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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7일 부활제7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사도 28,16-20.30-31
복 음 : 요한 21,20-25
그때에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요한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은
저마다 자기 방식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두 사도를 보여 줍니다.
그 둘은 주님께서 자주 함께하셨고
주님 승천 뒤에도 자주 함께 움직이던 제자들입니다(사도 3―4장 참조).
마지막 만찬 때는 요한을 시켜 주님께 여쭈었던 베드로(요한 13,23-25 참조)가
이제는 자신이 직접 주님께 여쭙고 요한은 침묵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요한이 살아 있기를 바라실 만큼
주님께 그는 각별한 존재였을까요?
그런데 그가 죽지 않으리라는 믿음은 근거 없는 추측이라고
요한 스스로 딱 잘라 말합니다.
실제로 요한은 사도들 가운데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주님 승천 뒤 칠십여 년을 더 살다가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오늘 복음의 구절이 신앙인의 삶에서 보이는 두 가지 모습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곧 베드로는 지상의 시간에 남아 있는 삶을,
요한은 영원한 하늘 거처에 사는 삶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요한 복음 강해』 참조).
다시 말하여 베드로는 순교의 길로 주님을 따르도록 불렸고,
요한은 높은 곳에서 말씀의 신비를 꿰뚫는 관상이 완전해지도록
당신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설교집』 참조).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에서 베드로에게 중대한 사명을 부여하시고 그를 새롭게 부르셨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을 새롭게 부르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21,22)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마땅히 고통이 따르겠지만 저마다 가는 길은 다르니,
남의 사정을 깊이 알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길에 충실해야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 기분은 내가 정해. 오늘 나는 ‘행복’으로 할게.”
이 문장을 보고는, ‘맞다. 내 기분을 내가 정할 수 있지.’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런데 자기 감정인데도 나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쉽게 포기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아 자기 기분이 어쩔 수 없다면서 포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이렇게 선언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내 기분이야. 내 기분은 내가 정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내 기분을 ‘웃음’을 정해 보았습니다.
하루 종일 웃을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정한 대로 내 기분은 흘러갑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다른 사람과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기 기분을 스스로 정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남에게 끌려가는 삶을 사는 이유가 미루는 습관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 미루는 습관은 자기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의 모두가 미루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그마치 80~95%가 미루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스스로 미루는 인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한 75%가 스스로 미루는 인생을 산다고 합니다.
이렇게 미루기 때문에 자기 기분을 정할 수 없습니다.
끌려가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명언이 있습니다.
‘항구에 정박한 배는 안전하다.
그러나 배는 정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존 아우구스투스 셰드)
미루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전할 수 있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기 기분을 스스로 정하면서 적극적으로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사랑하는 제자에 대해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애매합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다른 사람의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자기의 삶을 사는 것,
특히 주님께서 원하시는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비교하고 미뤄서는 안 됩니다. 그 길은 지금 당장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우리는 내일 성령강림대축일을 앞두고 부활시기를 마무리 합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그 동안 들어왔던 <사도행전과>과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베드로의 장래를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사도 요한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장래에 대한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장래에 대해서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22)
이는 그에게는 베드로와는 다른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각자에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베드로에게는 ‘증거’의 몫이,
그들을 뒤따라오는 사랑하는 제자에게는 ‘증언’의 몫이 주어졌습니다.
곧 ‘선포’(kerygma)와 ‘증거’(martyrium)라는 예수님의 예언직의 두 가지 형태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참 아이러니하고 재미난 내용을 드러내줍니다.
곧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랑을 확인까지도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다른 제자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다름 아닌 베드로의 오랜 고향 친구입니다.
그러니 그의 장래가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친구에 대한 비교나 경쟁이 아니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여기서 베드로는 요한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곧 베드로가 최후만찬에서 배신자에 대해 예수님께 직접 묻지 못하고 요한을 시켜서 물었기에,
이제 요한을 위해서 호의로 요한을 위해서 묻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일’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실, 베드로는 벌써 그랬던 적이 있습니다.
