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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2:1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작은 타협이 쌓이고, 회개를 미루고, 죄에 익숙해지고 신앙을 방치할 때 무너짐은 어느 새 삶의 현실이 되고 맙니다. 사사기 2장은 그 과정을 보여 줍니다. 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실패를 반복하는지 그 원인을 밝힙니다. 공주야! 조국교회의 위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성경 서사의 단절이다. 일상에서 신앙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다음 세대의 공유하는 언어가 사라졌고, 신앙의 유산도 물려주지 못하고 있다.
No one leaves God suddenly one day. When small compromises pile up, repentance is delayed, sin becomes familiar, and faith is neglected, collapse quietly becomes the reality of life. Chapter 2 of Judges shows that process. It reveals the cause of why Israel keeps failing in the Promised Land. Princess! What is the essence of the crisis facing the Church of the Fatherland? It is a break in the biblical narrative. From everyday life to the realm of faith, the shared language of the next generation has disappeared, and the heritage of faith has also failed to be passed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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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가 다른 세대가 되는 이 현상은 이미 사사기 시대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출애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 관계 맺기 방식이 ‘언약’이다. 하나님이 허락한 것 말고는 자의적으로 언약을 맺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방식에 따라 살아야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런데 거저 얻은 승리 후에 이스라엘은 가나안 민족과 언약을 맺는다. 하지만 이제 그 주민은 그들에게 선한 이웃이 아니라 가시와 올무가 될 것이다.
This phenomenon of the next generation becoming a different generation was already appearing in the time of the Judges. Leaving Egypt formed a new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Israel. That way of forming relationships is a “covenant.” One must not make a covenant arbitrarily, except as permitted by God. To be God’s people is to live according to the way of being that God desires. But after this freely obtained victory, Israel makes a covenant with the Canaanite people. But now that resident will not be a good neighbor to them, but a thorn and a sn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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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외면하면서까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생명의 질서를 거스르는 일이다. 가나안 주민과 자의로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선고되자, 그들은 대성통곡한다. 가나안 땅은 저절로 축복의 땅, 안전한 땅이 지질 않는다. 값없이 주신 은혜지만, 그 반응을 기대하시는 은혜다. 하나님의 말씀과 순종을 기뻐 하지 않으면 언제든 축복의 땅 통곡의 땅이 된다. 가나안은 가능성의 땅이다. 선택의 땅이다. 후회의 눈물을 흘리기 전에 지금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이중적인 삶의 방식을 청산해야 한다.
Loving the world even at the expense of turning away from God is contrary to the order of life. When judgment is pronounced on the Canaanite inhabitants and on Israel, to whom they have made a voluntary covenant, they wail loudly. The land of Canaan does not produce a land of blessing or a safe land on its own. It is grace given freely, but it is also grace that expects a response. If we do not rejoice in God’s word and obedience, we may at any time become a land of blessing, a land of wailing. Canaan is the land of possibility. It is the land of choice. Before shedding tears of remorse, we must now shed tears of repentance and put an end to this dual way of li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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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를 비롯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출애굽과 광야 행보와 가나안 입성의 역사를 기억하던 사람들의 죽음과 그들을 기억하는 서사의 상실은 여호와와 그분이 하신 일을 모르는 전혀 새로운 세대를 낳았다. 다음 세대는 땅의 언약 적, 신학적 성격, 즉 자신이 사는 땅이 자격 없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것임을 몰랐다. 그러니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이유가 사라진 다른 세대가 되었다.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 이스라엘이 변한 이유는 무엇인가? 후회의 눈물을 흘리기 전에 지금 청산해야할 이중적인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The deaths of those who remembered the history of the Exodus, the wandering in the wilderness, and the entering of Canaan that the LORD had done for Israel, including Joshua, and the loss of the narrative that remembers them, gave rise to an entirely new generation that did not know the LORD or what He had done. The next generation did not know that the covenant of the land, its theological character, is God’s grace and gift granted to those who are unqualified by the land he lives on, and that it was given to fulfill God’s will. Thus, it became a different generation from which the reason to serve only God had disappeared. Why did Israel change after Joshua died? What is the double way of living that must be put to rest now before shedding tears of regr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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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사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1-5)
여호수아 죽음 후의 이스라엘의 배역(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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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사자가(1a)
길갈에서부터(1b)
보김에 이르러(1c)
가로되 내가 너희로(1d)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1e)
인도하여(1f)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1g)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1h)
또 내가 이르기를(1i)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1j)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1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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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2a)
이 땅 거민과(2b)
언약을 세우지 말며(2c)
그들의 단을(2d)
헐라 하였거늘(2e)
너희가 내 목소리를(2f)
청종치 아니하였도다(2g)
그리함은 어찜 이뇨(2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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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내가(3a)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3b)
너희 앞에서(3c)
쫓아내지 아니하리니(3d)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3e)
가시가 될 것이며(3f)
그들의 신들이(3g)
너희에게(3h)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3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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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사자가(4a)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4b)
이 말씀을 이르매(4c)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4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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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 곳을(5a)
이름하여(5b)
보김이라 하니라(5c)
무리가 거기서(5d)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5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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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여호수아가(6a)
백성을 보내매(6b)
이스라엘 자손이(6c)
각기 그 기업으로 가서(6d)
땅을 차지하였고(6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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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7a)
여호수아의(7b)
사는 날 동안과(7c)
여호수아 뒤에(7d)
생존한 장로들(7e)
곧 여호와께서(7f)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7g)
모든 큰일을 본 자의(7h)
사는 날 동안에(7i)
여호와를 섬겼더라(7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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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종(8a)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8b)
110세에 죽으매(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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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가(9a)
그의 기업의 경내(9b)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9c)
북 딤낫 헤레스에(9d)
장사하였고(9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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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대 사람도(10a)
다 그 열조에게로(10b)
돌아갔고(10c)
그 후에 일어난(10d)
다른 세대는(10e)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11f)
여호와께서(10g)
이스라엘을 위하여(10h)
행하신 일도(10i)
알지 못하였더라(10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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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초한 가시_My own thorn.
