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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38)
[구사일생(九死一生)]
설원.
눈으로 시작해서 눈으로 끝나는 곳, 불어오는 바람에 섞여 있는 것도 눈이고, 바람을 따라 날리는 것도 눈이다. 북방은 온통 눈 천지였다. 지평선인지 수평선인지 알 수 없는 새하얀 벌판을 기다란 행렬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허연 입김을 토하며, 짐을 싫은 눈썰매를 열심히 밀고 있는 자들. 폭설이 쏟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흘러내렸다. 수신궁을 떠나온 수신가 일행이었다.
“젊은것들이라 역시 정력이 펄펄 넘치는구먼.....”
구슬땀을 흘리며 썰매를 미는 수신가 인물들을 모사는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지, 벌써 십여 일 동안을 줄기차게 썰매를 밀고 있으나 그들의 얼굴에서는 피곤한 기색 하나 없었다.
“으이그 추워라! 저것들을 보니까 더 춥네!”
수신가 인물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허연 입김을 보던 모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참, 형님! 저기 조우령이란 아이 있잖소.”
다른 이들과 같이 썰매를 밀고 있는 조우령을 보며 모사는 소살우를 불렀다.
“조우령? 왜?”
“아니 다른 게 아니고 저 정도면 인간성을 괜찮지 않소? 대장이라고 뻐기는 것도 없고, 나이에 비해 몸매도 처녀처럼 탱글탱글하고, 가슴도 큰 것 같고. 수신가 가주니까 돈도 좀 있을 테고. 딸린 식구들이 많은 게 단점이긴 한데....... 형님 보기엔 어떻소?”
“넌 열여덟 살 아니면 안 된다며. 왜 암내를 맡으니까 맘이 변하냐?”
“하여간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누가 내 짝으로 찍었답니까? 며느릿감으로 어떠냐고 물어보는 거지.”
“며느릿감? 그러니까 소령, 아니 형님 짝지?”
소살우의 말에 석두와 일휘도 놀란 얼굴로 조우령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니까 그러네. 형수님하고 닮았잖소. 그럼 둘을 붙여 주면 물건 하나 나올 것 같아서 말이오.”
“에라 썅! 물건이 뭐냐, 새꺄. 꼭 그렇게 무식한 티를 내고 싶냐?”
“넌 좀 가만있어, 새끼야. 저들을 데려가는 조건이 그거였냐?”
주먹을 들어 올리는 소살우를 말린 석두는 놀란 눈으로 모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맞소, 아들이나 딸 상관없이 하나만 낳아 달라고 했소. 그럼 중원에 자리 잡을 때까지 도와준다고.”
“그놈 참! 어떻게 그런 대견한 생각을 했냐?”
일휘 역시 놀랍다는 얼굴로 모사를 보며 말했다. 참으로 그럴싸한 발상이었다. 조우령과 백산이 자식을 낳는다면 소살우를 닮든지 아니면 천영 형수님을 닮은 자식이 나올 것이다.
소살우를 닮는다면 그는 잃었던 자식을 되찾는 게 되고 천영 형수님을 닮은 자식이 나온다 해도 백산의 딸인 소령을 닮았을 터이니 그 또한 환영할 일이다.
“이것들이 단체로 노망난 거야 뭐야!”
여태 들어 올린 주먹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소살우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당사자의 입장은 생각지도 않고 막무가내 식으로 밀어붙이는 일행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가만있어, 새꺄. 정 안되면 우리가 무릎 한 번 더 꿇으면 되잖아. 네 녀석 장가보낼 때도 꿇었는데 지금이라고 못할까. 그때 난 무릎까지 까졌어, 임마.”
기억을 되짚는 듯 일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상사병에 걸린 소살우 때문에 스무 살 먹은 처녀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죽어 가는 총각 하나 살려 달라고.
그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녀석이 낳은 아들을 장가보낼 궁리를 하다니. 참으로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씨팔! 내 자식인데 왜 형님들이 무릎을 꿇어. 무릎을 꿇어도 내가 꿇어야지! 불러!”
“네?”
놀란 얼굴로 모사는 소살우를 보았다.
“불러오라고! 며느리를 불러오란 말이다, 자식아!”
“알았소. 좋으면 좋다고 할 것이지 공연히 승질을 내고 지랄이야. 저 아이 데려오면 막이나 치시오. 그래도 수신가의 가준데 체면은 지켜 줘야지.”
투덜거린 모사는 썰매를 슬쩍 치더니 조우령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잠시 후.
호랑이가 끌고 있는 썰매로 올라온 조우령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일행을 쳐다보았다.
“왜 저를.......헉!”
조우령은 경악한 얼굴로 섯다 일행을 보았다. 자신을 기점으로 둥글게 둘러싼 그들의 몸에서 선홍빛 광채가 솟구치더니 썰매 주변으로 막을 치는 것이었다. 마치 비단을 사방으로 둘러친 것처럼 보였다.
“앉아라!”
“네.......”
자리에 앉으려던 조우령은 일순 멈칫했다. 소살우를 비롯한 다섯 명 전부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던 탓이었다. 잠시 주춤하던 조우령은 소살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만점!”
“나도 만점!”
일순 석두와 일휘의 입에서 동시에 만점이란 말이 흘러나왔다.
“이 녀석에게 얘기는 들었다. 내 며느리가 되고 싶다고 했다던데 맞느냐?”
석두와 일휘를 흘끔 쳐다보던 소살우는 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깜짝 놀란 조우령은 의아한 얼굴로 모사를 쳐다보았다.
