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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
2023년 7월 13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14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정치가들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어제와 같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발하시고, 그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사명을 주시면서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특히 오늘 복음을 대하면서 마음에 걸리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한 집과 마땅하지 않은 집에 관한 말씀입니다. 가끔 복음을 읽거나 묵상하면서 아주 가슴 뜨끔한 말씀입니다. 나는 과연 평화의 인사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자문을 해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평화의 인사를 하며, 집에 와서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합니다. 그런데 그 평화의 인사를 받으면 그 평화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게 인사하는 사람들의 평화는 화합과 화목입니다.
논어의 자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왈 ;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
子曰 ;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군자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화합하지만,
소인은 서로 같은 듯 무리지어 다니지만 어울리지 못한다.
‘군자는 서로 다른듯하지만 어울리고, 소인은 서로 같은듯하지만 서로 어울리지 못한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군자는 화합하면서도 부화뇌동 하지 않지만, 소인은 부화뇌동만 할 뿐 화합하지는 못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군자는 남을 자기 자신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남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므로 부화뇌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소인은 이익을 쫓으므로 이익을 같이하는 사람끼리는 함께 행동(行動)하지만 남과는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레가 한번 쳤다 하면 천지 만물은 이에 호응하듯이 연달아 덜컥 거립니다. 이것처럼 자신의 줏대와 기준을 망각한 채 이해관계(利害關係)에 따라서 혹은 무조건 남의 주장에 따르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군자의 '화(和)'와 소인의 '동(同)'을 공자는 엄밀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화'(和)는 각자가 지닌 자기만의 특성을 다른 이와 하나로 융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동'(同)은 각자가 갖고 있는 특성을 지닌 채 다른 이와 융합하지 않고 '같은 척 꾸미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은 사람이 살아감에 도리에 맞게 서로 화합하고, 도리에 맞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부화뇌동(附和雷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동이불화'(同而不和)는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각자의 이익이나 기호가 같을 동안에 만 어울릴 뿐이고, 이해가 달라질 경우 언제든지 부화뇌동(附和雷同) 한다는 뜻입니다.
군자는 평화의 축복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고, 소인은 평화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복음에서는 집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각 개인에서부터 집, 사회, 교회, 단체, 국가까지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가정에서도 서로 화목하고,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평화의 인사와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고, 사람들과 하느님의 축복이 머물 것입니다. 또한 그 축복으로 더욱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사랑은 화목을 바탕으로 합니다. 가정의 화목은 서로 다른 성격과 서로 다른 주장을 고집하지 않고, 사랑으로 융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고집만 주장한다면 가정의 평화는 깨지고 말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평화를 누리기에 합당한지 생각합니다. 우리의 정치가들과 정당들은 정말 군자다운지, 아니면 소인 같은지 생각해 봅니다. 나라의 꼴이 이지경이면 하느님의 축복이 따를 리 없다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정치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삶이 당리당략을 위해서 정치를 할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화합해서 화이부동을 이루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부화뇌동으로 정치할 것인지 정말 암담하기도 합니다. 정치가들이 이제는 정말 정신을 차려서 군자다운 정치를 해야 합니다. 그만큼 성숙된 정치문화가 뿌리를 내릴 때도 되었습니다.
국가에 이로운 일이라면 또한 올바른 일이라면 바르게 처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개인의 사정을 두고 정치를 하면 안됩니다. 국가를 우선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장래를 생각해서, 또 국익을 생각해서 올바른 결정을 해야 할 때 당리당략을 버려야 합니다. 아주 소인배들이 하는 짓거리를 하면서 정치가들이라고 나서고 있는 것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이집트로 보내셨습니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44,18-21.23ㄴ-29; 45,1-5
그 무렵 18 유다가 요셉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나리, 이 종이 감히 나리께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
나리께서는 파라오와 같으신 분이시니, 이 종에게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19 나리께서 이 종들에게 ‘아버지나 아우가 있느냐?’ 물으시기에,
20 저희가 나리께 대답하였습니다. ‘저희에게 늙은 아버지가 있고, 그가 늘그막에 얻은 막내가 있습니다.
그 애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 아들로는 그 애밖에 남지 않아, 아버지가 그 애를 사랑합니다.’
