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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생활이 취미활동이라면, 취미활동 역시 ‘비격식’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취미활동은 서로가 공유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에 목적성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 취미활동에 적합한 뜻을 가지고 시간을 투여해야만 효과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취미활동이라는 것은 취미에 자기를 연동시키는 주된 매개체를 통하여 수행되는 것이므로, 그 목적성이 명확해야 한다. 사람이 모이는 곳은 그 어떤 것이라도 '친목활동'의 성격이 생겨날 수밖에 없지만, 친목이 주된 매개체보다 더 부각되어 버리면 본래의 목적성이 훼손되어 그냥 도로 '친목활동'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굳이 어떤 매개체를 공유할 필요 없이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이야기의 장이 되어 버린다.
취미활동은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모이는 분명한 매개체를 필요로 한다. 단지 사람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그 무엇'에 의하여 모이는 것이어야 한. 그 매개하는 그 자체에서 '에너지 = 힘'를(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차맛어때>는 '차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들의 연합체'이고 차로써 소통하는 공간이다. 그러니 차맛어때의 취미활동의 매개체는 '차'이다. 취미활동의 가장 기본 골격은 일단 '순수성'이다. 순수성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순수한 기쁨이라고 여긴다. 차를 마실 때 차 그 자체가 주는 이야기와 에너지가 있으므로, 그 자체와 자기와의 교감에서 얻어지는 기쁨은 순수한 것이라고 여긴다. 차를 마실 때 자기 내면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바로 '순수한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취미활동은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순수한 기쁨'에 몰입하는 것이라서, 반드시 자신과 연결되는 매개체가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이 매개체가 우선순위가 되면 이 매개체에 적합하도록 관계의 룰(질서)도 정렬하게 된다. 이렇게 생겨난 ‘룰’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관계를 지속하는 힘이 있다. 관계를 억압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집중하지 않고 매개체에 몰입하는 것이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바로 이 지점이 취미활동을 하는 이유일 것이다.
몰입할 때 정신은 긴장상태에 있게 되고 오히려 편안해한다. 신체는 몰입할 때 이완되어 부드러워진다. 경계가 사라지고 새로운 경계가 생겨난다. 그것은 하나의 ‘막’과 같다. 차를 마실 때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지점은 바로 그 지점일 것이다. 차와 마찬가지로 학문(철학)하는 즐거움도 바로 이 범주에 있다고 여긴다. 자기가 편안하고 좋아야만 몰입할 수 있는 게 학문이고 철학이고 취미이기 때문이다.
취미의 역사는 오래되었다고 여기지만, 요즘처럼 모든 사람이 각자의 삶에서 받아들이고 인식한 기간은 몇 백 년밖에 안 되고, 우리나라는 몇십 년밖에 안 된다. 취미는 학문하는 즐거움처럼, 그러니까 무엇인가에 몰입할 때 얻어지는 즐거움에서 비롯되는 순수한 기쁨에서 파생되었다고 여긴다. 책 읽기 취미가 아마 가장 유사한 파생 형태일 것이다. 학문과 취미의 경계 지점에 있는 형태로는 ‘책 읽기’가 대표적인 취미 형태라고 여긴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하고 수많은 취미활동이 있지만, 차맛어때는 '차와 차문화'를 선택한 사람들이 모인 대집단이고, 이에 맞게 차맛어때 룰은 진행되는 것이며, 이에 마음을 둔 사람들이 모여서 차생활을 수행하는 소집단으로 분화되었다.
살면서 누구나 자신에게 알맞은 취미가 있다면 자기 삶을 원활히 흐르게 하는 도구를 하나 더 가지고 있는 셈이니 어느 모로나 유익하다. 거기에서 새로운 형태로의 관계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고, 삶의 형태에 변화가 생기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홀로 할 수 있는 취미, 여럿이 모여서 할 수 있는 취미 중에서 무엇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선택은 전적으로 자기 취향과 자기 관계적 성향의 문제이니까. 다만 여럿이 모여서 수행되는 취미는 관계성에 의해 집단성과 사회성을 무시할 수 없다. 취미활동의 어려운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 관계성에서 오는 집단성과 사회성이라고 여긴다. 집단성과 사회성에 의해서 또다시 그 모임에 적합한 관계의 룰이 파생된다. 이때 파생되는 룰 역시 ‘매개체’를 원활하게 수행할 형태로 정렬되어 만들어져야 한다. 만들어진 룰을 익히는 과정에서 서로의 시선 차이에 의해 부대낌이 생기고, 관계의 어려움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모든 집단 내에서의 사람의 만남은 이 관계의 어려움을 얼마나 잘 다루어 내고 관계를 연마하고 룰이 실효적인가에 따라서 '관계의 질적 향상'을 판가름하게 된다.
