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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100.6.27 토법 타이핑
반갑습니다. 오늘 강연을 잘 해서 인지 질문이 많이 나왔습니다. 덕진교우 강연 잘 들으셨죠? 원불교를 제대로 만나서였습니다. 원고를 잘 적고 외워서 피피티까지 준비해서 정성이 참 대단합니다. 급해서 허겁지겁한 게 아니라 정성으로 해줘서 감사합니다.
먼저 덕진 교우님은 처음에 만났을 때 강연에서도 말했듯이 어머니께 의지하며 거래 관계를 해서 오게 되었죠. 그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옛날에 제가 원남에 있을 때 박원진 교무님도 그렇게 해서 오셨습니다. 군 제대 이후 어머니가 세 번만 가보라고 하셨답니다. 덕진 교우랑 원진 교무랑 공통점이 있습니다.
집에서 원불교에 가 보라고 해서 온 사람들 중에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원진 교무님처럼 처음엔 거부감이 있지만 어머니가 가보라고 하시니 효심으로 시늉을 해서 오고 덕진 교우님은 거랠 하셨죠. 그런데 이렇게 와서 그냥 시간만 떼우고 간 게 아니라 “내가 건질 거 있으면 건져보자” 하는 생각이 있었던 거죠.
처음에 박원진 교무도 제대하고 왔을 때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가보라 해서 왔다가 어영부영 하고 사라진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부모님이 제게 연락이 와서 사정을 설명하고 우리 아들딸 책임져 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식의 두 부류가 있습니다. 그냥 시간만 떼우고 마음도 얻지 못하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차피 앉아 있는 시간에 건질 건 건져보자는 마음, 즉 배우는 마음, 까닭 있는 마음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젊은이로써 배우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우리 교법을 참 좋아하고 결국엔 본인이 상당히 은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일반으로 올라간 문혜은 교우가 친구랑 약속을 했는데 문혜은교우가 두 번 약속을 어겼대요. 그러다 세 번째 약속 때 친구가 무슨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안하니까 마지못해 교당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 제안이 바로 청년 초대법회를 오는 거였습니다. 이 친구는 고대 수학교육과 다닐 때 강남에 있는 사랑의 교회에 열심히 다녔던 친구입니다. 그런 문혜은 교우에게 딱 한번만 초대법회에 오라고 제안을 한 겁니다.
그런데 이 친구 내면에는 신앙에 대한 궁금증이 있어 목사님에게 계속 질문을 했습니다. 신의 존재와 신비적인 것에 대해 질문을 계속 했는데 이에 대해 목사님은 마치 기독교의 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기독교에서는 교리에 대한 의심을 품으면 그건 신을 의심하고 신이 흔들리는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혜은 교우는 신의 존재는 과연 어디에 있나 하는 물음으로 계속 고민을 했습니다.
제가 그 친구가 초대법회 왔을 때 일반인들이 우리 교법 중에 좋아하는 내용으로 설법을 했습니다. 수행자들은 삼학병진을 좋아하고 까닭 있는 사람들은 이사병행을 설명해주면 아주 좋아하는데 보통 사람들은 사은을 말하면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천하의 하우자(멍청이)라도 사은 없이는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부모, 동포, 법률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단순한 은혜적 관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 대상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저 하늘 위에만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만나는 각 대상이 나에게 죄와 복을 주고 나에게 위력을 주지 않느냐 라는 거죠. 직원이 회사에 위력을 주고 손님이 위력을 주고 옆의 주 인연이 이 나에게 위력을 주지 않느냐. 그분이 바로 신앙의 대상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 친구가 깨달았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신앙의 수직적 구조를 수평적 구조로 설명해 주신 겁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입교하고 청년 부회장도하고 교무 정토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당의 핵심인력입니다. 청년회 때도 보이지 않게 많은 사람을 교화했습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고 있냐 하면 원불교는 교회에 비하면 역사도 짧고 수량적으로도 적고 여러 가지 기관이나 사람 수도 훨씬 많아요. 원불교의 매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큰 매력은 대종사님의 법입니다. 그 법은 첫째로 시대에 맞고 둘째로 누구나 이해하고 써먹을 수 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바로 응용할 수 있다 하는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원불교의 교법은 시대에 맞고 누구나 이해하고 접할 수 있으면서 내 삶에 바로 적용하면 은혜가 쏟아져 나오는, 대종사님의 표현에 의하면 먹기만 하면 선약인 것이 바로 대종사님의 법이다 하는 겁니다.