후회의 눈물_Tears of regret.
기억의 상실_Loss of mem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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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언약은 신앙의 출발을, 존재방식을, 삶의 목표요 종착역을 알려주기 때문에 언약신앙이 전수되지 않으면 다음 세대가 다른 세대가 됩니다. 삶을 통한 신앙의 교육으로 신앙의 대가 끊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Lord, because the covenant reveals the starting point of faith, the way of being, the goal of life, and the final destination, if the covenant faith is not passed down, the next generation becomes a different generation. I pray that through faith education through life, the harvest of faith will never cease.
2026.9.4.fri. Clay
신학 비평//
울었지만 달라지지 않았다__이스라엘의 다음 세대는 왜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었을까. 신앙은 기억을 전달하는 것으로 계승되는가, 아니면 이전 세대의 하나님이 다음 세대 자신의 하나님이 되는 새로운 사건이 필요한가? 사사기 2장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단순히 우상숭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면 기억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죽자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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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다른 세대라는 말이 무서운 말입니다. 다른 민족이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같은 집에서 태어나 같은 땅을 물려받은 자기 자식들이 어느 날 다른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합니다. 부모들은 정말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을까요. 출애굽 이야기를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단순하게 보기에는 이스라엘의 절기와 율법과 제의 자체가 기억을 반복하도록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알지 못했다는 말은 정보가 없었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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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출애굽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이야기가 더 이상 자기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데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홍해는 생존의 기억이었지만 아들에게는 옛날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 광야의 만나가 은혜였다면 자녀에게는 종교적 전설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신앙교육의 가장 어려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기억은 전달할 수 있지만 경험까지 상속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조국교회의 위기를 성경 서사의 단절이라고 진단하신 것은 상당히 중요한 지점을 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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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위기의 원인이 단지 다음 세대에게 성경 이야기를 충분히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오히려 다음 세대가 이전 세대의 말과 삶 사이의 균열을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사기 1장을 지나온 독자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부모 세대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라는 명령을 알고 있으면서 노동력으로 이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말하면서 현실에서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언약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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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2장의 다른 세대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등장한 불신앙 세대가 아닙니다. 앞 세대의 불완전한 순종이 다음 세대에서는 하나의 생활양식이 된 것입니다. 부모에게는 타협이었던 것이 자식에게는 문화가 됩니다. 이것이 사사기 1장과 2장을 연결하는 가장 불편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세대는 하나님과 가나안을 동시에 붙잡으려 했습니다. 다음 세대는 그것을 보고 자랐습니다. 그러니 자녀들이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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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입으로는 하나님이 전부라고 말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다른 가치와 얼마든지 공존했다면, 다음 세대는 부모의 교리보다 부모의 생활방식을 더 정확하게 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전수는 말의 문제가 아니라 서사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서사란 성경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부모의 삶이 자신이 전하는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김의 눈물도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백성은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크게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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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까지 드립니다. 그런데 사사기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눈물은 무엇이었을까요. 회개였을까요, 후회였을까요. 본문은 그들의 눈물을 조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삶을 통해 눈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슬픔은 진실할 수 있지만 진실한 감정이 반드시 변화된 삶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보김은 우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사사기의 역설은 그들이 울고도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다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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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후회의 눈물을 흘리기 전에 회개의 눈물을 흘리자는 표현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눈물이냐보다 눈물을 흘린 다음 무엇을 바꾸었느냐입니다. 회개를 감정의 강도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많이 우는 사람이 좋은 신자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적 회개는 눈물의 양보다 삶의 방향과 관계의 재구성에 가깝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깨뜨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가나안 사람을 더 이상 쫓아내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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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긴장이 언약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은혜는 인간의 선택을 무효화시키는 마술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선택한 공존의 결과를 하나님께서 제거해 주지 않으십니다. 자신들이 붙잡아 둔 것이 이제 자신들의 가시가 됩니다. 자초한 가시라는 표현이 그래서 좋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도의 형벌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인간이 선택한 것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경험하게 하시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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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놓지 않겠다고 붙잡은 것이 어느 날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 세대 문제를 너무 쉽게 이전 세대의 책임으로만 돌려서도 안 됩니다. 부모가 신앙을 살아내야 하지만 자녀의 믿음까지 대신 살아줄 수는 없습니다. 신앙에는 반드시 단절의 순간도 필요합니다.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전수와 단절이 동시에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물려받되 그 이야기를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대와 고통과 질문을 통과하여 다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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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유산은 될 수 있어도 믿음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를 위한 가장 좋은 신앙교육은 정답을 완성해서 넘겨주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었는지 말해주면서도 네가 만날 하나님은 내가 다 설명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자녀가 질문하고 의심하고 씨름하면서 자신의 언어로 신앙을 다시 구성할 공간을 허락하는 것도 신앙 전수의 일부일 것입니다. 신앙의 대가 끊어진다는 것은, 아이들이 성경을 모르게 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 이야기는 알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자기 삶과 아무 관계없는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것이 더 무서운 단절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