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은 일제하에서 '여성박사 1호, 전문학교의 유일한 여성교장, YWCA창시자' 등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교육,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혀 왔다. 그리고 8.15 이후 이화여대 총장직을 비롯한 여러 학교의 이사장직을 맡았고, YWCA,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대한부인회 등 각종 여성단체를 설립하고 임원직을 역임하였다. 또한 1948년 정부수립 직후에는 유엔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 정치,외교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 이런 활동의 결과 정부로부터 1963년 대한민국장 포상을 받았고, 1970년 사망한 이후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을 받았다.
김활란의 약력
대한민국의 여성운동가, 교육자.
호 우월(又月). 초명 기득(己得). 인천 출생. 활란이라는 이름은 세례명 헬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1907년(융희 10) 이화학당에 입학, 초·중·고등과를 거쳐 1918년에 대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교사로 근무하다가 미국에 유학, 1924년 웨슬리언대학, 1925년 보스턴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 이화여전(梨花女專) 교수로 취임하였다. 1945~1961년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사장 겸 이화여대 총장으로 재직하는 한편, 1950년 공보처장(公報處長)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 이사장,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한국여학사협회 회장 등 많은 사회단체에서 활동하였고, 국제연합 총회 한국대표를 비롯하여 전후 수십차례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국위를 선양하였다. 특히, 50여 년 간 이화여대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화여대를 여성교육의 요람으로 만들어 한국 여성교육에 이바지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과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賞), 미국 감리교에서 수여하는 다락방상을 수상하였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1970년에 1등 수교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일제말기에는 누구 못지않을 정도의 친일행각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민족주의자 김활란
그녀가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고 이화학당 교사로 있을 때 3.1운동이 일어났다. 그 당시 그는 지하독립운동 조직과 연결되어 있었다. 1920년에는 이화전도대를 만들어 조선 각지를 돌면서 포교활동을 하였다. 이 때 기독교는 메시아의 도래라는 점에서 민족에게 자각과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전도활동은 단순한 기독교 전도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의 활동은 주로 학교나 종교활동에서 강연과 글 등을 통해 여성해방론을 전파하였다. 즉 여성의 교육권, 재산권 확보 등 전형적인 자유주의 여권론을 주장하며 활동하였다. 그리고 좌우합작의 근우회(槿友會)에도 창립될 초기에 잠시 관여하다가 1928년 근우회에서 활동을 끊은 후 주로 종교단체 활동만을 계속하다가 1930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학위를 받아 '여성박사 1호'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농민문제에 관심을 갖고 농촌사업을 벌였다. 문맹퇴치, 가정경영에 필요한 지식획득, 개인적 차원에서의 경제 자립, 봉건적 인습 타파, 의복개량 등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반에 걸쳐 활발하였던 브나르도 운동과 연결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문맹퇴치, 금주,금연, 절약,저축, 미신타파 등의 개량적 활동으로 이어졌다.
즉 그가 주장하는 여성해방운동이 민족해방이라는 범주안에서 가능한 것이었음에도, 점차 민족해방과 여성해방을 분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친일행위의 시작
1930년대 중반을 넘으면서 일제는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 건설을 위해 민족말살정책, 황국신민화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하여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우며 신사참배, '황국신민의 서사' 낭독 등을 강요하였으며 철저한 통제망을 조직하여 우리 민족을 전쟁수행의 도구로 삼기 위해 광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지식인층의 일부에서 일제에 굴복하여 반민족행위에 나서는 변화가 나타났다.