충타원님께서 우의동 원장으로 계십니다. 이 분이 안산교당 교무님이셨습니다. 충타원님이 덕진교우에게 안암교당을 소개해 주신 것 같습니다. 항상 덕진교우는 충타원님께 고마운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 들어가면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감사하고 종교적인 면에서 보면 어머니의 역할이 아주 큽니다. 어머니가 덕진교우 모르게 저한테 압력을 많이 넣으셨습니다. 좋은 말로 할 덕진이한테 잘하라고 보통이 아니셨죠.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냐면 어떤 일을 하면 지켜보고 주위에서 바라보는 성격이 아닙니다. 기어이 되게 만들어버려요. 일은 저지르고 되게 하여야 하고, 되었으면 한다는 관망은 일을 성공시킬 수 없습니다. 덕진교우 어머니께서는 이번에 향타원 법호를 받으셨는데 안산교당 부회장이십니다. 일인 회사도 되게 하시고 딸 신앙도 되게 하시는 추진력을 갖고 계십니다. 그 음덕이 그렇게 크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덕진교우는 오빠가 있고 여동생 다솔이가 있고 사촌 두 살 차이나는 양은선 교우가 있습니다. 교화는 시내에 나가서 원불교와 관련된 팜플렛을 나눠주고 신문에 내면 잘 될 것 같지만 쉽지 않습니다. 결국 교화는, 물론 사업도 마찬가지이지만 사업도 인연입니다. 인연 중에서도 가까운 인연부터 하는 것입니다. 덕진 교우도 엄마라든가 여러 인연을 통해 마음이 나니까 동생들을 하게 되었어요. 가장 효과적인 쉬운 교화의 방법이고, 교화를 안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예상해 드릴까요?
종교라는 것은 영혼을 떼타지 않게 해줍니다. 반대로 말하면 인간은 아주 탐욕적입니다. 그 이야기는 다솔이가 원불교를 안 다니면 지금은 그런 생각이 없지만 시집을 가고 자식을 낳고 남편을 만나면 살림이 달라집니다. 덕진이를 잊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마음을 계속 닦지 않는 이상 오염이 되기 시작합니다. 영혼이 때가 타고 가치관 차이에 의해 의견 충돌이 되고 재산 문제나 결정을 함에 있어 충돌하게 됩니다. 가장 행복한 친구, 부부, 법동지는 생각을 공유하는 친구, 부부, 법동지인 것입니다.
생각이 다르다면 결국 다툼이 생기고 나중에 문제가 생기죠. 다르다고 해서 다 그러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라는 것이 종교가에서 기도하고 훈련을 통해서 스승님의 법문을 듣더라도 마음은 욕심에 의해 번뇌가 가득하고 싸움을 하는 법이고 덕진교우가 말했듯이 책을 봐서 말로는 옳은 말을 해도 행동은 다르게 나오죠. 단순히 마음에 힘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신앙적인 진리관이 없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정리해보자면 불가에서는 속인은 속인이고 중생은 중생인 것이고 소인은 소인이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다릅니다.
토요일 이 시간에 여러분이 오신 것은 대인으로 군자로 부처로 살고 싶고 그런 큰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내 맑은 영혼을 떼 타게 하고 싶지 않고 이 세상의 보은자로서 세상에 큰 은혜를 주고 내생에도 환영받는 영생의 행복자가 되어 보면 어떻겠는가 하는 생각도 있으시고 마음속의 문제들을 어떻게 하면 근원적으로 해결해 볼까 하는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있어도 마음을 다스리기가 힘든데 이런 생각도 없이 욕심의 세계에서 소인으로 살아가면 얼굴에 때가 덕지덕지 붙고 어두워진 기운으로 싸움닭같이 살게 됩니다. 제일 불쌍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기운 자체가 맑은 사람은 스스로가 행복합니다. 누가 일이 잘 풀리고 예쁘다고 행복한 게 아니라 자신의 기운이 맑아야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본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양을 통해서 내가 나의 본래 자리에 들어갔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제일 큰 욕심은 수양에 대한 욕심입니다. 그게 제일 큰 행복이니까. 명예, 돈, 쾌락 다 일시적 행복이고 끝없는 갈증과 욕망이 겹칩니다.
그러나 조건 없이 본래의 나와 합일할 때의 행복은 비교할 수도 없고 빼앗아갈 수도 빼앗길 수도 짓밟힐 수도 없는 행복입니다. 그래서 같이 신앙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복이 있으려면 이렇게 해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가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길 종교는 직업 생활, 사업과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종교가 정말 보탬을 줍니다. 사업을 한다면서 바쁘다고 법회를 어영부영 나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남궁부가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감산님이라고 출가위 어른이신데 대종사님 법대로 회사를 운영하십니다. 노사 분규도 단 한 번도 없고 담배 피우는 사람도 없고 주식 연말 배당금이 당신에게 몇 억인데 백 프로 장학 재단에 내십니다. 공장이 우리나라만 해도 4~5개, 해외까지 합하면 7, 8개가 됩니다. 그런데도 그 분은 법회 무결석에 교도 회장하고 중앙교의회 회장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이 안타까운 점은 학업 성적 취업 사업을 위해 이 법을 멀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도움을 주는 것인데 왜 피해를 주고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하는지 정말 안타깝습니다.
