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마애불 다 보기 위해 산에 오르는 일은 고행이다.
경상도의 마애불은 대부분 경주에 있지만 경주 남산 보다 높은곳에 있는 마애불이 있기 마련이다.
구미는 여러번 답사를 갔지만 마애불이 4좌가 있어 낮은 곳은 보았는데 높은곳인 금오산은 차일 피일 미루다가
시간과 체력을 길러 도전을 하였다.
채미정 앞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케이블 카를 타고 오르면 여기서 2시간 정도 천천히 가면 마애불을 볼 수 있다.
다른 분은 1시간 30분이라 하지만 때가 때인지라 더위가 오는 5월 말이고 몸이 지치는 계절이라 체력조절을 하면서 올라가니 2시간 걸렸다.
올라 가다가 공사중이서 인부들에게 혼이 나서 마애불을 보는 것이 조금 지체 되었지만 산위에서 보는 구미의 모습은 그 모든 시련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마애불은 정상에 8부능선에 있으며 모서리에 새겨 져 있어 측먼으로 보면 다른 느낌이 든다.
마애불 가기전 오륜탑
절벽의 바위면을 깎아 만든 높이 5.5m의 고려시대 마애여래입상으로, 암벽의 모서리 부분을 중심으로 양쪽에 조각된 특이한 구도를 보여준다.
얼굴은 비교적 원만하고 부피감도 있지만, 가는 눈과 작은 입에서 신라시대의 마애여래입상과는 다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어깨나 팔의 부드러운 굴곡은 얼굴에 어울리는 형태미를 묘사하고 있어서 상당한 수준의 조각가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옷자락을 잡고 있는 오른손이나 지나치게 큰 왼손, 둔중하게 묘사된 두 발, 경직된 U자형의 옷주름 등에서 신라시대보다 둔화되고 위축된 고려시대 조각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불상이 딛고 서 있는 반원형의 연꽃 대좌(臺座)와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에서도 나타난다.
이 마애여래입상은 얼굴·신체·옷주름·광배 등에서 신라시대 보살상보다 형식화가 진전된 고려시대의 마애여래입상으로 볼 수 있다
마애 입상에서 600 m 올라가면 약사암이 있다. 여기는 본존불이 약사불이 이라 하지만 조사 결과
석가모니상으로 지정되어 있다.
여기서 아래를 보면 가슴이 확 트인다.
금오산 정상 부근에 자리한 전통사찰 약사암의 대웅전 본존불이다.
이 석조불상은 신라 말 혹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이 되며, 개금이 두텁게 되어 있으나 그 재질은 화강암으로 보인다. 개금하기 전인 1960년대의 사진에 의하면 원만한 상호에 완전한 형태의 석가여래상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영남지역의 석불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약사암중수기(藥師庵重修記)」에 따르면 본래 지리산에 있던 석불(石佛) 3구(軀)[삼형제불(三兄弟佛)] 가운데 1불(佛)이라고 한다. 그 중 1구는 김천(金泉) 직지사(直指寺) 삼성암(三省庵)에 봉안(奉安)하고, 다른 1구는 성주(星州) 수도암(修道庵)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보물 제296호인 수도암 약광전 석불좌상의 설명문에 ‘금오산 약사암에 있는 석불, 직지사 약사전의 석불과 함께 3형제라 하고 그 중 한 석불이 하품을 하면 다른 두 석불은 따라서 재채기를 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스님께 새로 발견된 소형 마애불 위치를 묻고 다시 아래로 내려 오는데 올라 온 길이 공사중이라 다른 길로 내려 가다가
금오산성의 흔적이 보인다.
해발 97 6m의 험준한 금오산 정상부와 계곡을 이중으로 두른 석축산성으로,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 보수하였고, 1410년(태종 10) 국가적 사업으로 크게 고쳐 쌓았으나 외적의 침입이 없자 차츰 폐허가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병자호란과 1868년(고종 5)에 계속해서 고쳐 쌓았다.
중요한 것은 금오산성에 대한 기록이 많이 없다는 것이다.
암벽에 선정비가 몇개 보이지만 조선시대의 기록이고 고려나 삼국시대 이전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성안으로 내려 오는데 길은 험하고 멀고 몸은 힘들고 내려 오는 것이 다른 산의 비해 몇배나 힘들다.
4시50분의 마애불 답사를 마치고 선산 이문리에 있는 관찰사비를 마지막으로 구미의 오늘 답사는 끝이지만
남은 오로리 사지와 몇개의 신도비는 다음을 기약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