“내가 말했지 않느냐, 형님이자 조카라고. 그러니까 네 앞에 눈이 있는지 없는지 구분이 안 가는 인간의 아들인데 내겐 형님이 된다는 말이다.”
“그럼!”
조우령은 정신이 없었다. 자식을 낳아 주기로 계약을 하긴 했다. 그리고 영혼이 빙의된 묵안혈마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가 설마 광마도 소살우의 아들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
“맞다, 내 자식의 애를 낳아 주기로 했다면 넌 내 며늘아기가 된다는 말이다.”
“설명을 좀 해 주시면.......”
문득 울고 싶었다. 차라리 겉모습까지 늙었더라면 지금처럼 창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이제 갓 사십대 정도. 놀림을 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선 내 질문에 먼저 대답을 해. 양친은 살아 계시냐?”
“네? 예! 이십 년 전에 두 분 다 돌아가셨습니다.”
“쯧쯧! 조.......”
“조실부모!”
소살우가 말을 더듬자 곁에 있던 모사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맞아 조실부모했다는 말인데. 혼자 크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먼. 그럼 글은 어느 정도 배웠느냐?”
“.......?”
“글이란 천자문이나 논어 이런 걸 말하는 거다.”
의문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조우령을 향해 이번에도 역시 모사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주역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조우령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니, 분위기 자체가 공손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반노환동에 도달한 사람이 한두 명도 아니고 다섯 명이다. 그들 전부가 자신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니.
“주역이라....... 그거 수준이 높은 거냐?”
“끄응! 모르면 아예 묻지를 말든지, 아니면 공부를 좀 하든지. 이래가지고 며느리 시험 잘도 보겠다. 천자문도 간신히 뗀 형님에게는 그림의 떡이니까 수준이 높다는 것만 알면 되오. 공부를 할 만큼 했다는 말로 알아들으면 되오.”
“흐음! 그 인간도 나처럼 천자문밖에 모른다. 쉽게 말하면 대가리에 똥밖에 없는 인간이 힘만 무식하게 세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모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소살우는 조우령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서책으로 세상을 사는 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오히려 많은 경험을 쌓으신 그분께 배워야 할 것이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해야 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질문을 받았으니 평소 생각하던 바를 이야기했을 뿐이다.
“만점!”
“만점!”
또다시 석두와 일휘가 만점을 외쳤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하겠다. 만일 저기 있는 수신가 가족과 사랑하는 남편 중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땐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네?”
말문이 막혔다. 질문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수신가 가족들과 남편 중 누굴 택할 거냐고 묻다니.
“내 말이 좀 어려웠나 보구나. 간단하게 말하면 네가 남편을 택하면 수신가를 버려야 하고, 수신가를 택하면 남편을 버려야 하는 그런 선택을 말하는 거다.”
“아직 사랑을 해 보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만일 제가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를 선택하겠습니다.”
“이유는?”
“저들은 제가 없어도 살아 나갈 겁니다. 하지만 남편이 없다면 저는 살아가기 힘들겠지요. 남편도 그럴 테고.”
“합격!”
“합격!”
석두와 일휘의 입에서 합격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살우는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부탁이네! 적선하는 셈치고 그 인간을 받아 주게. 정 아니다 싶으면 떠나도 말리지 않겠네. 그 인간이 자실하지 않도록 만 해주면 자네가 원하는 걸 전부 들어 주겠네.”
“저기 이러시면........”
소살우가 돌변한 행동에 조우령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더듬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시아비처럼 무게를 잡던 사람이 갑자기 무릎을 꿇다니.
“수신가를 강호 제일 세력으로 만들어 달라고 해도 해 주겠네.”
“무슨 말씀인지 알아야.......?”
급기야 소살우가 고개까지 숙이자 덩달아 고개를 숙인 조우령은 난처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혼란스러웠다. 묵안혈마의 영혼이 빙의된 신체가 앞에 있는 사람의 아들의 몸이라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자살하지 못하게 해 달라는 건 또 무슨 말인지.
어정쩡하게 머리를 숙이고 있으려니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그 인간은 빙의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말이네. 저승에 있는 천영 형수님께 가야 한다면서. 그 때문에 강시로 만들어 버린 거라네.”
“그랬군요.”
모사의 말에 가슴 한편이 싸하게 젖어드는 것 같아 조우령은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이제야 머릿속이 정리되는 듯했다. 하늘에 있는 조천영이란 분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십 년 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셨지만, 서럽도록 보고 싶은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백산이란 분은 오십 년 전에 죽은 부인을 잊지 못해 자실을 시도한다고 한다. 과연 이 세상 사람들 중 몇이나 그런 사랑을 받고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어떤 생각으로 사는 사림이기에 그런 삶을 사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제 능력이 닿는다면 그분이 자살하지 못하게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자자, 그만 자세 풀고. 편히 앉아서 얘기 하세.”
환한 미소를 지은 소살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한편에 두었던 술상을 가운데로 가져왔다.
“제가 따르겠습니다!”
재빨리 술병을 잡은 조우령은 소살우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따랐다.
“편하게 앉으라니까, 그러네.”
“아닙니다. 이대로가 편합니다.”
“허허! 자네 수하들이 보고 있지 않은가. 수하들 앞에서는 언제나 수신가 가주여야지. 우리도 그만 막을 거둬야 할 것이 아닌가.”
“알겠습니다. 그럼.”
소살우의 말이 맞다 싶어 조우령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지금부터 그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전부 해 주겠네. 그래야 처음 보더라도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을 테니까. 자네도 한 잔 받게.”
슬쩍 미소를 머금은 소살우는 조우령에게 술을 권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 인간을 처음 만난 게.....”