21 그러자 나리께서는 ‘그 아이를 나에게 데리고 내려오너라. 내 눈으로 그를 보아야겠다.
23 너희 막내아우가 함께 내려오지 않으면, 너희는 다시 내 얼굴을 볼 수 없다.’ 하고 이 종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4 그래서 저희가 나리의 종인 저희 아버지에게 올라갔을 때, 나리의 말씀을 아버지에게 전하였습니다.
25 그 뒤에 저희 아버지가 ‘다시 가서 양식을 좀 사 오너라.’ 하였지만,
26 저희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희는 내려갈 수 없습니다. 막내아우가 함께 가야 저희가 내려갈 수 있습니다. 막내아우가 저희와 함께 가지 않으면, 저희는 그 어른의 얼굴을 뵐 수 없습니다.’
27 그랬더니 나리의 종인 저희 아버지가 저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아내가 나에게 아들 둘을 낳아 주었다는 것을 너희도 알지 않느냐?
28 그런데 한 아이는 나를 떠났다. 나는 그 애가 찢겨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였고,
사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아이를 다시 보지 못하였다.
29 그런데 너희가 이 아이마저 나에게서 데려갔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게 되면, 너희는 이렇게 백발이 성성한 나를, 비통해하며 저승으로 내려가게 하고야 말 것이다.’”
45,1 요셉은 자기 곁에 서 있는 모든 이들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모두들 물러가게 하여라.” 하고 외쳤다. 그래서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을 밝힐 때, 그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2 요셉이 목 놓아 울자, 그 소리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들리고 파라오의 궁궐에도 들렸다.
3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직 살아 계십니까?”
그러나 형제들은 요셉 앞에서 너무나 놀라, 그에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4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나에게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서는, 그들이 가까이 오자 다시 말하였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5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축일7월 13일 성녀 데레사(예수의) (Teresa of Jesus)
신분 : 수녀
활동 지역 : 로스 안데스(Los Andes)
활동 연도 : 1900-1920년
같은 이름 : 테레사, 테레시아
성녀 로스 안데스의 예수의 테레사(Teresia de Jesus de los Andes, 또는 예수의 데레사)는 1900년 7월 13일 칠레(Chile) 산티아고(Santiago)의 상류 가정에서 후아나 페르난데즈 델 솔라르(Juana Fernandez del Solar)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심 깊었던 그녀는 프랑스의 맨발의 카르멜회 수녀인 리지외(Lisieux)의 성녀 테레사(10월 1일)의 전기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이 성인전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하느님을 위해 홀로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극복하며 모든 것 위에 다른 사람을 두는 방향으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갔다. 그녀의 자기 변화에 더 큰 영감을 준 것은 첫영성체 때였다. 이를 통해 그녀는 주어지는 모든 것을 값진 것으로 만들기 위해 더욱 노력하였다.
1919년 5월 7일, 19살의 나이에 후아나(또는 후아니타 Juanita)는 로스 안데스의 카르멜회 여자 수도원에 입회하여 같은 해 10월 14일 착복식을 하고 예수의 테레사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녀의 짧은 생애의 마지막을 향해가고 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영성 생활의 체험을 많은 사람과 나누기 위해 편지 쓰기 사도직을 시작했다. 그러나 수녀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치명적인 발진티푸스에 걸려 활동의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녀의 스무 번째 생일을 석 달 남겨 두고, 또 6개월의 법정 수련 기간을 완료하기 직전에 그녀는 죽음의 위험 중에 있는 상태에서 관면을 받고 1920년 4월 7일 첫 서원을 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12일, 그해의 사순시기 성주간 중에 선종하였다.
성녀 예수의 테레사가 선종한 후 그녀의 시신은 산티아고에서 90km 정도 떨어진 로스 안데스의 아우코 린코나다(Auco-Rinconada) 순례지에 모셔졌다. 매년 10만 명 정도의 순례자들이 그녀의 유해를 참배하기 위해 이곳을 찾을 정도로 그녀는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여성과 젊은이들에게 잘 알려진 그녀의 생애에 대한 텔레비전 미니시리즈가 1990년대 초 칠레에서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했다.