기독교계에서는 신사참배 등의 문제로 일제와 기독교의 입장이 배치되었을 때, 폐교를 무릅쓰고 일제의 정책에 반기를 들것인가 아니면 일제의 정책을 따를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했다. 북장로교계에서는 학교 폐교를 불사하였고, 평양의 기독교계 학교 대부분과 일부 학교는 폐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나, 김활란이 있던 이화여전은 일제의 요구를 수용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김활란은 1937년부터는 일제와 관련된 일회적인 모임만 아니라 지속적인 단체활동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1937년 1월말에는 총독부 학무국의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를 결성하였고, 중일전쟁이 터지자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귀족 부인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비녀를 바치자고 조직한 애국금차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사회자로 활약하였다. 이후 이러한 성격의 각종 단체나 활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1938년 내선일체란 이름하에 조선교육령이 개정되어 사학에 대한 통제가 더욱 심해졌다. 수업중 조선어의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학생들은 군수공장에 근로동원되고, 교과 과정에서도 우리 문화나 전통에 관한 것은 말살되어 갔다. 그런 가운데 김활란은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00여명의 처녀들로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였다. 한편 김활란이 회장으로 있던 조선YMCA가 1938년 6월 8일 일본YMCA에 가맹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지원병제에서 징용,징병,정신대 등의 강제연행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식민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선전하기 위해 각종 친일단체를 결성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까지 앗아가려는 온갖 책동을 다하였다. 여기에 친일 여성단체를 만들고 여성명사를 동원하는 등 여성들도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김활란은 임전대책협력회 위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등 각종 친일단체의 임직원을 맡았다. 그리고 여성대중에게 노력동원, 가정의 절약과 저축을 강조하였다.
그는 1941년 말 야마기 카쓰란(天城活蘭)으로 창씨하였다. 그리고 부인궐기초구 강연, 결전부인대 강연, 방송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정책을 미화하고 내선일체, 황민화시책을 선전하며 일반 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나 딸, 동생으로서' 징병, 징용, 학병 동원에 대해 이해를 촉구하였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반도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신시대》1942.12)
'학도병 출진의 북이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의 총후는 우리 부녀가 지킬 것이다....... 학병 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 (뒷일은 우리가 《조광》 1743.12)
'이번 반도 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걸어가야 될 일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참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여성으로서 다시 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매일신보》 1943.12.25)
이화전문학교가 여자청년연성소 자도자연성과로 바뀌어 농촌여성을 계몽한다는 일제의 방침이 되자, 1944년 이화여전 학생 모집에는 150명 모집에 40명밖에 지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재학생 마저 수가 격감하였다. 그리고 제자와 후배들은 그를 외면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래도 그는 그냥 있었다. 그는 학교를 지킨다는 명분 하나 만으로 민족사에서 학교가 해야할 많은 역할을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즉 이화여전이란 명문사학을 지키고 보전한 노력과 공은 있지만, 민족사에는 커다란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이러한 친일적 지식인 여성의 활동은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 중 많은 수가 과거 민족독립운동에 참가하였던 까닭에 일제에 대한 적극적인 투쟁은커녕 안면몰수한 친일행위는 민중에게 분노와 실망만을 안겨 주었다.
김활란의 측근자였던 김옥길의 《김활란 박사 소묘》에서는 그가 1944년경 눈병으로 실명할 우려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남의 귀한 자식들을 사지(死地)로 가라 했으니, 장님이 되어도 억울할 것 없지....... 당연한 형벌"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한 진실로 반성하는 구절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친일한 많은 이들이 자서전이나 전기를 남겼지만 대부분 친일행위에 대한 일언반구도 없는 것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것인지도 모른다.
반민족적 행위를 범한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전에 이렇다할 반성의 말 없이 지나갔고, 현재의 우리는 여성계의 대모로서 그를 인식하고 있다. 역사 교과서에는 그를 좌우합작의 민족운동단체인 근우회 활동의 중심인물 내지 회장이라고 적어놓고 있으나 그는 근우회 활동에서 도중하차했을 뿐이다.
일제에게 굴복하기 보다는 죽음을 무릅쓴 투쟁을 한 이보다 어떠한 이유든간에 일제라는 강자의 압박에 못 이겨 굴복한 이를 우리는 더 많이 알고 추앙해야 할 인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이제 이렇게 된 연유에 대해, 그리고 민족적 자존심과 긍지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이다.
첫댓글 흠....결국 죽기 싫어서 일본 말 다 들어준 거 군요; 실망 스럽다;; 그렇게 오래 살면 뭐해요;
울 고등학교 설립자여요....ㅜ.ㅜ 이대병설 금란여자고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