“뇌룡현이었지요. 그때만 해도 참 좋은 세월이었는데.”
“그랬지. 형님은 사냥꾼이었지. 어린 시절 무림인들에게 마을 사람들과 가족을 전부 잃고......”
소살우가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모사가 뒤를 이었고, 그 다음은 섯다가 말을 받았다.
순식간에 조우령은 다섯 명이 하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천붕십일천마가 탄생하게 된 배경, 그들이 강호를 심판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때로는 탄식했고, 때로는 눈물을 흘렸다. 이야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우령은 백산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수신가 인물들이 의아한 얼굴로 이편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백산이란 한 인간의 삶 속에 푹 빠진 채, 그의 행적을 따라 강호를 종횡하고 있었다.
“뭐 하고 있는 것 같은가?”
수신가 좌호법인 조철정은 황당한 얼굴로 부인 조관영을 보며 물었다. 가주가 다섯 괴인에게 불려간 자 벌써 두 시진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썰매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 내려오지 않는 그녀들보다 다섯 괴인들의 행동은 더욱 괴이했다. 우는가 싶으면 화통하게 웃기도 했다. 온갖 동작과 감정을 섞어, 가주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한데 안타깝게도 내용을 들을 수 없었다.
“글쎄요. 알 수가 있나요. 음파를 차단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하여간 대단한 사람들임에는 분명하네요.”
조관영은 씁쓸하게 웃었다. 수십 년 동안 무공을 익혔고, 강호무림에 나가면 자신보다 강자가 별로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우연히 수신궁에 들른 다섯 명은 끝을 알 수 없는 강자들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소. 저런 고인들이 우릴 도와주겠다고 나선 걸 보면, 가주가 복이 있는....... 음? 음자, 저기 좀 보게.”
무엇인가를 발견한 조철정은 저면을 가리켰다. 어둠이 밀려드는 설원에 점처럼 보이는 검은 물체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고 있었다.
“곰인가? 고기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조철정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수신궁을 나설 때 음식을 준비해 오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중원으로 가는 도중 마을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들 또한 식량이 한정되어 있는 사람들.
무턱대고 팔라고 할 수가 없다. 해서 짐승이 발견되면 그때마다 잡아서 저장하고 있었던 거였다.
“가 봅시다!”
조철정은 방금 보았던 검은 물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설원을 가로질러 두 사람은 쾌속하게 쏘아져 나갔다.
온몸에 얼음을 줄줄 매달고 있는 인물. 넘어지면 일어나고, 일어났다가 다시 넘어지기를 반복하면서도 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는 북경을 떠났던 주홍이었다.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홍은 눈발을 흩뿌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북방으로 길을 잡아 무작정 도망을 쳤다. 쉬운 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과거 한 번 가 보았던 곳이기에 찾아 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자신만의 착각이었다는 사실은 설원으로 들어가면서 바로 깨닫게 되었다. 지천에 물이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설원은 사막과 같았다. 길은 물론이고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더하여 뼛속까지 파고드는 극심한 추위는 차마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살아야 했다. 이제 열여섯 된 딸을 버리고 선택한 삶. 명나라를 위해, 신음하는 백성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다.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는 건 비겁자나 하는 짓이라 여겼다.
언제부터인가 설원을 지나고 있는 자들이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동창무인들일 수도 있고, 금의위 무사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피해 더욱 빠르게 달렸다.
숨이 가슴까지 차올라 쓰러질 지경이 되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밤이면 얼음을 잘라 집을 만들어 그 속에서 쉬었다. 점점 몸은 지쳐가고 내공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한밤중에 잠시 쉬면서 꾸준히 운기행공을 했지만 그 또한 한계에 달했다.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방향을 가늠하여 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여기까진가!”
비몽사몽간에 달려온 길이 얼마인지를 모른다.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붙잡기를 수차례. 더 이상 일어설 힘이 없었다.
“부디 하연일 구했기를........”
사윗감으로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혹여 다른 생각을 가질까봐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만에 하나 거사가 실패했을 경우, 하연일 구해 줄 사람으로 그를 선택했을 뿐이다.
“드디어 쫓아 왔는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며 주홍은 눈을 감았다. 사람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지만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한순간 정신을 놓았다.
“허! 이 지경이 돼서 설원으로 오다니, 미친놈이구먼.”
정신을 잃은 주홍을 쳐다보며 조철정은 혀를 찼다. 눈발이 휘날리는 북방을 비단옷 한 벌로 횡단하는 바보가 있을 줄은 정녕 생각지 못했다. 빙공을 익힌 자신들도 두꺼운 털옷을 입고 다니는 곳이 아니던가.
“어쩌지?”
곤혹스런 얼굴로 조관영에게 물었다.
“어쩌긴 뭘 어째요. 아직 살아있으니까 구해야지. 빨리 안아요. 이러다 정말 죽겠어요.”
“끄응! 곰이었다면 식량으로나 쓰지. 이건 도무지.......”
투덜거리는 말과는 달리 조철정은 재빨리 주홍을 안았다.
“서둘러야겠네. 몸이 식고 있어.”
두 사람은 서둘러 폭설을 뚫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컹! 컹컹컹!
두 사람이 떠난 뒤 일 각 정도 지났을까. 요란한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수십 대의 썰매가 빠르게 주홍이 쓰러졌던 곳으로 다가왔다.
“놈이 쓰러진 곳은 여기요. 이제 잡았소이다.”
선두의 썰매에서 몸을 날린 무인 한 명이 주홍이 쓰러졌던 곳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기다란 창을 들고 있는 그는 탈혼창 악봉헌이란 자로 산동악가 가주인 악봉의 친동생이었다.
