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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22
사사기 1장은 단순한 정복 전쟁의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타협을 배우고 어떻게 믿음을 잃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진단서입니다. 벧엘의 승리로 시작하지만 단 지파의 패배로 끝납니다. 순종을 멈춘 작은 타협이 결국 얼마나 큰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줍니다. 공주야! 인생이 만만해 보이던 시절도 있었다. 맘먹으면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녹록치 않은 것이 인생이란 걸 알게 된다. 그렇지만 그게 절망이 아니라 다행이고 안심이 되었다.
Chapter 1 of Judges is not merely a record of conquest wars, but a spiritual diagnosis showing how God’s people learn to compromise and how they gradually lose their faith. It begins with Bethel’s victory but ends with the defeat of the tribe of Dan. It shows how a small compromise that stops obedience can ultimately produce such a great consequence. Princess! There was a time when life seemed easy. It seemed like I could try it if I set my mind to it. But as time goes by, I come to realize that life is not so easy. But that was not despair; rather, it was a relief and a comf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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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단기전이 아니라 장기전이고, 과정만이 아니라 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요셉 지파의 정복 전쟁에 함께하셔서 승리를 주신다. 물론 여리고 성 전투를 연상케 하는 정탐과 내부 협력자가 있었지만, 그 협력자는 여호와를 인정한 사람이 아닌 단지 살기 위해서 자신이 나라를 배반한 사람일 뿐이다. 살아남은 그가 루스라는 성읍을 건축하여 이제 이스라엘에게 또 다른 잠재적인 위협이 되었다.
Because life is not a short game but a long one, and the end matters as much as the process. The LORD will be with the conquest campaign of the tribe of Joseph and grant victory. Of course, there were spies and collaborators reminiscent of the Battle of Jericho, but that collaborator was not someone who acknowledged the LORD, but merely someone who betrayed his own nation for the sake of survival. Having survived, he built the city of Luz, and now he had become yet another potential threat to Isr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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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신 완전한 승리를 불완전한 승리로 바꿔버린 것은 이스라엘의 불완전한 순종이었다. 요셉의 두 지파인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와, 스불론과 아셀, 납달리 지파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언급이 없다. 하나님께서 전쟁 전에 미리 포기 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도리어 그들이 여러 이유로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거절한 것이다. 상대가 너무 강해 보여서 포기하기도 했고, 충분히 이길 수 있어도 노동력으로 이용하고 싶어서 포기하기도 했다.
It was Israel’s imperfect obedience that turned the perfect victory God had given into an imperfect one. There is no mention that God was with Joseph’s two tribes, the tribes of Manasseh and Ephraim, and the tribes of Zebulun, Asher, and Naphtali. It does not mean that God gave up in advance before the war. Rather, they rejected the victory that God gives for various reasons. Sometimes I gave up because the opponent looked too strong, and other times I gave up even though I could have won, because I wanted to use them as lab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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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을 대리하는 정복의 사명보다는 자신들의 실용적인 목적을 더 우선시 했다. 거절한 승리는 스스로 하나님께로부터 거절당할 불순종이었다. 불순종이 반복될수록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이전에는 쫓아낼 수 있어도 안 쫓아냈지만,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을 쫓아낼 수 없어서 아예 골짜기로 내려오지도 못했다. 단 지파가 약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약해서다. 지파의 규모만큼이나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작았다.
They placed their own practical purposes above the mission of conquest, which was to bear God’s judgment. The rejected victory was, by itself, disobedience to God, being rejected. The more disobedience is repeated, the more serious the situation becomes. Previously, they could have driven them out, but they did not; however, the tribe of Dan could not drive out the Amorites, so they were not even able to come down into the valley. It is not that the tribe of Dan is weak, but that their faith is weak. As small as the tribe was, so too was the faith in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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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 의해서 하나님도 산지로 쫓겨서 옴짝달싹 못하는 초라한 분이 되실 수밖에 없었다. 악은 그 세력이 약하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왜 그런가?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되는 내 선대는 무엇인가? 순종하는 과정 속에서 불순종하는 일이 있지 않은가? 나는 사업장에서 어떻게 소금을 유지할 것인가? 정복 실패 요인은 무엇인가?