사람들이 사회성에 의한 관계적 부침에 의해서 '마음공부'나 여러 ‘심리서적’, ‘도학’ 등을 공부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그 지점에서 발생되는 문제들을 다루고 대처하는 것에, 사람은 자기 시간의 절반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 만나기 싫어하는 현대인의 마음 상태도 이 지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그러나 또 사람은 고립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연결을 원한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어쩔 수 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다루는 많은 심리학적 방법론들과 룰(도덕과 윤리), 그것에 대처하는 인문사회철학 등의 서적 류일 것이다. 바로 이 관계들이 요동치는 지점에 ‘시장’이 형성되는 이유이다. 사람이 살면서 관계를 피하고만 살 수는 없으니까. 대처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 대처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러한 여러 요인에 의하여 우리는 개인으로 독립하면서도 집단의 일원이 될 수밖에 없다. 집단이라는 것은 사회성이 부각될 수밖에 없다. 특정한 형태를 가진 집단도 집단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그 자체도 집단이다. 하지만 오히려 사회성을 떠나는 형태, 홀로 있거나 혹은 집단형태를 되도록 유지하지 않는 것이 더 자유로운 삶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모임 형태에서 마냥 자유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솔직히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나 아닌 다른 타자들과 함께 하는데 어떻게 마냥 자유로울 수 있겠는지. 적정선을 넘어서면 바로 제지가 들어오는 것이 관계이니까. 집단생활은 물론이고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서로 기본적인 룰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니.
집단과 사회성에서는 항상 일정부분 ‘강제성’을 동반한다. 강제성은 룰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행다를 할 때 순서를 지키며 차를 우려내는 것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이행해야만 한 잔의 차는 자기 앞에 놓이게 된다. 행다 안에도 강제성은 스며들어 있다. 그것은 자연이 심어 놓은 강제성이 아니라 인간이 심어 놓은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차를 마실 수 있으니까. 한 집단의 룰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해야만 집단이 돌아가니까. 다만 그 집단의 수준에 따라 룰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집단 - 모임에서 서로의 관계성은 한 집단의 일원이라는 유대감과 공통으로 공유하는 정신성에서 오는 친밀감에 의해 형성된다. 여기에서 자연스레 신뢰가 싹튼다. 그러나 이 신뢰가 무너졌을 때 혐오감은 더욱더 크고 분노는 증폭된다. 또 한편으로는 이 신뢰를 지켜가는 것보다는 이용하거나 활용하여 사람을 기만하는 경우들도 빈번하다. 그런 사례들은 바깥 사회에서도 허다하게 듣는 내용들이다. 이러한 연유로 많은 집단 형태에서 ‘약관이나 정관’을 만들어서 명문화한다. 그러나 솔직히 그것을 누가 얼마나 읽어 보겠는가. 그러나 명문화되지 않아도 사람들은 은연중에 집단에 바라는 것은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일종의 안전장치 같은 것. 자기 보호에 관한 그런 것.
문제는 자기에게 적합한 형태로 자기 안에서 변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약관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그러한 측면이 있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사실 아주 특정한 범죄형태가 아니라면 대체로 갈등의 양상에서 집단은 중립형태로 갈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이는 눈에 보여 지는 형태일 뿐이고, 집단은 판단에서 집단의 방향성을 우선시하게 된다. 집단 그 자체가 나아가는 방향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개인은 희생(?)되기도 하지만, 집단의 방향성이 드러나 있는 이상, 이미 집단과 개인의 구도는 피해 갈 수 없다. 개인은 집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집단의 방향성에 자기가 합류할 것인가? 아니면 집단의 방향성을 더욱더 분명히 하여 집단의 방향성을 바꾸어 새롭게 갈 것인가? 의 문제로 귀결되며, 인간의 문명과 문화는 그렇게 작용반작용에 의한 힘의 균형에 의해 여기까지 흘러왔다.