“끈질긴 놈이군요.”
중얼거리듯 말하며 악봉헌 곁으로 한 인물이 날아 내렸다. 커다란 강궁을 들고 있는 이자는 남천벌 사궁각 가주인 혈궁 상첨이었다. 놀랍게도 주홍을 잡기 위한 작전에서 두 세력은 합작을 하고 있었다. 상부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합작은 아니었다.
안내인 때문이었다. 북방으로 가기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용기가 아니다. 안내인과 썰매, 그 두 가지가 없으면 아무리 강한 무인이라 할지라도 설원을 건널 수가 없다. 해서 두 세력은 안내인을 구하려 북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마을을 찾았다.
그런데 남아 있는 안내인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안내인을 차지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던 두 사람은 싸워봐야 손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합동작전을 하게 되었다.
“눈은 지겹게 오는군. 이 근처 어디에 숨어 있을 거요. 이제부터는 각자 알아서 합시다.”
한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쏟아지는 눈발을 보며 악봉헌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럽시다. 운이 좋은 쪽이 주홍의 목을 취하겠군요.”
악봉헌의 말에 상첨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웃고 있는 건 그의 입뿐이었다. 악봉헌을 쳐다보는 그의 눈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지금껏 이어졌던 공조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합작을 시도할 때부터 이야기되었던 사항이다. 주홍을 발견할 때까지만 합작을 하기로 하였고, 목을 취하는 순간 다시 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인 것이다.
“그럼 행운을 비오. 악가 무인들은 주변을 수색하라!”
상첨을 향해 포권을 취한 악봉헌은 자신의 썰매로 몸을 날리며 고함을 질렀다.
“가자!”
컹! 컹컹!
십여 대의 썰매가 설원을 뚫고 전면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은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전면에서 느릿느릿 다가오는 행렬을 보았던 탓이었다. 악가 무인 일행은 눈을 비볐다. 엄청난 수의 행렬이 폭설을 뚫고 이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악봉헌은 놀란 얼굴로 전면에서 다가오는 자들을 보았다. 아직 멀리 떨어진 채여서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썰매만 해도 삼십여 대에 달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썰매를 밀고 온다는 것이었다. 커다란 짐승이 끌고 있는 한 대의 썰매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사람들이 밀고 있었다.
“저들이 구해 간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다시 힘을 합쳐야겠소이다.”
상첨이었다. 악봉헌과는 달리 상첨은 주변을 꼼꼼하게 살폈다. 주홍은 움직일 여력이 없다고 판단했고, 그가 움직였다면 발자국이 남았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쌓인 눈을 향해 몇 번의 장풍을 날려 보았으나 사람 발자국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결국 누군가 주홍을 구해 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도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
그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악봉헌을 뒤따라온 이유였다.
“좋소, 일단 저들에게 가 봅시다, 전진하라!”
멈춰 섰던 스물다섯 대의 썰매가 빠르게 전면으로 나아갔다. 잠시 후, 북황련과 남천벌 무인들의 눈에 전면 상황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이백 명 남짓, 상당한 인원이었다.
“놈들이 구해 간 게 맞군!”
악봉헌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유일하게 짐승이 끌고 있는 썰매 위에서 주홍을 발견했다. 치료를 하고 있는지 한 인물이 빠르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아마 추궁과혈을 하고 있는 중이리라.
“나는 북황련 소속 산동악가의 악봉헌이오. 신분을 밝히시오!”
이편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저 없이 다가오는 자들을 향해 악봉헌을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상대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썰매를 밀고 올 뿐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악봉헌은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분명 북황련이라 했고 산동악가의 악봉헌이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뜨거운 뭔가가 머리끝까지 확 솟구쳤다.
효과가 있었던지 호랑이가 끄는 썰매를 타고 있던 자가 이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에 악봉헌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듣고 있어, 임마. 난 전영이다. 됐냐?”
“이익!”
“참으시오, 악 대협. 우리에게 필요한 건 주홍의 목이지 불필요한 살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창을 틀어쥐고 몸을 날리려는 악봉헌을 상첨이 말렸다.
일반 양민들도 아니고, 조금 전 주홍을 데려갔던 것을 보면 저들 또한 무공을 익힌 자들. 공연히 싸움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하는 말이었다.
악봉헌이 진정하는 기미가 보이자 상첨은 앞으로 나서서 정중하게 말했다. 물론 목소리에 내공을 싣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악봉헌과는 달리 자신의 말은 들어줄 것이라고.
탈혼창 악봉헌보다는 혈궁 상첨이란 이름이 더 알려졌다는 사실을 증명하고픈 생각도 있었다.
“난 남천벌 사궁각 각주 상첨이오. 그대들 마차에 있는 그자를 쫓아 왔소이다.”
이 정도만 말하면 알아서 주홍을 내놓을 거라 확신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일반 무인들은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숙이는 남천벌과 북황련 무임들이 아닌가. 하지만 상첨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알았어.”
조금 전 말했던 그자는 그 한마디를 끝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부르르, 상첨은 불끈 활을 틀어쥐었다. 악봉헌에 이어 자신마저 무시당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상첨은 이내 표정을 풀었다. 아직 못했던 말이 남았던 탓이었다.
“그자는 역적이오. 좋은 말할 때 넘겨주는 게 신사에 이로울 것이오.”
‘놈, 이제는 넘겨주지 않을 수 없을 거다.’
내심 중얼거리며 상첨은 조금 전 고개를 돌렸던 자의 등을 주시했다.
