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삭동이로 1415년 태어나 1487년 73세까지 살았다. 국무총리격인 영의정까지 역임한 세조를 왕으로 세우게한 조선의 킹메이커 였다.
당시 경덕궁 문지기 출신 (정9품)이었으나 죽마고우 권람의 소개로 수양대군을 소개 받는다.
단종을 폐위하고 왕의자리를 오르기 위해 한명회는 전략가 역활을 충실히 이행한다.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단종 최고의 실세인 수양대군 동생 안평대군 김종서 황보인을 살해하고 단종을 위협하여 왕의 자리를 빼앗는다. 일명 계유정난이다.
명분 부족으로 왕의 자리를 빼앗자 전국의 여론이 나빠지자 단종을 강원도 영월에 유배를 보낸다.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나고 세조를 암살을 위해 명나라 사신 만찬장에 서 암살을 계획했다.
한명회는 살해를 눈치채고 전하 날씨가 더우니 경호원을 물리게 하소소 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역모에 가담한 자의 세조살해계획 을 고자질하는 바람에 성상문 하위지등 6명이 살해하여 사육신 이라 불리운다.
당시 김시습도 과거공부를 하다가 쿠데타 정부에 실망하여 중이 되어 전국을 떠돈다.당시 서슬퍼런 시절에 사육신 시신을 야밤에 수습 노량진 에 묻어준다.
당시 단종복위 운동에 동참한 자들을 죽이기 위해 한명회는 살생부를 만듵어 3족을 멸하였다. 한편 단종은 유배지에서 17세의 나이에 복위의 싹을 자를려고 죽인다
당시 죽음을 피하기위해 박팽년 아들을 노비의 딸과 바꾸어 죽음을 면하여 지금 달성군 하빈면에 살았다. 그 후손이 국회의장 박준규 이병철회장 부인 박두을 이 유일하게 살아난 핏줄이다.
아무튼 한명회는 세조가 임금이 된후 14년간 지방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도제찰사로 임명된다. 그 이후 이조판서 우이정 좌이정 최고의 자리 영의정까지 역임 세조의 최고의 실세가 된다. 그의 세째딸이 나중 임금이 되는 예종과 결혼 장순왕후가 되며 넷째딸은 성종임금과 결혼한 공혜왕후가 된다. 자신의 딸 두명이 모두 임금과 결혼한 장인이되니 실세중의 실세임은 틀림없다.
세조가 피부병이 아주 심한 문둥 이 병으로 죽자 예종이 즉위하고 12개월만에 사망 성종이 즉위한다.
성종이 어려 세조의 부인이 손자 성종을 수렴청정을 하다 20세에 성종이 독립하려하다 한명회가 권력을 유지하려고 반대 하다가 다른 대신들의 반대에 부닥치다 관직에 물려나 지금의 강남의 땅 값 최고의 자리 압구정 정자에서 노후를 보낸다. 한명회의 호가 압구정이다. 중국의 관료가 지어준 호이기도 하다ㆍ
한명회는 경덕궁 문지기에서 조선초기 세조의 최고의 실세자리 에서 많은 땅과 노비를 임금으로 부터 하사받아 많은 첩등으로 당시 73세면 천수를 누리며 살다가 갔다.