그녀는 1987년 4월 3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93년 3월 21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녀는 칠레의 첫 번째 성인이자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성인으로 선포된 첫 번째 맨발의 카르멜 여자 수도원의 수녀이다. 또한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10월 15일), 예수 성심의 성녀 테레사 마르가리타 레디(Teresia Margarita Redi, 3월 7일), 리지외의 성녀 테레사(10월 1일), 십자가의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 8월 9일)와 더불어 맨발의 카르멜 여자 수도원에서 다섯 번째로 테레사 이름을 가진 성녀이다.
축일7월 13일 성 에즈라 (Ezra)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 연도 : +4/5세기BC
같은 이름 : 에스드라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성문서에,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역사서에 속하는 구약성경 에즈라서는 후반부(7-10장)에 가서 등장하는 주인공 에즈라의 이름을 따서 제목을 붙였다. 에즈라서는 느헤미야서와 함께 바빌론 귀양 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어로 하느님의 도움이라는 뜻을 지닌 성 에즈라(Esdras)는 바빌론으로 귀양 간 유다인들의 사제이자 율법 학자로서 페르시아 정부의 유다인 담당 기구 안에서 조언자의 직무를 맡고 있었다. 페르시아 임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제7년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유다인의 공동체를 다시 이룩할 명령을 받았다. 약 1,500명의 유다인과 많은 성전 봉사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도착해(7장 이하) 법을 선포하고 그것을 의무적으로 지킬 것을 명하며 타민족과의 혼인을 금지하였다(9장 이하). 이는 많은 동포가 이민족들과 혼인하여 민족의 순수성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이를 막고자 했던 것이다. 그 뒤 그는 페르시아로 돌아갔으리라고 본다.
축일7월 13일 : 성 요엘 (Joel)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 연도 : +4세기BC
같은 이름 : 조엘
요엘서는 구약성서의 열두 소예언서 중 두 번째로 등장하는 예언서로 브두엘의 아들 요엘(1,1)이 선포한 말씀으로 모아져 있다. 요엘은 ‘하느님은 (참) 하느님이시다’라는 뜻을 지니며 역대기와 느헤미야서와 에즈라서 등 구약성서 후대의 역대기계 문헌에는 18회나 언급되지만, 그 외에는 사무엘 예언자의 맏아들 이름으로 단 한 번만 사용된다(1사무 8,1). 그래서 요엘이 오래된 이름이기는 하지만 구약성서의 후대에 와서 흔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 구약성서 어느 곳에서도 요엘 예언자가 언급되지 않는다. 요엘서 자체에서도 요엘 예언자 개인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런데 요엘의 예언이 유다 지방, 특히 예루살렘과 그곳의 성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점에서, 그가 유대인이고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였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요엘은 성전에서 거행되는 종교 의식을 당연한 일로 여긴다. 이사야나 에제키엘처럼 이스라엘인들의 잘못된 종교 의식을 비판하였던 예언자들과는 달리, 그것이 아무런 문제도 지니고 있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가뭄과 메뚜기 떼의 침입으로 성전에서 매일 바쳐야 하는 곡식 제물과 제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여러 외적 궁핍보다 더 큰 불행으로 여긴다(1,9. 13. 16). 또한 그의 많은 표현도 전례 용어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그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직하던 ‘전례 예언자’였으리라고 추측된다.
다른 한편, 기존의 성서에 정통한 요엘은 선배 예언자들의 사상을 어어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미 공포한 말씀을 다시 선포하고 그들의 어구나 어휘를 인용하고 재활용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예언자를 ‘성서 예언자’ 또는 ‘성서 해설가’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예언자로서 요엘의 성격을 흐리게 하거나, 그의 독창성을 부정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여러 정황을 종합할 때, 기원전 4세기 초엽이 요엘 예언자의 시대일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는 페르시아 제국 시대로, 유대인들은 민족과 땅이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나름대로 평온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느헤미야와 에즈라가 감행한 종교개혁 덕분에 예루살렘 성전은 유일한 성소로 자리를 굳히고, 그곳의 모든 전례도 이미 잘 정비되어 거행되고 있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예수의 데레사 자매님과 요엘, 에즈라 형제님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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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