목숨을 내놓고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하고서 세 번이나 배신하고 도망가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는 이제 예수님을 따라 죽을 것입니다.
담대하게 ‘증거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도 담대하게 ‘증언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활동의 사목직이,
요한에게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관상의 역할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한 베드로에게는 ‘교회’를,
당신이 사랑하신 요한에게는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담대하게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어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님 부활이 주신 ‘용기’와 ‘담대함’으로 말입니다. 아멘.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따라라”(19절) 하셨을 때
베드로가 돌아다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따라오는 것을 보고,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절) 하고 물었을 때,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2절) 라고 하신다.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나를 따라라.”라고 하신다.
행동적인 신앙은 주님의 수난의 본을 보고 완전하게 배웠으니 주님을 따라야 한다.
지금 막 시작된 구원은 주님께서 오실 때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은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뒤로 73년을 더 살며 트라야누스 황제 때까지 살다가
다른 사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 평화롭고 평온하게 하늘나라로 떠났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너의 것, 곧 네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나를 따르기나 하라고 하신다.
사도 요한은 온 세상도 다 담아내지 못할 만큼 많은 일을 기록할 수 있었지만,
단 한 권의 복음서만을 남겼다.
요한은 묵시록도 썼으며, 또한 매우 짧은 서간도 한 편 남겼다.
지금 성경에 있는 세 편의 서간은 모두가 요한의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세 편을 다 합쳐도 100줄이 되지 않는 글이다.
이 복음을 자신이 썼다고 드러내는 이유는
그는 복음을 제일 마지막으로 썼고 복음을 쓴 이유가
그분이 자기를 사랑하셨고 자기 기록이 믿을만한 것이며,
이 일을 하게 된 것은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25절).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만물을 지혜로 창조하셨으며
그분의 지혜는 한계가 없으므로(시편 147,5 참조) 한계가 있는 이 세상은
무한한 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자기 안에 다 담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한계가 있는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말씀을 읽고 실천해야 한다.
끊임없이 말씀을 실천할 때 우리는 궁극적인 유익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것들을 잘라 버리고 선을 실천하여 성숙해짐으로써
자신을 밝게 하고 시야를 넓혀야 한다.
그리하여 구원 자체이신 주님을, 하느님을 차지하여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일석삼조(一石三鳥)’라는 말이 있습니다.
돌 하나를 던졌는데 세 마리의 새를 잡았다는 뜻입니다.
뜻밖에 좋은 일이 생기는 경우를 말합니다. 제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토요일 하루에 네 가지의 일이 있었습니다. 오전에는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미사 후에는 집 축성이 있었고, 이어서 구역장 회의,
마지막으로는 청소년 음악회까지 있었습니다.
아침 9시에 집을 나섰고, 저녁 10시에 사제관으로 돌아왔습니다.
피곤할 법도 한데, 마음은 오히려 충만했습니다. 왜일까요?
저는 이 네 가지 일을 돌아보며,
하느님께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하나로 이어주셨다고 느꼈습니다.
첫 번째는 장례미사입니다. 삶의 한 여정을 마친 형제님을 위해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 미사는 단지 죽음을 슬퍼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분의 생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감사드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인간은 기억하는 존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억은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의미’로 바꾸는 작업입니다.
장례미사는 바로 그런 작업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한 사람의 생애를 감사로 바꾸는 시간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주님 품 안에서 영원으로 가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두 번째는 집 축성입니다. 괌에서 막 이사 온 가정이었습니다.
아직 교적도 없고, 가구도 없었지만, 축복은 가득했습니다.
어떤 본당에서는 교적이 없다는 이유로 축성을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소속을 보시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먼저 보신다.
“존재는 환대에서 피어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손님을 환대했습니다.
손님은 아브라함이 곧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이를 얻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강도당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주님께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축성은 환대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은 이곳에 잘 오셨습니다’ 하고 말해주는 일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현재의 신앙입니다.