오늘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화재가 났는데 화재가 나면 주위 사람들이 도와줄 것 같죠? 천만에요. 진정한 친구는 어려울 때 나옵니다. 좋은 상황에선 누가 안 좋아해줍니까. 화재가 나면 자신이 평소에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위에 적이 많으면 잘 못 산 것입니다. 또 일반 업자들은 화재가 났다고 해서 쉽게 도와주지 않습니다.
또 아까 주위에 있던 경쟁 업체가 아예 더 망해버리라고 도와주질 않았는데, 경쟁 업체에 대해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죠. 상대를 알고 나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지피지기 하는 것이. 도인 교우 다니는 회사에 가서 내가 오늘 독경하고 왔어요. 건물이 200억이고 직원이 128명입니다. 불과 몇 년 전에 갔을 때만 해도 60명이었는데 128명으로 늘었습니다. 거기가 원래 솔루션 시뮬레이션 하는 회사인데 그 계통에서 2위였습니다. 그런데 1위하는 회사 사장이 2위 3위 회사들을 누르고 자기가 앞서 가니까 어리석은 행동을 했습니다. 그 어리석은 행동이라 하면 첫 째, 남자는 바람을 피우고 둘째는 사업을 대량 확장하고 그다음으로 잡기를 합니다. 이 사람은 잡기를 하다가 꺾어져서 도인 교우 회사가 자동으로 1위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왜 드리냐 하면 너무 경쟁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아까도 회사에서 정도 경영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게 정답입니다. 정도 경영을 해서 내가 내 길을 쭉 가기만하면 주위(경쟁자)는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있습니다. 뭔 덫에 걸리든지 알아서 떨어져 있습니다. 남녀 문제이든 건강 문제이든 인연 문제이든 욕심을 과대하게 내서 떨어져 있든가 잡기를 하고 하다가 떨어져 나갑니다.
가치관이나 진리관이나 마음의 힘 또는 스승이 없으면 그렇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6-70년대 우리 큰아버지도 회사를 크게 했어요. 내가 나중에 보니까 6-70년대 회사 사장 중 작은마누라 없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8-90프로 이상이 둘째, 셋째부인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이 법에 바탕 해서 차분히 가다보면 기가 막히게 주위는 다 정리가 되어 있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스스로 엄청 커져 있다 하는 말입니다.
우리 법은 동정간 공부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공부입니다. 모든 대상이 불공의 대상이에요. 무시 학습이요 엄청난 공부입니다. 경계를 대할 때마다 크게 되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경계를 당하면 아파하고 상처를 입고 주저하고 또는 방향을 틀고 병이 납니다. 원불교 사람들은 경계가 있으면 처음엔 주춤하다가 결국엔 그게 자기 성장의 기회가 되고 대나무에 마디가 늘어나듯이 쭉쭉 커나갑니다. 그게 원불교 마음공부의 위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괄목상대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개인도 가장 잘 살고 싶다면 교육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즉 공부와 훈련입니다. 우리 안암교당 청년회도 더 잘 되게 하고 싶으시다면 훈련에 빠지시면 안 됩니다. 공부방에 오지 않거나 공부할 기회가 있을 때 빠지면 그 사람도, 안암교당도, 원불교도, 회사도 비전은 없습니다. 어떤 기업이든 종교가든 가정이든 단체든 교육과 훈련이 빠지면 비전은 없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생각할 때 내가 경전을 얼마나 보고 쓰는가, 훈련에 얼마나 안 빠지는가 또는 공부방에 안 빠지는가 생각해보세요.
제가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이렇게 강의를 하고 나면 여러분들에게 강의료를 50만원씩 받아도 손해입니다. 내가 살아온 경험 노하우, 깨달은 것 모두 제 것이 아니고 다 대종사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서울 시내에 이 정도 법당을 짓고 이 시설들을 운영하려면 얼마 드는지 아세요? 제가 원불교학과를 다니면서 들인 돈이 몇 억이고 출가한지도 30년이 다 되었습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이 노하우들에 대해서 질문하는 사람, 상담하고 공부하는 사람이 가장 반갑습니다. 그런데 질문 안하고 공부도 안하고 미꾸라지처럼 빠집니다.
정신과는 의사가 가만히 앉아서 듣고만 있는데도 한 시간에 8만원씩 받습니다. 종교가는 이런 일반 상담과는 다릅니다. 참 신기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르면 부정해버립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지 부정해버립니다. 그게 철학적 사유라는 겁니다. 철학이란 사실을 직시하는 겁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사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르면 부정합니다.