“죽일 놈들!”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들의 모습에 마침내 상참은 진득한 욕설을 뱉어내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모사 일행은 반응을 보였다. 다만 그들의 시선은 뒤에 있는 남천벌이나 북황련 무인이 아닌 석두에게 쏟아지고 있을 뿐이었다.
“아는 놈이오?”
주홍의 얼굴을 가리키며 모사는 석두에게 물었다.
“가만? 이 사람은.......”
주홍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던 석두는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경왕 주홍. 아들인 승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그 이름. 실제 황제가 되어야 할 사람은 그라고 했다. 한 번에 불과했지만 인사를 나눈 적도 있었다.
적룡왕이라 불렸던 자, 황실의 이인자였던 주홍이 분명했다.
“형님 답답하게 왜 그러쇼. 이 자식이 누군지 말 좀 해 보라니까.”
“깨어나는데 직접 물어 봐라!”
섯다의 추궁과혈에 의해 정신을 차리는 주홍을 턱으로 가리키며 석두는 말했다.
“으음!”
석두의 말마따나 주홍은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흐릿하지만 자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살아 있는 것으로 봐서는 추격하던 자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며 눈을 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눈을 뜨기 위한 주홍의 노력은 헛되이 끝나고 말았다.
퍼억!
관자놀이에 전해지는 충격에, 점점 맑아지던 머리가 다시 어둠속으로 빠져 버린 것이다.
“해롱거리는 놈에게 물어보기 뭘 물어 보오. 형님이 말해 보시오.”
주홍의 관자놀이에 주먹을 날려버린 모사가 석두를 보며 재차 물었다.
“주홍이라고 황제의 동생이다.”
“주홍!”
석두의 말에 먼저 반응을 보인 이는 한편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조우령이었다. 화들짝 놀란 얼굴로 조우령은 주홍을 쳐다보았다.
사저의 남편이다. 그가 조자령을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수신가의 가주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수신궁을 떠나면 죽는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저는 사랑을 택했다. 그랬던 사저의 남편이 죽어 가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는 사람입니까, 형수님!”
“네?”
주홍이란 말보다 더한 충격을 받은 듯, 조우령은 경악한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백산이란 사람의 아이를 낳아 달라고 협박했던 그가 아닌가. 그런데 형수님이라니.
“뭘 놀리고 그러십니까. 형님의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애는 우리 조카가 되고, 조카의 어머니는 형수님이 되는 건 당연한 건데요. 설마 아이를 낳아 주겠다고 했던 말 그냥 해 본 말은 아니지요?”
“그래도, 이건.......”
할 말을 잃은 듯 조우령은 더듬거렸다. 엉겁결에 아이를 낳아 주기로 했고, 백산이란 사람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팔십이 넘은 이들에게 형수님이란 말을 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지금은 힘들겠지만 차차 적응이 될 겁니다, 형수님. 그보다는 이놈에 대해 말을 해주십시오.”
“휴우! 이분은.......”
나직하니 한숨을 내쉰 조우령은 주홍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실상 그에 대하 아는 것도 별로 없었다. 황실의 이인자였다는 사실과 사저가 죽도록 사랑했다는 정도였다.
“그럼, 이놈이 여기 나타난 건 형수님을 찾아온 거로군요. 도움을 청하기 위해. 사전가 하는 분하고는 친했습니까?”
“일상적인 관계였을 뿐 특별히 친하다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항렬이 같아 사저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수신가는 전부가 친척입니다.”
“그럼 저 자식들에게 줘 버려도 문제가 아닐 것 같은데. 형님은 어떻소.”
고개를 끄덕이던 모사는 석두를 보며 물었다.
“글쎄, 한 번 보았던 사람이라 개떼들에게 던져 주기도 좀 그렇구나. 우리 품으로 들어온 것도 인연인데, 살려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허! 자식 공연히 나타나서는 사람 고민되게 만드네.”
주홍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모사는 악봉헌과 상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이 춥기는 추운 모양이네. 저 자식들 얼굴이 벌개졌소, 형님.”
잔뜩 얼굴이 붉어진 두 사람을 보며 모사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모사의 말대로 상첨과 악봉헌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주홍만 건네주면 충돌 없이 그냥 떠나려고 했었고, 놈들 또한 그럴 기미를 보였다. 그런데 마지막에 형님이라 불렸던 외팔이 녀석이 산통을 깨버린 것이다.
“정녕 죽고 싶은 게냐!”
마침내 악봉헌은 참지 못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무림에서는 말보다 행동이 먼저다, 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바로 곁에 있는 상첨 때문에 참았다. 그런데 말로 해서는 안 되는 자들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봐, 임마! 형수님, 여기 있는 좀팽이들 중에서 무공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 있습니까?”
악봉헌을 향해 슬쩍 인상을 쓴 모사는 이내 부드러운 얼굴로 조우령을 보며 물었다.
“제가 어떻게.......”
조우령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자꾸만 형수님이라 부르는 호칭이 부담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더욱 답답했다.
“살우 형님 무공을 구경하고 싶다고요? 형님, 형수님이 형님 무공을 보고 싶대요.”
마치 조우령의 대변자인 양 모사는 소살우를 쳐다보았다.
“씨팔! 알았어, 개자식아!”
모사를 향해 욕설을 뱉어 낸 소살우는 벌떡 일어났다. 조우령을 형수님이라 깍듯이 부르는 모사의 의도를 왜 모를까. 행여 자신이 조우령을 며느리로 부를까 봐 미리부터 선수를 치고 나온 것이다. 나중에 백산을 만났을 때 소령으로 대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을 그런 식으로 하고 있다.