세 번째는 청소년 음악회였습니다.
어색하고 서툰 손놀림, 떨리는 음표, 아직은 조금 부족한 표현력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모습이 더 감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미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희망은 두 딸을 두고 있다. 하나는 분노요, 다른 하나는 용기다”고 말했습니다.
분노는 지금 부족함에 대한 성찰이고, 용기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발돋움입니다.
청소년들의 연주는 그런 희망의 시작이었습니다.
서툴지만, 순수했고, 그래서 아름다웠습니다.
네 번째는 구역장 회의였습니다. 저는 이 회의를 다리(bridge)라고 생각합니다.
본당과 구역, 사제와 신자, 하느님의 말씀과 생활의 목소리를 잇는 연결의 다리입니다.
“다리는 강을 피하지 않는다. 강을 품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 다양한 사연, 때로는 불만까지도
사랑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본당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역장 회의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연결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사람들을 맞아들이며,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어진 시간을 복음으로 바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집은 감옥이었지만, 그의 영혼은 자유로웠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은 곧 ‘비교하지 말고,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살아라.’라는 말씀입니다.
장례미사를 통해 과거를 봉헌하고, 집 축성을 통해 현재를 축복하며,
구역장 회의로 본당과 구역을 이어주는 다리를 놓고,
청소년 음악회로 미래의 희망을 품었던 하루였습니다.
그 하루 속에서 저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우리 각자의 삶도 그렇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과 자리, 그 모든 순간이 바로 하느님 은총의 통로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과거를 감사로, 현재를 기도로,
미래를 희망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또 다른 사도행전과 또 다른 바오로 사도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부활 시기가 끝나면서 부활 시기 내내 읽었던 사도행전도 끝납니다.
제가 사도행전을 대할 때 왜 다른 사도들 얘기는 별로 나오지 않고,
바오로 사도 얘기가 대부분인가? 하는 점이 불만이라면 불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작 열두 사도는 바오로가 아닌 다른 사도들이고,
그들도 열심히 복음을 선포했을 텐데 그들 얘기는 거의 없고,
바오로 사도 얘기가 대부분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아무래도 열두 사도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분들이고,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 선교를 대표하는 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행전과 그리스도교 역사는 ‘계속’과 ‘새롭게’의 역사입니다.
계속 새롭게 시작되는 역사라는 뜻이고 멈춰있지 않다는 뜻이며
어디에 머물러 있지도 않다는 뜻인데 이것이 실은 선교입니다.
이런 뜻과 맥락에서 오늘 사도행전의 끝은 끝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죽은 다음에 쓰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의 죽음 얘기가 없고
그의 복음 선포가 어떻게 끝났는지 얘기가 없습니다.
일부러 결말을 짓지 않은 것이며
로마라는 곳에서 새 장이 열린 것까지만 기록합니다.
사도행전은 그야말로 사도행전이지 바오로 사도의 행전이 아니고,
바오로 사도가 단독 주인공인 것처럼 보이지만 단독 주인공이 아니며
또 다른 사도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얘기로 계속되어야 할 행전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2, 제3, 제100의 ‘또 다른 행전들’이 나와야 하며
우리가 이 행전들의 ‘또 다른 바오로’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묵상을 하며 ‘또 다른 바오로들’이 되기로 결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예수님 중심의 참 좋은 보완관계의 제자들
“베드로, 바오로, 애제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의로우신 주님은
의로운 일을 사랑하시니,
올곧은 이는 당신 얼굴 뵈오리다.”(시편11,7)
참 빠르게 흐르는 세월이요 변화무쌍한 변화입니다.
이런 삶의 흐름 중심에는 자연과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늘 살아 활동하심을 믿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떠난 자리에 레오 교황이 들어섰고,
윤대통령이 떠난 자리에는 이대통령이 들어섰습니다.
두 분 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앞서 세상에 보내준 하느님의 선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의 흐름도 놀랍고 새롭습니다.