지금 제 손에 컵이 들려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앉아있지 않았던 누군가가 들어왔을 때 그 사람에게 내 왼손에 뭐가 있냐는 질문을 하면 그 사람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첫 번째 보기는 컵이라는 대답을 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투시력이 있다면 가능하겠죠. 두 번째 답은 모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정답이죠. 그러나 사람들은 없다고 합니다. 프랑스 파리가 있습니까? 모스크바가 있어요? 내가 안 보이면 없는 겁니까? 대종사님께서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원불교에 들어오면 점수를 더 준다 하셨습니다. 저는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신뢰를 하지 않을 때 저 정도 되는 사람이 믿는다면 나도 믿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나기 마련입니다. 원불교에 다니는 사람 중에 여러분보다 훌륭하고 유명하고 경험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그런 사람들도 믿는데 내가 그 법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모르니까 안 믿더라도 그냥 알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그건 2등급 철학적 방법입니다. 철학은 처음에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모른다는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이것이다’라는 정답을 놓고 접근합니다. 그런데 접근을 하는데 있어서 무조건 믿는다고 하면 그건 맹신입니다. 내가 내 것화하는 과정을 의문을 통해 가질 때 그게 정신(正信)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신(信)이다. 그러나 보통사람은 불신입니다. 아니라고 해버리죠. 성자의 말씀은 일단 믿어라. 몰라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분발하고 의심을 지속적으로 하라. 그런데 사람들은 의심 자체를 하지를 않습니다. 불신을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경험한 만큼밖에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죠. 성자의 지혜를 자기 것을 삼을 줄 몰라요 기가 막힌 타력을 스스로 차단하는 꼴이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의 회사를 차렸다면 자신이 경험한 것만 갖고서 회사를 설립할 게 아니라 이왕이면 비슷한 회사를 벤치마킹하고 책을 보고 하면 훨씬 편합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아니라고 하거나 없다고 할 게 아니라 차라리 모른다고 하고 아는 사람에게 물어 보는 것이 올바른 태도죠. 무조건 불신하는 태도가 무지의 소지요 교만의 소지입니다. 그 결과가 불신인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책이나 인연을 통해 내가 한 번 성격이나 내 자신을 바꿔보겠다고 하는 것도 좋습니다. 덕진교우가 생각이 있는 사람이죠. 그런데 책을 많이 보는 것도 좋은데 중요한 건 내 삶의 변화입니다. 책을 보는 것과 내 삶의 변화와는 다릅니다. 교회 가면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장애인 아저씨가 걷기도 하고 깡패가 갑자기 목사가 됩니다. 하지만 감동이 무슨 소용입니까? 내 삶에 내가 적용해서 변화가 있는 게 중요하지 감동이 뭐가 중요하냐는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념입니다. 그게 실행이죠. 실행이 중요하고 실행 없는 감동은 소용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감동 주사만 맞게 되죠. 감동적인 것만 찾아다니고 그 다음에는 내성이 생겨서 어지간한 일에는 감동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원불교의 제일 큰 공부는 취사입니다, 취사. 즉 실행입니다. 실행하는 종교예요. 원불교는 실행하고 써먹는 종교입니다. 마음을 사용 ‘용(用)’ 하는 것이죠. 마음을 쓰는 종교지 마음을 간직하고 관념으로 생각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마음을 쓴다는 것은 몸을 쓴다는 겁니다. 몸을 써야 합니다. 몸을 쓰지 않고 관념으로만 하니까 청문회에 세워 놓으면 엉망진창이죠. 서울대를 나오고 하버드대를 나왔어도 청문회에 나오라고 청와대에서 연락이 오면 다 꼬리 빼고 도망간답니다. 지금까지 우리 수준에서의 청문회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사회에서는 다를 겁니다.
앞으로의 미래 사회는 도덕성과 과학적 능력 이 두 가지를 겸비한 사람이 차분히 자기가 준비하면 오히려 여기저기서 오라고 해서 귀찮을 것입니다. 내가 내 할 일을 하면 그까짓 명예와 부귀, 내가 원하는 것들은 귀찮을 정도로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쫓아가면 도망가버리지만 내가 하면 귀찮을 정도로 따라옵니다. 속 좁은 사람 마냥 여자 쫓아다니고 돈 쫓아다니고 하면 원불교에선 좀생이입니다. 사회에선 그걸 잘한다고 보고 박수쳐줄 지도 모릅니다. 짧게 보면 그게 잘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시대가 빨라서 다릅니다. 내가 조금만 내 자신을 바로잡아도 회사에서 상을 하도 줘서 다른 사람들한테 주라고 할 겁니다. 처세하고 아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은 그릇이 작으면 자만합니다. 여러분의 그릇은 어떤 그릇인줄 알아? 그릇 없는 그릇입니다. 그것을 상근기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법기라고 하는데 그건 그릇 없는 그릇이 제일 큰 그릇이라는 겁니다. 왜 그릇이 없다고 하는지 아세요? 여러분 본래가 여러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스스로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기로 말하면 우주를 감싸고도 남고 작기로 말하면 겨자씨보다 작은 것이 여러분입니다. 그런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은 자기를 국한짓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천지보다도 큰 것입니다. 사실은 광대무량한 천지보다 더 큰 게 여러분 마음입니다.