Because of them, even God was driven to the mountains and could only become a pitiful figure, unable to move an inch. Evil can never be ignored, even if its power is weak.What's the matter? What is my predecessor that violates God’s command? Is there ever disobedience that occurs in the process of obedience? How will I maintain salt at the workplace? What are the reasons for failure in conqu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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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지파의 정복, 요셉 지파 중심(22-36)
a.요셉가문의 불완전한 정복:22-26
b.요셉 가문(므낫세, 에브라임 지파)의 정복 실패:27-29
c.스불론, 아셀, 납달리 지파의 정복 실패:30-33
d.단 지파의 정복 실패: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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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족속도(22a)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22b)
여호와께서(22c)
그와 함께 하시니라(22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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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족속이(23a)
벧엘을(23b)
정탐케 하였는데(23c)
그 성읍의 본 이름은(23d)
루스라(23e)
탐정이 그 성읍에서(23f)
한 사람의(23g)
나오는 것을 보고(24h)
그에게 이르되(24i)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24j)
우리에게 가르치라(24k)
그리하면 너를(24l)
선대하리라 하매(24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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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25a)
성읍의 입구를(25b)
가르친지라(25c)
이에 칼날로(25d)
그 성읍을 쳤으되(25e)
오직 그 사람과 그 가족을(25f)
놓아 보내매(25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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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26a)
헷 사람의 땅에 가서(26b)
성읍을 건축하고(26c)
그 이름을(26d)
루스라 하였더니(26e)
오늘날까지(26f)
그곳의 이름이더라(26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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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낫세가(27a)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27b)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27c)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27d)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27e)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27f)
쫓아내지 못하매(27g)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27h)
그 땅에 거하였더니(27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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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28a)
가나안 사람에게(28b)
사역을 시켰고(28c)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2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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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임이(29a)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29b)
쫓아내지 못하매(29c)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29d)
그들 중에 거하였더라(29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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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불론은(30a)
기드론 거민과(30b)
나할롤 거민을(30c)
쫓아내지 못하였으나(30d)
가나안 사람이(30e)
그들 중에 거하여(30f)
사역을 하였더라(30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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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이(31a)
악고 거민과(31b)
시돈 거민과(31c)
알랍과 악십과(31d)
헬바와 아빅과(31e)
르홉 거민을(31f)
쫓아내지 못하고(31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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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땅 거민(32a)
가나안 사람 가운데(32b)
거하였으니(32c)
이는(32d)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3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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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달 리가(33a)
벧세메스 거민과(33b)
벧아낫 거민을(33c)
쫓아내지 못하고(33d)
그 땅 거민(33e)
가나안 사람 가운데(33f)
거하였으나(33g)
벧세메스와(33h)
벧아낫 거민들이(33i)
그들에게(33j)
사역을 하였더라(33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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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리 사람이(34a)
단 자손을(34b)
산지로 쫓아 들이고(34c)
골짜기에 내려오기를(34d)
용납지 아니하고(3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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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하고(35a)
헤레스산과 아얄론과(35b)
사알빔에 거하였더니(35c)
요셉 족속이 강성하매(35d)
아모리 사람이 필경은(35e)
사역을 하였으며(35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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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리 사람의 지계는(36a)
아그랍빔(36b)
비탈의 바위부터(36c)
그 위였더라(36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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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승리_Incomplete victory.
거절한 승리_I refused to win.
이를 수 없는 승리_A victory that can't be reac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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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주께서 은혜를 주셨으면 그 은혜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며 주님의 말씀과 약속에 대한 깊은 신뢰의 삶을 살아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항상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대강만 가지고 세밀한 문제에 대해서는 자세히 주의할 시간이 없다하고 정력이 없다하고 그리고 또 바쁘다고 하는 것들을 구실 삼아 결국 은혜를 역이용하여 그릇되게 행했던 일이 참으로 많았고 그 결과로 이스라엘이라는 큰 교회가그만 여러 번 불순종하는 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날도 진리와 비진리가 더불어 같이 있어서 개인의 정신을 혼탁하게 만들고 잘못된 것이지만 그냥 넘어 감으로 잘못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사는 현실이 참으로 부끄러운 것을 고백하나이다. 주님 부디 오늘이라고 하는 동안에 주신 은혜가운데 더욱 진실히 서있게 하시고 항상 배우지만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반성하게 하시어 주께서 저를 더욱 징계 하시되 빛을 비추시고 깨달음을 주시기를 간구하옵나이다.
Lord, if You have shown us Your grace, we should serve You with that grace and live a life of deep trust in Your word and promises. However, they were unable to do so, and they always had only a rough idea of God, saying they had no time to pay close attention to the finer details, and that they were too fatigued, and that they were also too busy, using these excuses as a pretext. As a result, there were many instances where they misused grace and acted in error, and as a result, the great church called Israel appeared many times in disobedience. Even today, truth and falsehood coexist, clouding the mind of individuals, and though it is wrong, we live in a reality where we simply overlook it and do not even realize that it is wrong, which I confess is truly shameful. Lord, please help me stand even more faithfully in the grace You have given me while this is called today, and always make me reflect on why I remain in a state of learning without truly understanding. I pray that You discipline me further, shine Your light upon me, and grant me enlightenment.