얼마 전 수도원 원내 흰꽃들 가득했던 앵두나무들이였는데
어제는 그동안 빨갛게 익은 앵두를 다 땄습니다.
한동안 빨간 열매들을 보는 기쁨이 컸었는데
아쉬운 마음에 써놓은 ‘관상의 기쁨’이란 글을 나눕니다.
“앵두 다 땄어요?”
자매의 옷도 얼굴도 앵두 빛에
빨갛다
눈물 같은
흰 꽃잎들 진자리마다
빨간 기쁨으로
아기자기
귀엽게 익어간
앵두형제들이었는데
‘먹는 것’보다 ‘보는 것’이
관상의 기쁨이 더 좋았는데
참 아쉽다”<2025.6.6.>
그러나 관상과 활동의 상호보완의 조화와 균형이 참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보이지 않는 중에도 끊임없이 일하시는
하느님의 선물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기쁨과 감사의 일상을 이루어 줍니다.
내일은 대망의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끝나고 두 주인공, 베드로와 주님의 사랑을 받던 애제자가 나오며,
사도행전 역시 끝나며 바오로가 그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세분 모두의 중심에는 주 예수님의 자리하고 있습니다.
새삼 이 세분은 물론 우리 모두의 삶의 영원한 중심은 주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어제 교회 일치를 위해 애쓰는 다양한 사람들의 평신도 지도자들을 만나
격려하신 레오 교황의 한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주 예수님을 삶의 여정 중 중심에 모십시오
(Always keep the Lord Jesus at the center of your journeys).
이것이 본질적이며 모든 은사들은 이 목적에 봉사해야 합니다.”
삶의 여정 중 삶의 중심에는 주 예수님이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나 깨나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라는 것이며
그 빛나는 모범이 오늘의 세 제자인 베드로, 바오로, 애제자입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세분이 자리잡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세 분 다 경쟁관계이기 보다는 보완관계로 다 꼭 필요한 분들입니다.
참 신기하고 신비로운 것은 주님을 중심으로 베드로와 애제자는 늘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다음 대화에서 보다시피 예수님은 이 둘의 관계를 신속히 지혜롭게 분별해 주십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주님은 애제자에 대한 불필요한 호기심의 관심을 접고 충실히 당신을 따르라는 명령인데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이 애제자는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입니다.
주석자의 이 익명의 애제자에 설명이 참 신선하고 깊습니다.
바로 애제자의 이중적 신원입니다.
실제적 인물로써 애제자는 물론 죽었겠지만,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모두와 일치를 이루는 상징적 인물인
“완벽한 제자로서의 애제자”는 예수님 재림 시까지 늘 교회 공동체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지속되는 한 교회의 중심에는 늘 영원히 애제자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가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The Church must never be without him).
우리 교회 공동체 주변을 잘 살펴보십시오.
틀림없이 바로 언제 어디서든 주님의 교회 공동체 중심에는
늘 관상의 애제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바오로의 행적이 참 눈부시고 놀랍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로마에 도착했으며 사슬에 묶여있는 수인의 처지에서도
셋집에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환대합니다.
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참으로 자유로이 담대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비록 바오로는 쇠사슬에 묶여있을지라도 말씀은 묶여있지 않습니다.
이 처지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고백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혀 고통을 겪고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있지 않습니다.”(2티모2,9).
참으로 말씀의 진리가, 주 예수님이 바오로를 참으로 자유롭게 했음을 봅니다.
베드로, 바오로, 애제자 셋 모두가 주님을 중심으로
각자 받은 사명에 충실하며 좋은 보완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각자 제자리에서 제몫의 사명을 다하며 서로의 부족을 보완하며
주님 중심의 참 좋은 공동체 삶을 살게 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하겠다.”(마태28,20). 아멘.
늙어서 죽고 싶사옵니다.