그런데 누가 칭찬받으면 속이 쓰리고 누가 상 받으면 성질나서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워대죠. 미생 본 사람이 교무님들에게 보라고 추천을 합니다. 미생에서 그려낸 현실이 회사 생활에 거의 근접했다고 하지만 조금 약하다고 합니다. 국한을 지은 채로 상대적 세계에 사니까 누가 잘 나가면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고….
내 시골 친구들이 하도 연락 와서 몇 번 나가 봤습니다. 나가서 나는 반가워서 필름이 40몇 년 전으로 돌아가는데 친구들은 툭하면 카톡에서 자신들끼리 싸운 이야기 하고 누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 하고 자신이 들어왔는데 누가 자신을 보고 안 웃었다고 하고 자기보다 잘 산다 어쩐다 어떤 이유로 동창회 안 나오겠다고 하고…. 여러분 이렇게 살고 싶으십니까? 화재 이야기도 나왔지만 앞으로 여러분에게는 별일이 다 생길 겁니다. 교통사고가 날 수도 있고 내 스스로가, 내 가까운 인연이 또는 내 직장이, 이 나라가 별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 때마다 어쩔 수 없다고 하시겠어요?
IMF때 더 성장한 회사를 몇 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우리 학사에 장학금 희사한 분이 IMF 때 회사를 2배 3배 성장시키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차입을 받아서 과다 투자를 하는데 이 분은 자본을 갖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과다 투자를 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돈을 가지고 있다가 회사가 성장합니다. IMF때, 그리고 경기가 어려울 때 두 배 세 배 더 큽니다. 부동산 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질 때 그걸 하나 사는 겁니다. 세상이 흥망성회 할 때 같이 흔들리지 말고 내가 중심을 잡고 가만히 있다가 가격이 내려가면 하나 사고 또 다시 그 사이클이 돌아오면 사고, 조금만 기다리면 사도록 되어 있습니다. 주식도 마찬가지고 부동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멀리 보지 못하고 짧게만 보는 사람은 결국은 어려워지는 겁니다.
보통 하나가 터지면 대개는 악순환이 됩니다. 아까 강연에서도 화재가 났을 때 어머니가 죽을 생각을 했더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신앙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제가 전농에 있을 때도 그렇고 교무 하면서 이런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부도가 나서 식구들이 같이 약을 먹고 다 죽자고 하는 경우도 있고 많은데 제가 교화해서 잘 살게 한 경우가 여럿 있습니다.
종교라는 것은 한계상황 속에서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사람이 오히려 어려운 환경을 자신의 자산으로 삼을 수 있게 해줍니다. 공부인의 자세죠. 그러나 비공부인 에게는 어려운 상황이 상처와 원망이 됩니다. 젊을 때는 돈을 많이 버는 집을 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산을 많이 쌓는 게 중요합니다. 젊을 때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 푹 고꾸라지지 말고 노후에 쭉쭉 올라가라는 겁니다. 이것이 이소성대입니다.
사업이라는 건 쉽게 성장하지 않습니다. 확 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지고는 합니다. 그러나 그 곡선을 더 크게 들여다보면 올라가고 내려가는 와중에도(진급기, 강급기처럼) 그 안에 미세한 오르내림(성주괴공)이 있습니다. 그 때 평상심을 유지하느냐, 잘되든 못되든 그걸 뚝 떼어놓고 볼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 힘이 없어서 병이 납니다. 요즘 정신과가 손님들로 미어터지죠. 앞으로 더 그럴 겁니다. 그건 마음에 힘이 없어서 흔들릴 때마다 정신을 못 차리기 때문입니다. 자산이 될 시간에 그런 사람은 병원에 가야합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직장 안에서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럴 겁니다. 여러분들, 유지비 없어도 없는 대로 잘 내세요. 나중에 그게 다 자신의 자산이 됩니다.