일순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인정해야 하는데, 그를 형님으로 인정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질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환한 미소를 머금던 소살우는 천천히 썰매에서 내려 북황련과 남천벌 무인들 앞으로 다가왔다.
“허! 이런 미친놈을 봤나!”
악봉헌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다가오는 자를 보았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자의 몸에서는 무인이라면 당연히 풍겨야 할 기세조차 흘러나오지 않는다. 더구나 왼팔이 없는 자는 무기조차 들지 않고 있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산동악가 무인 삼십 명, 남천벌 사궁각 고수 오십 명을 합치면 전부 팔십 명이나 되는 무인들이 아닌가. 그런데 혼자 오다니. 더욱 황당한 노릇은 썰매 위에 있는 자들의 표정이다.
마치 남의 집 불구경 나온 자들의 표정이 그러할까. 걱정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콧구멍을 후비는 자들마저 있었으니. 그 참에 귓전으로 더욱 황당한 말이 들려왔다.
“아가야, 지금 난 기분이 무척 더러워. 저기 썰매에 앉아 있는 전영이라는 개자식이 말이다. 며늘아기를 형수님으로 만들어 버렸단 말이다. 그런데 지랄 맞은 건 뭔지 아냐? 저 새끼 말이 맞다는 거야. 뭐라 반박할 말이 없다는 거지. 오늘....... 똥 밟았다고 생각해라. 아니면 재수 없는 날이라고 생각하든지.”
소실우는 흰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살심(殺心)이 극에 달했을 때만 나타나는 그 미소였다.
“개자식! 죽고 싶으면 뭔 짓을 못할까! 먼저 남아 있는 오른팔을 잘라서 몸의 균형을 맞춘 다음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여주겠다!”
진득한 살기를 쏟아낸 악봉헌은 짓씹듯 말했다.
악봉헌의 말이 끝나자마자 곁에 서 있던 세 사람이 전면으로 나섰다. 악치운, 악사운, 악가운으로 그들 삼인을 가리켜 악가삼창(岳家三槍)이라 부르고 있다.
“호오! 창을 쥐고 강기를 터득한 걸 보면 제법 한가락 하는 놈인가 보구나.”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삼인을 보며 소살우는 놀란 듯 너스레를 떨었다.
“오른팔을 자르고 천천히 죽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다리부터 자르고 싶구나! 두 다리를 잘라 내고 그 다음에 오른팔을 자를 거란 말이다!”
대형 악치운은 허리를 한껏 앞으로 내밀었다고 전면으로 튕기듯 나아가며 소리를 질렀다. 허공에 떠 있는 상태에서 가공할 속도로 보이는 경공술인 궁신탄영(弓身彈影)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악치운이 공격을 시작함과 동시에 그의 좌우에 있던 두 사람도 몸을 날리며 소살우를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가공할 기운이었다. 그들의 창이 움직임과 동시에 내리던 폭설이 자취를 감췄고, 주변은 진공 상태로 변한 듯했다. 반투명한 강기를 머금은 삼 인의 창은 사방으로 살기를 뿌리며 소살우 면상과 심장 그리고 단전을 노리고 쇄도해 들었다.
그러나 목표가 된 당사자인 소살우는 태연했다. 그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싶은 순간, 그의 양발은 눈 위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붉은 기운을 머금은 오른팔과 오른다리를 동시에 횡으로 휘둘러 얼굴과 단전을 노리고 들어온 창을 쳐냈다. 소살우의 다음 동작은 더욱 빨랐다. 다른 창보다 한 걸음 늦게 도달한 창의 몸체인 창간을 타고 그의 신형은 빠르게 돌았다.
일 장에 달하는 창의 길이는 너무나 짧았다. 순식간에 악가삼창의 셋째인 악가운 앞에 도착한 소살우는 돌아가던 회전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 왼발을 번쩍 쳐들었다.
악가운은 질겁했다. 자신의 창을 피한 것만 해도 대단한 동작이거늘 창간을 타고 접근하다니. 더구나 눈앞으로 커다란 발이 다가오고 있다. 다급해진 악가운은 물러나기 위해 창을 끌어당겼다.
“헉!”
악가운의 입에서 나직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자석이 붙어버린 듯 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기를 버리면 조금은 더 살 수 있었을 것을.”
“크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악가운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새하얀 벌판을 붉게 물들였다. 단지 회선각에 당했을 뿐인데 악가운의 목은 칼에 잘린 것처럼 매끈했다.
“아우야!”
“지금 남 걱정 할 때가 아니다. 네놈의 목숨을 구할 생각을 할 때란 말이다.”
악가운의 목을 잘라 버린 소살우는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악치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움직인 거리는 한 걸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신형은 악치운의 창을 머리 위로 흘렸고, 하나밖에 없는 오른팔은 상대의 단전으로 틀어박히고 있었다. 아울러 소가 뒷발질하듯 차댄 왼발은 둘째 악사운의 턱에 작렬했다.
“커억!”
“아악!”
비명 소리보다 소살우의 신형이 더욱 빨랐다. 악가삼창을 해치운 소살우는 먹이를 노리는 표범처럼 악가 무인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산동악가라는 위명에 걸맞게 악가 무인들의 대응도 신속했다.
장로 세 명이 거의 동시에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뛰어 들어온 소살우를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수십 개의 창이 비처럼 소살우 전신으로 쏟아졌다.
창! 창창창! 창창!
소살우의 몸 여기저기서 푸른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금강불괴(金剛不壞)?”
“크악!”