박재찬 안셀모 신부
12사도 가운데 순교하지 않은 유일한 분은 바로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어린 나이에 사도로 불리움을 받아 90살까지 살면서
성모님과 초기 교회를 돌본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노년에는 그 설교에서 항상 “서로 사랑하여라.”를 강조하셔서 사랑의 사도가 되신 분이기도 합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셨던 사도 요한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참으로 많이 받고 있음에 감사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인생의 후반부를 거룩하게 보내는 10계명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운을 띄어 주셔요.
일!(좀 더 큰 소리로 해 주세요! 다시!) 일!
일만하지 말고, 기도해라.
이일 저일 끼어들지 말고 침묵해라. (한번 실패하면 골로 갈 수 있다.)
삼삼오오 성지순례를 다녀라. (코로나가 끝나면 성지 순례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사생결단하지 말고 멈출 줄 알아라. (연유를 갖고 살아라.)
오케이(OK)를 많이 하라. 특히 예수님의 말씀에! (되도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을 잘 관리하라.
칠십(70)%에 만족하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겨드려라.
팔팔하던 젊은 시절은 잊어버리고 오늘을 기쁨과 감사로 살아라.
구차한 변명을 삼가고 있는 그대로의 나와 너를 받아들여라. (변명만 일삼으면 사람이 몹시 추해 보인다.)
십(10)%는 이웃과 하느님을 위해 사용하라.
인생의 후반부는 우리 명상의 집에 오시는 여러분들처럼
영적인 일과 하느님의 일에 마음을 쓰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자신의 재산에, 자신의 자리에, 자신의 뜻에
집착하며 세상일에 마음을 쓰며 살아갈 때,
어느 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때에 하느님께서 부르신다면
우리는 준비 없는 죽음을 맞게 될 것입니다.
잘 살아야 잘 죽는 것 같습니다.
옛날 옛날에 왕을 위하여 열심히 일해 온 관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광대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러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왕은 그동안 광대가 자신을 위해 노력한 것을 감안하여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풀기로 했습니다.
“너는 큰 실수를 저질러 사형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정을 감안하여 너에게 선택권을 줄 것이니, 어떤 방법으로 죽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광대는 머리를 땅에 다가 묻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폐하, 저는 늙어서 죽고 싶사옵니다.”
.............. ㅎㅎㅎ
12사도 가운데 늙어서 돌아가신 유일한 분이 바로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의 형인 큰 야고보가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제일 먼저 순교하였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어떻게 순교하셨나요?
안드레아는 X자 심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지요.
‘의심의 사도’ 토마스는? 인도에서 창을 맞고 순교했습니다.
바르톨로메오는 살가죽이 벗겨지고 끔찍한 방식으로 처형당했습니다.
그 밖의 사도들도 모두 순교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사도 요한은 박해자들에 의해
끓는 기름 솥에 던져졌으나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놀란 박해자들이 요한을 처형하는 대신에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그 유명한 책을 집필하게 됩니다.
어떤 책이지요? 요한 묵시록.
96년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자 사면 받아
에페소로 귀환하여 요한복음서와 요한 서신을 저술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소 90세에서 100세 전후에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의 무덤은 현재 투르키에의 에페소로 가는 길에
셀축이라는 도시에 옛 성당의 폐허가 있는데,
이 성당 자리에 “성 요한의 무덤”이라고 쓰여 있는 비석이 있습니다.
저도 2018년에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에 따르면 고령으로 노쇄 해진 사도 요한이 늘 반복했던 말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서로 사랑하십시오”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기록했던 사도 요한은 예수님 가까이에서 누구보다도
사랑을 많이 받았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깨달았고 체험했으며
그것을 나누며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사도 요한처럼 남은 생애 ‘나만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사랑’을 하며, ‘내 것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며’ 예수님의 사랑으로 완성되어 가기를 다짐하도록 합시다.
오늘 복음 마지막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담아내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랑이야기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사랑에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분과 함께 사랑의 복음을 써 내려 가며 나와 나의 삶의 자리에
예수님의 사랑을 늙어 죽을 때까지 전하는 우리가 되실 빕니다. 아멘.
“사랑하며 늙어 죽고 싶습니다. ^^”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