그리고 아까 덕진교우가 초인종 소리를 들으면 덜덜 떨었다고 했는데 경계를 한 번 겪고나면 그렇게 행동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수양심이라는 건 부동심이라고 합니다. 나를 비워버리는 것입니다. 수양심은 무유공포입니다. 공포가 붙을 자리가 원래 없는 겁니다. 마음의 힘, 수양력, 부동심이 있으면 ‘아 그렇구나 또 볕들 날이 있겠지’ 하고 넘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까 부모님의 노고라고 표현했는데 사실은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부모님의 은혜를 10분의 1만 알아도 그 사람은 효자 효녀입니다.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자력도 중요하지만 부모 말을 믿고 나서 자신의 세부 분야에서 창의적 생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지 내 경험만큼만 부모의 경험을 믿겠다면 자기 손해입니다.
아까 평정심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본래 우리는 평정하고 탕평합니다. 원래 나도 없고 너도 없습니다. 그러나 경계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 그게 계속 그러는 것이 아니고 변화합니다. 이게 대소유무의 원리입니다. 대 자리에서 보면 본래 두려움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소 자리에서 보면 두려움도 있고 잘 풀리는 일, 안 풀리는 일 등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유무 자리를 통해 변화하는 것입니다. 우주 진리가 그 변화를 시키기도 하지만 내 마음이 시킵니다. 그래서 자신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 변화를 주도할 것인지.
그래서 일체가 유심조라는 말은 유무자리에서 즉 마음의 대자리를 통해서 나온 존재가 공이라는 것, 즉 실체가 공이라는 겁니다. 또 소 자리로서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인연 따라 있을 수 있고 유무 자리에 따라 얼마든지 내 마음이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 어떤 존재인가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 중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고정된 것이 아니니까 나를 어느 한 가지라고 이야기 할 수 없고 따라서 그건 무한한 가능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
유무자리로 여러분은 앞으로 얼마든지 여러분의 미래를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에겐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 법을 근간해서 이 중에서도 내가 죽고 난 후 여러분도 나이가 꽤 들면 여기서 출가위도 나올 것이고, 출가위는 성자 중에서도 보살 급입니다. 또 항마위도 나올 것이고 일찍 죽거나 원불교를 떠나서 추억으로 가질 사람도 많을 겁니다. 이 중에 원불교 계속 다닐 사람 반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왜 제가 그렇게 말씀드리냐하면 제 방에는 사진이 있습니다. 15년 전 사진을 보면 원불교 다니는 사람 몇 명 안남았습니다.
그때 당시에 임원 한다고 큰 소리 치고 단원들에게 전화 돌리던 사람들도 안 옵니다. 그건 내 마음을 내가 믿으니까 발생하는 일입니다. 상전급까지는 내 마음을 내가 믿으면 안 됩니다. 그때까지는 진리를 믿고 법을 믿고 스승을 믿어야 합니다. 신은 정이라고 했습니다. 정이라는 것은 고정시켜버리는 겁니다. 진리와 회상과 법과 스승에 박아 버리고서 내 마음이 장난을 친다고 하더라도 이미 박은 것을 뽑으면 안 됩니다. 마음이 장난하면 뽑아서 던져 버리는 사람은 원불교를 못 다닙니다.
그리고 아까 (덕진교우가) 옛날 단장중앙들한테 고맙다고 했는데 이 태도가 옳습니다. 자기 혼자 성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제가 석사로 상담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감정적인 공감과 이성적인 이야기를 하셨는데 인간은 감정과 이성, 즉 지정의 삼방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약자일수록 감정적 위로(공감)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계속 위로만 받으면 약자로 머물 수밖에 없어요. 그걸 해결하는 이성적 방향제시가 필요하고 때로는 그것을 참회하고 직관할 수 있고 자기 잘못을 인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매서운 충고도 필요합니다.
수준이 낮은 사람은 칭찬을 좋아합니다. 칭찬을 계속 해주면 낮은 집단입니다. 회사에서도주면 과장급 이상은 칭찬을 계속 하면 효율이 떨어집니다. 환경 문제에 대해서도 어린 아이들은 칭찬을 해주면 기부하지만 과장급 이사는 지구의 심각한 위기를 말해줘야 기부합니다. 칭찬이라는 한 면만 보지 말고 여러분은 양면을 모두 봐야 합니다. 칭찬만 받고 큰 것이 아니잖아요. 세상은 음양으로 구성되어 있는 겁니다. 교당에서도 항상 칭찬만 해줍니까? 칭찬만 해달라는 건 자기를 아이로 취급해 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솔성요론 일조에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으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람을 통해 칭찬을 듣고, 공감을 얻고 격려와 위로를 받으라는 거죠.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말고 때로는 법과 스승으로서 충고도 듣고 때로는 그것을 법으로 승화시켜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정이 법을 거쳐 온 정일 때 참 정이 됩니다. 따라해 보세요. “참 정은 법을 걸쳐 나온 정이다.” 그것이 참 정입니다. 어중간한 정은 나중에 문제를 발생시키고 집착의 세계에 빠지게 하고 정당한 세계에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법에 바탕한 정이 참 정인 겁니다. 법에 바탕 했다는 것은 공부에 기반을 두라는 것입니다. 공부를 근간으로 사업도 하고 결국은 우리 사업하자는, 일하자는 뜻이죠. 그러나 공부에 바탕하지 않으면 사업이 오래 가지고 못하고 상이 나고 나중에 가서는 싸움이 납니다. 공부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공부에 바탕해 사업을 하는 즉 일심보은하는 것이 불법 시 생활입니다. 일심만 주장하는 게 원불교가 아닙니다. 일심으로 보은하자는 게 원불교입니다. 공부해서 사업하자는 거고 원불교는 그런 법입니다.