2026.9.3.thu. Clay
신학 비평//
이스라엘의 실패는 믿음이 부족해서였을까,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신앙의 타협은 언제부터 불순종이 아니라 현실적인 선택처럼 보이기 시작하는가? 사사기 1장의 마지막 부분은 이상할 만큼 반복적입니다. 쫓아내지 못하였고, 쫓아내지 못하였고, 또 쫓아내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정복 실패처럼 보이지만 반복해서 읽으면 표현의 미묘한 변화가 눈에 들어옵니다. 문제는 그들이 정말 쫓아낼 능력이 없었느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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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낫세의 경우 결정적인 단서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강성해진 뒤에도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않고 사역을 시켰습니다. 힘이 없어서 못한 것이 아닙니다. 힘이 생겼는데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사사기 1장의 문제는 믿음과 불신앙이라는 내면의 문제를 넘어 정치와 경제의 문제로 확장됩니다. 가나안 사람을 제거하는 것보다 노동력으로 사용하는 편이 이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보다 경제적 효율성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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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불순종은 노골적인 하나님 거부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합리적인 얼굴을 하고 등장합니다. 이 점에서 불완전한 승리라는 표현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승리를 완성하지 못한 것만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완성하고 싶어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복해야 할 사람을 노동력으로 바꿀 수 있다면 죽이거나 추방하는 것보다 훨씬 실용적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위기는 패배에서만 발생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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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성공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신의 계산법을 더 신뢰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거절한 승리라는 표현이 오히려 본문의 핵심에 가까워 보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승리와 이스라엘이 원하는 승리의 내용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충실한 백성을 요구하지만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가나안 경영을 원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거절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은 계속 받고 싶은 모순이 발생합니다. 그러다가 관계가 역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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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가나안 사람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합니다. 그런데 아셀에 이르면 아셀이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합니다. 단 지파에 이르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 아모리 사람이 단을 산지로 밀어내고 골짜기로 내려오지 못하게 합니다. 이 문장의 주어가 바뀌는 과정이 무섭습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나중에는 가나안이 이스라엘이 어디에서 살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타협의 결과는 단순히 조금 세속적으로 사는 정도가 아니라 결국 누가 누구의 삶을 규정하는가라는 주도권의 문제로 발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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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단 지파의 실패를 단순히 믿음이 약해서라고 설명하는 것도 부족합니다. 단의 패배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개인적 믿음 부족이 아니라 앞선 지파들이 반복해온 타협이 구조화된 결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사기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죄는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는 그것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다음에는 그것을 이용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그것이 나의 삶의 영역을 결정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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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본문을 개인의 영적 전쟁에만 적용하면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 있습니다. 특히 사업장에서 어떻게 소금을 유지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결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세상과 접촉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돈과 효율과 경쟁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무엇만큼은 거래하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사람입니다. 사업을 하면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현실과 타협하는 모든 행위가 죄도 아닙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이익 때문에 옳고 그름의 기준 자체를 바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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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내가 돈을 사용하지만 어느 순간 돈이 나의 판단 기준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킨 장면이 불편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을 지배한다고 생각했지만 바로 그 선택을 통해 가나안의 가치체계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더 불편한 문제를 피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정복 명령과 진멸을 오늘날 그대로 윤리적 모범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가나안 정복 서사에는 현대 독자가 반드시 씨름해야 할 폭력의 문제가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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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가나안 사람을 오늘날의 악이나 비신자와 곧바로 동일시하여 쫓아내야 한다고 적용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오히려 사사기의 신학적 질문은 타자를 제거하라는 데 있다기보다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에게 맡겨진 정체성과 사명을 어떻게 욕망과 이익 때문에 변질시키는가에 있다고 읽는 편이 더 생산적입니다. 그렇게 보면 벧엘에서 살아남은 사람에 대한 평가도 조금 열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를 단순히 자기 나라를 배신한 사람이라고 확정하기에는 본문이 그의 내면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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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합처럼 신앙고백도 없지만 그가 왜 협력했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가 떠나서 또 다른 루스를 세웠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성읍 하나를 무너뜨렸지만 루스라는 이름은 다른 장소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이 장면은 상징적으로 강렬합니다. 인간은 외부의 성벽 하나를 무너뜨렸다고 해서 자신이 싸우던 세계를 완전히 제거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욕망과 문화와 가치체계는 장소를 옮겨 다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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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제거했다고 선언하는 것보다 내가 그것을 다시 생산하고 있지는 않은지 묻는 일이 더 어려운 이유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기도문의 고백이 본문과 잘 맞닿아 있습니다. 항상 배우지만 깨닫지 못한다는 문제입니다. 신앙의 실패는 말씀을 몰라서만 생기지 않습니다. 알고 있는 말씀과 실제 삶 사이에서 매번 작은 예외를 허용하면서 생길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바쁘니까, 이것은 현실이니까, 이것 정도는 괜찮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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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은 예외들이 반복되면 어느 날 내가 가나안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이 내 안에서 무엇이 정상인지를 결정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공주야. 인생이 장기전이라는 말은 오래 버티라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