사람이 집단에 소속되고 싶은 이유는 기대거나 의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즉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바깥 사회로부터의 맞바람을 피하여 집단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집단 그 자체의 본래적 특성이 이러하다면, 요즘 시대는 점차로 소집단화 되어 가는 추세라고 여긴다. 대집단은 인간의 친밀성을 충족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 다양한 소집단이 각각 필요와 목적에 맞게 생겨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집단 역시 매개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의 친밀함은 영구적인 감정은 아니고 가변적이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매개체는 어떨까? 매개체는 그 자체로 시간의 축적을 필요로 하고 있고, 그 축적에 의해 매개체 그 자신은 변화하게 된다. 가변적인 친밀성보다는 더 신뢰할만한 것이다. 사람은 서로가 바라보는 방향이 같으면 오래갈 수 있다고 여긴다.
어느 세대라도 마찬가지 이겠지만, 중년 이후의 모임 문화나, 취미활동에 있어서도 편하고 자유로운 것 역시 좋겠지만, 관계의 룰 - 집단의 룰을 숙지하는 것은 그 자신의 관계를 편안하게 한다. 일방통행을 하지 않게 되니까. 관계는 한 번 익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관계 역시 늘 가변적이다. 그래서 어려운 것. 어려운 것은 어려운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꾸 쉽게 가려는 것이 일방통행이라고 여긴다. 어려운 것이 쉬워지려면 절차를 통과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성찰을 획득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성에 대한 것은 단 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또 그 사람과의 또 다른 관계가 생겨나고, 기존의 관계일지라도 관계는 늘 변화한다. 그러므로 늘 새롭게 관계를 재정립하면서 서로 나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바로 그것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일신우일신'의 상생의 관계성 지향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러한 에티켓을 ‘메타 에티켓’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러나 어느 날은 관계를 놓아 버리고 싶기도 하고 관계에 지치기도 하는 것이 사람이다. 서로 삶을 살아가는 자기 시간이나 각자가 처한 상황이나 자신과 타인을 대면하는 마음 상태가 다르므로 이것을 다 맞추며 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각자의 심리적 날씨 상태가 다르니까.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만남이라는 형태의 ‘목적성’을 바로 세우는 일일 것이다. 그 목적성을 등대 삼아서 그 방향에 자기 심리 날씨를 맞추어 각자의 마음을 일시적으로라도 균일한 상태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훈련해 가다 보면, 자기 심리 날씨와 컨디션에 크게 영향받지 않으면서 맑은 정신을 잘 회복할 수 있다고 여긴다.
취미생활은 목적성이 분명할 때 일상에서 그 자신의 삶에 에너지를 준다. 매개체에 집중하면 관계는 부수적으로 따라온다. 매개체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면 그 환경이 오히려 자신을 보호한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신뢰 역시 시간 투여가 필요한 일이듯이 취미를 행하는 그 자신의 삶도 시간 투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축적이 어떤 반등의 시점인 변곡점을 지날 때 변화를 체감하게 된다. 시간의 축적을 통하여 비교 지점이 생겨나고 이전과 이후를 사유할 수 있도록 대칭점이 만들어진다. 그때 그 자신에게 그 대칭을 컨트롤할 힘이 생긴다. 힘이 생기면 방향을 정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인생의 나침판을 스스로 갖게 된다.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 보아야만 그 이전과 그 이후의 분기점이 생겨나 자기 인생의 방향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십대 이십 대 삼십 대 사십 대 오십 대 등등의 시간의 축적을 통하여 우리는 앞으로의 인생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라고 여긴다. 항상 분기점은 있다. 그 분기점으로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의 막막함을 이겨낼 수 있는 것처럼.
이와 같이 모든 취미활동은 모두 자체적인 룰을 가진다. 그러므로 취미는 비격식으로 또는 무위로 이루어지는 형태가 아니라 지극히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사람이 개입하여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반면에 자연스러워 보인다면 그것은 그만큼 숙련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자연스러운 것은 격식이 몸 안에 이미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만큼의 숙련을 통하여서만이 자연과 겨우 가까워질 수 있을 뿐이다.
___2023/07/02 아란도 작성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