아까 덕진교우님께서 변화가 네 가지 정도가 있었다고 이야기하셨는데 교법에 대조, 활용 위주였는데 믿음에 바탕한 활용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감사생활. 원불교 법을 진정으로 깨우친 사람은 감사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평정심과 진리의 힘. 진리의 힘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기도를 하게 되죠. 그리고 다짐으로 정각정행을 이야기하셨는데 두 가지의 정각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나에 대한 정각이고 둘째는 진리에 대한 정각입니다.
나에 대한 정각이 되려면 나를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정행은 어디서나 쓸모 있는 원만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앞으로 환영받는 사람은 원만한 사람입니다. 정에만 치우친 사람도, 법만 주장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법과 정, 일과 공부 모두 조화롭게 하는 사람이 원만한 사람입니다. 이게 정행이죠. 또 상근보시에 대해 이야기하셨는데 보시하면 나오는 병이 상입니다. 보시하면 상이 나옵니다.
보시를 안 하는 사람들은 상이 안 나오고 상낸 사람을 욕하죠. 복도 안 지은 사람은 상 내는 사람을 욕할 자격이 없습니다. 복을 지으면 상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그 상을 가지고 공부를 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 이런 상이 나오는지 들어가 봐야합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공부를 거치지 않으면 상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토가 떨어지지 않으면 지속적인 상이 남아있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실체는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고 들어가 봤더니 없더라는 걸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지은대로 받게 되는 작용은 있다는 것 까지도 알게 됩니다. 없으면서 있는 원리를 알지 못하면 상근보시는 어렵습니다. 국한?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국한을 넘어서는 사람이 되려면 나라는 존재가 천지보다도 광대무량한 존재임을 아는 것인데 그게 울을 넘어서는 거고 상대의 세계를 넘어서는 겁니다. 그럼 천하가 다 내 것이 되고 천하의 것이 다 자신의 가족이 되고 천하의 일이 내 일이 되고 천하가 나를 도와줍니다.
이왕이면 여러분들은 천하에게 도움 받는 사람이 되세요. 최후에 승리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몇 사람에게만 도움 받는 것이 아니라 천하에게 도움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은생어은. ‘은혜는 해에서 생긴다’라고 해석이 됩니다. 결국 복락은 고통에서 온다는 겁니다. 우리 덕진교우는 크게 대우받고 그에 비해 적게 쓰는 것 같아요. 더 배우셔야 합니다. 되도록이면 법회 결석을 줄이고 결석을 했다면 영상으로라도 법회를 보세요. 또 하나는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법회만 보아서는 쉽지 않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그래서 그게 상시응용주의사항을 주셨습니다. 기도, 경전봉독, 일기 같은 것이 지속적으로 되어야 합니다. 그게 되면 쑥쑥 클 겁니다.