튕겨 나온 창을 보며 놀라 소리를 질렀던 무인은 그보다 더 큰 비명을 지르며 눈 위로 피를 쏟았다. 왼팔이었지만 소살우는 성난 황소였다. 물러섬이 없다. 오직 눈앞에 있는 창을 치우며 악가 무인들을 도륙했다.
여전히 그의 몸에서는 어떤 기운도 흘러나오지 않는 듯했다. 적의 창이 도달한 그 순간, 붉은 기운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 붉은 기운은 가공했다.
창두를 가루로 만들고, 창을 튕겨낸다. 그리고 어김없이 악가 무인들은 목을, 허리를, 가슴을 틀어쥐고 바닥으로 몸을 뉘였다.
“상 각주, 뭐 하고 있는 거요! 활을 쏘시오! 놈에게 활을 쏘란 말이오!”
해쓱한 얼굴로 악봉헌은 상첨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 보고 있는 상황이 꿈처럼 느껴졌다. 꿈이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는 일이다. 단 일인에 의해 악가 무인 삼십 명이 썩은 짚단처럼 쓰러지고 있다.
별다른 기세를 풍기지 않은 자이기에 간단하게 끝날 걸로 알았다. 악가삼창 세 사람이면 넘칠 거라 여겼다. 그런데, 그들의 죽음은 시작에 불과했고, 나머지 수하들 또한 제대로 서 있는 자가 몇 없었다.
“사궁대는 활을 쏘아라!”
상첨은 광포하게 고함을 질렀다. 처음엔 악가 무인들이 당하는 모습을 즐기는 측면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이게 아니다 싶었다. 지금 상태가 지속되면 악가 무인들뿐만 아니라 자신들 또한 무사할 거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첨의 고함소리는 다른 절대자를 불러들이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으니.
“에라! 나쁜 새끼들아. 정당하게 한 놈씩 덤벼야지. 너무 비겁하잖아, 자식들아.”
소살우의 싸움을 지켜보고만 있던 모사가 썰매를 박차고 나와 사궁대를 향해 돌진했다. 소살우와는 달리 모사의 몸은 사궁대와 가까워질수록 검게 변했고, 그들의 바로 앞에 도착해서는 번쩍이는 광채를 토해 냈다.
“독이다!”
첫 시위를 놓고 두 번째 시위를 장전하던 사궁대 무인이 덜덜 떨며 고함을 질렀다. 바로 눈앞에서 녹아가고 있었다. 맨 먼저 화살이 녹더니 활이 녹고, 그 다음에 활과 화살을 잡았던 손이 녹았다. 눈 녹듯 급속하게 녹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몸이 녹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죽음보다 더한 공포였다. 몇몇 사궁대 무인들은 팔이 채 녹기도 전에 거품을 쏟아내며 쓰러지고 말았다.
둥글게 반원을 그리고 있던 사궁대 진형이 급격히 무너져 내렸다. 활이 소용없는 자였다. 쏘았던 활마저 녹아 버리는데 무슨 수로 그를 잡는단 말인가.
어느새 적의 수는 둘에서 넷으로 늘었고, 이번에는 얼음 조각으로 부서지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수신가 좌우호법인 조철정과 조관영이 조우령의 지시로 합세한 것이었다.
혼이 빠져 버린 자들.
수하들을 도륙하는 네 사람을 지켜보는 악봉헌과 상첨의 상태가 그랬다. 그들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죽어가는 부하들을 쳐다볼 수가 없다.
무공이 약한 자들이 아니었다. 너무 강해서, 넘치도록 강해서 외부로 나타나지 않았던 자들이었다. 몸은 금강불괴고, 이형환위에 허공답보, 그리고 능공허도를 자유자재로 펼치는 초극의 고수들.
그런 자들을 향해 큰소리를 쳤다.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를 질렀고, 부하에게는 오른팔을 자르고 고통스럽게 죽이라고 했다. 심검(心劍)을 성취한 자를 향해.
“어떻게, 어디서 저런 자들이 나타났단 말이냐. 어디서.......”
창이 떨어진 것도 알지 못했다. 처음 보는 자들, 그런 자들이 강호상에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다. 상첨 또한 악봉헌과 다르지 않았다.
“웃으며 살인을 하는 자! 웃으며 살인을 하는 자!”
미친 듯 중얼거리던 상첨은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강호 전설을 떠올렸던 탓이다. 환하게 웃는 얼굴과는 절대 마주치지 말라고 했다. 그는 살심이 끓어올랐을 때만 웃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왼팔이 없다고 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는 팔십이 넘었단 말이야. 저렇게 젊은 놈이 아니라고!”
상첨은 발악하듯 고함을 질렀다. 광마도 소살우, 천붕십일천마의 일인인 그가 떠올랐다.
“맞아! 나도 내가 이렇게 젊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시 새 장가를 꿈꾸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단 말이다!”
“정녕 광마도 소살우란 말이.......”
우두둑!
상첨은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뼈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목은 획 한 바퀴를 돌아 버렸다. 전면을 쳐다보는 그의 두 눈에는, 독공을 쓰는 자의 양손이 악봉헌의 뺨을 사정없이 갈기는 장면이 들어왔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상첨은 알아보지를 못했다.
아울러 한 번 맞을 때마다 악봉헌의 얼굴 살점이 뜯겨지고 있다는 사실도 그는 알지 못했다.
“앙천마마묵독공이었더냐? 천붕십일마.......”
머리가 녹기 직전 악봉헌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왜 나왔어, 새꺄!”
모사를 향해 다가가며 소살우는 고함을 빽 질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염장을 팍팍 질러 싸울 수밖에 없게 했던 놈 아닌가.
