. 그가 그런 사람이었다.
사랑한다는 그녀의 말에 대한 대답을 백산은 행동으로 대신했다. 뜨거운 숨결을 뱉어내는 주하연의 입술을 베어 물며 손으로는 봉긋 솟은 가슴을 쓸었다. 그러고는 슬쩍 틀어쥐었다.
주하연은 마른 신음을 토해 냈다. 기이한 느낌이 가슴을 타고 흘렀다. 아득한 기분과는 다른, 뜨거운 열류 같았다. 가슴에서 시작한 열류는 등줄기를 타고 아래로 흘렀다.
무심결에 백산의 혀를 빨아 당겼다. 꽉 틀어쥐었던 주먹을 풀어 그의 몸을 쓰다듬었다. 목을 쓰다듬고 가슴을 쓸어 보았다. 허리가 들려지는 듯하더니 눈 깜짝할 새 그의 얼굴이 시야를 메웠다.
그의 입술이 어깨에 내려앉자 다시 눈앞이 캄캄해져 버렸다.
주하연은 그의 등을 쓰다듬던 손을 내려 엉덩이를 틀어쥐었다. 탄탄한 준마의 엉덩이가 이럴까. 얼마 전 만져 보았던 그의 상징이 눈앞에 떠오르자 숨이 막혀왔다.
잠시 망설이던 주하연은 이내 결심한 듯 손을 천천히 앞으로 가져갔다. 그때 그는 분명 신음을 흘렸고 좋아했었다.
아랫배를 매만지는 그의 손길이 느껴진다. 뜨거운 숨결이 가슴에 쏟아진다. 한 가닥씩 흘러내리던 열류는 묶음으로 변하여, 숨 가눌 틈도 없이 아래를 점령했다.
“하악!”
저도 모르게 비음을 내지른 주하연은 그의 상징을 힘차게 틀어쥐었다.
“허억!”
이번에는 백산의 입에서 격한 신음이 터졌다.
반짝, 두 사람은 동시에 눈을 떴다.
주하연은 백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상징을 틀어쥐고 있지만 결코 부끄럽지 않았다. 침실에서는 어떤 행동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고 책에서 배웠다.
어느새 은밀한 그곳에 그의 손이 닿아 있었다. 파도처럼 밀려왔던 전율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녀는 허리를 활처럼 휜 채 그에게 매달렸다. 그를 향해 환히 미소를 지었다. 그가 좋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너무 좋다고, 사랑한다고 눈으로 말했다.
그의 손이 다시 느리게 움직이자 뇌리 속에 각인되었던 그 쾌감이 재차 밀려들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쥐고 있던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이 또한 춘서에서 보았던 것들이다. 남자는 지금과 같은 경우에 더욱 좋아한다고 했다. 이보다 더 좋아하는 것도 있다고 했다.
‘할까!’
생각보다 행동이 더 빨랐다. 저도 모르게 그녀는 자세를 바꿔 그의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여전히 쥐고 있던 그곳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헉!”
탄성을 내지르듯 백산의 입에서 쾌락에 겨운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리고 달덩이처럼 뽀얀 엉덩이를 와락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열기는 선실을 뜨겁게 달구었다.
죽음의 경계를 맞본 주하연의 몸놀림은 처음이란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격렬했다. 오히려 놀란 사람은 백산이었다. 그녀를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졌고 오히려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두 사람의 입에서 끊임없이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밤중에 시작된 관계는 새벽녘까지 계속되었고, 한순간 발작적인 신음을 끝으로 두 사람의 움직임은 우뚝 멈췄다.
“꿈같아요!”
땀으로 뒤범벅이 된 주하연은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꿈을 꾸는 것 같다. 웬 처녀가......”
“그래서 싫어요?”
“싫을 리가 있나. 오히려 좋지. 하지만.......”
또다시 나이 소리가 튀어나오려고 하지 백산은 재빨리 말을 끊었다. 하지만 주하연이 백산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오빠는 이제 이십대예요. 자신감을 가져요. 킥!”
말을 해 놓고도 좀 심했다 싶어 주하연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네 좋아요. 뭐랄까, 오빠의 일부분이 되었다고 할까, 벽이 없어진 기분이에요.”
“우리 사이에 벽이 있었나?”
“몰라요! 뭔지 모르지만 오빠와 나 사이에 거리가 없어진 것만은 확실해요. 아니, 거리가 없어진 게 아니라 끈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암튼 그래요.”
“아내 끈이 아니고 철삭일 거다. 만년한철로 만든 철삭. 누구도 잘라낼 수 없는 질기고 질긴 쇠줄 말이야.”
사랑스런 눈으로 주하연을 쳐다보던 백산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행복한 이틀이 될 것 같아요. 태어나 느끼는 가장 행복한 시간.”
또다시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에 주하연은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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