덕진교우도 관 속에 들어갈 때 큰 도인이 되어서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죽을 때가 되면 90% 이상이 화장을 할 거라고 봅니다. 종교에서 생사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면 좀 그렇습니다. 생사 문제를 생각한다는 건 현실을 가장 효율적으로 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나의 삶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고 현실과 연결짓기 위해서 생사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Q.(이도심 교우님) 제가 교당을 오래 다닌 건 아니지만 요즘에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생각이 드는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서 내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서야 하는지 의문이 많이 듭니다. 요즘 소중한 것인데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A.(양도인 교우님) 배움이 중단이 되거나 배우는 노력이 약해졌을 때 그런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교무님) 중요한 답 중 하나예요. 사람이 배우면 자극을 받습니다. 일상성에 빠졌다는 것은 자극이 약해졌다는 겁니다. 책만 하나 봐도 매우 크게 자극 받습니다. 회장, 단장들이 법문들 보내주면 자세히 보세요. 그것을 내 마음과 내 실행과 대입해서 보세요. 그럼 그 법문이 피가되고 살이 됩니다. 그런데 그냥 그걸 보고 ‘아는데, 들어봤는데’ 하고 넘기면 그게 바로 매너리즘입니다. 실행을 생각하면 매너리즘에 안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매너리즘은 관념의 유희입니다. 관념에 빠져 있으면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은혜를 알아도 실행을 해봐도 공부를 해봐도 매너리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해보면 실제로는 내가 계속 달라집니다. 또 실천해보면 나도 바뀌지만 주위 환경도 다 바뀝니다. 이렇게 적용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갔는데 환경이 또 달라져있고 그 다음에 오면 또 달라져있습니다. 환경도 계속 변화합니다. 실천해보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졌다면 실행을 안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기 쉽습니다. 좌선도 그렇습니다. 그걸 습선이라고도 표현하는데 그냥 좌선만 계속 하고 있는 겁니다. 서원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앉아있으면 그게 습선, 즉 그냥 선만 하고 앉아있는 것이 됩니다. 자기가 깨어 있지 않으면 멍하니 앉아 있는 겁니다. 경전 봉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생각 없이 읽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일단 정당한 규정이나 방법이 있다면 생각 없이 했어도 그 안에서 얻는 것이 있습니다. 콩나물에 물을 주면서 물을 흘렸어도 콩나물이 크듯이 설사 생각 없이 했다고 해도 법회를 보고 경전을 읽고 좌선을 하면 커나갑니다. 학사생들이 고생을 많이 하지만 제대로 철이 든다면 빠르게는 10년, 20년 늦게는 30년 안에 나를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 탁월한 걸 자신이 당시에는 몰랐다는 거죠. 교무님이 공부 이야기하면 학생들이 싫어합니다. 우산 교무님께서 학생들한테 예전에 하도 공부얘기를 했더니 학생들이 싫어하고 맨날 대모나 하고 해서 확 그만 두셨습니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와서 죄송하다 했습니다. 애초부터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더 컸을 것이고 나중에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해도 되죠. 그러니까 젊을 때 말을 너무 잘 들어도 안 되는데 말을 잘 들을 것이 있고 안 들을 것이 있습니다. 주체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말을 듣지 말고 창의적으로 자기 생각을 하세요. 그러나 신앙적인 거나 부모 스승의 이야기에서 수행적인 것은 말을 들으세요. 계문 지키라는 것과 하루 일과 지키라는 대종사님의 말은 들으세요. 그러나 많은 시도는 이것저것 적극적으로 해보세요. 젊은이라는 것은 도전이 아름다운 겁니다. 젊은 사람이 지금 도전도 안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학생들은 별 볼일 없습니다. 나는 혜성이가 마음에 들어요. 나중에 한 몫 할 겁니다. 젊을 때는 도전해 봐야지 맨날 방에서 티비나 보고 그럼 별 볼일 없습니다.
Q.(최도민 교우님) 상이 나는 것이 당연하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A.(교무님) 사실은 그것만 가지고 법회 한 번 봐야합니다. 상은 사상이라고 해서 상이 떨어지면 여래위입니다. 최소한 항마위 이상입니다. 그만큼 상을 안 내는 것이 어렵고 중생은 상이 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걸 떼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같이 병행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나라는 존재가 무아라는 것을 알아야 상이 떨어집니다. 내가 줬다는 것이 상이잖아요. 그러나 사실은 내가 낸 것이 아닙니다. 나 없는 것이, 나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 했을 뿐입니다. 내가 했느냐 무엇이 했느냐 하는 것을 깨쳐야 하고 둘째는 사은의 은혜 인과의 이치는 분명히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은혜만 알아도 상이 떨어집니다. 엄마한테 뭐 하나 사주고 상이 나오겠어요? 은혜를 알면 상이 안 나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공부하고 살다보면 별 사람 다 만날 겁니다. 배신하고 등에 칼 꽂는 놈들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결국은 다 돌아와요. 호리도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법에 호소할 거 있으면 해야죠. 그러나 그렇게도 제재할 수 없다면 걱정마세요. 우리 집에 소로 와서 꼬리까지 떼어 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억울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지었으니까 받든가 안 지었으면 안받습니다. 진리가 다 보상해 줍니다. 이게 철저한 인과의 이치입니다. 사실은 절대 손해 없습니다. 지은만큼 받는 겁니다. 인과는 지은만큼 받고 내가 받은 은혜를 갚은 것이기 때문에 상이 날 것이 없습니다. 무상은 깨쳐야 하고 인과는 계속 실행을 통해서 계속 녹아나는 겁니다.
첫댓글 타이핑공양 감사합니다^^
아고고~~
글씨가 넘 작아 60대 이상은 도저히 불가합니다아~!!!
돋보기를 써도 어렵습니다아^^
선처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