“내가 왜 나왔지? 형님이 화풀이할 동안 구경만 하기로 했는데?”
소살우의 물음에 일순 모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맞다. 형수님이 아버님을 도와달라고 하는 바람에 나왔소.”
갑자기 생각난 듯 모사는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었다.
“아버님?”
“그렇다니까, 내 귀로 분명히 들었소. 아버님이 걱정된다고 하면서 저 아이들을 내보내잖소. 그래서 나왔지, 뭐.”
모사는 멍한 얼굴로 이편을 쳐다보고 있는 조철정과 조관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버님이라....... 참 듣기 좋은 말이네.”
소살우의 입꼬리가 귀밑까지 찢어졌다. 아버님이란 한 마디에 조금 전 섭섭했던 마음이 씻은 듯 사라졌다.
“형수님이 형님을 아버님이라 부르는 것까지는 말리지 않겠소. 하지만 형님은 절대 안 되오. 무조건 형수님이라 불러야 하오. 그건 형님이 양보하시오.”
소살우를 빤히 쳐다보던 섯다는 다짐을 받듯 말했다.
“알았어, 임마!”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소살우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들을 아들이라 부를 수는 없지만 며늘아기는 생겼다. 그 정도만 해도 어딘가. 더구나 그들이 자식을 낳으면 자신을 닮을 게 분명하다. 생각만 해도 날아갈 것 같았다.
“좋소?”
“그럼 좋지, 안 좋냐? 기분 째진다, 임마. 아들은 잃었지만 며늘아기는 절대 안 잃을 거다. 중원에 도착하면 바로 혼례를 올려 줘야겠다. 아니 혼례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 손자부터 만들어 달래야지.”
싱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소살우는 썰매를 향해 걸었다.
“큭! 대가리하고는! 아이고, 또 형수님께 부탁을 해야겠네.”
소살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모사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나저나 편하게 가게 되어 다행이구먼.”
북황련과 남천벌 무인들이 타고 왔던 썰매를 보며 모사는 싱긋 웃었다. 대열을 정비한 일행은 남쪽을 향해 길을 잡았다.
그들이 떠난 한 나절 후, 동쪽으로부터 이십여 대의 썰매가 싸움이 있었던 현장에 도착했다.
“으음! 놓쳤단 말인가?”
백설로 뒤덮인 주변을 둘러보며 신음을 흘리는 자. 허리츰에 도를 차고 있는 그는 단천도 팽구로 하북팽가의 인물이었다.
“어떠냐?”
어깨에 앉은 눈을 털어 내며 팽구는 곁에 있는 자를 향해 물었다. 그가 쳐다보는 자는 길잡으로 고용한 북방 사람이었다.
“흔적이 끊겼습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게.......”
길잡이는 말끝을 흐렸다. 폭설로 앞서가던 자들의 흔적이 끊겼음은 물론이고 길마저 잃었다. 간신히 길을 찾아오기는 했으나 눈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무림인들을 안내할 자신이 없었다.
“겨울이 되면 우리 길잡이들도 북방으로 가지 않습니다. 길을 잃으면 얼어 죽기 십상이거든요.”
그가 돌아갔으면 하는 이유였다. 한번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언제 그칠지 알 수도 없다. 비단 그뿐이라면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길을 가리키던 표식마저 눈에 파묻혀 보이지 않게 된다. 북방에서 평생을 살아온 자들이라 할지라도 방법이 없다.
“얼어 죽는단 말이지....... 식량은 얼마나 남았느냐?”
심각한 얼굴로 설원을 쳐다보던 팽구는 뒤편을 향해 소리쳤다.
“한 달 분량 정도 남았습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핑구는 길잡이를 보며 말했다.
“오 일만 더 찾아보고 돌아간다.”
“알겠습니다.”
일순 얼굴이 환해진 길잡이는 북으로 썰매를 몰았다. 잠시 후 싸움 현장에 있던 이십여 대의 마차가 팽구를 따라 폭설 속으로 사라졌다.
맨 후미에 식량을 실은 썰매가 무엇인가에 걸린 듯 덜컹 하더니 검은 물체 하나가 끌려 나왔다. 소살우에게 당했던 혈궁 상첨의 시체였다. 한동안 썰매에 끌려가던 상첨의 시체가 떨어져 나왔다.
그 시체가 별간된 건 천붕회 무인들이 떠난 지 반 시진 후였다.
“여기서 싸움이 있었던 모양이네?”
등에 지고 있던 조그마한 보퉁이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입 안으로 가져가는 여인, 그녀는 남궁세가를 떠나온 남궁미령이었다. 육포를 오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남궁미령은 양손을 사정없이 쓸었다.
휘이익!
일순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폭풍 같은 바람이 불더니 바닥에 쌓였던 눈들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수십 구에 달하는 시체가 드러났다.
“호오! 남천벌과 북황련 무인들이 전부 죽었다는 말........ 응?”
시체를 둘러보던 남궁미령은 씹던 육포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반쯤 녹다만 시체가 시야에 잡혔던 탓이었다. 뚫어져라 한참동안 시체를 응시하던 그녀의 눈에서 급기야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분명 앙천마마묵독공에 당한 흔적이었다.
“석두! 너, 죽었어!”
포효하듯 고함을 내지른 남궁미령은 남쪽을 향해 빛살처럼 몸을 날렸다. 폭설을 뚫고 가는 그녀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지금 찾아가는 남편은 십 년 전의 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
즐독합니다.,.
즐독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즐감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독 입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하고 깁니다.
즐독 ㄳ
감사합니다 .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0^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